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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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숙 시인은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으며, 1996년 [문학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를 썼다.
백연숙의 첫 시집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에는 문장 가득 마음이 담겨 있다. 비가 내려 무너진 집을 복구하려는 개미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음악이 만들어지는 장면으로 바꾸어 적거나(「클라리넷」) 할머니의 병 때문에 한 집에 옹기종기 모이게 된 모녀 삼대를 “우리는 한때 소녀였다”라는 사랑스러운 문장으로 한데 모은 자리에서 발견되는 연민이나 애틋함 같은 것(「소녀시대」).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시 속의 이들이 처한 안타까운 사정을 잠시나마 잊은 채 그 따듯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세상에는 빈속을 든든히 채워 몸을 회복하기 위해 찾는 “죽집”도 있지만 어떤 허한 이들의 경우, 다른 이유로 방문하는 “죽집”도 있다. 이를테면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러” 가려는 “손님들”이 있는 「묵음(黙音)」의 가게와 같은 곳.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아까시나무”를 찾는지는 추정만이 가능하지만 어떤 흥미 본위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도 그곳에 “손님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그들이 좋아하는 나무를 잘 길러 보기 위해 “휴일에도 물을 주러 나”가는 주인의 따듯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백연숙의 시집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를 찾아 읽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발길이 자주 그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그의 시가 새롭거나 화려한 수사들로 써졌기 때문이 아니라 저 다정한 주인처럼 우리의 텅 빈 곳을 채워 주려는 그의 마음 때문이다. 우리가 곧 다시 허기질 것을 알고 어떻게든 우리의 빈 곳을 어루만져 이를 다른 것으로 채워 주려는 필사적인 다정함. 이것이 백연숙 시의 특별함이 아닐까. 그의 시를 읽으며 “다급한 허기”를 채운 후에야 새로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는 말도 덧붙여 본다(「모과가 한창」). 어쩌면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가장 낯설고 먼 하나의 이국”처럼 여겨졌던 가족의 허기 같은 것(「몽유도원도」). 세상에는 참 채워야 할 것들이 많다. (이상 송현지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이 책의 총서 (150)
작가의 말
버스정류장도지나고페르시안고양이도지나고
겨울지나겨울이오기전당신도지나고지나는김에나도지나가며
다지나왔다고생각했는데
웬걸, 저만치서 당신의 오늘과 내일이 나를 노크한다
쉼표 하나 지나자마자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 갸우뚱거린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비상등처럼 깜빡이거나 지직거리는
당신의 그 찬란한 눈동자를 믿는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평촌 - 11
클라리넷 - 12
의자는 푸르다 - 14
멍 - 16
모과가 한창 - 18
돌무지 - 20
워킹맘 - 22
설계사 - 24
질병분류기호 - 26
분화구 - 28
달빛감옥 - 30
제2부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 - 35
그 고개 - 36
소녀시대 - 38
개밥바라기별 - 40
귀뚜라미 모녀 1 - 42
불탄 집 - 44
매 - 46
꽃샘 - 47
입춘 - 48
악착같이 - 50
퇴근길 - 52
제3부
생선꽃 - 55
만추 - 56
몽유도원도 - 58
묵음(黙音) - 60
카풀 - 62
택시 안에서 택시 잡기 - 64
MRI - 66
메모리얼 가든 - 68
연신내, 가로등 06-4로부터 - 70
있다가 없는 밤 - 72
제4부
바람 부는 날 - 77
남태령 - 78
도둑맞은 자화상 - 80
치욕은 어떻게 오는가 - 82
주말의 평화 - 84
백야행 - 86
귀뚜라미 모녀 2 - 88
동백꽃 - 90
자궁의 기억 - 92
장항선 - 94
해설 송현지 허기의 자리 - 95
추천사
-
일찍이 1996년에 시인이 되었으나 이번이 가까스로 첫 번째 시집이다. 따져 보면 이십팔 년 만에 시집을 내놓는 셈이다. 그 함구와 침묵과 격절의 시간에도 시인은 타자를 유심히 바라보는 일만큼은 내려놓지 못한 모양이다. 타자의 슬픔을 바라보면 누구에게나 연민이 발생하는데, 그 순간 타자에게 값싼 동정을 내비치는 주체는 속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 점을 잘 아는 백연숙은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식의 전략을 택한다. 그러다 보니 ‘여동생’과 ‘나’와 ‘엄마’와 ‘할머니’가 할머니 방에 모이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우리는 상기된 소녀들”이 된다(「소녀시대」). 미용실 갔다가 개미집을 구경하고, 동태찌개를 먹거나 세탁기 앞에서 ‘엄마’를 떠올리고, 달빛을 바라보다가 거실 창문에 맺히고, 반찬 투정하는 ‘남편’ 앞에서 동백꽃이 되는 일이 모두 그렇다. 그것들은 새초롬한 듯하지만 다 예사롭지 않고, 무심한 듯하지만 살가운 데가 있다. 간접 인용 형식의 구문을 활용한 표제작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가 주는 울림을 읽어 보라. 사소하고 무덤덤한 전언이 통증처럼 아리게 스며들 것이다. 또 하나 백연숙의 시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 ‘여자’다. 그 ‘여자’는 지극히 객관적이면서 냉철한 척하는 ‘여성’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들려오거나/해마다 잊지 않고 찾아와 통증으로 열리는/몸의 서랍들”을 지닌 ‘여자’다(「자궁의 기억」). 우리는 이 시집의 성과를 ‘여성’이라는 말의 메마른 관념성을 ‘여자’라는 몸의 생생한 구체성으로 그려 낸 수확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책 속으로
평촌
거미줄에 걸려 말라붙은 나비를 본다
바람 불 때마다 파닥거리는 나비
멀리 쌍둥이 빌딩이 보인다
벌레 먹은 산딸나무 잎사귀
거미줄 위에 매달린 채 흔들린다
줄을 쳐 놓고 대체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지만
육천 원짜리 백반을 먹기 위해
식판을 들고 길게 줄이 섰다
거미줄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무거워지는 허기,
요란하게 지나가던 배달 오토바이 경적 소리도
거미줄에 걸려 있는 가을장마 끝이었다 ■
돌무지
돌이 울어요
비가 오면 떠내려갈까 봐
맨 밑에 깔린 채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단말마의 비명을 위해
돌들이 개구리처럼 떼거리로 울어요
여덟 명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걸 감추기 위해
케냐 엄마는 냄비에 돌을 넣고 끓였지요
휘휘 저으며 맛도 봤을 거예요
쌀이나 금이 되느라 돌들은 잠 못 이루고
냄비가 끓는 동안 아이들은 헛배가 불렀을 거라고
돌들은 잠시 울음을 그쳐요
눈이 오면 강아지 꼬리가 생기고
차곡차곡 쌓인 비명들 입냄새처럼 빠져나와
아아 입을 벌려 눈을 받아먹으며
오오, 배부르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으지요
울음을 그친 돌들은
반달눈을 하고 깊은 잠이 들어요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들
모래알처럼 밤새 반짝이지요 ■
십 분이면 도착한다며 봄이라며
물들까 봐 근처도 가지 않았다며
쥐똥나무 창공이라며 친구라며
졸지도 않았다며
꽃은 피었지만 나비는 날지 않았다며
사각지대는 아니었다며
새가 노래로 울었다며
58년 개띠 열댓 살짜리 아이가 있었다며
게이는 아니지만 스타킹이 나왔다며
뒤로 갈 수도 없었다며 대포통장이었다며
아이와 노모가 타고 있었다며
하필이면 블랙박스가 꺼져 있었다며
애인이라며
월요일은 일산 수요일은 목동
토요일은 우리 동네 약수터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자
운 좋게 발을 뺐다며 물까지 타진 않았다며
고향 가는 길이었다며 ■
기본정보
ISBN | 9791191897715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1월 02일 | ||
쪽수 | 110쪽 | ||
크기 |
128 * 209
* 15
mm
/ 281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파란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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