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잎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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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때의 자각은 거개가 사회적 내포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인 내포를 지닌다. 그것이 구체적이면서도 생생한 형상과 함께하면서도 십분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무엇보다 그의 시의 형상이 일단은 이은봉 개인의 성찰적 지혜, 곧 반성적 깨달음을 기초로 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뜻에서 이은봉이 시를 통해 추구하는 서정의 의미, 서정적 깨침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시(是)와 궤를 같이 한다. 변화하는 현실과 함께하는 옳은 것을 구해야 한다고 할 때의 옳은 것 말이다. 이때의 시가 역사적인 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번의 시선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은봉의 시들은 예의 ‘의미 있는 서정’, ‘깨어 있는 서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충분히 형상화시켜 시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자신의 시적 진실이나 진리를 넉넉하게 육화시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육화시킨다는 것은 물질화시킨다는 것인데, 물질화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는 이번 시선집에서도 이미지, 이야기, 정서를 강화하고 있다. 이미지, 이야기, 정서를 강화시킨다는 것은 그것들 안에 의미나 깨달음을 잘 감추고 숨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의 시들이 그것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작가정보

1953년 세종 출생. 보문고, 숭전대(현, 한남대), 숭실대 등에서 수학.
1983년 ≪삶의문학≫ 제5호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 외 6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
시집으로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름], [봄 바람, 은여우], [생활], [걸어다니는 별]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 [시와 생태적 상상력], [시와 깨달음의 형식], [시의 깊이 정신의 깊이] 등이 있음.
기타 시론집으로 [화두 또는 호기심], [풍경과 존재의 변증법] 등이 있음.
(사)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부이사장, 충남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광주대학교 명예교수, 대전문학관 관장, 세종마루시낭독회 회장 등의 일을 하고 있음.
작가의 말
이미지가 살아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이야기가 숨어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정서가 충만한 시를 쓰고 싶다. 이들 형상 속에 깨달음이 꿈틀대는 시를 쓰고 싶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여러 형상이 하나의 의미로 응축되고 수렴되는 시를…….
지구라는 행성에서 69년째 살고 있다. 그래서인가. 69편의 시를 여기 모은다. 69편의 시는 한 편의 시. 69는 하나, 69는 원, 원은 태극, 태극은 리비도……. 나는 69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선불교에서는 다즉일(多卽一), 일즉다(一卽多)이라고 하지 않는가.
서정(抒情)은 풀과 나무의 이름으로, 새와 짐승과 벌레 등의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생생하고 구체적인 삶의 언어로 하여, 생기있고 활기 있는 사물의 언어로 하여 되살아나는 것이 서정이다. 서정이 깨어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진실이 함축되어 있는 시를.
2021. 6.
청리당에서 이은봉
목차
- 제1부
서대전역/휘파람아/눈/소년은 누워/부활-전태일/라면봉지의 노래/남새갈기/사랑에 대하여/자유에게/호박/ 일기-1987년 6월 22일/한강/생활이여 이윽고/철근 콘크리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계룡산-겨울 삼불봉/무엇이 너를 키우니/도라지꽃
제2부
햇무더기야/계룡산 폭설/개나리꽃/길음동 참나무/그 여자, 기왓장 같은 여자/발자국/능소화, 넝쿨꽃/초록 잎새들/무등산-함박눈 내린 뒤/꽁치/무화과/대둔산/망초꽃더미/ 송아지처럼/조금나루/낡은 집/칠산 바다-노을
제3부
생쥐/불타는 나무/연탄재/종촌리/프로펠러/땅끝 바다에서/만우절/분노/접는 의자/버스에서/죽천장 백일홍/연무대 삼거리/흔들의자/낮달/봄밤/민들레꽃/폐타이어
제4부
각시탈/결석/오늘치의 죽음/춘양 가는 길/생각/오색딱따구리/죽음들/뻐꾸기 울음/매미/파문/붉은 고양이/삶은 달걀이라고/생활/정치/김밥 두 줄/조촐한 가족/웃는 얼굴
추천사
-
삶이 없는 시가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삶이 잘 보이지 않는 시는 있다. 삶이 잘 보이지 않는 시에는 대략 몇 종류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몇 겹의 언어를 거둬냈을 때 은유되어 있던 삶이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내는 시이다. 어쩌면 이런 시는 삶이 잘 보이지 않는 시라기보다는 삶이 농익은 언어 안에 잘 갈무리되어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은봉 시인의 시는 바로 이런 시이다. 시의 도처에 숨겨놓은 그의 삶이 은닉(隱匿)의 눈을 뜬 채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은봉 시인의 시에는 삶의 이야기가 잘 숨겨진 채 구체적인 이미지로 잔잔히 흐르고 있다. 이처럼 그의 이번 시선집은 이야기와 이미지가 잘 뒤섞여 있는 시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런 특징은 삶의 전체가 맥맥히 흐르는 강물인 양 그의 시들을 촉촉이 적시면서 언어의 강물로 흐르게 한다.
오늘도 이은봉 시인은 눈으로, 귀로, 입으로, 코로, 또 몸으로 만나는 삶의 모습들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손끝으로 불러내어 깨어 있는 서정의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 그는 이번 시선집에서 사소하지만 소중한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일상을 시라는 언어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다.
책 속으로
호남선 완행열차가 울고
열일곱 낯선 소녀가 울고
‘시립청소년보호소’
높은 입간판이 보이는
정월 대보름
전깃줄에 걸린, 방패연이 외로운
낮 열두 시.
-「서대전역」 전문
잔디밭 묏등 아래
소년은 누워 돌을 던진다
하늘은 언제나 저만큼
저만큼 푸르러 빛나는데
던져 무엇을 맞힐 수 있을까
맞힐 수 있을까
청개구리 한 마리
가슴께로 튀어 오르고
일락산 저쪽
산그늘에 잠긴 간이역
기적소리 가슴 태우는데
오늘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포르르 굴뚝새가 날아오르고
지천으로 흐드러지는 찔레꽃……
돌아누운 자리로
찔레꽃잎이 떨어지고
눈물이 떨어지고
천천히 흔들리는 시냇물
온 우주를 적셔버린다
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산 구렁이 울음소리 들린다.
-「소년은 누워」 전문
타오르는 불더미 속으로
잘 익은 살 내음 속으로
그는 갔다 손을 흔들며
어금니를 깨물며 그는 갔다
밝고 환한 얼굴로
이제는 당신의 십자가
당신의 기름진 아랫배
편치 못하리라 어떤 모습으로든
그가 돌아온다
뜨거운 함성이 돌아온다
그의 잘 익은 근골 속으로
타는 눈물이 흐른다 기쁨이 흐른다
노동으로 단련된 구릿빛 내일이
사랑이 흐른다 일찍이 어디
이처럼 벅찬 그리움이 있었더냐
아픈 희망이 있었더냐
우리들 성긴 밥상 위로
보라 그의 구수한 광대뼈가 돌아온다
떡으로 밥으로
따수운 고깃국이 돌아온다
진수성찬이 돌아온다.
-「부활-전태일」 전문
멀리서 풍장 치는 소리 들린다
팔월도 한가위
산마을 아득한 골짜기 저쪽
색동옷 곱게 차려입은
어린아이 둘……
젊은 엄마를 따라
묏등 앞 오가며 상을 차린다
조촐한 가족, 두 번 절하고
음식 나누는 동안
산까치, 참나무 끝에 날아와 운다.
-「조촐한 가족」 전문
기본정보
ISBN | 9788966272013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7월 20일 |
쪽수 | 120쪽 |
크기 |
127 * 207
* 13
mm
/ 193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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