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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 국내도서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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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덕 · 바히네 · 2025.02.28
    10%16,200정가18,000원|1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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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라 삼한일통의식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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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진 · 여유당 · 2024.11.30
    45,000|1,350p

    신라가 7세기 전쟁을 통해 삼국을 통일했다는 인식은 현재 학계의 통설이자 사회적 상식이다. 백제를 병합한 것일 뿐이라는 일각의 의견이 있지만, 교과서와 대중 매체를 통해 ‘통일신라’는 확고한 역사적 준거가 되어 있디. 다만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탓에 ‘불완전’하다는 단서가 따라붙는다. 이 불완전함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삼한일통의식이다. 신라는 삼국이 모두 삼한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서 이 동류의식에 기반하여 삼국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전쟁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도 삼국을 아우르는 통일로 인식하며 체제 운영의 기반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이에 신라의 통일은 우리 민족이 형성되는 계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상식이 학문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묻는다. 정말 7세기 신라는 삼한일통의식을 표방했는지 실증적으로 검증하여 해당 자료들이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7세기 역사를 설명할 수 없음을 밝혔다. 가장 중요한 청주운천동비는 10세기 고려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김유신 관련 문헌 자료는 후대에 가공된 설화임을 입증하였다. 나아가 실제 자료를 분석하여 삼한일통의식이 9세기 체제 분열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이념으로 수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명제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화두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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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김부식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5.02.28
    10%27,000정가30,000원|1,500p

    ≪삼국사기≫의 전체적인 체제는 그대로 살리면서,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부분을 발췌했다.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 유교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논했다. 때문에 김부식의 역사학은 한국 중세 사학의 기초를 정립했다는 사학사적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있을뿐더러 원전을 읽는 묘미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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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김부식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5.02.28
    10%13,320정가14,800원|140p

    ≪삼국사기≫의 전체적인 체제는 그대로 살리면서,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부분을 발췌했다.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 유교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논했다. 때문에 김부식의 역사학은 한국 중세 사학의 기초를 정립했다는 사학사적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있을뿐더러 원전을 읽는 묘미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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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비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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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 도명 · 북랩 · 2025.02.11
    10%18,000정가20,000원|1,000p

    한민족의 시간과 공간을 지우려 했던 일제의 역사 왜곡 사문 도명이 그 진실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한·중·일 고대 삼국의 역사를 바로잡을 게임체인져! 비문에 감춰진 비밀을 파헤쳐 일제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고대사의 진실을 복원하다! 고구려에서 가야까지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밝힌고구려에서 밝힌 통천 도명의 역사 대탐사통천 대탐사 이 책은 고구려 19대 왕인 정복 군주 광개토태왕의 비문(碑文)에서 시작되는 역사의 해석에 관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 종교인인 작가는 가야의 심장부인 김해에 살면서 가야와 가야불교의 역사를 접하게 되었다. 가야를 들여다보다가 임나(任那) 문제를 만나고, 임나 기록과 관련 있는 광개토태왕릉비까지 살펴보게 되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는 고구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지만, 그 비문의 해석에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일제는 한반도를 정복하려는 방편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었으며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 비문을 변조하였다. 광개토태왕릉비와 진경대사탑비는 모두 일본 제국주의가 자행한 역사 왜곡의 희생물이다. 또 두 비문에는 임나일본부에서 말하는 임나의 위치가 어디이며,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알게 하는 단서가 숨어 있다. 작가는 일제가 어떤 방법으로 역사 왜곡을 해 왔는지 역사 자료와 비문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풀어냄과 동시에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과 풍부한 사진으로 그간의 논쟁을 설득력 있게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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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천년 왕국 신라 역사의 재발견(한영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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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전 · 상생출판 · 2025.01.13
    10%20,700정가23,000원|1,150p

    이 책은 한민족 9천 년 역사 왜곡의 축소판인 천년 왕국 신라 역사의 근원을 바로 세우면서 동북아와 인류 창세 역사의 원형문화 정신이지만 한국 사학계의 대다수가 그토록 한 목소리로 철저히 부정하고 있는 『환단고기』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담겨 있는 한국 역사문화의 원형정신을 중심으로 2016년 6월 12일 경주화백 컨벤션센터에서 진행한 환단고기 북 콘서트 강연 내용을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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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송희복 · 글과마음 · 2024.12.27
    10%19,800정가22,000원|1,100p

    신라는 한국인의 선험적 고향과 같은 시공간이다. 한국인의 유전적 원형질 및 한국어의 본래적 기원도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 신라는 역사의 잘잘못이나 가치의 잣대가 담겨있는 오래된 기표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고구려와 대조영의 열풍과 함께, 신라를 폄훼하는 생각들이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고대에 존재했던 공동체들, 예컨대 고조선과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는 우리의 다섯 손가락으로 비유할 수가 있다. 깨물어서 아프지 아니한 손가락이 없다. 고구려와 백제가 가치가 있는 만큼 신라도 우리에게는 소중하다. 21세기 초의 반(反)신라 정서는 정치적인 배경이 깔려 있어서 더 문제적이라고 본다. 이 책은 신라를 둘러싼 역사의 쟁점과 문학 속의 신라정신 등을 중심으로 엮은 학술 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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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이성제 외 · 동북아역사재단 · 2024.11.29
    10%27,000정가30,000원|1,500p

    고구려사 연구성과와 방법론을 담은 지침서 고구려사는 한국고대사에서 지난 10년간 가장 큰 변화상을 보였던 분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를 적극 활용하여 고구려사 연구의 방향과 방법론이 새롭게 모색되었으며, 정치사와 대외관계사를 중심으로 연구주제가 세분화되고 다양해지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고고학에서는 북한의 연구성과에 기초하여 개설적인 정리를 시도하던 경향에서 벗어나, 중국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고자료가 소개되고 임진강 이남의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가 늘어나면서 고분벽화·고분·토기 등 여러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성과물이 나오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고구려통사』 발간은 이러한 고구려사 연구성과를 충실하게 정리하여 학계와 일반에게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에 막 입문한 이들에게는 고구려사 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고구려의 새로운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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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동북아역사재단 한중연구소 · 동북아역사재단 · 2024.12.16
    10%25,200정가28,000원|1,400p

    고구려사 연구성과와 방법론을 담은 지침서 고구려사는 한국고대사에서 지난 10년간 가장 큰 변화상을 보였던 분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사를 적극 활용하여 고구려사 연구의 방향과 방법론이 새롭게 모색되었으며, 정치사와 대외관계사를 중심으로 연구주제가 세분화되고 다양해지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고고학에서는 북한의 연구성과에 기초하여 개설적인 정리를 시도하던 경향에서 벗어나, 중국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고자료가 소개되고 임진강 이남의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가 늘어나면서 고분벽화·고분·토기 등 여러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성과물이 나오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고구려통사』 발간은 이러한 고구려사 연구성과를 충실하게 정리하여 학계와 일반에게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에 막 입문한 이들에게는 고구려사 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고구려의 새로운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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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한성백제박물관 · 서울책방 · 2024.11.07
    10%18,000정가20,000원|1,000p

    2024 백제문화특별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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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 2024.12.10
    10%270,000정가300,000원|15,000p

    진주목(晉州牧)은 삼국시대의 거열성(居列城)에서 기원한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 9주 중 하나인 강주(康州)의 주치(州治)가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주치로서의 강주는 영현(領縣) 두 곳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는 진주목이 되었으며, 9개의 속군현(屬郡縣)을 관할하는 대읍으로 편성되었다. 진주목은 경상도의 계수관(界首官) 세 곳 중 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진주는 조선 건국 직후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는 진주를 포함하여 목이 단 세 곳밖에 없었으므로 진주의 지역적 중요성은 높게 평가되었다. 진주목에는 목사(牧使)가 임명되었으며, 초기에는 판관(判官)과 교수(敎授) 등이 함께 파견되었으나, 후기에는 두 직책이 모두 폐지되었다. 진주에는 1603년(선조 36) 이래로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이 위치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진주목은 진주군이 되어 23부의 하나인 진주부(晉州府)의 치소로 설정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진주군은 경상남도의 관찰사영(觀察使營)이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의 읍치는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 중심 시가지에 위치한 진주성과 그 인근 지역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진주목은 삼국시대의 거열성 혹은 거타(居陀)에서 기원한다. 662년(신라 문무왕 2)에 신라가 차지하여 거타주(居陀州)를 두었다가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청주총관(菁州摠管)을 설치하였다. 경덕왕 때 강주(康州)로 개칭하였으며, 혜공왕 때 다시 청주(菁州)가 되었다가 이후 강주로 환원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강주라 부르다가 983년(고려 성종 2)에 12목을 설치할 때 처음으로 진주라 하고 목을 두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12주 절도사 중 하나가 되어 진주 정해군(定海軍)이라 하였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다시 진주목이 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로 승격하였으나, 1402년에 다시 진주목으로 삼았다. 조직 및 역할 진주목은 신라 경덕왕 때 강주라 불렸으며, 신라 9주 중 하나인 강주의 주치가 위치한 곳으로 중시되었다. 강주에는 주의 장관인 도독(都督)이 파견되었다. 한편 강주는 가수현(嘉樹縣: 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일대)과 굴촌현(屈村縣) 두 곳의 영현을 거느렸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강주는 진주로 개칭되고 진주목으로 중시되었다. 9개의 속군현을 거느렸으며, 경주 및 상주와 함께 경상도의 세 곳 계수관 중 한 곳으로서 높은 위상을 지녔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진주목으로 편제되었으며, 목사가 파견되는 등 지역 중심지로서 진주목의 역할과 비중은 여전히 중시되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 목사가 임명된 고을은 진주와 상주, 성주(星州) 단 세 곳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진주의 중요성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진주에는 목사가 근무하는 외관청(外官廳)과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진주목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의 영역은 기존 고려시대의 진주 직속 영역 외에 고려시대의 반성현(班城縣: 현 경상남도 진주시 반성면 일원), 영선현(永善縣: 현 경상남도 고성군 영현면 일원), 악양현(岳陽縣: 현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일원) 3개 속현의 영역을 합병하였으며, 화개부곡(花開部曲: 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일원)과 살천부곡(薩川部曲: 현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일원)의 영역 역시 진주에 완전 합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정3품의 목사와 종5품의 판관, 종6품의 교수가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3품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이 목사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270명, 인리(人吏) 73명, 지인(知印) 23명, 사령(使令) 42명, 군뢰(軍牢) 14명, 관노(官奴) 60명, 관비(官婢) 58명이 편성되었다. 즉 판관과 교수는 이때 이미 폐지되었다. 19세기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정3품의 목사가 임명되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판관과 교수는 폐지된 것으로 나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진주의 호수가 1,628호, 인구는 5,906명으로 기록되었다. 『여지도서』에는 1759년(영조 35)에 진주목의 호수가 13,966호, 인구는 65,098명으로, 그중 남자가 28,548명이고, 여자가 36,550명이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진주에 5개의 면과 72개의 리가 기재되었는데, 5개의 면은 동면·남면·북면 각 한 곳과 서면 두 곳으로 사실상 방위 면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방리(坊里)의 숫자가 69개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의 영역이 현재의 경상남도 진주시는 물론 산청군과 하동군·사천시·고성군·남해군 등의 일부 지역까지 포괄할 정도로 넓었으므로, 『호구총수』의 리와 『여지도서』의 방리는 사실상 타 지역의 면과 동일한 범주로 이해할 수 있다. 『호구총수』에 따르면 진주목의 호수는 15,028호, 인구는 69,495명으로, 남자는 33,498명, 여자는 35,997명이었다. 1910년(순종 3)의 조사 내용인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따르면 진주의 호수는 18,832호이고, 인구는 90,548명으로, 그중 남자가 46,459명, 여자가 44,089명이었다. 조선시대에 진주목의 읍치와 관아는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일대에 위치하였다. 변천 창원(昌原)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된 까닭에 1603년(선조 36)에 진주로 옮겼으며(『선조실록』 36년 5월 2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와 진주목사를 겸하게 하였다. 경상우병영은 이후에도 진주에 계속 위치하였으나, 1635년(인조 13)에 진주와 병영(兵營)을 나누어 다시 별도로 진주목사를 두었다(『인조실록』 13년 7월 11일). 1702년(숙종 28)에는 진주의 영역이던 악양(岳陽), 화개(花開), 진답(陳畓), 적량(赤良) 4개 지역을 하동에 이속시켰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진주목은 진주군이 되어 진주관찰사부 즉 진주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1896년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진주군은 경상남도 관할하의 1등군으로 편제되었고, 경상남도관찰사영의 소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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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한국학자료원 편집부 · 한국학자료원 · 2024.11.30
    10%180,000정가200,000원|10,000p

    **삼국사기 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는 한국 역사와 지리 정보를 담은 두 권의 주요 역사서입니다. 이들 각각의 내용과 의의를 소개합니다. **삼국사기 지리지**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시기(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 중 "지리지"는 삼국의 지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부분으로, 각 나라의 주요 산천, 도로, 군현(郡縣)과 지명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리지는 삼국의 정치·행정 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고대 한반도의 지리적 환경과 지역사회 구조를 탐구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특히 고대 지명이 현재 지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각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파악하는 데 활용됩니다. **고려사 지리지** *고려사*는 조선 초기 문신들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고려 왕조의 공식 역사서(1451년 완성)로, 고려의 전반적인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중 "지리지"는 고려 왕조의 행정구역, 주요 지형, 자연환경, 교통로, 그리고 각 지역의 특산물과 경제적 중요성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고려사 지리지는 고려 시대의 지방 행정 체계와 당시의 자연환경 및 지역경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조선 시대 행정구역의 정비와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의의** 이 두 책의 지리지는 단순한 지역 정보의 나열을 넘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맥락을 반영하며, 역사 연구와 문화유산 이해의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리적 역사를 탐구하거나 고대와 중세 한국의 행정체계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귀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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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고대 동아시아의 이주와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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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준 · 역사비평사 · 2024.11.20
    10%27,000정가30,000원|1,500p

    4세기 초·중반 이래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들어온 다수의 외래 이주민이 남긴 많은 중국 계통의 고분들에는 적지 않은 벽화와 문자 자료들이 남겨져 있기에 그들의 독특한 사회상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역비한국학연구총서 44번째로 기획 편찬된 『고대 동아시아의 이주와 고구려』는 4세기 초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외래 전통의 독특한 장의(葬儀) 전통 및 이와 관련된 국가의 ‘이주’ 정책, 그리고 현지에 정착하여 자체적인 사회상을 구현해갔던 이주집단의 삶에 주목하였다. 민족국가의 틀과 일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거시적 공간에서 고구려를 이해한다 4세기 초반 이래 낙랑·대방군 고지(2군 고지, 현재의 황해도·평안도 일대)에 외래 이주민 관련 고분들이 다수 나타나게 된 배경은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4~5세기에 화북 동북부에서 요서-요동-고구려로 이어지는 공간은 인적 유동(流動)이 이루어지는 통로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체가 공동의 이해관계를 놓고 상호 경쟁 및 연합을 이루기도 하는 지역적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정치적 격변과 혼란 속에서 중국 왕조의 변경에 있던 군현들이 차례로 소멸하는 과정, 그리고 1세기 가까이 지속된 거대한 유이민 파동과 이를 두고 화북의 주요 세력들이 이주민 확보를 위해 경쟁을 벌였던 현상 등은 동북부의 고구려에도 일정한 정책적 대응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다문화 이해공동체였다. 고구려라는 영역과 경계 내에서 정치·제도적 발전상에만 주목한다면 결코 고구려의 다원적 국가상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일국사적 관점과 국가의 성장, 지배체제 중심의 연구 시각에 갇혀 있던 고대의 다채로운 자료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4~5세기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넓은 영역과 그 내부의 다양한 종족들을 구성원으로 삼았던 고구려가 화북의 정치적 변동과 추이를 긴밀하게 파악하는 가운데 내부의 정책을 조율하고 적용했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고분 속 벽화와 묵서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주민 집단의 존재 양상과 주민 구성 4세기 초반 서진(西晉) 왕조의 붕괴와 동시에 화북 일대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많은 유이민이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화북의 이주민을 자국에 유치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에도 화북에서 유입되는 이주민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수용하는 데는 고구려 정권의 의도도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고구려가 이 이주민들을 2군 고지의 곳곳에 안치했다고 본다. 2군 고지는 서진 정권의 붕괴로 인해 중앙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사실상 소멸 단계를 밟고 있었다. 고구려는 바로 그곳에 생산 기반과 수취체제를 복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주민들의 노동력을 적극 활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2군 고지 내 중국계 망명인들의 고분에는 묘주의 공적 사적 일상이 묵서와 벽화로 표현되어 있는데, 특히 묘지(墓誌)의 기록이 흥미롭다. 거기에는 중국 지명이 관칭된 태수·자사호 등의 지방관호도 보이며, 당대 행정지명이 아닌 과거 시기의 주·군 단위명을 활용한 사례도 나타난다. 이는 4세기 이래 원래 살던 지역을 떠난 화북의 이주민들이 타지에서도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지연(地緣)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군 고지의 동수와 진의 고분에서 과거의 주·군·현 단위 본적 지명을 표기한 사례는 출신지 인식에 대한 그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고구려는 2군 고지에 안치한 고위 망명인들 각각의 예하에 다양한 지역 출신의 이주민들을 편성했다. 동수·동리·진 등 망명인들의 개별 관할지 내에는 유주와 요동 등지에서 이주해온 이주민 외에도 그 주변에 원래 거주했던 한인(韓人)과 예인(穢人)을 비롯하여 낙랑·대방 출신을 표방하는 일부 토착주민이 함께 편성되기도 했다. 토착민까지 일부 포함된 이러한 다양한 주민 구성은 개별 망명인들이 임의로 편성한 결과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가 그들을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덕흥리벽화고분의 칠보행사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주민의 사회상, 정서와 이념, 신앙적 지향 덕흥리벽화고분 내 묘지·묵서는 연속된 장면 배치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 즉 일종의 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는 이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 덕흥리벽화고분 전실의 관람 순서를 보여준다(222~223쪽 그림 참조). 이에 따르면 덕흥리벽화분의 전실은 관람객이 최초 남벽의 출입문을 통해 들어올 경우 제일 먼저 시선이 가는 맞은편 북벽의 통로문 상단에 묘지를 배치했으며, 이후 시계 방향으로 북벽 우하단의 행렬도→동벽의 행렬도→남벽 통로문 좌측의 행렬도→남벽 통로문 우측의 막부관리도→서벽의 13군 태수내조도→북벽 출입문 좌측의 묘주도 순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서사와 구성 의도는 묘주의 주변인들과 외부의 시선을 고려하여 대외용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는데, 외부 관람자를 뜻하는 ‘관자(觀者)’ 관련 묵서 역시 같은 의도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는 중국 문화에 기반을 둔 묘주 일족의 정서·지향을 같은 처지에 있던 휘하의 이주민 사회와 함께 공유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서로 간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덕흥리벽화고분의 칠보행사도는 기존에 고구려 중앙정부가 개입하여 치른 공적 행사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필자는 묘주 진의 관할지에서 열렸던 일상 행사의 모습이라고 파악한다. 묘주인 진, 혹은 고분의 제작자들은 현실(玄室) 안의 많은 연꽃 도안과 칠보행사도를 통해 묘주가 평소 중시했던 불교 신앙을 그의 사적 공간에서 최대한 강조하려고 했으며, 묘주 자신의 신앙적 지향을 외부에 드러내려고 했다고 본다. 또한 이 지역에 안치되었던 소규모 집단이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장기간 거주했던 양상을 보여주는 근거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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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한성백제박물관 · 서울책방 · 202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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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성백제박물관 소장품목록 12, 『백제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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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한성백제박물관 · 서울책방 · 202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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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백제문화특별전, 『강철 백제: 철, 강한 나라를 만들다』의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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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한성백제박물관 · 서울책방 · 2022.12.15
    10,000|300p

    한성백제박물관 소장품목록 13 , 『기증유물 2016-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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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한성백제박물관 · 한성백제박물관 · 202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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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한성백제박물관 기증자료 특별전시회, 『청화』의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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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윤용혁 · 서경문화사 · 20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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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는 우리나라의 4고도(古都) 중의 하나이다. 2004년 고도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신라문화권의 경주와 함께 백제문화권의 공주, 부여, 익산이 문화재청에 의하여 고도로 지정되었다. 이에 의하여 ‘특별보존지구’ ‘보존육성지구’ 등이 지정되어 사업이 진행중에 있다. 공산성, 무령왕릉 이외에도 감영터, 목관아 일대, 제민천변 등에 대한 사업이 진행 중이다. 고도이미지 찾기 사업으로 한옥 건축을 적극 장려하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유적의 정비만이 아니고 도시의 이미지 자체를 ‘역사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자원을 토대로 역사도시로서의 공주가 문화적, 경제적 생산성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생산성을 갖는 역사도시’ 공주, 그것이 향후 공주 발전의 한 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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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김도상 외 · 생각나눔 · 202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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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첨단과학이다. 고고학에서는 현대물리학의 반감기(半減期)를 이용해서 절대연대를 측정하고,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시설물의 축성과정에서 계량고고학을 이용한다. 따라서 과거 역사유적에 대한 토목공학의 탄성 추계를 한다. 옛날엔 춘추필법과 고귀야(古貴也) 혹은 후고박금(厚古薄今) 원칙에서 역사 사료의 학술 가치를 저울질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역사적 사실 하나를 비정(比定)하는 데도 i) 사회과학인 신의칙, 경험칙, 논리칙 및 실험칙 등을 무시할 수 없다. ii) 델파이 신전의 신탁이 아닌 언어학(발음학, 의미론, 화성론 등), 어원(범어, 타밀어 등), 표기(이두, 차음, 차의 등), 지명유래, 위정자의 의도 등을 매트릭스 모형화(matrix model)해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가야사에 국왕의 재위 기간에서 김수로왕은 157년, 김고로왕 115년이나 된다. 물론 일본서기에서도 70~120년의 왕조가 있다. 우리나라 통계청에서 청동기 시대 평균수명 38세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잣대로 단순하게 재위 기간을 판단하면 역사 사실(non-fiction) 아니라 소설(fiction)이다. 가야 연맹체 국가 혹은 제후국에서는 맹주국의 윤허가 떨어져야 왕조가 바뀐다. 따라서 문자 기록의 액면보다 그렇게 기록해야 하는 배후를 읽어야 한다. 고녕가야에서 현재와 대화를 할 부분이 많다. 단적으로 사도성(沙道城)에 사벌국(沙伐國) 호민 80호를 이주시킨 건 오늘날 휴전선 대성동(臺城洞) ‘자유의 마을(戰略村)’이란 현실을 비교하여 들여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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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한종섭 · 아우내 · 2024.09.14
    10%27,000정가30,000원|1,500p

    삼국시대 이후에 고려나 조선에는 모화사상이 팽배하였고 왜정시대 이후는 식민지가 되면서 역사 문화가 극심하게 왜곡되었다. 인류 문명은 갯벌의 천문에서 발생하며, 그중에 관측이 어려운 금성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인류 문명의 발상지가 한국임을 알게 되었다. 천문에서 발생한 가림다 문자와 알파벳을 해석하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은 알파벳에는 50가지의 천문원리가 포함된 것을 밝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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