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을 다 써 버린 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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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려시의 시가 독특한 것은 무의식의 흐름을 무의식의 언어로 그려 내는 방식 때문이다. 그는 애초에 언어와 개념과 사유의 로고스를 신뢰하지 않는다. 세계는 질서 정연한 인과율로 움직이지 않는다. 질서는 아버지의 법칙(Father’s Law)이 상징계에 강요하는 명령일 뿐이다. 기표들은 계속해서 가까이에 있는 것과 자리를 바꾸거나(인접성의 원리 = 전치 = 환유) 서로 다른 것들을 (그 사이에 있는 닮은 것들을 찾아내서) 하나로 합친다(유사성의 원리 = 응축 = 은유). 황려시의 시들은 한마디로 언어의 무의식, 무의식의 언어에 충실한 시들이다. 이런 열쇠를 가지고 황려시의 시들을 읽으면 그 외피에서 보이는 난감하고 복잡하며 난해한 미로의 지도가 보일 것이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박쥐’가 되고, ‘밤’이 ‘범’이 되고, ‘사막’이 ‘강물’이 되며, ‘밤’이 ‘방’이 되는 것은 난해한 일이 아니라 (무의식과 기호의 세계에선) 일상이다. 그러면 “둥근 소리들이 가까이 다가가 눈으로 입술을 더듬는다”와 같은 문장도 이해가 갈 것이다(「신발이 수상하다」). 황려시에게 일상은 로고스가 아니다. 그에게 일상은 은유이고 환유이며 무의식이다. 황려시는 바로 그런 일상의 풍경들을 그림처럼 그리고 있다. 그 그림들에선 파면 팔수록 다양하고 깊은 미로가 리좀(rhizome)처럼 펼쳐진다. (이상 오민석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이 책의 총서 (150)
작가정보
작가의 말
비 오는 날 뒤뜰에 묻은 기분과
이젠 다 써 버린 주머니 속 기분
출렁이던 말들은 소진되었다
그새 아이비 넝쿨은 두 시 반이고
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늘어나는 - 11
밥 먹는 밥 - 12
날마다 여자 - 13
모월 모시 - 14
방 - 15
팔찌 - 16
비누, 미끄러운 방식 - 17
절분초 - 18
나를 옮기다 - 19
서로 다른 두 개를 하나로 쓰면 어떨까 - 20
위대한 의자 - 22
핑계 - 23
뒤끝 - 24
신발이 수상하다 - 25
제2부
때매김 - 29
견고한 우리 - 30
무고(誣告) - 32
수작 짐작 참작 - 34
자소서 - 35
지렁이 - 36
직립 - 37
해가 짧아졌어요 - 38
어디까지 왔니 - 39
유리구두 - 40
이를테면 - 41
시시콜콜 - 42
명명식 - 43
말머리 없음 - 44
던질 필요 없다 - 45
찐빵 - 46
제3부
음유시인 - 49
반계탕 - 50
남자 사람 친구 - 51
몸치 - 52
감염 - 53
어부바 - 54
테라스 - 56
가끔 기분을 씻는다 - 57
가래나무 - 58
특선 메뉴 - 59
오래된 물감 - 60
미션 - 61
계단을 한 장씩 뜯어먹었다 - 62
궤 - 63
제4부
a boaster - 67
귀 - 68
옥상 - 69
우선멈춤 - 70
합(合) - 71
환승 - 72
나의 수베로사 - 73
플라세보 - 74
피드백 - 75
터널 - 76
시집을 꺼내 밥을 먹었다 - 77
워크숍 - 78
2+1 - 79
달력을 받아 오다 - 80
가시엉겅퀴 - 82
미필적 호명 - 84
해설 오민석 부유하는 기호들 - 85
추천사
-
분열된 언어를 통해서 분열된 현실을 가리키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원래부터 언어는 분열되어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분열의 언어는 분열의 통증을 반감시키고, 반대로 개방의 폭을 한없이 늘려 놓는다. 따라서 황려시의 시의 넓은 행간은 반복과 상관될 때조차 정밀한 초점화보다는 활달한 확산과 개진을 목표로 한다. 단어와 문장과 이미지가 촉발하는 무엇, 혹은 그 자리, 그러한 문장의 연쇄가 남긴 잔향들은 아직 완성 직전의 언어로 제공된다.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시의 행간이 넓다고 하여 황려시의 시가 ‘아무 말 대잔치’인 것은 아니다. 재현의 언어가 처음부터 완수할 수 없었던 몫을 투명하게 가로지르면서 다른 언어와 이미지로 끊임없이 도약하는 언어. 가장 시적인 것들은 재현이 무산된 자리에서 후발하는 착시 같은 것이라서 “데이지 꽃대를 자르면 목이” 타고(「명명식」), “귀뚜라미는 보일러 안에서 보일러가 되고”(「서로 다른 두 개를 하나로 쓰면 어떨까」), “카놀라유처럼 미끄럽게 잠꼬대를 하고 나무가 바람 대신 흔들리고”(「남자 사람 친구」) “컵은 먹물을 담은 채 골똘”하고(「몸치」), 그렇게 “시가 나를 쓴다”(「서로 다른 두 개를 하나로 쓰면 어떨까」). 황려시의 시에서 언뜻 반복적이어 보이는 일상은 분열의 언어로 비산하고, 우발과 우연은 정교한 재현의 언어로 가지런하다. 애초에 분열과 재현이, 도약과 유비가 나란하기만 하다면 이것들은 결국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신발이 수상하다」의 독화술이나 「반계탕」의 환유가 모두 저 「합」에서 보이는 골몰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는 “생각이 뼈만 남을 때까지 생각”하고 “뼈가 되어” 생각하는 것이다(「합」). 이렇게 우리는 황려시의 시들을 “명랑한 실패”라 불러도 좋겠지만(「뒤끝」), 실패의 끝에서 생각의 뼈를 만지며 더 자주 명랑할 수 있으리라.
책 속으로
견고한 우리
우리라는 말을 구해 준 우리, 맞지? 우리였지 나를 캐내려고 손톱이 다 해지고야 알았지 파양이 안 되는 질기디질긴 줄기였다는 걸 우리 사이에 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고구마 줄기처럼 껍질을 벗겨야 꺾을 수 있는 내 껍질은 고스란히 고집이라서 손톱이 까맣도록 벗겨야 우리에게 닿을 수 있다는 걸
실 좀 꿰어 봐라 바늘 내미는 엄마에게 긴 실을 귀에 걸어 주면 얼마나 시집을 멀리 가려고 핀잔하더니 엄마는 정말 멀리 가 버리고 난 그래 봐야 평택에서 서울인데 질긴 껍질로 우리에게 아직 닿지 못했는데
우리를 구해 준 우리, 맞지 우리였지
아버님 하나 엄마 하나 우린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지 제 나이보다 빠르게 출가한 언니에게 도망가냐고 물었지 사랑이라고 쉽게 대답했어 비가 오고 있었다
미처 덮지 못한 장독 뚜껑이 우릴 기다렸어 달그락달그락 기다렸어 비는 자꾸 내리고 쌩쌩한 우리끼리 젖은 골목을 키웠어 해묵은 간장이 빗물에 넘치고 있었어 ■
가래나무
새를 위해서 팔을 뻗으며 새를 위해서 흔들리며 다만 새를 하늘로 던지며 그 자리에 서 있다 서성인다
뛰어내려라
겁 많은 새를 위해서 고마움을 조금 모르는 새를 위해서 유모차를 끌고 그늘로 모이는 사람들
이파리 하나가 해의 턱선을 가리고 양팔을 접고 있다 눈 뜨고 자던 바람도 새를 위해서 그냥 새만을 위해서 더 큰 나무에 갇히고
나무는 두리번거리며 날개처럼 퍼드득거리며 잠든 새를 찾는다 어두워서 더 커지는 숲
숲은 새 속으로 사라진다 ■
미필적 호명
해 지는 쪽으로 오라 거기 끝에는 네가 있고 널 만나기 위해 네가 와야 한다 너의 오른 손등을 감쌀 왼손은 비워 두었다
해 지는 쪽으로 오라 바스러진 이파리들은 모두 바람의 것 빼곡히 눌러놓은 문장이 일어서고 풀이 되는 너의 언덕으로 나는 돌아눕지 않았다 네가 도착하는 시간은 아직 어둡지 않아
살아지지 않는 날에
사라지지 않는 날에 ■
기본정보
ISBN | 9791191897760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5월 15일 | ||
쪽수 | 97쪽 | ||
크기 |
129 * 209
* 11
mm
/ 251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파란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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