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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9
오노레 드 발자크 저자(글) · 이철의 번역
문학동네 · 2025년 0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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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상세 이미지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 발자크의 대표작
‘인간극’ 총서의 문을 열어젖힌 첫 소설이자
인류의 상승 의지에 바치는 근대의 서사시
치밀한 현실 묘사를 특기로 장대한 작품세계를 펼친 ‘근대소설의 창시자’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여러 사업을 벌이고 사교계에 드나들면서도 왕성한 집필활동을 이어간 그는 무려 91편으로 이뤄진 ‘인간극’ 총서로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문학동네는 발자크의 작품으로 『나귀 가죽』 『루이 랑베르』 『13인당 이야기』를 출간한 데 이어, ‘인간극’으로 진입하는 주요 관문이라 할 대표작 『고리오 영감』을 선보인다. 오랫동안 발자크를 연구해온 역자 이철의 교수의 충실한 번역, ‘인간극’이란 틀 안에서 작품을 다각도로 감상하도록 돕는 상세한 해설, 작품 속의 주요 장소를 표시한 파리 지도, 번역 대본으로 삼은 ‘수정 퓌른판’에서는 삭제되었으나 발자크의 문학관을 잘 담아냈기에 수록한 초·재판 서문, 이 작품 이해의 관건인 당대 화폐와 금융에 대해 알려주는 부록은 『고리오 영감』을 보다 깊고 폭넓게 음미하는 데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의 총서 (52)

작가정보

저자(글) 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1799년 5월 20일 프랑스 투르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대학에서 법학
을 공부했으며, 변호사 및 공증인 사무실에서 잠시 일했다. 공증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작가의 길을 택하여 운문 비극 『크롬웰』을 집필하지만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창작활동을 열정적으로 이어가며 이른바 ‘상업 문학’ 작품들을 내놓았다. 한동안 문학을 등지고 인쇄업, 출판업, 활자주조업에 투신했으나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지게 된다. 다시 글쓰기에 몰두해 1829년 처음으로 본명을 써서 『마지막 올빼미 당원 혹은 1800년 브르타뉴』를 출간했고, 1831년 『나귀 가죽』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외제니 그랑데』 『골짜기의 백합』 등을 잇달아 발표했고, 자신의 소설작품 전체를 묶어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도구로 삼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구상해 1846년 91편으로 이뤄진 ‘인간극’을 출간했다. 1850년 8월 삶을 마감하고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1835년에 발표한 『고리오 영감』은 ‘인간극’ 총서의 방향을 정립하고 집필에 가속도를 붙게 해준 결정적인 작품으로, ‘인물의 재등장 기법’을 적용한 첫 소설이기도 하다. 대혁명 시기에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나 두 딸에게 재산을 다 털리며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고리오, 사교계의 총아가 되어 돈과 사랑을 거머쥐려는 야심가 라스티냐크 등의 인물들을 통해 온갖 욕망이 들끓는 19세기 전반의 사회상을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번역 이철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상명대학교 프랑스어권지역학전공 교수로 재직중이다. 옮긴 책으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 가죽』 『회개한 멜모스·아듀』, 에밀 졸라의 『인간 짐승』 등이 있고, 논문으로 「발자크와 건축」 「발자크와 시간」 「발자크와 정치」 「발자크와 돈」 등이 있다.

목차

  • 고리오 영감 _7

    초판 서문(1835) _421
    재판 추가 서문(1835) _435

    해설 | 『인간극』이라는 “거대한 건물”의 현관, 『고리오 영감』 _439
    부록 | 발자크 시대의 화폐 _499
    오노레 드 발자크 연보 _505

추천사

  • 우리가 알고 있는 19세기는 대체로 발자크의 산물이다.

  • 『고리오 영감』은 19세기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19세기 초반 프랑스에서 상속과 세습 자산이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장 뛰어나게 묘파한 문학작품이다.

  • 사회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로서 발자크는 사람들을 서로의 관계뿐 아니라 그들이 몸담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도 파악했다는 데 두드러진 재능을 보인다.

  • 오, 보트랭이여, 오 라스티냐크여, 그리고 그대, 그대가 보여주었던 그 어떤 인물들보다 가장 영웅적이고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낭만적이고 가장 시적인 그대, 오, 오노레 드 발자크여!

  • 1835년 발자크는 갖출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갖춘다. 소설가로서의 형성 과정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고리오 영감』은 그때까지 기울인 노력이 집약된 결과이고, 앞으로 쓰일 작품의 토대이다.

  • 인간극』은 피 대신에 돈이 순환하는 육체다.

책 속으로

보케르 부인은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실내 공기를 구역질 한번 하지 않고 들이마신다. 가을날 첫서리처럼 서늘한 표정이며, 무용수들이 애써 짓는 미소와 어음할인업자의 신랄한 찌푸림이 번갈아 나타나는 주름진 눈매, 한마디로 그녀의 모든 면면은 하숙집을 드러내 보여주고, 하숙집은 그녀의 됨됨이를 내포해 보여준다. 간수 없는 감옥은 굴러갈 수 없고 감옥 없는 간수는 있을 수 없는 법, 그녀와 하숙집 둘 중 어느 한쪽이 없는 경우는 상상조차 안 된다. _18~19쪽

파리는 말 그대로 하나의 대양이다. 거기에 수심측정기를 던져보라, 그래도 그 대양의 깊이는 도무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파리를 남김없이 답사하고 묘사하겠다고? 파리를 답사하고 묘사한다고 제아무리 공을 들인들, 이 바다의 탐험가들이 제아무리 수가 많고 관심이 높은들, 나중에 항상 또다른 신천지가, 또다른 미지의 존재가, 꽃들이, 진주들이, 괴물들이, 문학의 잠수사들이 잊고 있던 엄청난 어떤 것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날 것이다. 보케르 하숙집은 이러한 흥미를 자극하는 괴이쩍은 곳 중 하나다. _26쪽

이러한 소규모 집단은 전체 사회의 구성 요소들을 축약해서 보여주기 마련인데, 실제로 그랬다. 저녁식사 자리에 모인 열여덟 명 중에는 학교나 사교계에서 그렇듯 따돌림을 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짓궂은 괴롭힘이 집중되는 놀림감이 하나 있었다. 외젠 드 라스티냐크가 하숙집에 기거한 지 두 해를 막 넘길 무렵, 앞으로 두 해는 더 눌러앉아 함께 지내야 할 하숙인 중 그런 놀림감이 된 인물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천덕꾸러기는 고리오 영감이라 불리는 은퇴한 제면업자로, 화가라면 역사가가 하듯이 그 인물의 머리에 화폭의 모든 빛을 집중시켜 그렸을 것이다. _32쪽

한편에는 가장 우아한 사회가 보여주는 신선하고 매력적인 이미지, 진귀한 예술품들과 호사품들로 둘러싸인 젊고 활기찬 이들과 시정으로 가득찬 열정적인 얼굴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누추함이 수를 놓은 음울한 그림들과 열정이라고는 형해밖에 남지 않은 면상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 라스티냐크는 재산을 일구기 위해 평행하게 놓인 두 개의 참호를 열어젖히겠노라고, 학문과 사랑에서 동시에 성공하겠노라고, 박식한 학자인 동시에 유행의 첨단을 걷는 인물이 되겠노라고 결심했다. _125~126쪽

라스티냐크는 보트랭이 친구인지 적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그의 화력 세례를 받고 있을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보트랭이라는 이 독특한 인물이 때때로 그의 정염을 꿰뚫어보고 마음을 읽어내는 것 같은데, 정작 자신은 철저하게 속을 감추고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스핑크스의 미동 없는 심오함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_150쪽

“(…) 내가 아버지가 되었을 때, 난 하느님을 이해했다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지 않는 곳이 없지요. 창조는 그분의 소산이니까. 이보시오, 내가 내 딸들에게 그런 존재라오. 다만 나는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정도보다 내 딸들을 더 극진히 사랑하오. 왜냐면 세상은 하느님만큼 아름답지 않지만 내 딸들은 나보다 더 아름답기 때문이라오. (…)” _198쪽

고리오 영감은 숭고해 보였다. 고리오 영감이 부성이라는 열정의 불길로 그토록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외젠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으니, 바로 감정이 가진 스며드는 힘이다. 한 인간이 아무리 투미하다 할지라도, 강렬하고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부터 그는 표정을 변화시키고 동작에 활력을 주며 목소리에 생기를 부여하는 어떤 특별한 유체流體를 뿜어낸다. 그런가 하면, 종종 가장 어리석은 자도 열정에 사로잡히는 경우에는 말로, 혹은 말이 아니라면 생각으로라도 가장 우렁찬 웅변을 터뜨리는 경지에 도달하며, 눈부시게 찬란한 세계로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 고리오 영감의 목소리와 동작에는 위대한 배우가 빙의한 듯 강한 전달력이 실려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의 아름다운 감정은 그 자체로 의지가 써내려간 시 아니던가? _199쪽

“이런, 내가 널 아프게 했구나.”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의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부성의 그리스도라 할 만한 그의 표정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그동안 회화의 최고 거장들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구세주가 겪는 수난을 화폭에 담기 위해 창조했던 이미지들을 부지런히 참조해야 하리라. _317쪽

사랑은 잠시 머물다 순식간에 사라지며, 마치 악동처럼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폐허로 만든다. 감정의 호사란 곳간에서 피어나는 시詩다. 곳간의 풍요로움이 없다면 사랑은 대관절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_327쪽

“(…) 오, 하느님! 내가 감내했던 비참과 수모를 잘 아시면서, 내가 부쩍 늙고, 급변하고, 파리해지고, 죽음으로 내몰리던 그 시절, 내가 받았던 그 무수한 난도질을 하나하나 다 아시면서 대체 왜 오늘 나에게 이토록 고통을 주십니까? 나는 그애들을 너무 사랑한 죗값을 다 치렀잖습니까. 걔들이 내 애정을 그런 식으로 배은망덕하게 갚았고, 형리처럼 나를 불로 지져 고문했잖습니까. 아, 아버지들이란 그렇게 어리석기만 한 존재지! 난 도박장을 못 끊는 노름꾼처럼 걔들에게로 다시 발길을 돌렸으니, 그만큼 걔들을 사랑했다네. 내 딸들이 내 악폐의 근원이었어. (…)” _393쪽

그는 무덤을 바라보다가 젊은이로서의 마지막 눈물을 떨구었다. 순수한 마음에서 일어난 거룩한 감동이 자아낸 눈물, 떨어진 땅에서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그런 눈물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자욱한 구름을 응시했다. 그가 그러고 있자 크리스토프는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 위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센강 양안을 따라 똬리를 틀고 누운 파리, 이제 막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한 파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의 두 눈은 방돔광장의 원주와 앵발리드의 돔 사이, 그가 뚫고 들어가려 했던 눈부신 상류 사교계의 본거지에 탐욕스럽게 붙박였다. 윙윙거리는 그 벌집을 향해, 미리 꿀을 빨아먹을 기세로 눈길을 주던 그는 웅장하게 울리는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
그러고서 라스티냐크는 자신이 사회를 향해 선포한 도전의 첫번째 행위로, 뉘싱겐 부인 집을 향해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_418~419쪽

출판사 서평

★ 노벨연구소 선정 ‘100대 세계문학’ ★ 가디언 선정 ‘역대 세계 최고의 소설 100’
★ 서머싯 몸 선정 ‘세계 10대 소설’ ★ 시카고대학 선정 그레이트 북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발자크의 야망과 역량이 응축된 대표작

프랑스대혁명 10주년을 맞이한 1799년에 태어난 오노레 드 발자크는 나폴레옹의 제1제정, 왕정복고, 7월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대격변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다. 그는 절대왕정과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평민이 재산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하거나 귀족일지라도 영락해 빈곤한 처지에 내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다. 이 변화무쌍한 시대를 목격한 증언자이자 미래를 내다본 예언자로서, 발자크는 단테의 『신곡』을 본받아 “서양의 『천일야화』”가 될 방대한 작품집 『인간극』을 구상했다. 1839년경, 그동안 발표해온 작품들에 질서를 부여해 체계적으로 재편성하는 한편, 앞으로 집필해나가야 할 방향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호적부와 경쟁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인간과 사회의 갖가지 면모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인간극’의 소설들은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인물의 재등장 기법’ 등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움직이는 거대한 세계와도 같다. 인간사의 ‘결과’ ‘원인’ ‘원칙’에 해당하는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로 구성된 『인간극』은 훗날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연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인간극’ 총서의 작품들 중에서도 ‘인물의 재등장 기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한 첫 소설이자 총서 집필에 가속도를 붙게 해준 『고리오 영감』은 발자크가 천명한 체계 정신, 총체성과 통일성을 향한 의지가 가장 뚜렷이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시와 비극이 주류를 이루며 소설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고, 낭만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집필된 『고리오 영감』은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온 발자크의 문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의 드라마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진실을 담아내면서, 19세기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딸들에게 헌신하는 ‘부성의 그리스도’ 고리오
출세를 꿈꾸는 야심만만한 청년 라스티냐크
두 사람의 운명이 극적으로 교차하며 빚어낸 희비극

『고리오 영감』은 왕정복고기인 1819년 11월 말에서 이듬해 2월 21일까지 약 세 달간 파리의 서민 하숙집 ‘메종 보케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왕년에는 부유한 제면업자였으나 고독하고 궁핍한 처지로 전락한 고리오가 딸들을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과정이 이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다. “영원한 아버지의 표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고리오가 보여주는 부성애는 그저 숭고하다기보다는 돈으로 딸들의 애정을 구하고 도착적인 욕망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병적인 열정에 가깝다. 그의 성공과 몰락은 나폴레옹의 흥망이라는 정치적 상황과도 궤를 같이하며, 전통적인 권위가 무너지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빚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고리오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하숙집 4층의 이웃 방에 살며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법과대학생 외젠 드 라스티냐크다. 가난한 귀족 집안의 기대를 걸머지고 파리로 상경한 그의 “호기심 어린 관찰과 파리의 살롱을 드나들 수 있던 수완” “명민한 지능과 열의” 덕분에 이 이야기는 “진실한 색조”를 띠게 된다. 고리오가 점점 힘겨운 상황에 처하며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면, 라스티냐크는 간절히 욕망해온 사교계를 뚫고 들어가며 밝은 미래를 예고한다. 사촌인 보제앙 자작부인의 이름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아 상류 사교계라는 “미궁”에 진입하고, 거기서 만난 은행가 뉘싱겐 남작의 아내이자 고리오의 둘째 딸 델핀의 정부가 됨으로써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라스티냐크는 이미 『나귀 가죽』(1831)에서 “1829년 12월 초순”에 주인공 라파엘을 사교계로 인도하는 능수능란한 댄디로 등장했는데, 『고리오 영감』에서는 그보다 십 년 앞서, 사교계로 막 발을 들이는 신출내기로 그려진 셈이다. 이후 ‘인간극’ 총서의 『뉘싱겐 은행』 『금치산 선고』 『아르시의 국회의원』 『본의 아닌 코미디언들』 등에 재등장하는 그는 승승장구하며 화려한 편력을 보이다가 마침내 법무부 장관 자리까지 오른다.
이처럼 몰락해가는 노인과 점점 성공가도를 걷게 되는 청년의 상반된 운명이 엇갈리는 『고리오 영감』에서 또하나 주목해야 할 인물이 하숙집 3층에 사는 비밀스러운 사십대 남자 보트랭이다. 일명 ‘불사조’라 불리는 탈옥한 도형수 자크 콜랭으로 밝혀지는 그는 돈과 사랑을 거머쥐려는 라스티냐크의 욕망을 꿰뚫어보곤 출세하게 해주겠다며 유혹한다. 하숙인 미쇼노의 밀고로 체포되면서 정체가 탄로나는데, 이 작품에서는 중간에 사라지지만 『잃어버린 환상』과 『매춘부의 영광과 비참』에 재등장해 에스파냐 사제 카를로스 에레라, 파리 경찰청 치안대장으로 변신하는 인물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범죄를 불사하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보트랭은 기성 체제에 대한 ‘반항’을 상징하는 존재다.
이 세 인물 말고도 『고리오 영감』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한 남녀노소 인물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모습으로 등장한다. ‘메종 보케르’가 자리한 뇌브생트즈느비에브가와 하숙집 안팎의 정경을 상세히 묘사한 후, 하숙집 주인 보케르 부인을 필두로 일곱 명의 내부 하숙인을 소개하는 도입부에서부터 발자크 특유의 집요한 묘사와 박력 넘치는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드라마를 능숙하게 엮어내며 희로애락을 자아내는 『고리오 영감』은 19세기 전반의 천태만상을 생생히 재현해낸 사회소설이자, 갓 스물 넘은 청년 라스티냐크가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돈, 그것은 목숨과도 같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

발자크는 사업 실패로 진 거금의 빚을 갚느라 평생 고생한 작가다. 돈에 줄곧 민감했던 그의 관심사가 반영된 탓인지 이 소설에서 ‘돈’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리오가 배은망덕한 두 딸의 관심을 받으려 오데사에 가서 전분을 제조하려 하는 것도, 라스티냐크가 어머니와 누이가 보내준 돈으로 옷을 사서 빼입고 사교계에 입성하려는 것도, 보트랭이 라스티냐크에게 장차 파리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가 될 빅토린에게 접근하라고 조언하는 것도 모두 돈 때문이다.
발자크는 이 소설을 통해 상속받은 재산이나 아내의 지참금 없이 성실한 노동만으로는 부를 이룩하기 어려운 현실, 돈이 없으면 아버지마저 외면하는, 비정할 정도로 배금주의가 만연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에 착안한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19세기 초 노동소득과 자산소득의 현격한 격차, 부의 불평등한 분배를 보여주기 위해 『고리오 영감』 속 한 장면, 보트랭이 라스티냐크에게 출세에 관한 일장 연설을 펼치는 부분을 인용하며 “보트랭의 설교에서 가장 섬뜩한 부분은 이것이 왕정복고 사회의 정확한 특징들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이라고 했다. 역자 이철의는 돈이 이 작품 이해의 결정적 요소라 보고, 당대 통용되던 여러 화폐의 단위와 가치, 어음, 국채, 은행, 이자율 등에 대해 정리한 부록을 해설 뒤에 추가했다. 돈 때문에 가족관계가 변하고, 돈으로 사랑과 권력을 쟁취하려는 상황을 그린 『고리오 영감』은 물질만능주의가 여전한 지금을 돌아보게 하며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발자크의 마지막 손길이 닿은 ‘수정 퓌른판’을 번역한 결정판

『고리오 영감』은 사업 실패 후 집필활동에 다시금 몰두해 『나귀 가죽』(1831)으로 명성을 얻고 『샤베르 대령』(1832), 『외제니 그랑데』(1833) 등으로 입지를 다지던 발자크가 역량이 한창 무르익은 1834년 가을에 집필하기 시작해 이듬해 초에 탈고한 작품이다. 1834~1835년 주간 문예지 〈르뷔 드 파리〉에 네 차례에 걸쳐 게재되고 1835년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는데, 이 번역본은 발자크가 “『인간극』의 최종 원고”라고 선언한 ‘수정 퓌른판’을 따랐다. 그래서 초판의 장 구분 없이 쭉 이어지는 구성이지만, 애초에 총 여섯 장으로 구성해낸 서사의 밀도 높은 짜임새로 극적 효과를 거둔다.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해 각주로 초판의 장 제목(1장 서민 하숙집, 2장 두 번의 방문, 3장 사교계 입성, 4장 불사조, 5장 두 딸, 6장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놓았다.
『고리오 영감』은 1844년 ‘퓌른판’ 『인간극』 전집에 처음 수록될 때는 ‘풍속 연구’의 ‘사생활’ ‘파리 생활’ ‘지방 생활’ ‘정치계’ ‘군대’ ‘농촌 생활’ 중에서 ‘파리 생활’ 장면으로 분류되었다. 그만큼 파리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장소로 등장하는 이 소설은, 파리를 부지런히 누비는 라스티냐크의 동선을 따라 하숙집이 자리한 남부의 포부르 생마르셀, 전통 귀족의 거주지인 포부르 생제르맹, 신흥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거점인 쇼세당탱 등의 서로 다른 장소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고리오 영감』에서 파리는 무절제한 욕망 추구로 인해 타락이 만연한 “진흙구덩이”, 깊이를 알 수 없고 수수께끼로 가득한 “대양” 등으로 비유되곤 한다. ‘수정 퓌른판’에서 『고리오 영감』은, 고리오를 위시한 인물들의 드라마로 무게중심을 두려는 의도에서인지 ‘사생활’ 장면에 편입되었다. 이렇듯 ‘인간극’이라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고리오 영감』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작품을 감상하는 묘미가 한층 배가될 것이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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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41601874
발행(출시)일자 2025년 02월 27일
쪽수 532쪽
크기
140 * 210 * 32 mm / 753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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