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숲 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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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를 때 높이로만 오르지 말고 부피로도 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산꾼들은 높이의 산을 오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산행은 산의 속살을 보지 못하고 그저 땀만 흘리고 올 뿐이라는 걸 안다. 산을 몸으로 부딪히며 오르는 지리산이야말로 진정한 산행이며 정말로 부피의 산과 높이의 산을 다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자동차로 성삼재에 올라 능선을 타고 가는 종주 산행은 산행이 아니라 트레킹이다. 그 다음으로 느낀 매력은 지리산이 가진 역사성이다. 가야의 멸망을 안고 있는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숱한 질곡들을 몸소 체험해 간직하고 있다.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는 왕국의 흥망성쇄가 손에 잡힐 듯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 들려온다. 가장 최근의 역사도 그렇다. 동란으로 동족상잔이 일어났을 때 피아간에 치열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고 휴전 후에도 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되어 민가에 자주 출몰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우리 민족은 이데올로기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숱한 주검과 마주쳐야 했다. 총칼을 든 군인들만이 아니라 흰옷 입은 농투산이도 부역으로 끌려가 굶어 죽거나 추위에 얼어 죽거나 총알받이가 되어 산화하였거나 하는 가슴아픈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아직도 빨치산들이 구축해 놓은 비트들이 산죽밭 곳곳에 널려 있고 큰 나무들에는 총알이 박혀 있거나 스쳐간 흔적들이 남아 치열했던 전투를 증언하고 있다. 이런 아픈 역사가 매번 지리산에 들 때마다 숙연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역사적 사실에 들었다는 느낌과 함께 숱한 사연들을 안고 있는 지리산을 쉽게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느끼는 매력은 숱한 종류의 다양한 동식물들이다. 그것들이 있어 지리산을 살아있게 하고 숲속에서도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작은 풀벌레부터 다양한 새들의 종류들. 고라니 삵괭이, 여우나 늑대, 반달곰까지 그야말로 생태계가 살아 있는 생명이 출렁이는 산이다. 그래서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나 어떤 동식물들도 지리산에 들면 그 생명을 쉽게 보전할 수가 있다 한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흘러 죽을 병에 걸리더라도 지리산에 들어 치유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았다. 지금도 그런 이들이 지리산에 들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느끼는 매력은 지리산은 불국토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다. 한국 불교의 중흥을 이끈 고승 대덕들이 스쳐간 곳이 바로 지리산이다. 그 제일 앞머리에 있는 사찰을 꼽으라면 벽송사다. 벽송선사가 창건하여 숱한 제자들을 길러 불교의 중흥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사찰마다 불교적 사연들이 전해져 온다. 그것들에서 많은 느낌과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강영환 시인은 지리산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정보
목차
- 자서…03
목차…04
제 18 부/지리산 숲 빈터
천왕봉이 운다…11
귀향…12
원시는 맛나다…14
백무동 숲길…15
고사목-제석봉…16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도…18
숲 그늘 길-거림…19
남명매-덕산…20
정당매-단속사지…21
원정매-남사 예담촌…22
흑매-화엄사…23
칡꽃-쌍계사…24
붉은 동백-연곡사…25
차꽃-쌍계골…26
곶감-덕산…27
지리산 불-의신…28
깊은 그늘-순두류…29
산나리-대성골…30
십리 벚꽃-화개동천…31
칡범을 찾아서…32
제 19 부/지리산 풀꽃
개별꽃-임걸령…43
풀솜대-노고단…44
하늘말나리-제석봉…46
곰취-치밭목…47
고비-반야봉…48
원추리-돼지평전…49
지보초-토끼봉…50
철쭉-팔량치…51
참나리-왕시루봉…52
산오이풀-세석평전…53
복수초-만복대…54
투구꽃-왕등재…55
동의나물꽃-노고단…56
지리터리풀꽃-천왕봉…57
꿩의 다리-묘봉치…58
구절초-삼도봉…59
칼잎용담-삼신봉…60
개불알꽃-삼정산…61
벌개미취꽃-북고리봉…62
지리엉겅퀴-돼지 평전…63
며느리밥풀꽃-벽소령…64
털중나리-형제봉…66
지리바꽃-연하봉…67
싸리꽃-남부능…68
배초향꽃-연하천…69
병꽃-팔량치…70
나도 옥잠화-지리주능…71
얼레지-연하천…72
금강애기나리-삼각고지…73
은방울꽃-달뜨기능…74
하늘빛 산수국-상불재…75
밤꽃-문수골…76
미역줄나무꽃-써레봉…77
좀민들레-둘레길…78
제 20 부/지리산 야생화
조릿대-장단골…81
산앵도-뱀사골…82
동자꽃-거림골…83
개여뀌-중산리…84
노랑제비꽃-거림…85
현호색-임걸령…86
생강나무꽃-단천골…87
백도라지꽃-윗새재…88
산수유꽃-상위…89
맨드라미-안내원동…90
까치수염-범왕리…91
흰인가목꽃-먹통골…92
층층잔대꽃-청학골…93
궁궁이-청학골…94
산수국-청학동…95
히어리-구룡곡…96
산딸나무꽃-백무동…97
흰민들레-삼정동…98
달맞이꽃-허공달골…99
노루삼꽃-삼정산…100
바위떡풀꽃-이끼폭포…101
꿩의밥-빗점골…102
며느리밑씻개-거림골…103
까치수염-한신계곡…104
금강애기나리꽃-삼각고지…105
더덕꽃-새재…106
자귀꽃-먹통골…107
메꽃-장단골…108
금강초롱-법천골…109
노란물봉선-연하봉골…110
비비추-금강대…111
노루오줌꽃-한신지곡…112
외갓냉이꽃-큰세개골…113
금미타리-양정…114
모싯대꽃-중봉골…115
심마니를 기다리는 산삼꽃-문수골…116
[후기] 나는 지리산을 간다…118
책 속으로
천왕봉이 운다
지리산 천왕봉이 운다
멀리까지. 소리를 보내 나를 부른다
우는 산을 달래려고 산에 들었다
소리는 들리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겨우내 얼었던 몸이 풀리는지
참았던 가슴을 터뜨려 부끄럼도 없이
맨살 천둥소리로 운다
큰산도 옷고름 풀어 놓고
울고싶을 때가 있나보다
누구도 깨어나지 않은 새벽이면
목소리가 아닌 온몸으로 우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함성으로
깊은 속내를 속 시원히 토한다
나는 울음소리를 따라 칠선골에 들어
물 흐르는 소리로 귀를 씻고
젖 달라 보채는 아가를 달래듯
울음으로 높이진 천왕봉을 마주한다
냐가 울고 있다
귀향
걸어온 길을 모두 지운 뒤
노을 색을 등에 지고 홀로
검은 산으로 들고 있는 풀꽃이
외따로 선 먼 등불을 향해 간다
오래 기다리는 등불은 누가 켰을까
물소리가 산을 버리고 떠나는데
오래 기다리는 검은 숲에
지빠귀도 놀다 가고
장수풍뎅이도 밥 먹고 간다
웃음소리가 자글자글 별밭이다
기웃거리는 물이 있고
늘어진 그늘도 쉬어간다
숲길은 나무꾼이 내었다
죽은 나무를 베어 오다
등지게를 부려놓고 한숨 돌리다
나도 집을 버리고 들어
등불 하나 찾아간다
자주 들지 않아 길은 지워지고
숲길은 빈터로 모인다
군불 때 방을 덥히고
밥을 지어 살림을 이룬다
숲속 빈터에 새들이 몰려 든다
찌르레기 휘파람새가 몰려와서
제 목소리로 노래 부른다
숨어있던 새들도 노래 앞으로 몰려와
날개를 치켜세워 춤을 춘다
빈터가 야단이다
원시는 맛나다
백무동 숲에 들어 빈터 골라
나무 베어 기둥 세우고
혈거를 짓고 들어앉아 돌도끼를 갈며
숲을 질러가는 사슴을 향해
빗나가는 죽창을 던진다
원시는 더 없이 맛나다
지빠귀가 지빠귀를 낳는 것처럼
편백숲이 편백을 낳는다
그늘진 숲은 꽃이 있어 어둡지 않고
꽃은 눈빛과 향기로 원시를 세운다
꽃을 찾아드는 나비가 바람을 탄다
원시는 숨쉬기가 편하다고 자꾸만
원시 숲이 원시를 낳는다
숨은 숲길
지리산 천왕봉 앞에 서면
나는 얼마나 작은 벌레냐
지나가는 잠간은 얼마나 긴 찰나더냐
풀잎 위에 이슬로 누워
지나는 바람에 얼굴 깎이다 보면
아래로 쏟아져 달려가는 물처럼
내 지나온 숱한 길들에 대하여
하나도 서두를 일도 아니고
자벌레 한 걸음보다 더 짧은 보행으로
긴 숲은 언제 다 지날까 걱정할 일도 아니다
은하 속 먼지 한 톨이 꿈틀한다
누구도 오지 않는 빈터에서 꽃이 피고
보아주지 않아 시든 꽃이 우주를 품는다
숲은 얼마나 더 깊어지고
숲길은 또 얼마나 멀리 갈 것이냐
숲으로 난 길은 얼마나 가늘더냐
내 길은 끊어지지 않고
뒤따르는 발자국을 기다린다
고사목-제석봉
지리산 제석봉에 서 있는 나무는
혈액형이 나와 같은 B형이다
그래서 여태 한자리에 서있다
그대 떠나고 난 뒤
뼈에 새긴 칼금을 지우지 못한다
은근히 강요하지 마라
끝까지 간다 홀로라도
한번 택한 길은 바꾸지 않는다
등을 보이고 가는 물에게
다시 돌아서지 말라고 철조망을 친다
눈물 찍어 발자국을 그리지도 않는다
바람 지나는 길목에 서서
바람에게 살과 피를 내어 주고
하얀 뼈로 남을 때까지 몸뚱이는
별 가는 산등성이에서
뿌리는 실금 강에 목을 추기고
낮은 구름과 어울리며
마른 목을 다해 휘파람을 분다
나무는 거스를 수 없는 B형이다
고사목을 말리지 마라
비바람에 깎여 제석봉이 사라져도
B형은 바뀌지 않는다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도-순두류
숲은 곳곳마다 빈터다
숱한 빈터가 모여 다복다복
나무를 키우고 풀꽃을 가꾼다
길이 모여 그늘을 부린 자리에
빈터끼리 손을 잡고 산을 높인다
숲에 빛이 가시기 시작하면
별이 눈을 떠 주인이 된다
몸에 등불을 켜든 반딧불이가
구석진 곳마다 빛을 뿌려가며
별빛에 소금을 더한다
백 년 전에 죽은 꽃들을 본다
천 년 전에 살던 꽃이다
눈 시린 걸음마 앞에서
별이 되어 눈을 밎춘다
빈터에 별들이 내려와 산다
숲 그늘 길-거림
풀잎 이슬에 몸 적시며 나는 지리산을 간다
숲 그늘길 따라가는
걸음 멈추지 못하는 자벌레다
빨리 갈 이유도 느리게 갈 이유도 얻지 못한다
힘에 맞는 걸음은 지치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 숲길에서
나무끼리 속삭이는 대화를 귀동냥하며
휘파람으로 대꾸를 보낸다든가
숲에서 무엇을 얻는다든가
무얼 찾고자 하지 않는다 다 삿되다
숲에서는 자신을 읽고 가면 그뿐
숲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
그늘만 밟고 가는 숲길
이슬에 몸 젖는 수풀 속에는
마련된 그늘이 기다리고 있어
꽃 곁에 한숨 자고 나면
지친 몸을 바꿀 수 있다
그때까지 숲길은 나를 기다릴까?
남명매-덕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종*을 마주한
산천재 매화를 보러 갔다
그늘에 남은 잔설에도
꽃이 나를 반겨준다
오백 년 전에도 나를 위해 피어 있었다
그때 내가 당도하지 못했을 뿐
우린 만날 인연을 오백 년 전부터 지녔다
꽃을 감상하던 남명 선생이 뒷짐을 지고
꽃이 품었다 보낸 미소를 읽고
뒤돌아 내게 힐끔 미소를 보냈다
나도 미소를 보낸다
남명 선생도 내 미소를 읽었을까?
가지를 흔들며 꽃잎이 떨어진다
천왕봉 쇠북종이 울어 가끔
잠든 마을 언 물소리를 깨우지만
들은 척도 않고 빠져나가는 물소리 끝에서
오백 년 등걸에 꽃이 핀다
*울지 않는 종: 남명의 시에서 천왕봉을 지칭한다.
*산천재 : 남명 조식 선생이 기거하던 집
정당매-단속사지
속세를 끊고 들어앉아 있어도
찾아가 얼굴 맞대는 길손이 있다
무엇을 묻고 싶었을까?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고 서 있는 견자
속살까지 젖어 드는 독경 소리에
지리산도 달빛을 암송한다
육백 년이 죽어 물소리로 떠나도
남은 뿌리가 남겨진 탑을 짊어지고
저문 경내를 밝힌다
아들아, 해 지거든
매화분에 물을 주거라*
*퇴계 이황의 당부
출판사 서평
산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체력만 믿고 쉽게 덤벼들지만 산은 체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지리산을 많이 다녔다고 자부하지만 아직도 지리산을 모른다. 부피의 산으로 따진다면 100분의 1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리산 종주를 몇 번 했다고 지리산을 다 아는 것처럼 횡설수설하는 이들을 볼 때 앞으로 더 많이 지리산을 왕래하면서 겸손을 더 배워야 할 것임을 넌지시 일러 주곤 한다.
창밖 눈이 터질 듯 핀 꽃을 보며
늙은 한 남자가 수음을 한다
바람이 그의 몸을 흔들어 말렸지만
병상의 아내를 대신해 나무가 매단 꽃이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바람을 탄다
양변기에 쏟아져 내리는 분홍빛 꽃잎,
잎마다 누구도 주워가지 않는다
누구나 꽃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벚나무가 사정해 쏟아 놓은 살빛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봄날이다
-「십 리 벚꽃-화계동천」 전문
내가 은퇴 후 거처를 지리산에 두지 않은 이유도 지리산에 대한 외경심 때문이다. 지리산의 품에 안기는 것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친한 척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나 아니라도 지리산을 사랑하는 이는 참으로 많다. 지리산이 가진 부피에 대하여 경외심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지리산을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지리산을 알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지리산과 친해지기 위해 지리산을 간다. 지리산을 어제도 갔고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나는 내 마음에 남은 지리산을 간다.
기본정보
ISBN | 9791188048885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2월 07일 |
쪽수 | 128쪽 |
크기 |
125 * 206
* 11
mm
/ 316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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