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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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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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작가정보

저자 이이화는 1936년 대구 비산동에서 태어나, 부친인 한학자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 선생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열여섯 살 무렵 집을 나와 부산·여수·광주 등을 떠돌다 여관 종업원 노릇을 하며 광주고를 졸업했다.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해 ‘문학청년’의 꿈을 키웠지만,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중퇴하고, 아이스케키·빈대약장수·술집웨이터·가정교사 등 20여 가지 직업을 거쳤다. 이십대 후반 무렵 본격적으로 역사학을 공부하겠다 결심하고, 동아일보사 출판부와 색인실 임시직을 거쳐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 서울대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고전과 역사를 연구했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때 참여한 뒤 연구소장이자 《역사비평》 편집인으로서 동학농민전쟁 등 민중·생활사 연구와 역사답사기행 등을 주도하며 역사 대중화에 나섰다. 이렇듯 독학으로 ‘역사학자’의 길을 개척하면서 ‘민중사·문화사ㆍ생활사’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일궈냈다. 특히 1995년부터 10년 동안 칩거하며 써낸 한국통사인 『한국사 이야기』(22권)는 필생의 역작으로 꼽힌다. 역사학자로서 저술뿐만 아니라 ‘역사바로잡기운동’이나 ‘과거사 청산’ 등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로잡는 역사운동가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맡았고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단체 조사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목차
- 머리글|진솔함과 자기 과시의 차이
1장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
가출
아버지 야산 이달 선생
역사 공부의 밑천이 된 한문을 배우다
2장 고학의 길
소설을 읽으며 꿈꾼 새로운 세상
고아원 생활
유일한 학력증서, 광주고 졸업장
짧은 대학생활
고단했던 밥벌이
3장 편집자에서 한국사 집필가로
번듯한 학사과정, 동아일보사 임시직 시절
학계에 데뷔하다
4장 대중 속으로 들어간 역사학
일반 독자들이 읽을 역사 글을 쓰다
서울대 규장각 시절
10·26과 서울의 봄
아치울에 정착하다
대중들과 함께 호흡한 역사기행·역사강좌
5장 역사문제연구소와 <역사비평>
신군부 독재에 맞선 '역사문제연구소' 발족
<역사비평>을 창간하다
6월 항쟁 이후의 변화들
6장 한국사의 흔적을 찾아서, 미개척지 중국 답사
한국사의 미개척지, 수교 전인 중국 답사
박완서·송우혜 선생과 함께한 두 번째 중국 답사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찾아나선 중국 서쪽 답사
실록 사건과 세 번째 중국 답사
7장 동학 농민군의 역사를 재조명하다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 '선봉장'맡아
동학군을 재조명한 실질적 주역, 향토사학자들
동학농민혁명 100돌 사업의 성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출범
8장 민족, 민중을 중심에 둔 첫 '한국사 이야기'
평생의 소원, 한국통사 집필
고대사와 고려사를 각 4권으로 출간하다
집필의 피로를 덜어준 문밖 나들이
10년 결실, 22권의 한국통사 완간
9장 고구려사 보전과 과거사 청산
고구려사 지키기와 동북공정
남북학자들이 함께한 고려사 학술토론
과거사 청산의 중심, 민간인 학살 문제
과거사 정리법 통과와 한계
10장 역사의 현장에서
통합민주당 공천 심사에 참여하다
촛불의 현장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다
압록강·두만강 국경지대 탐방
친일 문제와 국치 100년
에필로그|남기고 싶은 가족 이야기
연보
논문 및 저서
인명 찾아보기
책 속으로
내가 살아온 나의 얘기를 쓸 적에는 진솔하면서 과장 없이 담아내고 싶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그대로를 ‘리얼’하게 드러내려고 했다는 뜻이다. 내가 평소에 역사인물이 될 만한 인사의 자서전이나 저명인사들이 쓴 살아온 얘기를 읽으면서 자기가 한 일은 모두 정당한 것처럼 서술하거나, 아니면 어떤 사건을 두고는 자기 중심의 서술로 일관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거의 가식과 과장과 허위로 포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또 내가 살아온 시대가 너무나 험악했고 격동의 세월이어서 현장을 통해 내 삶과 사회를 연결하는 사회사적 접근을 시도해보려고도 했다. 내가 겪은 대로 사회의 밑바닥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다. 또 제 혼자만 잘살아보겠다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얘기만이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이나 더불어 나누는 훈훈한 정담도 고루 담아보려고 생각했다. 미시적(微視的) 접근을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얘기를 쓰면서 이게 쉽게 되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을 자기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냉철한 이성이나 지나친 객관성은 오히려 한 개인의 개성을 흐리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증언자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역량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늙은 나이에 새삼 떠올린 것은 남의 자서전을 읽고 비평하는 것과 내 자신이 쓰고서 내부 검열을 하는 데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pp.4~8
나는 8개월 만에 태어났다. 이를테면 팔삭둥이다. 태아 때부터 영양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게다가 미숙아로 세상 빛을 보았으니 정상적인 영아가 아니었다. 가슴과 팔다리는 배배 꼬여 있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태생만이 비정상이 아니라 왼손잡이에다 성장해서도 키는 160센티미터 채 못 되는데다 학교도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생각도 삐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태어날 때 나를 받았다는 둘째 형수는 그때 얘기만 나오면 “작고 삐삐 말랐어요”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아이를 보러 와서는 “그놈 눈 하나는 똘망똘망하네”라고들 했단다. 흔히 하는 귀엽다든지 잘생겼다든지 같은 덕담 대신에 눈만은 총명하다고 말한 것이다. p.24
이때 나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고루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자. 나도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학교를 다니자. 새로운 세상에 나가보자. 바로 이것이었다. ‘도통’을 했다고 소문난 야산 선생, 내 아버지도 아들의 이런 결심은 몰랐을 것이다. ……
나의 가출 동기는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나를 전혀 서자로 여기지 않고 아들 중의 하나로 여겼다. 그렇지만 내 어머니에게는 달랐다. 형님들은 작은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서모’라 불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굳이 그런 호칭을 써야 하는지 불만스러웠다.
또 언제부턴가 내가 거리에 나가거나 남의 집에 가면 “쟤가 머리는 아주 좋은데 서자래”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가정이나 사회에서 서자 차별 제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자 이런 내 태생에 대한 불만이 가슴속에 저몄다. 나는 그렇게 끝내 가출을 결행했다. pp.57~59
그 뒤 몇 해 동안 나는 출판부에 임시직원으로 나가 『동아연감』 출간 작업을 하고 봄여름의 공백 기간에는 을지로 입구에 있던 국립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한국학 또는 한국사 관련 책과 논문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동아일보사 조사부와 국립도서관의 책들은 나의 한국사 공부에 밑거름이 되었다. …… 나는 색인 작업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자 지식이 많은 덕분에 오자가 적었고 이해도 빠른 편이었다. 특히 《동아일보》 창간 직후인 1920년대의 갖가지 식민지 분위기와 사회 사정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1920년 초기 조선의 북방이나 만주 지역 기사에 ‘비적 출현해 경찰과 교전’이라는 기사가 나오면 항일 독립투쟁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총독부의 식민지정책만이 아니라 여러 사건 사고 기사를 통해 식민시대 사회 분위기와 근대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어느 대학의 사학과에서 이런 알찬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6년 남짓 되는 동아일보사 생활을 다시 더듬어보면, 기한부 임시직에서 계약직인 촉탁에 이르기까지, 내내 주류에 끼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를 전전한 처지였다. 또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도 술 마시고 떠들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득이 많았다. 요즈음도 나는 이 시절을 두고 "번듯한 학사과정을 마쳤다"고 말한다. pp.123~124
출판사 서평
당대의 역사가가 쓴, 너무나 진솔한 자서전
역사가가 쓴 자서전은 그리 많지 않다. 학계의 주류에 있던 이들이 회갑연이나 정년퇴임 등의 기념일에 맞춰 서둘러 출간하는 자기 중심적 서술로 일관한 책들이 넘쳐나긴 하지만, 오랜 집필 과정을 거친 진솔한 회고록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2010년 강만길 선생의 『역사가의 시간』이 출간되어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편 강만길 선생과 이이화 선생은 같은 진보학계의 진영에 있지만, 역사학자로서 성장한 내력은 판이하다. 강만길 선생은 기존의 보수적 역사학계의 반대편에서 최초로 분단 시대의 역사학을 주창하고, 좌익계열의 독립운동 활동을 우리 독립운동사에 포함시킴으로써 근현대사 연구의 큰 족적을 남겼지만, 선생 역시 기성학계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반면 이이화 선생은 고졸 학력에 제대로 된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다. 팔삭둥이 서자로 태어나 작은 키와 허약한 체질의 신체적 조건을 지닌 채, 전국의 고아원을 전전하며 공부의 꿈을 키웠다. 이이화 선생이 짊어진 삶의 조건은 대다수 국민들이 궁핍했던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 시절을 감안하더라도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주역의 대가 아버지 이달 선생에게 배운 한문 실력과 남다른 총기,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정으로 선생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역사가가 되었다. 당대의 역사가가 쓴 ‘자신의 역사’는 어떤 무늬를 빚을 것인가? 그는 ‘진솔함과 자기 과시의 차이’에서 긴장했다고 담담히 밝히지만, 이 책의 미덕은 단연 ‘진솔함’이다. 감추고 싶은 가족사, 남달리 혹독한 유년기 청년기를 거쳐온 신고의 세월을 선생은 진실하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때로는 철저하지 못했던 정직성이나 민주운동 과정에서 한 발 뒤에 서 소심히 방관했던 부끄러움도 이 자서전에 담아냈다.
가출 소년에서 민중의 역사가로
그는 가출 소년이었다. 신학문을 배우는 것은 일본놈이 되는 것이라는 부친의 엄격한 신념에 따라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한문만을 배웠다.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전쟁통에 고아원에 들어가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국의 고아원을 전전했다. 명문 광주고등학교에 들어가 ‘여관뽀이’ 생활을 하며, 생애 유일한 졸업장을 손에 쥐지만, ‘문학도’의 꿈을 안고 들어간 서라벌예술대학은 1년을 채 다니지 못한다. 그러고는 먹고살기 위한 십수 가지 직업을 거친다. 가짜로 서울대 배지를 달고 문제집 장사를 하기도 하고, 아이스케끼, 빈대약, 가루치약 장사, 보험사 외무원, 술집 웨이터, 급기야 매혈까지. 큰 장애물이었던 병역 문제가 해결되고, 역사가로서 출발하는 큰 계기를 마련해준 동아일보사 연감 작업 임시직이 된 것이 선생의 나이 서른한 살 때다. 인생의 승부처였다.
선생은 국립도서관과 동아일보사 조사부의 책을 훑으며 평생 한국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시 이이화가 동아일보사 조사부 책을 다 읽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부친에게 배운 한문 실력과 문학도로서의 글쓰기 능력, 그리고 본인이 체험한 ‘민중적 삶’이 결부된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창작과비평》《신동아》《뿌리깊은나무》《월간중앙》 등의 매체에 실리고, 독자들은 자신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역사 텍스트’에 열렬히 호응한다. 한편 척사위정과 북벌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담은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기성학계에서도 소장 역사학자로 인정을 받고,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위원, 규장각 고전 해제 집필, 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 등을 거치며 기존의 학제에서 배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만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었다.
전업 역사저술가의 롤 모델
선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생각이 삐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말하는데, 선생의 굴곡진 삶과 바로 그 ‘삐딱한 생각’은 남들과는 다르게 역사를 바라보는 이이화식 시선의 바탕이 된다. 1970년대 말 무렵부터 이미 영호남의 지역감정이나 파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한국의 파벌’이란 제목으로 한국사 속의 당파, 지벌, 문벌, 학벌 문제를 《월간중앙》에 연재해 인기를 얻었으며, 이미 알려진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던졌다. 폐륜적 폭군으로 폄하되었던 광해군을 새로이 조명했으며, 정여립ㆍ강홍립ㆍ정인홍 등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을 재평가하고, 전봉준ㆍ이필제 등의 동학지도자, 신돌석ㆍ장지필 등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인물들을 발굴했다. 역사 속의 잊혀진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하거나 특정 사건을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식의 역사 서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1990년대 이후임을 감안했을 때, 이이화 선생의 당시 작업은 명실공히 선구적이었다. 물론 역사 집필가로서 선생의 능력과 안목, 그리고 치열한 열정이 집대성된 작업은 10년간의 집필과정을 거쳐 원고지 2만7천 매에 새겨진 22권의 한국통사 『한국사 이야기』였다.
『한국사 이야기』라는 ‘역사를 쓰다’
한반도의 빙하기부터 거슬러 올라가 1945년 해방까지의 한국통사를 22권의 책으로 한 개인이 집필한 것은 전대미문의 작업이었다. 집필 기간과 분량만이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역사에서의 평등’이라는 자신만의 화두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왕조사ㆍ정치사ㆍ사건사 위주의 역사 서술이 아닌 역사의 또 다른 주인으로서 일반 백성, 노비, 백정, 여성 등 민중들의 삶과 생활사를 포괄한 ‘완전히 새로운 한국사’를 펴냈다. 서술 방식도 논문식이 아닌, 일반인의 눈높이를 염두에 둔 이야기체를 지향했다. 이러한 역사 서술은, 누구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길 위의 역사가로서의 삶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문헌에 파묻히지 않고, 전국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기록을 발굴하거나 현장의 목소리를 채록했다. 선생이 오랫동안 관여하고 활동한 역사문제연구소의 중요한 행동과제가 ‘현장 답사’였던 것이나, 자서전 속에 담긴 많은 내용이 답사나 역사 기행, 역사 강좌 등에 할애된 까닭도 그와 맥락을 같이한다.
역사가의 시대정신
선생이 인생의 후반기, 역사 집필뿐만 아니라 역사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게 된 내력도 그와 이어진다. 선생만의 독보적 영역을 이룬 주전공 분야가 ‘동학농민전쟁’ 연구라 할 수 있는데, 선생은 관련 저서의 집필에 그치지 않고 ‘동학농민운동사의 재조명’이라는 사회운동으로 확장한다. 이는 선생이 뒤에 고구려사 보전 운동, 과거사 정리 운동, 친일청산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행보와도 연결된다.
자신의 생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이 지나온 ‘사회’와 ‘세계’를 돌아보는 것이며, 그 ‘세계와 맞섰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리라.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성찰과 독서의 감흥이 그다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신의 생을 들여다보는 역사가의 렌즈가 자서전의 흔한 맹점이라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자기 긍정의 흔적을 공들여 걷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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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그의 인생 역정은 한 편의 소설이다. 그는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랐다. 공식 학력은 고졸이다. 서러움이 얽혀 있는 생래적 소수자로 태어난 그는 열여섯 살 무렵 한문 공부만 시키던 아버지 곁을 떠나 시와 소설 등 많은 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새로운 세계를 동경한다. 그 문학 체험을 통해 그는 소수자냐 아니냐가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란 고뇌하고, 성취하고, 열망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기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평생의 영감을 얻었다. 이 자서전은 그런 바탕 위에서 씌어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많은 치부를 거침없이 공개하겠는가. 또 하나, 그의 글 속에는 그가 처했던 어려움, 곤궁했던 처지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누구 탓으로 돌리는 흔적을 볼 수 없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의 몰염치가 만연한 세태 속에서, 그가 보여준 자기 성찰의 태도는 그 자체가 미덕이다. 십대 시절부터 이이화와 교유한 나는 그가 고3때 쓴 「까뮈와 창조적 윤리」라는 글 속에 담긴 인간 존중 의식을 기억한다. 나아가 역사학자이자 역사운동가로서 그가 장년기 이후 쉼 없이 벌이고 있는 역사 운동을 보면 그 모두가 인권과 평화와 연관된 것이다. 이 자서전을 꿰뚫고 있는 주제가 자유와 평등, 인권과 평화임을 감안할 때, 그의 인생은 삶과 글이 일치했다. 존경할 따름이다. 일독을 감히 권한다.
- 박재승 (변호사, 전 대한변협회장)
선생의 글에는 번뜩이는 섬광이 있다. 다른 학자들이 못 보는 것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에서는 노숙자 인생에서 우러나온 ‘길 위의 역사가’만이 뿜어낼 수 있는 체취가 느껴진다. 걷고 또 걸으면서 현장에서 체득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이미 유년기, 청년기에 남한 각지에서 수십 가지 떠돌이 직업을 전전하면서 밑바닥 서민과 고통을 함께 나눴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 상황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 책에는 파란에 찬 인생 곳곳에 흐르는 진한 인간미와 더불어 저자가 왜 ‘민중의 역사가’가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사연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또한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고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에 외롭게 뛰어다니는 활동가로서의 모습도 담겨 있다. 대부분의 회고록이 가식과 허위투성이인 데 반해, 이 책은 자신의 숨기고 싶은 과거사를 굴곡 심했던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 포개어 담담한 이야기체로 풀어내고 있다. 너무나 진솔하다.
- 서중석 (역사학자,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이화 선생님은 역사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쓰면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기록자이면서 창조자인 것입니다. 파란만장하고 험악한 삶을 살아오면서도 흔들림 없이 진실과 정의를 추구해 왔습니다. 재야 사학자로서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역사학의 장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워 나가는 운동가로서 제주 4ㆍ3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 앞장섰고, 한국전쟁시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온 힘을 쏟고 계신 평화운동가입니다. 선생님의 이 책은 그러한 역사를 말해줄 귀중한 자료입니다.
- 강창일 (국회의원, 역사학 교수)
<책속으로 추가>
1975년 한국사연구회에서 주제발표를 하면서부터 얼치기 연구자였던 나는 한국사학계의 중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 나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 뒤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이로 해서 국외자의 위치에서 역사학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신문이나 월간 잡지에 한국사 관련 글을 쓰며 집필가로 이름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두어 가지 다짐을 했다. 무엇보다 한국사 관련 글만 쓰기로 결심했다. 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려는 뜻이었다. 또 역사 대중화를 위해서 논문만이 아니라 일반인 대상의 한국사 관련 교양서를 써보기로 했다. 당시 이른바 순수학문을 한다고 표방한 인사들은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을 ‘잡문’이라 해서 쓰지 않는 것을 품위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교수’ 같은 전문 직업을 갖지 않은 ‘프리랜서’로서 원고료나 인세로 살아가야만 했으니 대중을 위한 글을 쓰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었다. pp.139~140
이들 저술에는 발굴의 성격이 강한 주제와 내용이 많았다. 이미 알려진 역사 사건이라도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특히 지리산이나 구월산 일대에서 활동한 변혁세력의 활동을 새롭게 조명했다. 또 인물사에서는 흔히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들을 재평가했는데, 광해군·강홍립·정여립·정인홍 등 임금이나 벼슬아치들, 홍길동·임꺽정·장길산 등 의적 또는 이필제·전봉준 등 동학세력들, 신돌석·장지필 등 평민 의병장이나 백정 인권운동을 벌인 기층민중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한국사에 ‘아웃사이더’로 다루어져 왔었다. p.185
1986년은 내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의 탄생이었고 또 하나는 내 딸 응소가 ‘쉰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역문연이 나의 학문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됐을뿐더러 나를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 인물로 만들어주었다면, 늦둥이 딸은 가정생활에 재미와 활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해 1월 원경 스님이 주지로 있는 경기도 안성 청룡사에서 1박2일로 첫 준비모임을 했다. 이때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우리는 두 가지 합의를 보았다. 첫째는, 정치가나 민주화 운동가보다는 역사학 전공자들을 조직의 선두에 두자는 것, 둘째는, 연구소 형식을 빌려서 한국사를 중심에 두고 인접 분야인 각 인문사회과학을 망라하는 조직을 만들되 이름은 ‘역사문제연구소’로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역문연의 설립 목적은 한마디로 표현해 한국 근현대의 여러 문제를 공동작업을 통해 연구하고 이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 바로 그것이었다. pp.191~192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봉오동전투 현장, 하지만 전투가 벌어졌던 골짜기는 당시 저수지로 바뀌어 ‘봉오동 반일유적지’라는 팻말만 서 있었다. 1920년대 초 홍범도 부대는 국경지대에서 무장활동으로 일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에 남양 주둔 일본군 국경수비대가 추격에 나섰다. 그해 6월 6일, 독립군 연합부대로 편성해 700여 명 규모를 갖추었던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을 골짜기로 유인해 사면 총공격으로 전사 150명, 총상 200여 명에, 소총 160정, 기관총 3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독립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항일독립전쟁 과정에서 최초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 봉오동전투를 두고 연변의 독립운동 연구가들은 정작 홍범도 부대가 전투의 중심부에 있었고 김좌진 부대는 2선에서 도왔다고들 했다. 연변 일대에서는 홍범도를 봉오동전투의 영웅으로 받들고 김좌진은 보조역할을 한 것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남쪽의 교과서 등에서 청산리전투만 부각시킨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이 전투의 중간지휘관이었던 철기 이범석(훗날 국무총리)이 김좌진과 자신이 모든 걸 지휘했다고 주장하며 홍범도를 완전히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엉터리 역사 기록을 현장 답사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한 나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pp.255~258
백추위에서는 우선 ‘동학’ 관련 역사 용어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많이 쓰는 용어로는 동학란을 비롯해 동학혁명·동학농민전쟁 또는 혁명·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했다. 동학란은 왕조 시대의 용어로, 민란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를테면 ‘역적질’을 했다는 것이다. 동학혁명은 천도교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동학이 주도해서 혁명을 추구했다는 의미다. 박정희 군사정권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썼다. 동학농민전쟁은 농민이 주체세력이었지만 동학이란 조직 또는 평등사상을 포용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과 농민이 결합해서 혁명을 추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썼고 남쪽의 진보학계에서도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곧 그 운동 주체는 생산대중인 농민이란 것, 동학은 종교적 외피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종교의 존재를 배제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답습한 것이다. 먼저 이런 여러 용어를 두고, 역사학자·정치학자·사회학자 들을 모아 1990년 6월 토론회를 열었다.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니 결론이 날 턱이 없었다. 다양한 학문 경향을 추구하는 풍토에서는 결론이 나지 않아도 탈 잡을 것이 못된다. 그래서 한국역사연구회의 회원인 소장학자들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바꾸어 썼다. 나는 동학은 외피보다 인간존중사상과 봉기과정에서 나타난 조직 동원 등의 사실을 들어 일단 ‘동학농민전쟁’으로 쓰기로 했고, 이 용어를 백추위에 반영했다. pp.290~291
조선 중기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므로 각기 ‘조-일 전쟁’과 ‘조-청 전쟁’으로 불러야 국제교류사의 관점에서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의 경우,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간지의 연대를 쓰고 일본 민족을 얕잡아보는 ‘왜(倭)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을 담은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병자호란의 호란(胡亂)이란 용어의 경우도 ‘북방 오랑캐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교과서에 이런 용어를 쓰게 되면 설명이 길어지고 민족 차별관을 유발하게 된다. 다만 주체와 전쟁이란 용어를 써서 그 실상을 알리면 된다는 뜻이다. 그사이에 대두한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의 현실 대응을 두고 타협적인 주화파의 정당성을 부각하려 했다. 주자학으로 무장한 척화파는 중화주의에 매몰되어 민중의 고통을 외면했으며 실체가 없는 명분론에 따른 ‘존명배청(尊明排淸)’으로 일관해서 국제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했다.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를 벗어나 다른 민족을 인정하면서 교류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따라서 송시열 계통의 노론 세력이 주화파를 마치 매국노처럼 다루는 행태를 경계하려 한 것이다.
조선 후기는 역동적 사회를 이루어냈다고 보았다. 물이 고여서 썩은 게 아니라 줄기차게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바탕을 둔 실학의 추구는 현실을 개혁하려는 논리였으며, 노비 등 민중의 저항과 중인-서민문화의 대두는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내재적 발전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 이런 관점에서 민중사·생활사 기술에 열중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전개된 통과의례와 놀이문화와 고유의 풍속과 독자적인 문화 창달을 부각하려 했다. 그래서 서민문학의 유행과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그리고 판소리와 가면극의 등장이 민중에 토대를 두고 유교의 엄숙주의 또는 지배문화의 근엄성을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실학과는 달리 중세와 근대의 중간 지대에서 태생한 민중정서 분출의 한 모습이었다. pp.372~373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가 여전히 해묵은 이데올로기 문제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근래 들어 과거사 청산 문제로 사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제고하고 민주 가치를 존중하며 인권사회로 가는 도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념 갈등과 과거사 청산의 중심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 문제가 놓여 있다. 그 피해자들은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숨죽이며 살아왔으며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또 군이나 경찰에 들어가 출세할 수도 없었으며 외국 유학이나 여행을 갈 적에도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극한의 인권유린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의 해결에는 두 가지 전제, 곧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유족들에게 적용되는 연좌법의 철폐가 이뤄져야 했다. p.410
기본정보
ISBN | 9788984314825 |
---|---|
발행(출시)일자 | 2011년 07월 18일 |
쪽수 | 523쪽 |
크기 |
152 * 214
* 35
mm
/ 733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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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지도자들중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아침에 김문수가 119에 전화한 것을 녹취한 내용을 듣고 이런 지도자들이 우리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공직자라는 사실에 너무도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119에 전화해서 한 나라의 공직에 있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나 경기도 지도사인데 ... 하며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짜 근무자의 이름을 묻더니 대답을 하지 않자 화를 내는 행위를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한단 말인가. 이것이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실체가 아닐까.... 자서전이나 박사논문 또한 마찬가지이다. 저명한 박사들이 표절로 인한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자신의 저술을 대필하거나 자서전을 돈을 주고 사는 부류가 우리 사회에 널려 있는 지도자의 한 모습인 것이다. 이러 시국에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역사를 쓰고 만들어 가는 아름답고 양심적인 지도자가 있다. 이이화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바로 그런 부분들 때문에 자꾸 눈시울이 붉어지다가 하길 여러번 , 책을 다 읽고야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이이화 선생님의 한국사를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역사학자로서 존경해 마지 않았던 분이라 자서전이 출간되었을 때 무척 들뜬 기분으로 구매를 하려고 했는데 참 희안한 것이 이 책이 내 인연이었는지 어떠한 생각지 못한 인연으로 책이 내게 왔다. (다 읽고나서 그 사실에 또한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가가 쓴 자서전은 많지 않을 뿐더러 대부분의 자서전들이 자기 중심적인 서술인 것에 반해 이이화 선생님의 자서전은 역사학자인 이이화선생님의 사적인 부분과 함께 한 격동하는 역사 한가운데에서의 개인이라는 것으로 다른 자서전과 집필의 차이를 느낀다.
스스로를 태생부터 정상적이지 않았고 신체조건도 좋지 않았으며 왼손잡이에다 유난스레 병에 시달렸고, 다른 동무들과 어울리지 않고 산속에서 지내며 여느 청소년과는 다른 성장과정을 겪었음을 고백하는 이이화선생님은 가사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야산 선생으로부터 가출하여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스스로 검정고시를 치르고 고등학교 입한한 것이 학력의 전부가 되었다. 아버지 야산 선생은 당시 시대의 혼란함과 동시에 신구의 학이 상충되는 과정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를 일본놈이 되는 것이라는 이유로 산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한문을 가르치는 업을 이루는 과정에 아들들 또한 자연적으로 한문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학교를 다니고 싶던 이이화 선생님은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가출하여 부모가 다 살아있음에도 고아원에 의탁하여 학교를 다니게 된다. 일제시기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과 4.19혁명의 시기를 거치면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저자는 방황과 배회를 거듭하다 자살의 유혹과 겪고 이집 저집 친구집을 찾아다니며 생활하던 중 성공하는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드릴 꿈으로 고시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5.16쿠데타를 겪은 후 병역기피자가 되어 결국 시험도 취직도 못하고 몸을 피해다니는 처지가 된다. 늙으신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해야 되는 상황이 되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만 빈곤의 뿌리는 뽑아지지 않은 채 급기야는 빈대약을 뿌리다가 자살행위로 오인 받아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고아시절 여관에서 심부름꾼을 하면서 학교를 다닌 전력이 있는지라 궁핍함을 면하기 위해 시작한 웨이터 생활 또한 결국 빚만 떠앉고 그만두었지만 이이화선생님은 이 때 경험한 밑바닥인생의 경험을 온몸으로 느낀 것을 훗날 사회사의 체험적 자료들이 되었다고 한다.
고졸 학력에 제대로 된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이지만 주역의 대가 아버지 이달 선생에게 배운 한문은 이이화 선생님의 생애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이화 선생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서 깨닫는 부분이 많았는데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닌 정신적인 유산을 자식에게 남겨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이화선생님 개인으로서는 자식에게 엄하기만 했지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지 않는 아버지 야달 선생에게 마음에 한이 있을지는 몰라도 야달 선생이 가르쳐준 한문으로 인해 역사를 바라보는 탁월한 시각과 한문해석에 밝은 것의 바탕은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소중한 유산이 있었기에 굴곡진 삶속에서도 남들과는 차별화된 시각을 가지고 역사의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진정성과 역사의 흐름 가운데 아웃사이더로 머물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전 삶의 과정을 통하여 한국사의 아웃사이더 인물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는 역사운동을 벌이게 되는 힘이 되어 준 것이다. 이런 역사운동의 작업은 능력과 안목, 치열한 열정이 집대성되어 10년간의 집필과정을 거쳐 22권의 한국통사 [한국사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한반도의 빙하기부터 거슬러 올라가 1945년 해방까지의 한국통사를 22권의 책으로 집필한 것이다 . 한국사를 한 개인이 집필한 것은 전대미문의 작업이었다.
1990년 들어 중국 사회과학원에서는 일부 학자를 동원해 일부 학자를 동원해 고구려 역사에 대해 '일사양용(一史兩用)'의 이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한국사에 대한 몇가지 의문점이라는 글을 다음duam)에서 본 기억이 있다. 김정일 사망이후 통일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북한을 흡수하기 위한 오랜 작업을 해오고 있다는 증명으로서 또 하나 대두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 동북공정이다.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말해 소수민족 통일국가론에 따라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정권으로 주장해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지금 그 동북공정의 작업으로 인하여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 하는 수작의 글들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에 앞서 그들은 서북공정, 서남공정을 계획하여 현재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 공정은 중앙아시아 국가와 동남아시아 국가를 고구려와 같이 모두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이는 바로 중화사상의 부활이다. 고구려 문제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정부는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를 발족하여 이이화 선생님을 이사장으로 추대하였지만 이이화선생님은 고구려사를 위해 다른 행동적인 측면에서의 운동을 위해 2008년 이사장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고구려사에 관한 작업은 진척을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이이화선생님은 세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 이명박 정부가 동북공정이나 고구려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다.
둘째, 보수정당의 몇몇 인사들이 방해 때문이다.
셋째, 서울 광진구청이 경쟁적으로 사업을 벌여 초점이 흐려졌다.
우리나라의 현대는 역사상 아직도 풀지 못한 과제들을 떠안고 있다. 동학혁명에 관한 재조명과 역사를 학습으로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늘 답사로 땅의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의 발걸음 속에 사회지도층의 몰염치한 행위가 만연하고 있는 세태속에서 역사를 바로 세워 나가는 운동가로서 제주 4?3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 앞장섰고, 한국전쟁시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데 온 힘을 쏟고 계신 평화운동가로서 그분의 역사운동속에 깊이 담겨있는 인권과 평화에 관한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길 바라며 민중의 역사가라 불리우는 그분의 역사속 왜곡된 진실을 찾는 작업을 통하여 우리 세대에 당면한 문제인 동북공정 앞에서 우리세대에 꼭 풀어야할 역사적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진실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귀기울여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숙지해야할 과제이며 아울러 이이화 선생님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