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타인이 감추고 싶은 가장 자명한 얼굴'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자신만의 은유로 새롭게 재해석한다. 사랑을 비롯한 모든 감정의 겹들인 언어도 너와 나라는 동일성 아래에 있다는 것, 이것이 시인이 가진 언어들의 바탕이며, 나아가 그 언어들이 다다를 지점이다.
이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우리가 부르는 다양한 사물들의 이름과 감정의 겹들인 언어가 뒤섞여 분리되고 합쳐지기를 반복하며, 개별성과 주관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에서는 그 과정을 거친 언어들이 내 의식의 상태를 넘어선 언어로서 만나게 되는 지점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결국 모든 언어들의 출발이자 종착은 너와 나라는 타인이라는 경계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낯선 이들과의 한때>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을 배우던 아이들은
철수나 영희보다는 세련된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안녕이란 말은 배우지 못했다.
60년대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집고양이에게나 붙여줌직한 이름으로 견갑을 두른 아이들은
헤어질 때도 안녕이라고 말할 줄 몰랐다.
황사가 짙게 내린 그날
내 입속엔 더 지독한 황사,
우리는 서로 연락처도 물어보지 않고
다시 만나자 했다.
이 책의 총서 (23)
작가정보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문학』에 「동그라미 변주곡」외 4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강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옛날이야기와 기호학을 공부하고 있다.
"타지에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마침 그날 학교에서 연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만든 연을 보시고 혀를 끌끌 차셨다. 그리고 새 연을 만들어주셨다. 대나무 살을 쪼개고, 엄마가 그림을 그리던 종이를 자르셨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 연을 잡고 문원리 논둑길을 뛰어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도 뛰었다. 연은 어찌 된 일인지 날다가 자꾸 고꾸라졌다. 창호지가 아닌 화선지로 만든 연은 풀에 젖어 자꾸 찢어졌다. 그래도 즐거웠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연을 모두 태워버리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그때가 지나서도 연을 날리는 아이들은 게으른 놈이라고 욕을 먹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나는 여태 혼자 연을 날리고 있다. 허공에 높이 띄운 채 거두지도, 보내지도 못하고 서 있다. 저걸 어째, 저걸 어째. 한때 내가 놓은 연줄을 대신 잡고 날 기다려준 이들 있다. 나보다 미련한 이들, 그들에게 감사와 원망을 보낸다. 나는 늘 분신보다는 투신에 더 끌렸다. 이제 줄을 놓는다. 그리고 찢어진 날개에 매달려 날아갈 것이다."
목차
- 제1부 봄날은 착란
낯선 이들과의 한때·12
정오의 잔디밭·13
솔잎향 불면·16
해바라기 연대기·18
산초의 고백·22
다변증과 실어증의 사례 연구·25
봄날은 착란·28
3호선 팬터마임·32
귓속의 하루·34
연애질의 세기·36
난·生·38
수상한 오후·41
산자들의 귀환·42
죽은자들의 귀환·44
무인도에 갇히면 가져가고 싶은 책은? -미래소년 코난에게 1·46
사람은 무중력 상태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미래소년 코난에게 2·48
세오녀는 연오랑을 기다리며 무얼 했을까? -미래소년 코난에게 3·49
우표를 붙이지 않은 엽서는 어떻게 수신되는가? -미래소년 코난에게 4·53
2008-미래소년 코난에게 5·54
제2부 멸종 세대를 위한 그루브
보트피플·58
문장 작법 12페이지·60
파리지옥에 빠진 달·63
탈출기·66
하품·69
其猫·한·밤·70
누에잠·74
아침·76
서른 전야-멸종 세대를 위한 그루브 1·81
P군에게-멸종 세대를 위한 그루브 2·82
문신-멸종 세대를 위한 그루브 3·85
칼·87
한 그릇·88
판화 새기는 밤·90
툭·91
소설 속 착한 여주인공 이름 같은·92
갈매기의 저녁 식사·94
치자꽃 피는 계절·102
아프리카 동물병원·104
제3부 생물과 무생물
생물과 무생물·108
38.9℃·110
그 시절·113
아이들은 병아리를 묻는다·114
원형질의 꿈·116
아이들 비탈에 서다·121
피서·122
아비의 거리·124
이름·126
봄나무에게 묻고 싶은 것·128
강물을 보러 갔다가·130
따뜻한 무덤·132
바벨의 피·136
변경에 피는 꽃·138
자궁의/에 대한 꿈·140
책 읽는 남자·141
겨울이었다·142
Tokyo發·144
작품 해설 | 허윤진(문학평론가)
환한 불면·145
출판사 서평
‘환한 불면’이라고 했던가. 문학평론가 허윤진은 그녀의 시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환한 불면이라, 그도 그럴 것이 밤은 많은 이들에게 하루의 노고가 풀리는, 말들을 잠재우는 시간이다. 허나 윤예영에게 밤은 언어의 소생기이자 모든 언어들이 마침내 의식을 갖게 되는 지점이며 그리하여 사물과 현상으로만 존재하던 언어들이 수면위로 올라오는 시간이다. 분출된 욕망들이 부딪히는 시간, 그것들이 한데 뒤엉켜 목소리를 내는 시간 속에서 윤예영은 말한다. ‘내가 나를 갖는 것을 밤과 낮은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자정의 언어처럼 그녀의 시는 그렇게 어두운 시간에 환하게 다가온다.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윤예영의 첫 시집을 펴낸다. 데뷔 10년 만에 내는 첫 시집인 만큼 통통하게 살이 오른 그녀의 언어들은 삶이라는 이름 아래에 뿜어져 나오는 모든 기억들을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시간을 두고 그 감정들을 결정짓는다. 기억이 빚어낸 감정들은 하나의 가장 극명한 주체이자 타인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주체의 극명함은 그녀가 읽을 때도 쓸 때에도 예민하게 다가오는데 그렇게 해서 쓰인 그녀의 자의식이야말로 자로 댄 것 같이 명확하고 선명한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이 여기에 놓여 있다. 그녀의 시를 ‘거울’이라 일컬어 봄은 어떨까. 감춰지고 은폐된 우리들의 얼굴을 보게 되는 ‘거울’ 말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시들은 1부에서는 우리가 부르는 다양한 사물들의 이름과 감정의 겹들인 언어, 그러한 것들이 한 데 뒤섞여 분리되고 합쳐지기를 반복해 개별성과 주관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이라면 2부에서는 그 과정을 거친 언어들이 내 의식의 상태를 넘어선, 내 통로 밖의 언어로서 만나게 되는 지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3부에서는 결국 그러한 모든 언어들의 출발이자 종착은, 너와 나라는 타인이라는 경계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말을 걸어오는 건 할 말이 많은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는 휴지통이나 책꽂이 따위였다. 그들은 잠도 자지 않고 지껄여댔다. 그도 아니면 이미 몇만 광년 전에 죽어버린 외계의 것들, 혹은 맹렬하게 잠을 자는 어린 딸애의 예쁜 배꼽. 나는 늘 착오적이었다. 눈을 뜨면 밤이었고, 눈을 뜨면 밤이었고, 눈을 뜨면 밤이었다. 블랙홀 속에 갇혀버린 이방인처럼 밤의 언저리를 휘돌았다. -「솔잎향 불면」
언어가 사유하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결코 잠들 수 없다. 불면의 밤이 지속되는 것은 그녀의 말이 어둠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닌 의식할 수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며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나’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타인의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나와 타인, 결국은 그걸 생성하고 흩어지게 하는 것도 언어라는 사실, 우리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레비나스가 말한, 우리의 얼굴은 타인이 감추고 싶은 가장 자명한 얼굴이라는 사실을 윤예영은 그녀만의 은유로 새롭게 재해석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을 비롯한 모든 감정의 겹인 언어들도 나와 너라는 그 동일성 아래에 있다는 것, 이것이 시인의 가진 언어들의 바탕일 것이며, 나아가 그 언어들이 다다를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착란이야말로, 나의 존재를 결정짓는 말일 수 있다는 것, 이제 우리는 그녀에게 들켰다.
봄날인가, 하니 그것은 또 시작이고 끝이다. 그녀는 말한다 ‘안녕이란 말은 배우지 못했’지만 우리 안녕이란 말은 해야 하지 않는가. 그녀의 시들을 통해 우리 이제 스스로의 안부를 묻는 법을 배워본다.
윤예영의 시는 낭만주의적 서정시처럼 매끄럽게 우리의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고 그녀 자신의 고백처럼 ‘유리병 조각을 씹는 듯한’ 불편한 서걱거림을 남기는 반미학의 시다. 그녀의 시는 무엇에 대해 말하더라도 말하는 방법을 전경화시켜 보여준다. 그것이 그녀의 현대성이다. ‘일관된 말하기’를 거부하며 지적 균열과 아이러니를 통해 변이, 산포, 접속되어 나간다는 점에서 수목형의 언어가 아니고 선들로 이어지는 다질적인 요소들의 결합 공간-리좀(rhizome)의 언어다. 아버지 돈키호테와 엄마 둘시네아의 딸, 로시난테의 동생인 그녀에게 체험은 말하기의 시작일 뿐 곧 의미의 탈구를 따라 언어는 진행되고 부서진 징후들은 모순의 장소에서 환상적으로 혼합된다. 어딘지 뼈들이 서걱거리고 건조한 상상력이 어긋나고 있는 윤예영 텍스트의 미묘한 매력! -김승희(시인)
기본정보
ISBN | 9788925518848 | ||
---|---|---|---|
발행(출시)일자 | 2008년 04월 15일 | ||
쪽수 | 171쪽 | ||
크기 |
124 * 195
mm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랜덤시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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