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우와 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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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내가 될 수 없었던 내가 마침내, 나로서 잘 존재했다고 믿게 된 아주 잠깐의 세계
이 책의 총서 (71)
작가정보
목차
- 라비우와 링과
작가의 말
김서해 작가 인터뷰
책 속으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 그런 날들이 두껍게 쌓여서 내 조그만 기대를 잘게 부수었다. 방학이 이미 망한 것 같았고, 그 기분은, 무언가를 처음부터 망친 듯한 기분은 아주 익숙하게 호흡을 조여왔다. 울지는 않으려고 몸을 숙여 얼굴을 책상에 대고 살살 비볐다. 나와 박스밖에 없는 방에서 나는 치졸하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콤플렉스투성이. 방학만 망친 것도 아니면서 뭘 처울어. 울 일도 아닌데.
나는 가끔 내가 실망으로만 이루어진 사람 같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14~15쪽)
이런 틈에 해외여행 중인 룸메이트와 박스 더미 같은 걸 자꾸 떠올리면 발자국마다 우울이 남을 것이다. 경제적 우울, 소비자적 우울, 뭐 그런 것들이 내 몸에서 촛농처럼 죽죽 떨어져 내릴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나를 반쯤 잃어버린 것도 같았다. (17쪽)
“앞으로 뭘 하고 싶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를 둘러싼 사물, 분위기, 정보와 지식, 사람들, 대화,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날이 많지 않았다. 온 세상에 윤곽선이 하나도 없고, 그저 덩어리로 보였다. 그래, 사람들에겐 생각이 있는데 내겐 항상 기분만 있는 것 같았다. (36~37쪽)
문득, 사람들이 물 한 잔을 마시는 데도 돈이 드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아득해졌다. 다들 처음부터 돈이 있고, 경제의 원리를 알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혼란스럽지는 않은지, 좋아하는 게 있는지, 누가 물어보면 바로 말할 수 있는 인생 계획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나는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나를 알 수 없었다. 가끔은 내가 사실 연속적인 실망과 불안으로 빚은 인간 모양의 케이크라서, 아무 때나 조금만 건드리면 녹아버리고 으깨지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43~44쪽)
그러나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한 것만으로 천벌을 받은 것처럼 눈물이 먼저 흘렀다. 아마도 내가 바란 것은 함께하자, 함께 있으면 서로 도움이 될 거야 같은 말, 그런 사소한 환대였던 모양이다. 그것을 너무 바란 나머지, 또 너무 부정한 나머지 왈칵 울 수밖에 없었다. 이네스는 내가 우는 것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아파? 왜 울어? 나는 계속 고개를 흔들다가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 화장실에 들어가 훌쩍거리며 온몸을 씻었다. 입안에서 뜨거운 숨이 잔뜩 얽혀 두 번째 혀가 생기는 것 같았다. (46쪽)
이네스는 내가 단어의 뜻을 설명할 때 아주 신중하고, 눈이 반짝인다고 했다.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쌓여 있던 안개가 한 움큼 사라졌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기, 무안해서 어쩔 줄 모르기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 애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좀 더 강렬한 빛을 내 마음에 비추어주려는 것처럼 말했다.
“너는 언어를 좋아하는 것 같아. 많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게 꼭 칭찬은 아닌데도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맙다고 말했다. 이네스는 마치 박스를 끄르듯 나를 해체해서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놓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84~85쪽)
“언젠가 가보고 싶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 올린 이네스가 샤워실 문을 열고 나오자 수증기가 방 안으로 폭발하듯 퍼졌다. 이네스는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는지 뭐라고 했어? 하듯 나를 쳐다봤다.
“네 고향에 가보고 싶어.”
“좋아. 놀러 와. 내가 그리울걸?”
이네스는 방 안에 우리 둘만 있는데도 내가 자기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말은 아주 작게 말했다.
“꼭 널 만나러 갈게.” (99~100쪽)
출판사 서평
“내 외로움의 책임을 빠짐없이 묻고 싶어졌다”
도저히 내가 될 수 없었던 내가 마침내, 나로서 잘 존재했다고 믿게 된 아주 잠깐의 세계
2023년 단편소설 〈폴터가이스트〉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첫 장편소설 《너는 내 목소리를 닮았어》를 통해 타인과의 만남이 빚어내는 관계의 빛깔을 감각적으로 그려온 김서해 작가의 신작 《라비우와 링과》가 위즈덤하우스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라비우와 링과》는 대학교 3학년 ‘주영’이 자신의 룸메이트로 브라질에서 유학 온 ‘이네스’를 맞이하며 시작된다. 계절학기 수강, 편의점 야간 근무, 주말엔 카페 청소 알바까지, 꽉 짜인 매일매일은 “촛농처럼 죽죽 떨어져 내리”는 무력감으로 채워지고, 호흡을 조이는 일상의 압박으로 가득하다. 대학생들이 곧잘 누리곤 하는 ‘경험’들은 당장 오늘 치의 돈으로 손쉽게 대체되곤 한다. 주영의 오늘을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조금만 건드리면 녹아버리고 으깨지는” 인간 모양의 케이크, 너무나 취약해서 쉽게 무너지고야 마는 어떤 것이다. 또 하루를 견디고 기숙사로 돌아온 어느 날, 주영은 브라질에서 온 교환학생 ‘이네스’를 새 룸메이트로 맞이한다. 인생은 우연하고도 사소한 계기들이 빚어내는 결과물인 걸까. 낯선 언어로 이네스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던 주영의 일상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라비우와 링과》는 도저히 내가 될 수 없었던 내가 마침내, 나로서 잘 존재했다고 믿게 된 어느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머릿속이 꽉 차고 마음은 텅 비어서 누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기 힘들 때, 그저 “함께하자, 함께 있으면 서로 도움이 될 거야”라며 두 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소설이다. 흘러가버린 공허한 하루를 꽤 괜찮았던, 어쩌면 특별했던 잠깐의 세계로 다시 해석할 수 있게끔 진동을 가하는 소설, 《라비우와 링과》는 이야기가 어떤 일을 해내고야 마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즈덤하우스는 2022년 11월부터 단편소설 연재 프로젝트 ‘위클리 픽션’을 통해 오늘 한국문학의 가장 다양한 모습,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하고 있다. 구병모 〈파쇄〉, 조예은 〈만조를 기다리며〉, 안담 〈소녀는 따로 자란다〉, 최진영 〈오로라〉 등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위픽 시리즈는 이렇게 연재를 마친 소설들을 순차적으로 출간하며, 이때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단 한 편’의 단편만으로 책을 구성하는 이례적인 시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 편 한 편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은 소재나 형식 등 그 어떤 기준과 구분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단 한 편의 이야기’라는 완결성에 주목한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논픽션 작가, 시인, 청소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장르와 경계를 허물며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확장한다.
시즌 1 50편에 이어 시즌 2는 더욱 새로운 작가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시즌 2에는 강화길, 임선우, 단요, 정보라, 김보영, 이미상, 김기태, 김화진, 정이현, 임솔아, 황정은 작가 등이 함께한다. 또한 시즌 2에는 작가 인터뷰를 수록하여 작품 안팎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년 50가지 이야기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위픽 시리즈 소개∥
위픽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입니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작은 조각이 당신의 세계를 넓혀줄 새로운 한 조각이 되기를,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당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당신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한 조각의 문학이 되기를 꿈꿉니다.
기본정보
ISBN | 9791171717064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8월 14일 | ||
쪽수 | 128쪽 | ||
크기 |
111 * 187
* 17
mm
/ 307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위픽(WEFI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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