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라면, 불교 수행자라면 누구나 고심하는 화두이다. 그런데 이것은 수행이 일정 경지에 올랐을 때나 가능한 궁극의 화두이다.
기초가 부실한 상태에서 이 화두를 잡게 되면 너무 막연하여 시간만 허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는 아래처럼 쪼갤 필요가 있다.
① ‘나’는 있다. - 참나, 眞我
② ‘나’는 없다. - 無我
③ ‘나’는 있는 동시에 없다. - 有而無
④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 非有非無
⑤ ‘나’는 空이다. - 空
⑥ ‘나’를 알 수 없다. - 不可知
당신이 이 문제를 보자마자 저절로 답이 보인다면 깨달은 것이다. 만일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문제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생각이 확 올라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이리저리 굴러가는 순간, 이미 답은 없다.
힌두교의 깨달음으로는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내리기 어렵다. 그 구조가 4차원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세존의 가르침, 바로 佛法이다.
그렇다면 위의 여섯 가지 항목에서 어떤 것이 답일까?
이 문제의 답을 정오의 그림자처럼 뚜렷하게 제시한 것이 이 책이다.
지금껏 불교 철학에서 풀지 못했던 궁극의 화두를 다룬 책으로서, 관심 있는 독자라면 확연히 다른 수준 높음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김준걸
불교 수행자. 저서로는 [大道에 이르는 書], [소설天國誌], [나는 누구인가], [空으로 보는 금강경] 외에 다수가 있다.
그는 현실과 이상이 조화를 이루는 창조적 삶을 道學의 모태로 삼고, 21세기에 부합하는 현대적 정신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목차
- 序文 - 8
제1장 총론 - 26
제2장 깨달음의 여섯 가지 함정 - 40
1. 반야로써 佛法을 깨우치다 - 43
2. 大慈大悲한 보살심으로 충만하다 - 48
3. 信心으로 生死를 초월하다 - 53
4. 위빠사나를 통해 알아차림만 남다 - 58
5. 無我之境에 이르다 - 64
6. 眞我를 찾아 無住가 되다 - 71
제3장 깨달음의 세 갈래 길 - 80
1. 싯다르타의 첫 번째 구도행, 眞我 - 80
2. 싯다르타의 두 번째 구도행, 절대 - 86
3. 싯다르타의 세 번째 구도행, 해탈 - 91
제4장 붓다가 깨달은 無上正等覺 - 98
제5장 그냥 깨달아라 - 116
1. 海印을 쥐어라 - 119
2. 대칭을 깨고 자유로워라 - 125
3. 有·無·空의 화두를 잡아라 - 134
4. 분별에 속지마라 - 150
5. 관찰하고 즐겨라 - 158
6. 實存의 위치에서 수행하라 - 165
제6장 궁극의 話頭 - 172
1. 차원의 한계 - 172
2. 힌두교와 불교의 깨달음 - 176
3. 나는 누구인가? - 182
4. 제1원인 - 186
後記 -194
책 속으로
두 종류의 구슬로 이루어진 세상이 있다. 바로 유리구슬과 수정구슬이다. 유리구슬을 가슴에 지닌 사람들은 번뇌망상으로 인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뭉뚱그려 중생이라 부른다.
이런 때에 중생들에게 더 높은 차원을 가르치는 무리들이 있으니, 바로 힌두교의 수행자들이다. 그들 구루(Guru)들은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유리구슬을 수정구슬로 바꿔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원리는 간단하다. 현상계의 無常함을 인식하고 생각을 고요히 가라앉히면 수정구슬이 된다. 번뇌망상만 잦아들면 그 자체로 수정구슬이란 얘기이다. 이렇게 텅 빈 마음 바탕에서 찾은 수정구슬을 아트만(Atman)이라 부른다. 아트만은 우주와 둘이 아니기에 유리구슬이 지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소멸되어 영원불변하게 된다. 유리구슬의 중생에겐 더 없는 구원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대략 2천5백여 년 전에 자신이 지닌 유리구슬로 인해 몹시 괴로워하던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이다. 그는 유리구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힌두교의 구루들을 스승으로 삼고 수행에 정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정구슬을 얻게 되었다. 깨닫고 나니 자신은 본래부터 수정구슬이었다. 유리구슬은 스스로 왜곡해서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싯다르타는 한동안 수정구슬에 만족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다. 수정구슬은 과연 온전한가?
모든 구루들이 범아일체(梵我一體)를 거론하며 아트만이 곧 우주 삼라만상임을 강조했다. 이때 쓰이는 비유가 「수불리파(水不離波) 파불리수(波不離水)」이다. 아트만이 파도라면 브라만은 바다여서 결국 같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런 논리에 뭔지 모를 부족함을 느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수정구슬에 대한 그의 의심만은 뚜렷했다.
결국 그는 구루들의 수정구슬을 능가하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 홀로 수행에 임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다이아몬드구슬을 찾아냈다. 기존에 깨달음의 궁극이라고 믿고 있던 수정구슬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값진 보배였다.
세상에서 홀로 다이아몬드구슬을 갖게 된 싯다르타, 그는 자신이 이룬 경지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이아몬드구슬을 전해 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이아몬드구슬은 너무 쉽고 단순하여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였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가장 쉬운 건 가장 어려운 것과 상통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전해 줄 다이아몬드구슬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의 무지와 아집은 어떤 것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傳法할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발을 디딜 때 느껴지는 발바닥의 감각을 통해 傳法할 방법을 찾아냈다. 이런 우연한 일을 계기로 싯다르타의 법문은 열렸고, 그의 다이아몬드구슬은 마침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의 다이아몬드구슬은 기존 힌두교의 수정구슬과 비교해 뭐가 다른가?
아무리 살펴봐도 그 빛깔이나 촉감에 있어서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혹시 싯다르타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수정구슬을 가지고 다이아몬드구슬이라고 허세를 부린 건 아닐까?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잠시 보자. 그는 기존의 아트만을 대놓고 부정했다. 수정구슬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철저히 분석학에 입각해서 사물의 실상을 논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법(緣起法)에 따라 합성된 것들이고, 그래서 쪼개 보면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다. 그 텅 빈 것을 깨달으면 그게 다이아몬드구슬이란 얘기이다.
이런 말에 힌두교의 구루들은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수정구슬은 원래부터 텅 빈 곳에 있었다. 그 텅 빈 곳은 無처럼 보이지만 여백으로서의 기능을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바로 ‘순수 알아차림’이다. 여백이 곧 ‘참나’란 얘기이다. 참나가 한 생각 일으키면 삼라만상이 그려지고 그것들에 매여 있으면서 중생이 된다. 유리구슬과 수정구슬은 모두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텅 빈 곳에 자리한 여백의 의미마저 부정했다. ‘텅 빈 각성’인 아트만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는 다이아몬드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것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어떤 구체적 묘사도 없이 그저 텅 빈 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諸法無我만을 강조했다. 諸法無我의 이치를 터득하면 다이아몬드구슬을 얻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이다.
그 당시 힌두교 수행자들은 싯다르타의 이런 주장에 두 가지 의문을 내었다. 첫 번째는 싯다르타의 법이 유물론과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물질이 산산이 해체되면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영혼도 물질의 산물이니 그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수정구슬이든 다이아몬드구슬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그냥 오로지 無일 뿐이다.
두 번째는 유물론이 아니라면 텅 빈 곳에 뭔가 있어야 한다. 수정구슬이든 다이아몬드구슬이든 그것을 알아차리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이 뭔가를 힌두교에서는 인정했다. 바로 참나(Atman)이다. 만일 싯다르타가 말한 다이아몬드를 알아차리는 어떤 인식 작용이 있다면 그건 기존의 아트만과 같게 되고, 결국 그는 수정구슬을 다이아몬드구슬이라고 허풍을 친 것이 된다.
싯다르타의 다이아몬드구슬엔 이렇게 두 가지 의혹이 남는다. 유물론이냐, 아니면 또다시 아트만의 재탕이냐의 문제이다.
사실 이 점을 묻게 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평생 동안 싯다르타는 침묵했다. 독화살의 비유를 들며 입을 굳게 닫았다. 독화살에 맞아 죽게 됐는데 그 화살의 재질을 꼬치꼬치 따질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이다. 그리곤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세상은 緣起法에 의해 합성된 것으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달으면 다이아몬드구슬이 된다고….
적잖은 제자들이 그의 침묵에 의혹을 품고 떠나갔다. 하지만 힌두교의 수정구슬에 의혹을 품은 수행자들은 여전히 그의 다이아몬드구슬에 희망을 걸었다. 이렇게 해서 다이아몬드구슬을 기치로 내건 불교가 탄생했다.
그런데 당시의 싯다르타는 왜 形而上의 진리에 입을 닫았을까? 뒤에 살펴보겠지만 싯다르타는 ‘그냥 있는 법’을 가르쳤다. 이것이 佛法의 정수인 中道이다. 그런데 적잖은 제자들이 ‘그냥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때 세존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질문에 일일이 장단을 맞추다가는 ‘그냥 있는 법’이 더욱 미로에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세존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침묵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냥 말하기 싫었다. 가령 누군가가 당신에게 「숨을 들이쉬면서 공기를 마셔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말하기 싫던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당시의 싯다르타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나 본말을 전도시키는 질문은 그냥 넘기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어쨌든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과연 싯다르타의 말대로 다이아몬드구슬을 지닌 사람들이 나왔을까?
결과는 참담했다. 수행자들은 계속해서 유리구슬의 얼룩만 닦고 있는 것이었다. 유리구슬에 낀 번뇌망상의 때를 지우며 평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일이 무려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를 지켜보는 힌두교의 구루들은 그들 불교 무리의 우매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시선이 불편했던 것일까. 유리구슬의 허망함에 지친 불교 수행자들은 하나둘씩 힌두교의 수정구슬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오온(五蘊)이 사라진 텅 빈 바탕에 초지성(超知性)의 알아차림만 집어넣으면 수정구슬이 된다. 그리고 수정구슬이 되어 바라보면 지금껏 알고 있던 유리구슬은 모두 증발한다. 번뇌망상도 모두 수정구슬의 빛이 뿜어져나와 이루어진 것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수정구슬과 둘이 아니다. 절대와 해탈 역시 저절로 이루어진다. 기존의 유리구슬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높디높은 경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제 불교수행자들은 힌두교의 아트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트만이 거짓된 것이라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가차 없이 버렸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죽어라고 佛法을 닦았지만 기대하던 다이아몬드구슬은 없고 남은 것은 얼룩이 지워진 유리구슬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힌두교의 수정구슬로 향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면 왜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로 귀의하지 않은 것인가?
힌두교로 귀의한 불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불제자들은 힌두교의 수정구슬에 이름을 바꿔 달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쪽을 택했다. 아트만 대신 참나, 眞我, 佛性, 本性, 如來藏, 一心… 등의 수많은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이미 하나를 훔쳤는데 두 개 세 개를 못할 게 없었다. 영혼이 인정되니 자연스럽게 윤회론이 도입되고, 내친김에 업장론이나 인과론도 가져다 썼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힌두교의 신들도 끌어들였다. 시바를 비롯한 힌두교의 신들은 보살이란 이름을 달고 불교의 신이 되었다. [천수경/千手經] 같은 경전엔 세세한 힌두교의 신들마저 등장하지 않던가. 신의 등장은 자연히 경배하는 의식으로 이어져 불공이 되었다. 이런 구복적 신앙에 自利利他의 자비심을 더해 대승불교라는 명패가 올라갔다.
바야흐로 힌두교의 수정구슬은 대승불교로 넘어와 깨달음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이가 龍樹이다.
龍樹는 무작정 반대만 한 것이 아니다.
출판사 서평
‘나는 누구인가’ 라는 궁극의 화두, 이 책에 답이 있다
불교 철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얼마나 긴 세월 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을까! 헤아릴 수도 없는 평생의 시간, 불교적 관점에 따르면 수억 겁 년 동안 윤회를 반복하며 헤매고 헤맸을 바로 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힌두교도, 불교도 깨달음에 이르게 해 준다는 이 문제의 답을 속 시원하게 내놓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아직 오를 수 없는 나무일지라도, 최소한 지도는 얻어 가라
긴 세월 동안 속풀이 동치미 같은 책들만 집필해온 저자다. 특유의 날카롭고 머리를 관통하는 것만 같은 시원한 해답이 드디어 이 책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오랫동안 담아 두었으나 풀지 못한 그 문제를 이 책을 읽는 순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여 그만한 능력은 안 될지라도, 최소한 어떻게 찾아가는지 알 수 있는 지도는 챙겨 갈 수 있다.
오랜 숙원을 향한 걸음에 지팡이가 되어줄 스승 같은 책
철학에 발을 담근 모든 사람의 소망이 아닐까? 나의 근원을 찾아 먼 길을 온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이란 숙원을 이 책을 지팡이 삼아 풀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기본정보
ISBN | 9791185038285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10월 22일 |
쪽수 | 198쪽 |
크기 |
158 * 231
* 19
mm
/ 476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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