작가의 서재: 일본 유명 작가들의 서재탐닉기
도서+사은품 또는 도서+사은품+교보Only(교보굿즈)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20,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Box 기준 : 도서 10권
로그아웃 : '서울시 종로구 종로1' 주소 기준
이달의 꽃과 함께 책을 받아보세요!
1권 구매 시 결제 단계에서 적용 가능합니다.
북카드
키워드 Pick
키워드 Pick 안내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다른 연관 도서를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로, 클릭 시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최근 많이 찾는 순으로 정렬됩니다.

수상내역/미디어추천
일본 근대작가 서재탐닉기.
머릿속은 오로지 책뿐이다. 가족들만 딱하게 됐다.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지면 좋으련만, 그럴 리는 없겠지.
일본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쓰치다 교손은 이 방 저 방 책이 들어찰 만큼 들어차 서재로 사용하는 곳까지 일본 미술사 연구서로 꽉 채웠다. 책값으로 돈을 몽땅 쓰다 보니 아내에게 늘 혼나는 처지다. 그런데 어찌하랴.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지길 바란다는 그의 탐닉은 끝이 없다. 어디, 쓰치다 교손뿐이랴.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서른두 명 작가의 서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가정보
본명은 시마자키 하루키이다. 1872년 일본 나가노 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논어, 효경 등을 배우며 자랐고, 메이지 학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 서양 고전을 탐독하며 문학에 눈을 떴다. 메이지 학원 졸업 후 메이지 여학교 고등과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이듬해 시인 기타무라 도코쿠 등과 함께 문학잡지 '문하계' 의 창간 동인으로 참가해 시와 수필을 발표했다. 1897년 첫 시집 '약채집' 으로 등단, '일엽주', '여름 풀', '낙매집' 등 총 네 권의 시집을 발표하며 메이지 시대 낭만주의 문학의 선두주자로 평가받았다. 이후 시 창작을 접고 나가노현의 고모로 의숙에서 6년간 교사로 근무하다가 1906년 '파계'를 자비 출판했다. 이어서 '봄', '집' 등의 장편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그 입지를 굳혔다. 말년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역사소설 '동트기 전' 을 출간했으며, 이 작품은 일본 근대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3년 '동방의 문'을 집필하던 중 뇌일혈로 사망했다.
저자(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892년 도쿄에서 태어나 다이쇼 시대에 활약한,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재학생 시절 동기들과 함께 창간한 잡지 《신사조》에 〈코〉를 발표해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으며 단번에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동서양의 역사와 고전에서 가져온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인간의 모순된 심리, 예술을 향한 열망 등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초기에는 〈라쇼몬〉, 〈마죽〉 등 인간 내면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그려낸 작품이 많고, 중기는 〈지옥변〉, 〈희작삼매〉 등 자신이 추구한 예술지상주의가 드러나는 작품이 많다. 만년에는 〈어느 바보의 일생〉, 〈톱니바퀴〉, 〈갓파〉, 〈암중문답〉, 〈점귀부〉 등 주로 자기 고백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삶에 대한 회의, 발광에 대한 불안, 잦은 발병 등으로 결국 서른다섯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후, 친구이자 문예춘추 대표였던 기쿠치 간이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쿠타가와 상을 제정하였고, 지금까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매년 신인 작가에게 수여되고 있다.
소설가이자 수필가. 도쿄 출생으로 본명은 나가이 소키치. '지옥의 꽃' 등으로 졸라이즘을 표방.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피상적인 근대화에 반발하여 일본의 옛 정서에 관심을 보이며 평생 반속적(反俗的)인 문명비평가로서의 자세를 관철시켰다. 대표작으로는 '아메리카 이야기', '프랑스 이야기', '냉소', '힘 겨루기', '아구세', 일기 '단초테니치조' 등이 있다. 1952년 문화훈장을 수여받음. '프랑스 이야기' 는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발매금지 당하기도 했으며, '묵동기담' 은 일본에서 두 차례(1960년, 1992년)나 영화화되었다.
1899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 1916년 일본여자대학에 입학. 1918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고대동양어학을 연구. 1951년 52세의 나이로 사망. 주옥같은 작품 160여 편을 남김.
사카구치 안고는 1906년 니가타 현 니가타 시에서 태어났다. 도요대학 인도철학과 재학 중에 프랑스어학교 아테네 프랑세즈에 입학하고 동인지 '말'을 창간한다. 1931년에 발표한 <찬바람 부는 술 창고에서>와 <바람박사> , <구로타니 마을>이 유명 작가 마키노 신이치의 격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다. 당시 그의 문학 이념은 1932년에 발표한 <파스에 대하여>에서 표명되었으나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방랑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1938년에 <눈보라 이야기>를 발표한 후 설화 소설과 역사 소설로 새로운 영역을 연다. 전쟁중인 1942년 자신의 문학관을 밝힌 <진주>를 쓰고 <일본문화사관>과 <청춘론>등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한다. 1946년 패전 후의 혼미한 상황에서 전후의 출발점을 통찰한 <백치>와 <타락론>을 발표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1949년 2월, 과도한 작업을 소화하기위해 복용한 수면제와 각성제 중독 증상이 악화되어 신경정신과에 입원한다. 그후 1952년 <요나가 공주와 남자>와 <노부나가>등을 발표한다. 1955년 뇌출혈로 급사했다.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오사무, 이시카와 준 등과 함께 신희작파 또는 무뢰파라 불린다.
1892년 카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고등소학교(지금의 중학교) 중퇴 후 세무서의 급사, 부두의 잡역 등을 전전하다가 작업 중의 사고를 계기로 19세에 상경했다. 이후 화가, 기자 등을 거쳐 고단샤(講談社)의 각종 현상소설에 입선하면서 키지로(雉子郎)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의 국민 문학 창달에 힘쓴 공을 인정받아 1960년에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2년에는 '마이니치예술대상'을 수상하였다. 1962년 생을 마쳤고, 죽음 이후 요시카와 에이지상 및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2006년 현재 東京 靑梅시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미야모토 무사시', '삼국지', '대망', '대인' 등이 있다.
1867~1902. 일본 근대의 하이쿠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하이쿠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잡지 《일본》, 《호토토키스》를 기반으로 하이쿠 혁신 운동을 전개했고, 문하에 가와히가시 헤키고토,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 같은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만년에는 거의 병상에 있었으며, 1902년 일생을 마쳤다. 《분류 하이쿠 전집》, 《신 하이쿠》, 《춘하추동》 등을 남겼다.

1909년 6월 19일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에서 7남 4녀 중 10번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다. 고리대금업을 통해 대부호로 급성장한 쓰시마 집안은 본인이 평생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였고, 이후 작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교시절부터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도쿄제국대학 불어불문과에 입학해서는 좌익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30년 작가 이부세마스지와 사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유머와 풍자 감각을 다듬어가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같은 해에 연인 다나베 아쓰미와 투신자살을 기도했지만 홀로 살아남아 자살방조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역행』이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하자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심사평에 항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6년 창작집 「만년」으로 문단에 등장하여 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정신적 공황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 사카구치 안고, 오다 사쿠노스케, 이토 셰이, 이시가와 준 등과 함께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 문학'의 대표 작가로 불리게 된다. 이 시기에 발표된 『인간실격』은 퇴폐와 파멸의 정조를 기저에 깔고 있는 '다자이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연인 야마자키 도미에와 함께 다마가와조스이에 투신해,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14-1937. 최초의 한센병 작가로 조선경성부(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시치조 데루지 혹은 고지(七條晃司). 당시 한센병에 대한 편견과 차별 때문에 호조 다미오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도쿠시마현(徳島縣)에서 자라며 14세에 고등 소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니혼바시(日本{橋)의 약품 도매상에서 일하면서 호세(法政)중학교의 야간부에 다녔다. 당시 좌익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며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의 「부재지주(不在地主)」를 계기로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영향을 받아 동인지(同人誌)를 창설하였으나, 1932년에는 귀향하여 결혼한다. 그러나 1933년 한센병 진단을 받아 이혼을 하고, 다시 상경하여 계속해서 소설을 썼다. 좀처럼 좋은 글이 나오지 않자 조바심을 느껴 자살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인 도쿄 히가시무라야마(東村山)의 전생 병원(현 다마전생원[多磨全生園])에 입원하였다. 투병생활 속에서 문학에 열정을 기울였으며, 이후 그의 작품은 스승으로 삼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에 의해 「문학계(文学界)」 등 여러 잡지에 발표되었다. 특히 「마키노인(間木老人)」(1935)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인 「생명의 초야(いのちの初夜)」(1936)에서 입원 당초의 기묘한 체험을 그려 문단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어 약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나병 요양원 수태(癩院受胎)」(1936), 「나병 가족(癞家族)」(1936), 「망향가(望郷歌)」(1937) 등의 소설과 수필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끊임없이 죽음과 마주하면서 한센병 환자로서 자신의 숙명을 직시하였으나, 1937년 12월 5일 장결핵으로 24세에 사망하였다.
1886년 이와테 현에서 태어났다. 모리오카보통중학교를 중퇴한 후 문학지 『묘조』의 동인이 되어 첫 시집 『동경』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했으며 시부타미보통소학교·야요이보통소학교 대리교사와 『하코다테일일신문』 ·『호쿠몬신보』 ·『오타루일보』 ·『구시로신문』 기자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이후 『아사히신문』 교정계에 취직하여 후타바테이 시메이 전집을 교정하고 아사히가단의 선자選者로 일했으나 1912년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저서로는 가집 『한 줌의 모래』, 『슬픈 장난감』, 시집 『동경』, 소설 『구름은 천재로소이다』 등이 있다.
일본 미스터리 추리소설계의 거장.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이지만 에드가 앨런 포의 이름에서 따온 필명을 평생 사용하였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후 서점 경영과 잡지 출간에 실패한 뒤에 1923년 신청년에 〈2전짜리 동전〉을 발표하며 추리작가로 데뷔했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여명기에 눈부신 걸작 단편들을 여럿 발표하여 유명해졌지만 한때 붓을 꺽고 방랑하기도 하고 반전 혐의로 검열에 걸려 전면삭제를 당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일본탐정작가클럽을 창설하고 잡지를 발간하며 강연과 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추리소설의 발전과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1955년 그의 환갑을 맞아 탄생한 에도가와 란포상은 지금까지도 일본의 추리소설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며, 추리작가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수상작은 고단샤講談社가 출판하고, 38회부터는 후지TV가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고 있다.
작가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1903~1951)는 일본 쇼와기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서, 그녀의 많은 작품들과 그녀의 삶을 주제로 하여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제작되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들로는 밥, 번개, 처, 방랑기 등 다수가 있다. 그 중에서 이번에 출간된 장편 『뜬구름』은 작가 만년의 작품으로, 1955년에 영화화되었으며 1940년대 패전 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897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나 교토제대를 졸업하였으며, 이 대학 개교 이래 최고의 수재라는 칭송을 들으며 독일로 유학갔다. 히케르트와 하이데거의 가르침을 받았다. 귀국 후 처녀작 '파스칼에서의 인간 연구'로 일본철학계에 충격을 던졌다. 호세이 대학 교수가 된 뒤 유물사관의 인간학적 접목을 꾀했으나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면서 강단에서 쫓겨났다. 그 후로 극우 천황주의자들을 비판하며 군국주의에 저항했으나 '탈주한 공산주의자 친구에게 밥 한 그릇, 옷 한벌을 준 죄'로 다시 붙잡혔다. 철학자이자 사회평론가였으며 문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영양실조와 급성 신장염 등오로 일본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옥사했다.
1904년 도쿄 출생. 일본 쇼와(昭和)시대에 신선한 심리주의적 묘사로 주목을 끈 작가. 도쿄대학 국문과 졸업.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예술파 문학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사사를 받음. 1930년 발표한 <성가족(聖家族)>의 성공으로 문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으며 대표작으로는 <성가족>, <바람이 분다>, <광야> 등이 있다.
도쿄에서 외교관의 딸로 출생했다. 상류계층에서 성장하며 익힌 서양적 기품과 교양을 바탕으로 시인, 수필가, 번역가로 활동했다. 미션스쿨인 도요에이와여학원을 다니며 영어와 서양 문화를 배우고, 졸업 후에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사사키 노부쓰나에게 사사했다. 시가집으로 『물총새』, 『들에 살며』가 있다. 마쓰무라 미네코라는 필명으로 싱, 예이츠 등의 아일랜드 문학을 번역하여 일본에 아일랜드 문학을 소개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쓰보우치 쇼요, 모리 오가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노년에 집필한 수필집 『등화절』은 제3회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수상했다. 당대의 뛰어난 문인들과 문학적으로 정서적으로 깊게 교류했으며, 호리 다쓰오의 소설 『성가족』의 모델이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흠모했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1889년 후쿠오카 출생. 일본을 대표하는 SF작가, 탐정소설가, 환상문학 작가이다. 근래에는 '유메노', '유메Q' 등으로 부르며 칭송하는 이들도 적잖다. 본명은 스기야마 타이도, 어릴적 이름은 나오키였다. 친부는 일본 후쿠오카계 우익정치집단 '겐요샤'의 거두 스기야마 시게마루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유메노의 유니크한 작품세계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소녀지옥', '오시에의 기적', '견신박사', '병에 담긴 지옥'등 괴기적이고 환상성이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하였으며 이들 작품은 일본의 영화, 만화, 게임 등에 시대를 초월한 영향을 끼쳤다. 그 중 구상에서 탈고까지 10년 이상이 걸린 '도구라 마구라'는 읽는 동안 한번쯤은 정신이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저자의 대표작으로 일본본격탐정소설 3대 기서로 불린다. 유메노는 '도구라 마구라'를 발표한 이듬해(1936) 뇌출혈로 사망하여 작품과 더불어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가나가와(神奈川) 현 오다와라 시에서 태어나 39세에 자택에서 자살했다. 191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열세 명의 동인을 모아 ≪13인≫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거기에 첫 작품 <손톱>을 발표했고, 당시 자연주의의 대가였던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후 전기에는 대부분 신변잡기적 사소설풍의 육친 혐오적 작품을 썼다. 그러나 중기에는 작풍이 다소 변화되어, 이른바 환상풍의 경지를 개척하게 된다. 고향 오다와라(小田原)의 풍토에 고대 그리스나 유럽 중세의 이미지를 중첩시켜 꿈과 현실을 교착시킨 환상적인 작품들로, 지적인 유머나 풍자성이 그 특징이다. 후기에 해당하는 1931년 무렵부터는 신경쇠약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작품은 다시 전기의 사소설적 경향으로 바뀌며 더욱 어두워졌다. 이런 마키노 문학은 일본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자연주의의 전통을 이은 ‘사소설’의 방류로 평가되며, 그 작품은 ‘변형 사소설’로 불린다. 마키노 문학의 미학적 본질은 창백한 자의식에서 반사되는 신경증적 양상과 비애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살도 채 안 된 자신과 어머니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가 버린 아버지의 보헤미안적이고 데카당적인 삶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고 훈육에 엄격했다. 어머니의 엄한 양육 방식은, 아버지를 닮아 틀에 얽매이기 싫어하던 마키노의 유년 시절에 큰 상처를 남겼으며, 그 트라우마는 끝내 치유되지 못했다. 그것이 육친 혐오 양상이나, 신경증적 양상, 그리고 방랑이나 위악성과 자조성, 광기 등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起夫)는 “일본인으로서 일본 풍토에 발을 디디고 살면서, 이것을 서구적 교양으로 치환해 바라보고, 서구적 환상으로 장식해, 언어 예술만이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같은 이중의 영상을 작품 세계로 해, 그 신비한 지적 감각 체험에 독자를 이끌고 가는 하이칼라의 작가”라고 그의 작품의 본질을 짚었다.

1867년 도쿄에서 유복한 집안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긴노스케(金之助)다. 어려서부터 한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문명 개화 시대에 영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1893년 도쿄 제국 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도쿄 고등 사범 학교, 제5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폐결핵 초기 진단을 받았다. 제일고등학교 시절에 가인 마츠오카 시키를 알게 되었다. 도쿄고등사범학교, 마츠야마중학교의 교사를 거쳐 다이고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1900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윌리엄 크레이그 밑에서 수학했지만, 유학비 부족과 고독감, 영문학에 대한 위화감 등으로 신경 쇠약에 시달렸다. 1903년 귀국해 제1고등학교, 도쿄 제국 대학의 강사로 활동하다 1905년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호평을 받으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후속작으로 『도련님』(1906), 『풀베개』(1906)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인기 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1907년 교직을 그만두고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이후 『산시로』(1908), 『그 후』(1909), 『마음』(1914) 등 주요 작품들이 모두 동 신문에 연재되었다. 1916년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어 49세에 사망했다. 작품은 당시 전성기에 있던 자연주의에 대하여 고답적·관상적인 입장이었으며, 그 후 '산시로'(1908), '그 이후'(1909), '문'(1910)의 3부작에서는 심리적 작풍을 강화하였고, 다시 '피안에 이르기까지'(1912), '마음'(1914) 등에서는 근대인이 지닌 자아·이기주의를 예리하게 파헤쳤다. 소설뿐 아니라 한시, 하이쿠, 수필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겼으며, 모리 오가이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로 손꼽히면서 근현대 일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84년부터 2004년까지 1천 엔권 지폐에 초상이 사용되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이다.
하이진俳人(하이쿠 시인)ㆍ소설가. 본명 기요시淸. 교시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로부터 받은 호. 시키의 영향으로 언문일치의 사생문을 썼으며, 소세키에게 자극을 받아 사생문체로 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여유파의 대표적 작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메이지 40년대(1907)부터 소설에 주력하여 하이쿠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적이 있다. 1911년 4, 5월에 조선을 유람하고 7월에 『조선』을 신문에 연재한 후 1912년 2월에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1937년 예술원 회원. 1940년 일본하이쿠작가협회 회장. 1954년 문화훈장 수장. 1959년 4월 8일 85세를 일기로 사망. 대표적인 소설로 풍류참법風流懺法(1907), 배해사俳諧師(1908), 『조선』(1912), ?감 두 개?二つ?(1915) 등이 있다.
일본에서 국민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 동안 720여 편에 달하는 자연과 인간, 사랑을 노래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70여 점의 조각 작품을 완성한 조각가로 활약했으며, 이외에도 번역, 평론 등에서 업적을 남긴 예술인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카무라 고타로는 1883년(메이지 16) 도쿄 시타야(下谷)에서 불사였던 아버지 고운(光雲)과 어머니 와카[わか, 통칭은 도요(とよ)]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06년 2월에서 1909년) 6월에 걸쳐 미국 뉴욕,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는데, 이 시기를 통해 예술혼에 눈뜨고 서구 문명과 그 속에서 형성된 근대적 자아를 체득하게 된 고타로는 귀국 후 제2의 고운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의 갈등, 파벌이나 연고가 일체를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일본 예술계라는 벽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귀국 직후 예술 전위 모임인 ‘팬의 모임’에 참여해 질풍노도의 탐미적·데카당스적인 생활을 보냈다. 1909년에는 고마고메에 있는 조부의 은거처를 아틀리에로 개조해 예술 활동을 하고, 1910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험적 화랑인 로켄도를 열기도 했으나, 공조자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12월에 하시모토 야에코의 소개로 지에코를 알게 되는데, 그녀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나와, 여성 해방을 표방한 잡지 ≪세이토≫의 표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진 두 예술가의 만남은 연애 시기를 거쳐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고타로의 첫 시집 ≪도정≫은 지에코와 결혼을 앞둔 1914년(다이쇼 3) 10월 출판되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 결혼 생활을 내용으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써서 그것을 지에코의 사후 ≪지에코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고(1941. 8),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 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고타로는 지에코의 죽음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 정부의 정책에 찬동하는 시를 써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45년 9월 공습으로 도쿄에 있던 아틀리에가 소실되자 이와테현으로 피난했는데, 종전 후에도 이와테현 시외에 있는 오타무라 야마구치(太田村山口)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며 자기 유적(自己流謫)의 자연 친화적 생활을 보냈다. 1945년 12월 시집 ≪전형≫을 시작으로 자연과 순수한 시작(詩作)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발표하는가 하면, 1947년 7월에는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자전적 시편인 ≪암우소전≫을 발표함과 더불어 제국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지만 이를 사퇴한다. 1950년 11월에는 ≪지에코초 그 후≫ 시문집을 출판하고, 70세가 되던 1952년 10월에 도와다 호반(十和田湖畔)에 세울 지에코 나부상(裸婦像) 제작을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1955년 12월 ≪요미우리 신문≫에 시 <생명의 큰 강(生命の大河)>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1956년 4월 화가 나카니시 도시오(中西利雄)의 아틀리에에서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영원한 반려자인 지에코와의 만남과 결혼, 사별은 다카무라 고타로의 인생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으며, ≪도정≫, ≪지에코초≫, ≪기록≫, ≪전형≫, ≪지에코초 그 후≫를 포함하는 그의 7권의 시(문)집은, 일본 근대 시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메이지, 다이쇼, 쇼와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한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 내고자 했던 시인의 인생 기록으로서 크나큰 감명을 주고 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도쿄에서 일본어를 공부했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매혹된 책을 직접 독자에게 전하고픈 마음에 두 언어 사이를 왕복하는 번역가의 길에 들어섰다. 낯선 일본 근대문학을 알아가는 마중물이 되길 바라며 ‘작가 시리즈’를 기획, 『작가의 마감』, 『작가의 계절』, 『작가의 산책』을 선보였다. 다음에는 어떤 주제로 엮어볼까, 궁리하며 매일 작가 전집을 뒤적이고 일본 전자도서관을 들락날락한다. 옮긴 책으로는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등이 있다.
목차
- 1장, 예찬과 한탄 사이
탁자 위_시마무라 호게쓰
서재와 빛_시마자키 도손
소세키산방의 가을_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서재 한담_노무라 고도
한밤 귀갓길_나가이 가후
1.5평짜리 방_쓰지 준
나의 서재_쓰치다 교손
서재가 중심인 집_미야모토 유리코
디디티와 이부자리_사카구치 안고
서재_요시카와 에이지
2장, 서재에서 딴짓하기
실내 여행_이쿠타 슌게쓰
서재 망상_요시카와 에이지
램프 그림자_마사오카 시키
도마뱀붙이_도요시마 요시오
종소리_나가이 가후
나태라는 가루타_다자이 오사무
푸른 융단_사카구치 안고
눈_도쿠토미 로카
단상_호조 다미오
책장을 덮고_이시카와 다쿠보쿠
3장, 책이 있는 풍경
책꽂이_미야모토 유리코
서재 여행_에도가와 란포
나의 스무 살_하야시 후미코
소리에 대해_다자이 오사무
사전의 객관성_미키 기요시
책 이야기_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또 다른 책 이야기_호리 다쓰오
독서 잡감_오카모토 기도
몸에 배다_가타야마 히로코
좋아하는 탐정소설_유메노 규사쿠
독서와 생활_마키노 신이치
4장, 친애하는 문구에게
나와 만년필_나쓰메 소세키
내 주변_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의 책상_오카모토 기도
헌책과 장서인_스스키다 규킨
인형 이야기_다카하마 교시
헤이지의 도난_노무라 고도
재생지_데라다 도라히코
나의 코안경_사토 하루오
조각칼의 멋_다카무라 고타로
사생첩_우에무라 쇼엔
책상 위 물건_미야모토 유리코
책 속으로
서재 한담(노무라 고도)
서재는 넓으면 좋을까, 좁으면 좋을까? 조시가야에 살 때 1평이 채 되지 않는 벽다락을 서재로 삼은 적이 있다. 정신 사납지 않아 좋았지만 참고서 놓아둘 곳이 없어 곤란했다. 지금 서재는 4평인데도 조금 좁은 느낌이다.
이제껏 본 서재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공간은 야나기타 구니오 선생의 서재다. 얼추 30평 크기에 구석구석 책장이 놓였는데, 도서관 서고처럼 방 가운데도 책장이 자리했고 한구석에 업무용 책상이 있었다. 이러면 한밤중에 옆방까지 참고서를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되니 편하겠다. 서재와 서고를 따로 만들면 꽤 합리적일 것 같지만, 추운 겨울밤이면 그만 귀찮아져서 꼼짝도 하기 싫은 법이다. 설렁설렁 일을 하면 아무래도 변변찮은 결과가 나온다.
31쪽
한밤 귀갓길(나가이 가후)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 쓰다 만 초고, 내팽개쳐진 펜과 담배 파이프. 소파에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그날 반나절 낮잠 꿈을 머금은 솜털 이불. 더러운 카펫 위에는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양말. 찢어진 서화 병풍. 이 모든 것이 어지러이 널브러진 실내 광경. 나라는 한낱 중년 서생의 생활이 여윈 손끝으로 켠 불빛을 받아 더없이 쓸쓸하고 고요하게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회한, 근심, 번민, 희망, 망상…… 온갖 감정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나는 이 침통한 한밤중 감상을 달갑게 받아들인다. 기쁘기 그지없다. 홀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올 때, 이 세상에서 서재만큼 반가운 곳은 없다.
36쪽
서재 망상(요시카와 에이지)
나는 늘 생각한다. 책상 밑에 날 놀리려고 엉뚱한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난쟁이 마법사가 한 명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무튼 끊임없이 물건이 없어진다.
방금까지 옆에 놓였던 빨간 색연필, 책갈피에 끼워둔 메모지, 일에 필요한 명함, 파이프, 가위, 답장해야 할 우편물, 교정할 원고 등등. 뭐가 됐든 책상 위에서 자꾸만 사라져버린다. 그때마다 “어이” 하며 가족을 불러 집이 떠나가라 시끌벅적하게 찾아보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애를 먹는다. 자칫 나중에 잡서 더미 사이에서 뜬금없이 나오기라도 하면 참으로 멋쩍기 그지없다. 멋쩍음을 숨긴 채 지나가는 말로 “요전번에 찾았던 거, 있었어”라고 알릴 때마다 “거, 보세요” 하고 가족들은 한껏 우쭐거린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가족의 긍지를 높이고, 드물게 내가 기죽는 사건이니 오히려 좋은 일이려나.
83쪽
나태라는 가루타(다자이 오사무)
괴로움이니 고매니 순결이니 순수니, 이제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써라. 만담이든 짤막한 이야기든 상관없다. 쓰지 않는 까닭은 어김없이 나태해서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맹신이다. 사람은 자기 깜냥 이상 일도 못 하고, 자기 깜냥 이하 일도 못 한다. 노동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리가 없다. 인간 실격,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찌푸린 얼굴로 책상 앞에 앉지만 막상 아무것도 안 한다. 턱을 괴고 멍하니 있을 뿐이다. 별로 심오한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게으름뱅이의 공상만큼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지만, 게으름뱅이의 공상도 졸졸 끝없이 흐르며 달려간다.
뭘 생각하고 있는가. 이 남자는, 지금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 기차 여행은 지루하다. 비행기가 좋다. 엄청나게 흔들리려나? 비행기 안에서 담배 피울 수 있나? 골프 바지를 입고 포도를 먹으며 비행기에 타고 있으면 멋져 보이겠지? 근데 포도는 씨를 뱉어야 하는 걸까, 씨까지 통째 삼켜야 하는 걸까? 포도를 바르게 먹는 법을 알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이 이상해서 통 종잡을 수 없다.
106~107쪽
책꽂이(미야모토 유리코)
어렸을 때, 아버지 책상이 놓인 2평짜리 방에 한쪽 벽을 다 차지하는 2단 선반이 달려 있었다. 위는 책장으로 썼는데 『문예구락부』, 『신소설』, 『태양』 같은 잡지 몇 년 치가 잔뜩 뒤섞여 나뒹굴었다. 게다가 커튼도 없어서 늘 먼지투성이였다.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선반에 올라가 닥치는 대로 잡지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글자는 모르니 오로지 그림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신소설』이었던가, 한 잡지 속표지에 아무리 봐도 뭔지 알 수 없는 묘한 그림 한 장이 실려 있었다. 넓은 연못에 붉은 석양이 내리비친다. 건너편 검은 숲과 연못 수면과 거기 뜬 보트 한 척이 비스듬히 비추는 붉은 햇빛에 섬뜩하게 휩싸인 가운데 누군가 서 있다. 해쓱한 얼굴 반쪽은 선명히 보이는데 그 외는 흐릿하다. 가슴 언저리에 활활 불타오르는 듯 색칠한 볼록한 뭔가가 일그러진 채다. 다섯 살 여자아이 눈에는 왠지 그게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고릴라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됐다. 몇 번씩이나 유심히 들여다봤지만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다.
140~141쪽
독서 잡감(오카모토 기도)
일요일만 한가하던 나는 이곳저곳에서 소개받아 온종일 여러 집을 방문했다. 꽤 고된 일이었다. 본디 장서가라는 사람은 도쿄 한복판에 거의 살지 않는다. 대체로 교통이 불편한 변두리에 집이 있다. 전철 없는 시절에 혼고 고이시카와나 혼조 후카가와 부근까지 찾아가려면 왕복 시간만 해도 꽤 잡아먹었고, 그만큼 가장 중요한 독서 시간이 줄어들어 몹시 난감했다.
무엇보다 낯선 집에 주저앉아 천천히 독서하자니 민망했다. 장서가라고 해서 꼭 넓은 집에 살지 않는 법. 때론 1평짜리 현관에 앉아, 때론 멋들어진 객실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는데, 변변히 차 한 잔 내주지 않는 집이 있는가 하면 차와 과자를 내놓더니 덤으로 장어덮밥까지 차려주는 집이 있다. 대우는 천차만별, 푸대접은 사소한 불평으로 끝나지만 너무나 후한 대접은 미안한 마음에 자주 가기가 꺼려진다. 홀대도 난처하고 환대도 난처하니, 아무래도 대응이 쉽지 않다.
182~183쪽
나와 만년필(나쓰메 소세키)
어째서 삼사 년 전에 만년필로 바꾸자고 갑자기 맘을 먹었더라. 이유는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일단 편리함이라는 실용적인 동기에 지배당했을 게 틀림없다. 만년필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당시 마루젠에서 펠리컨이라 불리는 제품을 두 자루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걸 지금까지 쓰고 있긴 한데, 불행히도 펠리컨에 대한 내 감상은 매우 좋지 않다.
펠리컨은 원하지 않는데도 원고지 위에 잉크를 쓸데없이 똑똑 떨어뜨리거나 꼭 먹색이 나와줘야 함에도 막무가내로 거절하며 주인을 학대했다. 하기야 주인 역시 펠리컨을 푸대접했을지도. 무정한 나는 잉크가 다 떨어지면 책상 위에 놓인 아무 잉크나 닥치는 대로 집어 들어 펠리컨 배 속에 부었다. 또 블루블랙은 딱 질색이라 일부러 세피아색 잉크를 사서 펠리컨 입을 거침없이 벌려 먹였다. 경험이 없어 펠리컨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몰랐다. 실제로 펠리컨이 아무리 물을 싫어한다고 해도 이제껏 그를 씻겨줄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214쪽
사생첩(우에무라 쇼엔)
축소도 사생첩에 쓰는 종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되도록 질이 좋은 종이를 골라 손수 철했다. 요즘은 얄따랗고 반투명한 유산지에 그린다. 양피지를 닮은 유산지라면 앞뒤 양면을 다 쓸 수 있어 꽃이나 나무를 사생하기에 편리하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연필로 축소도 연습을 하지만, 나는 익숙한 탓인지 붓과 먹이 그리기 쉽다. 습관처럼 저절로 몸에 배었지 싶다. 내게 그림은 무조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붓으로 그려야 하는 까닭에 축도하거나 스케치할 때도 항상 붓을 쓴다. 붓 선도 그만큼 좋아지기에 연필로 그리는 편보다 연습도 된다. 펜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붓글씨에 서툰 것과 같다.
267쪽
출판사 서평
작가의 삶으로, 작가의 서재로!
일본 근대작가 서재탐닉기
머릿속은 오로지 책뿐이다.
가족들만 딱하게 됐다.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지면 좋으련만,
그럴 리는 없겠지.
이 책에 등장하는 일본 작가들은 하나같이 글 잘 쓰기로 너무나도 유명한 대문호들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전부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낌없이 쓴다. 글쓰기와 책을 사랑하는 그들이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자기만의 공간, 서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일본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쓰치다 교손은 이 방 저 방 책이 들어찰 만큼 들어차 서재로 사용하는 곳까지 일본 미술사 연구서로 꽉 채웠다. 책값으로 돈을 몽땅 쓰다 보니 아내에게 늘 혼나는 처지다. 그런데 어찌하랴.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지길 바란다는 그의 탐닉은 끝이 없다. 어디, 쓰치다 교손뿐이랴.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서른두 명 작가의 서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버지의 서재는 나의 놀이터
어렸을 적 나는 아버지 서재에 자주 들어갔다. 바닥에는 잡지 몇 년 치가 잔뜩 뒤섞여 나뒹굴었다. 게다가 책 선반에 커튼도 없어서 늘 먼지투성이였다.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선반에 올라가 닥치는 대로 잡지를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글자는 모르니 오로지 그림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여기서 아버지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가 세이치로이고, 딸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 읽기를 즐겼던 작가 미야모토 유리코다. 특히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좋았던 작가는 아버지를 추억하는 글들을 남겼다.
아름다워라, 서재에 붙인 이름들
작가들은 자신만의 방에 취향대로 이름을 지어 부른다. 그것은 서재 이름인 한편 주인의 호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쓰보치 쇼요坪内逍遥와 소시샤双柿舍, ‘감나무 두 그루가 있는 집’이란 뜻으로 쇼요 선생의 호이자 서재 이름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때때로 조코도澄江堂라는 별호를 썼다. 그 예술적인 시선과 죽음을 떠올리면 ‘맑은 강이 흐르는 집’이란 뜻이 그에게 딱 어울린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그 유명한 이쇼안松倚庵, ‘소나무에 기댄 암자’로 그의 대표작 『세설』의 무대가 되었다.
꼭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곳만은 아니야
나의 수많은 악덕 가운데 가장 큰 악덕은 나태다. 그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상당한 수준이다. 적어도 나태만큼은 전문가다. 아무리 나라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기가 막힌다. 나의 최대 흠이다. 분명 부끄러운 단점이다. 나태만큼 이리저리 핑계를 댈 만한 악덕도 드물다. 다자이 오사무다. 그는 서재에서 괜히 책상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턱을 괴고 멍하니 있다가 하면서 책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나태함을 괴로워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작품들은 바로 이곳, 다자이 오사무의 서재에서 탄생했다.
기본정보
ISBN | 9791185153575 | ||
---|---|---|---|
발행(출시)일자 | 2023년 06월 20일 | ||
쪽수 | 274쪽 | ||
크기 |
129 * 188
* 23
mm
/ 409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작가 시리즈
|
Klover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200원 적립
문장수집 (0)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주문취소/반품/절판/품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판매가 5,000원 미만 상품의 경우 리워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2024년 9월 30일부터 적용)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
재미가 솔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