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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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교 『나는 죽은 사람이다』 출간
“나는 좁교가 아닌데 어깨가 무겁다 짐도 지지 않았는데
숨이 차다 좁교는 핏줄처럼 내 곁에 붙어 있다”
이름 없는 개인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
시대의 자화상, 그리고 시를 통한 씻김굿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을 내며 왕성한 활동을 해 온 이경교 시인의 시집 『나는 죽은 사람이다』가 걷는사람 시인선 82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을 인용해 이경교의 시세계를 꿰뚫어 본 이병철 평론가의 말처럼, 이경교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에 의해 고통당한 ‘아무개’였던 아버지의 삶에 천착하여 들어가 그 속에 담긴 슬픔과 한(恨), 미망(未忘), 꿈 들을 한 편의 신화 같은 이야기로 그려낸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크나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슬픈 무늬를 만들어 갔던 가장 약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헌사”(박형준 시인)로 읽힌다.
신산한 삶들을 위무하는 이경교의 시는 한 맺힌 이의 원한을 풀어 주는 씻김굿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1925년에 태어나 1998년에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이우목’,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강물에 몸을 던진 ‘큰어머니’, 평생 울음으로 그을어 있었던 ‘곡비(哭婢) 여자’, 말더듬이였지만 구성진 상두가를 풀어내던 ‘더더쟁이 소리꾼’, 어릴 적 홍역을 앓고 말을 잃어버린 친구 ‘진로’, 한쪽 팔이 없지만 누구보다도 평화로운 세계를 노래했던 ‘외팔이 아저씨’…….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무명(無名)의 삶을 시인은 매혹적이고도 신비한 이야기로 풀어낸다.
징용에 끌려가고 인민군에게 끌려가기도 하며 기구한 인생을 산 농부 아버지로부터 죽음의 기억과 변방의 삶을 물려받은 이경교 시인은 활자 중독자, 은유 중독자, 상징 중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나무 중독자’라고 칭한다. “내 몸속에선 옻나무가 자란다 아비가 흘려 놓은 옻독이 핏속을 흘러 다닌다”(「나무 중독자」)고 고백하는 그는 평생 나무가 좋아 산에 오르고, 나무로 만든 연필과 종이를 쥐고 시를 쓰고, 나무들의 수런거림을 쫓아 먼 곳의 오지를 헤매기도 했다. 그 방랑은 폐기된 시간, 소외되고 버려진 이야기를 무대로 끌어 올리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경교는 서정과 서사, 현재와 과거, 여기와 저기, 삶과 죽음, 의미와 이야기의 공존을 통해 역사와 개인의 간극을 좁히고, 현실과 환상의 간극을 무화시키며 ‘입체적 상상력의 시’를 구현해낸다.
박형준 시인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의 운명. 그러나 옻독이 온몸에 퍼져 피부에 꽃이 피듯 시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옻독이 흘러들어 한 권의 시집을 완성했다. 시가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듯 시인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라며 이 시집의 의의를 밝힌다.
이 책의 총서 (123)
작가정보
작가의 말
손을 좀 다오 그림자가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을 잡아야 하나 머뭇거리는 사이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눈을 떴으나, 다시 환한 꿈이 계속되었다
2023년 정월
이경교
목차
- 1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옻나무
나는 죽은 사람이다
턱이 말을 할 때
1925년생 1
1925년생 2
큰어머니
강물
눈병
순사와 유령
기일
그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아버지 1925-1998
탈출기
2부 나는 네 아비의 혼령이다
붉은 강
붉은 독
곁길로 빠지다
가족사진
아기나리
뜨거운 눈
출렁출렁
소녀상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상한 대화
두꺼운 잠
따스한 잠
무당사
돌아오라, 쏘렌토로
3부 나는 분명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다
낙타와 나
모래산
좁교가 간다
폭설 속에서 쇠못을 보거나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네
별빛이 벨 소리를 울리네
나무 중독자
햇살 환한 오후
에게해
사무라이 까마귀
페인트가 칠해진 새
흰목물까마귀
낯선 곳
4부 울음을 기다리는 곳
여치 당숙모
진로 1
진로 2
곡비 여자
외팔이 아저씨 1
외팔이 아저씨 2
더더쟁이 소리꾼
오지 않는 사람들
세 번째 비파나무
산상 음악회
도요새
이름을 묻다
등신불 이야기
새알꽃
해설
나는 살기 위해 죽으리라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추천사
-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물결의 무늬를 자신의 몸 안에 새기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무늬를 완성해 가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시인의 아버지는 1925년에 태어나 1998년에 돌아가셨다. 어떤 사람은 그 세대를 두고 어리석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시집은 그 슬픈 무늬를 만들어 갔던 가장 약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헌사이다. 한때는 머슴으로, 허기진 꿈결에 일본인으로, 인민군과 국방군 사이에서 늘 곁길로 다녀야 했던 사람을 부끄럽다 여길지 모르지만, 그 부끄러움으로 우리를 먹이고 입히며 소리 없이 곁을 떠나셨다. 옻독으로 “몰래몰래 곁길만 걸었”던 아버지를 따라간 것일까, “무리에 섞이지 못하”(「곁길로 빠지다」)며 시인의 길을 걸으며 서러움에 “그는 왜 하필 그때 태어났을까?”(「그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자주 물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운동, IMF가 끝나 경제적 풍요로움이 우리 앞에 펼쳐질 때 그는 떠났다. 이 시집은 시인 자신의 개인사에서 가족사로 그리고 우리 시대의 자화상으로 읽힌다. 시집 속의 ‘진로’, ‘곡비 여자’, ‘외팔이 아저씨’, ‘더더쟁이 소리꾼’과 종친 어르신들은 “사진 속을 걸어 나”가 “어디로 갔을까”(「가족사진」) 찾아보지만 이미 “동구 밖으로 흘러가는 꽃구름처럼 상여는”(「출렁출렁」) 흘러가고 시간의 흐름 속으로 떠내려간 이들은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 곁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의 운명. 그러나 옻독이 온몸에 퍼져 피부에 꽃이 피듯 시인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옻독이 흘러들어 한 권의 시집을 완성했다. 시가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니지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듯 시인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
책 속으로
아비는 죽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징용에 차출되어 탈출할 때, 죽을 고비를 제대로 넘겼지 이제 나는 식민지인이 아니다! 기쁜 눈물이 마르기도 전 다시 6·25가 터진 거야 이번엔 인민군에 끌려가게 되었지 산기슭에서 단체로 똥을 누고 있었지 상상이 되니? 숲 그늘마다 빼곡히 앉아 똥을 싸는 청년들…… 내장까지 다 버리고 싶었지 외로움의 빛깔은 어스름 빛이란 걸 알았지 문득 눈앞에 옻나무가 환하게 서 있더구나 어스름이 등불로 바뀔 때도 있지 그게 뭘 의미하겠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지 옻나무 순을 꺾어 천천히 밑을 씻었단다 밑이 뜨거워진 건 옴이 내장을 적셨기 때문이지 내장인들 얼마나 놀랐겠니? 온몸이 불덩이였지 좁쌀 같은 발진이 혀와 동공을 뒤덮었을 때, 죽은 나를 버리고 그들은 떠났단다 그때 아비는 죽음과 내기를 한 거야 아비는 부활을 모르지만, 죽은 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들었지 마른 등불, 혹은 끈끈한 옻나무 진, 그 사이로 흐르는 하얀 목소리, 그 흰빛에 싸여 부활은 천천히 걸어왔단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부분
나는 늘 저쪽이었네, 빈방에 내 몸을 가두고 유배를 떠나곤 했네 아무도 모르는 외로운 감옥은 정겨운 집이었네 떼 지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네 패거리는 전쟁과 전염병을 불러온다고 경고한 이도 있지, 무리에서 이탈한 사자는 아무도 없는 산모롱이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지
-「곁길로 빠지다」 부분
서 계신 모습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쓰러지기 전의 모습이지, 아버지가 아니라 그림자가 말하는 것 같아요, 누구나 그림자를 데리고 다니지, 구름 속에 있는 기분이라니까요, 얘야 산다는 건 구름 속을 걷는 일이란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어요? 아니 근처를 지나는 중이었지 나도 꿈을 꾸고 있었나 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때 징용이 내 아내를 앗아 갔어, 그건 제발 잊으세요 아버지, 아니야 죽어도 못 잊는다는 말도 있잖니? 인민군에 끌려간 얘기는 오늘도 남겨 둬야겠구나, 그래요 아버지, 아무래도 다시 오긴 어렵겠지 요샌 꿈도 안 꿔지니 말이야, 살펴 가세요 아버지, 오냐 구름을 잘 골라 디디렴 슬픔이 구름을 부풀리니까 구름은 모든 걸 덮으니까
-「이상한 대화」 부분
짐을 산처럼 잔뜩 싣고 저기 좁교가 간다 좁교는 사랑을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순한 눈망울 굴리며 거친 숨 내뿜으며 좁교는 일만 하다가 죽는다
왜 좁교는 하필 나와 같은 돌림자인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어느 땐 내가 짐을 잔뜩 지고 산비탈을 오른다 나는 좁교가 아닌데 어깨가 무겁다 짐도 지지 않았는데 숨이 차다 좁교는 핏줄처럼 내 곁에 붙어 있다 좁교는 꿈길까지 나를 따라다닌다 좁교는 들리지 않는 내 울음이다
-「좁교가 간다」 부분
외팔이 아저씨가 마을 대항 릴레이 선수로 나섰다 우리 마을은 노상 꼴찌였으므로, 아저씨는 말처럼 빨랐으므로, 이장은 아저씨를 마지막 주자로 점찍었다 우리 마을은 역시 꼴찌였다 외팔이 아저씨에게 배턴이 인계되었다 아저씨는 앞을 노려보며 내달렸다 한쪽 옷소매가 우승 테이프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트랙을 반쯤 달렸을 때, 아저씨 앞엔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가 운동장을 덮었다
아저씨가 갑자기 트랙을 이탈했다 아저씨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실격이었다 환호는 욕설로 바뀌었다 이번엔 이장이 비난을 받았다 정신병자를 선수로 뽑은 건 이장이라고! 다음 날 아저씨는 우리에게 말했다
맨 앞자리란 슬픈 거란다 누구도 볼 수 없으니까, 추운 허공에도 길을 내야 하니까 내 이마 서늘해질 때, 허공도 이마가 벗겨지니까, 거기 주렁주렁 매달리는 열매들을 보았니? 공기의 결마다 맺히는 쓸쓸한 핏방울들을
-「외팔이 아저씨 2」 전문
우리 마을 최고의 상두잡이는 더더쟁이 아저씨였지, 말끝마다 더더더가 달라붙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 말더듬이 모세를 닮아 입이 무거웠지만 구성진 상두가 가락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지 아저씨의 상두가 선창은 허공을 나는 새들까지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지 상두가 가락이 허공을 흔들면, 새들의 후렴이 따라붙었지 꽃상여 주변은 소란스러웠지 아저씨의 상두가 가락은 저승문을 흔들고 온 메아리 같았지 그건 이승의 소리가 아니었지 말더듬이를 핑계로 말을 잔뜩 쟁여 두었다가 상두가 가락에 쏟아부었지 아저씨는 저승의 소리꾼이었지
-「더더쟁이 소리꾼」 전문
기본정보
ISBN | 9791192333649 | ||
---|---|---|---|
발행(출시)일자 | 2023년 02월 17일 | ||
쪽수 | 136쪽 | ||
크기 |
125 * 200
* 13
mm
/ 27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걷는사람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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