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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
오월의봄 · 2023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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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광기’의 또 다른 이름은 언제나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비정상’ ‘비이성’ 등과 같은 그 명명들은 광기의 이름이자 동시에 낙인이었다. 그러나 광기가 치료 및 교정해야 할 정신질환에 해당한다는 지배적인 정신의학적 관점은 광기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상상력을 강하게 억압한다. 다른 한편, 지배적인 의료적 관점의 반대편에는 ‘정신질환’이라는 낙인과 꼬리표에 맞서 광기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고 그 생생한 언어를 되찾고자 하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있다. ‘매드 프라이드mad pride’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매드운동은 광기의 의료화 흐름에 저항하며 강제치료, 회복을 위한 서비스의 부재, 사회적 낙인 및 차별 등의 문제에 활발히 개입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한 저자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는 ‘미쳤다는 것’, 즉 광기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떤 사회적 요건들이 필요한지 세밀히 논증하고 탐구해나간다. 광기라는 현상을 두고 정신의학과 당사자들의 매드운동이 팽팽히 대립하는 현실은 저자가 이 책을 쓰도록 추동했다. 그는 매드운동과 그 당사자들이 진정한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고 자신의 역량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 운동의 주장은 물론 그에 회의감을 드러내는 정신의학의 관점 모두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립하는 두 집단 혹은 관점이 ‘화해의 태도’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할 때,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한 화해를 이뤄낼 때, 대항적 광기 서사는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우리 모두를 그 ‘대화’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작가정보

Mohammed Abouelleil Rashed

정신과 의사. 이집트 카이로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영국 런던 소재의 가이스칼리지병원, 킹스칼리지병원, 성토머스병원에서 수련받았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철학과 정신의학의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정신의학과 철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광기와 정신질환을 둘러싼 정체성과 인정, 문화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다. 여러 학술지와 언론에 〈정신의학의 정체성과 정신장애운동의 도전The Identity of Psychiatry and the Challenge of Mad Activism〉 〈광기를 옹호하며: 장애라는 문제In Defence of Madness: The Problem of Disability〉 등의 글을 발표했다. 현재는 런던대학교 버크벡칼리지 철학과 연구펠로우이자 킹스칼리지런던에서 객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
*저자 홈페이지: mohammedarashed.website2.me

번역 송승연

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 한양대학교 한국후견·신탁연구센터 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로 일했다. 성공회대학교 학부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사회복지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 권익옹호, 정신건강 복지와 관련한 여러 학술논문을 발행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 세력으로 발돋움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번역 유기훈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노들장애인야학 휴직 교사. 서울대학교에서 공학과 인류학, 의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법학과 인문의학을 공부하며 생명과 의료, 장애와 정신보건을 둘러싼 법과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관련해 여러 학술논문을 발표했으며,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책 《아프면 보이는 것들》을 함께 썼고, 현재 미란다 프리커의 책 《인식적 부정의: 권력과 앎의 윤리Epistemic Injustice: Power and the Ethics of Knowing》를 동료와 함께 한국어로 옮기고 있다.

목차

  • 책머리에 9
    서문 19

    1부. 광기

    1장 정신장애운동과 인정에 대한 요구 37
    1. 들어가며 37 | 2. 정신장애운동의 간략한 역사 42 | 3. 광기의 의미 61 | 4. 매드 프라이드 69 | 5. 매드 프라이드 담론에 대한 철학적 관여 88 | 6. 나가며: 다음으로 다룰 문제들 91

    2장 정신적 고난과 장애의 문제 93
    1. 들어가며 93 | 2. 장애 97 | 3. 정신적 고난 128 | 4. 나가며 132

    2부. 인정

    3장 인정의 개념과 자유의 문제 137
    1. 들어가며 137 | 2. 자유로운 행위주체란 무엇인가?: 도덕적 의무 vs 인륜성 142 | 3. 《정신현상학》에서 나타나는 인정의 개념적 구조 148 | 4. 인정은 어떤 종류의 개념인가? 166 | 5. 인정 개념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76 | 6. 나가며 187

    4장 정체성, 그리고 인정의 심리적 결과 190
    1. 들어가며 190 | 2. 정체성 193 | 3. 인정투쟁 217 | 4. 인정의 심리적 영향 227 | 5. 나가며 241

    5장 무시: 정치적 개혁 혹은 화해? 243
    1. 들어가며 243 | 2. 사회적 해악으로서의 무시 245 | 3. 무시와 정치적 개혁 249 | 4. 무시와 화해 264 | 5. 무시에 대한 대응: 정치적 개혁과 화해의 역할 274 | 6. 나가며 278

    3부. 인정으로 가는 경로

    6장 매드문화 283
    1. 들어가며 283 | 2. 문화란 무엇인가? 285 | 3. 광기가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까? 288 | 4. 문화적 권리로 가는 경로 295 | 5. 나가며 307

    7장 매드 정체성 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과 실패한 정체성 308
    1. 들어가며 308 | 2.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과 실패한 정체성의 구별 314 | 3. 망상적 정체성 323 | 4.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과 실패한 정체성을 구분하는 방법론 357 | 5. 나가며 363

    8장 매드 정체성 Ⅱ: 자아의 통합성과 연속성 365
    1. 들어가며 365 | 2. 자아의 통합성과 분열 367 | 3. 자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387 | 4. 나가며 405

    9장 광기와 인정 범위의 경계 407
    1. 들어가며 407 | 2. 인정의 경계 408 | 3. 광기에 대한 서사들 417 | 4.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의 손상을 극복하기 429 | 5. 주관적 서사와 매드 서사의 차이 436 | 6. 나가며 440

    4부. 매드운동에 접근하는 방식

    10장 매드 정체성과 인정에 대한 요구 445
    1. 들어가며 445 | 2. 인정에 대한 요구의 규범적 정당성 448 | 3. 매드 정체성 인정에 대한 요구는 규범적 효력을 갖는가? 451 | 4. 무시에 대응하기 471 | 5. 매드 서사와 문화적 레퍼토리 477 | 6. 나가며 483

    11장 결론: 화해로 나아가는 길 485
    1. 회의론자와 지지론자의 화해 485 | 2. 광기와 사회를 화해시키기 490

    감사의 말 495
    자료 출처에 대한 안내 499
    주 500
    참고문헌 538
    옮긴이의 말 554
    찾아보기 565

추천사

  • 라셰드의 작업은 야심 차고 놀라우며 또 소중하다. 인정이론의 틀에서 매드 정체성을 다룬 기존의 논의는 사실상 전무하다. 이런 조건 속에서 그는 광기가 한 인간의 ‘정체성’으로 존중되고 사회문화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논리와 경로를 섬세하게 구성해낸다. 이 책은 그 같은 변화를 현실에서 일구어내려는 이들의 분투에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다.

  •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기쁨이 떠오른다. 이 책과 이 책을 함께 읽어준 광인들 덕분에 나는 광기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기쁘게 깨달았다. 광기 앞에서의 모든 포기와 도망의 기억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기뻤다. 그리고 무엇보다 광기를 질환으로 간주한 의료적 모델에서 벗어난 연구자, 매드운동의 중요성을 포착하고 광인의 목소리를 경청한 연구자, 광기를 연구의 폐쇄병동에 방치해온 우리 사회 인문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연구자를 만나서 기뻤다. 아마도 이 책이 의지하는 인정이론이 매드운동에 대한 유일한 접근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접근법을 쓰든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사회는 반드시 광기와의 대화를 시작해야만 한다.”

  • 의료적 모델은 광기를 경험하는 당사자들을 은폐된 곳으로 유배시키고, 당사자들을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뒤 목소리를 거세했다. 이런 폭력은 때로 당사자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사라져간 당사자들에게 손짓하고 싶었다. 매드운동에 대해 토론하고, 우리가 겪어온 영적인 경험과 독창성으로 대서사시를 쓸 수 있다는 설레임을 나누고 싶었다. 저자는 광기를 소환하면서 당사자들을 이 세계로 호출한다. 집요하도록 철학적이며 사회적인 질문들을 던지면서 말이다. 매드운동의 대항서사는 광기를 체계화하고 정돈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당사자의 광기의 경험이 정체성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어야 할 것이다.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은 ‘해방’이라는 오래된 본향本鄕을 일깨워준다.

  • 미쳤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러하다. 광기와 무관한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의학의 언어를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으로 본 푸코는 광기와 이성이 서로 단절될 수 없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매드 정체성에 대한 거대한 지평을 열어준 이 책의 열정에 감사드린다. 두 번역자의 깊은 고뇌와 노고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데카르트는 400년 전에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나는 당연히 나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비틀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광기와 이성의 구분이 없는 나를 생각한다. 그렇게 매일 나는 실존하며 살아간다.’

  • 이 책은 ‘정신질환은 생물학적 실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가?’라는 진보적이면서도 진부한 질문에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생물학적 담론이 독백을 멈추고 당사자들과의 대화의 장으로 나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교류해야 하는 이유를 선물처럼 알려주는 책이다.

책 속으로

문화기술지 연구를 통해 얻은 경험은 내가 매드운동을 바라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매드운동이 추구하는 노력을 질환과 관련된 의학적·심리학적 모델을 넘어 광기와 관련된 문화적 레퍼토리를 확장하려는 시도로 간주하고자 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내가 의도한 것은 매드운동의 주장과 요구를 존중하며 진지하게 마주하는 것이다. -15쪽

매드 프라이드는 자신들의 경험이 정신의학의 영향 아래 의료화되는 것을 거부하며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관점을 정립한다. 이와 같은 매드 포지티브 접근법은 나를 병리화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아픈’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75쪽

정한 개인이 자유로운 행위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자기개념, 믿음, 행위의 이유 등이 사회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그 인정이 해당 개인이 자유로운 행위주체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즉 주체는 홀로 자유로울 수 없다. -187쪽

나는 이 책을 통해 광기가 정체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 매드운동이 활동가 집단을 넘어 더 많은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매드 서사가 즉각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였다. 매드 정체성에 대한 인정 요구에는 규범적인 힘이 있으며, 사회는 반드시 광기와의 대화를 시작해야만 한다. -265~266쪽

인정 요구에 대한 승인이 무조건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으며, 승인이 실현되려면 해당 (매드) 서사를 실제적으로 마주하고 이해하며,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과정을 가능케 하는 주요한 수단이 바로 (넓은 의미의) 대화다. -472쪽

한국사회는 광기를 경험하는 당사자의 서사를 어떻게 써내려갈 것인지, 이를 위해 사회와 문화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그런 문화적 변환이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숙고하고 함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크나큰 과제를 앞두고 있다. 병리화된 언어 속에서 무시받아온 당사자들의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이 책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이다. -561쪽

출판사 서평

“사회는 반드시 광기와의 대화를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국가적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왔는가?

‘미쳤다는 것’을 문화와 정체성의 근거로 재발명하는
흥미진진한 철학적 탐구의 여정
모욕과 낙인을 걷어내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미국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의 핵심 인물인 주디 체임벌린Judi Chambelin은 탐탁지 않은 행동을 가리켜 ‘아프다’거나 ‘미쳤다’고 지칭하는 것이 만연해 있는 사회적 경향성을 지칭하기 위해 정신장애차별주의mentalism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의식화는 단지 정신의료 시스템의 영역에 멈추지 않고 환자경험자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포함하는 거대한 차별의 체계 전체를 문제 삼는다.”

‘광기’의 또 다른 이름은 언제나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비정상’ ‘비이성’ 등과 같은 그 명명들은 광기의 이름이자 동시에 낙인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에 따르면, 광기는 생물학적·심리적·사회적 요인 등의 상호작용으로 야기되는 정신질환에 해당하며, 조현병, 양극성 장애, 정신증 등과 같은 하위 유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의료적 관점은 광기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상상력을 강하게 억압할 뿐 아니라, 광기가 지닐 수 있는 창조적 힘을 외면한다. 즉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광기는 치료 및 교정해야 할 병리적 대상으로서, 철저히 의료적 임상 현장에 종속되어 있다.
다른 한편, 지배적인 의료적 관점의 반대편에는 ‘정신질환’이라는 낙인과 꼬리표에 맞서 광기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고 그 생생한 언어를 되찾고자 하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있다. ‘매드 프라이드mad pride’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매드운동은 광기의 의료화 흐름에 저항하며 강제치료, 회복을 위한 서비스의 부재, 사회적 낙인 및 차별 등의 문제에 활발히 개입한다. 매드운동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광기에 대한 사회문화적 존중과 인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고 전환이 이뤄진다. 흔히 긍정적인 정체성에 대한 모욕으로 일컬어지는 광기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광기를 마음의 질환으로 바라보는 의료적 관점과 정신의학을 개혁하는 것이 대안으로 부상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철학과 인류학을 공부한 저자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는 ‘미쳤다는 것’, 즉 광기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떤 사회적 요건들이 필요한지 세밀히 논증하고 탐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광기라는 현상을 두고 정신의학과 당사자들의 매드운동이 팽팽히 대립하는 현실이 이 책의 배경을 이룬다. 저자는 매드운동과 그 당사자들이 진정한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고 자신의 역량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 운동의 주장은 물론 그에 회의감을 드러내는 정신의학의 관점 모두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매드 프라이드’로 대표되는 당사자운동에 대한 깊은 존중의 태도로 일관하는 저자는 그 운동을 그저 옹호하는 손쉬운 방편 대신, 당사자운동과 그 반대편 그 모두의 입장을 톺아보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택한다.
매드운동은 정체성, 자아, 행위주체성,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지배적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귀중한 문화적 자원이며, 지금처럼 광기를 의료적 틀 안에 가두는 것이 (잠재적) 당사자들을 부당하게 배제하는 일은 아닌지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드 정체성에 대한 무조건적 인정을 강요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런 방식으로는 광기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전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두 집단 혹은 관점이 ‘화해의 태도’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할 때,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한 화해를 이뤄낼 때, 대항적 광기 서사는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우리 모두를 그 ‘대화’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정신장애 당사자의 목소리를 찾아서: 초기 당사자운동의 흐름
미쳤다는 것을 어떤 집단 혹은 공동체의 문화 및 정체성의 근거로 제시하는 흐름에 대해, 즉 매드 프라이드 운동과 매드 포지티브 운동의 인정 요구에 대해 사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의 역사부터 짚어야 한다. 저자 라셰드는 1970년대의 민권운동, 소비자/(서비스)이용자/생존자c/s/x 운동 등 19세기 후반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전개된 당사자운동의 흐름을 개괄하며 여타의 사회운동과 차별화되는 매드운동만의 급진성과 독창성을 발굴해낸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은 여성, 흑인, 성소수자들의 민권 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정신장애인 민권운동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영국의 경우 정신과환자연합이, 미국의 경우 정신이상자해방정선, 정신과환자해방전선, 그리고 정신과적 폭력에 대항하는 네크워크 등의 단체가 그 흐름을 주도했다. 물론 이전에도 민권 의제를 외친 단체들은 있었지만, 1970년대 이후 출현한 이 당사자단체들은 자신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정신건강 전문가들을 배제하고 당사자들로만 조직을 꾸렸다는 점에서 노선을 뚜렷하게 달리했다. 정신의학 자체를 ‘종식’시키면서 강제입원 및 강제치료를 폐지하고 정신과 환자가 정신의료기관 밖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활동 목적이었다. 즉 이들은 정신질환을 가진 누군가가 있고, 그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의료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기존 ‘정신의료 시스템’의 핵심 가설 자체를 해체했다. 이른바 ‘의식화consciousness-rasing’라고 불리는 급진적 전환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사자 정체성은 여러 갈래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라셰드는 이를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살펴본다. 그 한편에는 의료 서비스가 시장 기반의 방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환자 및 환자경험자ex-patient를 일컫는 명칭으로 등장한 ‘소비자’ 혹은 ‘서비스 이용자’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이런 식의 소비자 정체성을 비판하며 등장한 ‘생존자’ 정체성이 있다. 생존자 담론은 ‘환자’라는 용어에 담긴 의존성과 취약성을 폐지하고자 하며,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해석한다.
이를테면, 살아남았다는 것은 “정신의료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강제구금” “파괴적이고 무용한 치료” “정신적 고난과 괴로움” “사회 안에 존재하는 차별과 낙인” 등 여러 층위의 고통과 폭력에서 살아남았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강제적으로 부여받았던 ‘환자’ 정체성 대신 ‘생존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택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는 자신의 경험에 관한 ‘전문가’로 부상한다. 그러나 생존자 담론에는 분명 광기라는 현상에 부착되어 있는 부정적인 가치(정신질환 및 병리학의 언어에서 영향을 받은 가치들)을 완전히 전복시키지 못했다는 한계도 있다. ‘생존’의 개념에서 드러나듯, 이 담론은 광기의 경험을 여전히 부정적인 무엇으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광기’의 언어를 되찾아: ‘매드 프라이드’ 담론
라셰드에 따르면, 정신질환의 언어와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규범, 가치관에 확실하게 도전하는 담론은 매드 프라이드가 유일하다. 매드 프라이드 운동은 기존 당사자운동과 유사하게 정신장애 당사자가 겪는 부당한 억압 및 낙인의 경험에서 출발하면서도, ‘매드mad’라는 언어를 보존함으로써 광기를 긍정적인 무엇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즉 이 담론은 광기를 둘러싼 인식의 체계 전체를 전복시킴으로써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광기를 적극적으로 주장한다(‘매드 정체성’). “광기의 언어와 텍스트는 억압의 언어를 전복시키고 폄하된 정체성을 되찾으며, 차이에 대한 존엄과 프라이드를 복원한다.”
1997년 최초로 결성된 매드 프라이드는 새로운 당사자운동의 시대를 열었다. 1993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정신과 생존자 프라이드 데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프라이드pride’라는 용어를 끌어와, (서비스)이용자/생존자의 관점의 무력함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적지 않은 활동가들은 해당 관점이 관료적 시스템에 흡수되어 무기력해지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매드 프라이드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은 이 새로운 운동이 약물거부운동을 지속하면서도 “광기의 경험과 그것을 둘러싼 언어들”을 되찾을 것을 선언했다. 현재까지 매드 프라이드는 한국을 비롯해 캐나다, 영국, 미국, 프랑스, 호주 등 다양한 국가에서 개최되었으며, 특히 7/14로 지정된 국제 매드 프라이드 데이는 하루에서 일주일가량 지속되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이 행사에서 당사자들은 다양한 예술 전시, 공연, 야유회, 시위, 음악 등의 다양한 활동과 정신의료 시스템과 관련된 패널 토론 등을 기획하며 매드 정체성과 매드문화를 기념한다.
매드 프라이드 운동의 핵심은 광기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 있다. 광기를 질환으로 바라보는 관습적인 이해에서 그것을 정체성과 문화의 근거로 재발견하는 관점의 전환이야말로 매드 프라이드의 핵심이다. 따라서 광기의 경험은 더 이상 ‘정신질환’과 ‘정신병’이라는 언어의 틀에 갇히지 않으며, 광인 역시 환자나 희생자가 아닌 자신의 독특한 경험과 현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주체가 된다. 이 운동에 관여하는 당사자들의 언어는 매드 프라이드의 급진성과 전복성을 생생히 드러낸다. “광기는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질환’도, 내가 치료하길 원하는 ‘증상’의 집합체도 아닌, 내 정체성의 한 측면이다.” “매드 포지티브 접근법은 나를 병리화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아픈’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정상’이라는 기존의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차별적이었던 개념에서 벗어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매드 포지티브’ 전략
그렇다면 매드 프라이드 운동은 정신적 고난 및 장애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까? 무엇보다 우리는 당사자 활동가들의 글에서 자주 언급되는 매드 포지티브Mad positive라는 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드 포지티브란 흔히 정신병리학에서 비정상적인 이상 징후로 간주하곤 하는 감각적 왜곡, 환각, 환청, 망상적 지각 등을 특별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접근법을 말한다(매드 포지티브의 관점에서 그런 증상들은 ‘감각 인식이 고조되는 상태’ ‘강렬한 음성 감각과 시각적 자극’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험에서 복잡성과 중요성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등으로 새롭게 언어화될 수 있다). 이런 시각에 따라 광기라는 현상은 독특하고 창조적인 산물들의 잠재적 원천이 된다. 매드 프라이드 관련 글과 당사자 활동가들의 발언에서 광기와 창조성 사이의 연결고리는 자주 언급되며, 그 글들은 ‘정신적으로 아프다’고 간주되는 이들이 이룩한 문화적, 예술적 공헌을 강조한다.
“매드 프라이드는 ‘미쳤다’고 간주되었던 사람들이 우리 세계에 기여한 위대한 문화적 공헌을 상기시킨다.” “매드 프라이드는 광인들의 강점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존재를 기념하는 행사다. 이것은 우리 삶을 비극적이고 살 가치가 없는 것, 혹은 광인들을 폭력적으로 묘사하는 경향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 그것은 우리의 기술, 공헌, 창조성, 시, 작문, 음악, 예술, 연극, 유머, 아이디어, 지식, 우정, 공동체를 기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매드 포지티브 접근법에 기반한 창조적 실천들은 명백히 부정적으로 보이는 광기의 측면을 새롭게 구상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매드 프라이드 운동은 매드 포지티브의 사유를 바탕으로 정신적 고난과 장애를 다루는 전략을 구축한다. 첫 번째 전략으로는, 광기가 정신적 고난과 연관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한 개인의 실패나 병리학적 요인에 따른 결과가 아닌 사회적 관계적 문제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여기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전략을 통해 매드 프라이드 운동은 학대, 차별, 억압, 낙인, 빈곤,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을 거론한다. ‘정신질환’이라고 불리는 증상들은 사회의 주요 영역 및 시스템에 존재하는 잔혹한 문제들과 결코 무관치 않은데, 이 지점을 누락한 채 그 책임의 화살을 개인의 생물학적 요인에 겨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략으로는 정신적 고난과 장애가 ‘질환’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기능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즉 그런 현상을 ‘질환’으로 만드는 것은 그와 같은 차이를 수용하지 않는 바로 그 세계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될 권리’가 있다: ‘광기’라는 정체성의 인정을 향해
양면성을 지닌 광기의 특성은 한 개인이 지닌 특질과 민감성이 ‘위험한 선물’일 수 있다는 매드 프라이드 담론의 핵심적인 주장으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목소리를 거듭해서 듣는 등 광기의 고통스러운 측면은 광기라는 특별한 선물에 지불해야 할 수도 있는 대가와도 같다. 이처럼 당사자들은 광기 및 그와 결부된 다양한 현상들을 자신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질환’이 아닌 자기 정체성의 한 측면(내가 누구인지, 내가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것)으로 인식하며 ‘자기 자신’, 즉 ‘광인’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주창한다. ‘광인으로서 살아갈 권리’에는 광기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공동체를 꾸릴 권리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권리들을 쟁취하기 위해 매드 프라이드 담론은 “광기 및 정신병을 정의하는 사회적 신념, 규범, 가치관, 전반적인 관행”에 변화를 요구한다. 사회가 광기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수용하고, 광기의 창조적이고 영적 잠재력을 인정하며 당사자들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광인들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매드 프라이드의 전망이다. 그러나 매드 프라이드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든 관계없이 평등하게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평등의 정치’ 그 이상을 표명한다. 프라이드 운동이 요구하는 것은 그 다름에 대한 ‘인정’으로,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존중을 획득하고자 한다.
라셰드는 그렇다고 해서 그 담론을 의심의 여지없이 타당한 것이나 자명한 도덕적 의무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어떤 담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는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를 진정으로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운동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 운동의 파급력과 가능성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서라도 확언보다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라셰드는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증적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미쳤다는 것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조건들을 세밀히 견주어나간다.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정체성’에 대한 사유와 인정의 범위
라셰드는 광기, 즉 미쳤다는 것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 전에 광기가 문화를 구성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물론 당사자 활동가들의 문헌은 광기의 독특한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매드문화의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사실상 매드문화라는 발상은 문화공동체의 범주에 깔끔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매드문화에는 체계적인 의사소통 매체로서의 공유된 언어shared language가 존재하지 않는다.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를 진단받은 사람들은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기 때문에 각자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며, 단일한 언어나 공유된 역사 같은 것이 존재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런 특성은 광기가 하나의 문화를 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의 설득력을 약화한다.
그러나 라셰드에 따르면, 문화적 권리에 앞서 우리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정체성’의 문제이다. 만일 광기가 문화(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화적 권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결국 정체성의 문제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렇듯 라셰드는 문화가 정체성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며, 문화적 권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체성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또한 정체성은 문화적 소속 이외에도 직업, 인종, 종교, 성별, 성 정체성 등 다양한 집단 범주의 영향을 받으며, 문화적 권리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의 핵심 쟁점은 ‘정체성’에 있다. ‘각자의 정체성의 타당성과 가치에 대한 상호인정,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화해적 태도로 서로를 마주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망상, 극단적인 기분, 수동성 현상 등으로 발현되는 광기는 정체성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정체성 형성의 기반을 약화하는 ‘정신병’에 지나지 않는가? 이와 같은 광기의 현상들은 흔히 중대한 인식적 결함을 나타낸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실패한 정체성으로 섣불리 단정되곤 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라셰드는 어떤 정체성 주장이 사회적 인정의 범위에 들기 위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세 가지 요건을 제시한다. (1) 해당 주장은 실패한 정체성이 아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이어야 하며, (2) 통합된 정신의 표현이어야 하며, (3) 충분한 기간에 걸쳐 지속되어야 한다는 요건이 바로 그것이다. (1)과 관련해 라셰드는 해당 주장이 진릿값을 가질 수 있는지, 즉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 가능한지 여부를 검토한 뒤, 진릿값을 가질 수 있다고 간주되는 경우에 대해 착오의 본질을 살피며 판단을 이어간다(애초 진릿값을 가질 수 없는 주장들은 대등한 지위를 갖는 하나의 관점에 해당하므로). 다시 말해, 당사자의 관점에서도 해당 주장이 틀린 경우 그것은 실패한 정체성에 해당하며, 해당 정체성 범주에 대한 급진적인 개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틀렸다고 여겨지는 경우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이 된다.
‘유럽계 백인 여성’으로서 자신을 ‘흑인’으로 정체화한 레이철 돌레잘의 사례는 특정 정체성 범주(흑인)의 의미 자체를 의문에 부친다는 점에서 매우 논쟁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그녀는 흑인이라는 사회적 범주를 급진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주장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자신이 흑인이며 흑인 정체성을 가졌다고 믿는) 돌레잘이 단지 착오나 망상에 빠져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즉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의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정체성이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경청하고 토론을 진행해야 할” 가치가 있으며, 모종의 사회적·정치적 행동을 통해 그 정체성 범주에 문제를 제기하고 수정을 요청할 수 있음을 뜻한다. 결국 모든 망상적 정체성이 반드시 실패한 정체성인 것은 아니며, 각각의 정체성 주장은 각각의 방식과 맥락에 따라 세밀히 분석될 필요가 있다.

‘광기’를 새로 쓰기: 다양한 ‘매드 서사’의 가능성
광기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매드 서사Mad narrative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광기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는 곧 본질적으로 광기를 탈의료화하고, 지배적이고 억압적인 의료 서사를 정서적, 경험적, 심리적 다양성이 포함되는 대항서사인 매드 서사로 새로 써야 한다는 요구와도 같다. 이때 매드 서사는 자아의 분열 및 불연속성과 같은 특정 정신적 현상이 정체성 형성을 방해하는 손상으로 부적절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하며, 나아가 당사자에게도 자신의 체험을 통합된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청사진을 제공한다. 라셰드는 매드 서사의 이런 기능을 ‘광기를 정돈하는 것’으로 명명한다. 즉 광기를 정돈한다는 것은 광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인정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를 말한다. 매드 서사가 행하는 ‘정돈’은 다채로운 인정의 시나리오를 가늠하고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이 책에서는 ‘영적 변화’의 서사, ‘위험한 선물’ 서사, ‘치유의 목소리’ 서사로 대표되는 세 부류의 대항적 매드 서사를 소개하고 있다. 영적 변화의 서사에서는 광기의 영적 측면을 부정하는 정신의학적 접근법을 비판하며 영적 화두를 되살리고자 한다. 여기에는 영적 접근을 위한 사회적 공간과 광기의 잠재력에 대한 깊은 이해가 존재했던 다른 공동체 및 역사적 시대와 대조되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몸-자아-세계로 분절되는 관습적 구분을 무너뜨리며 광기의 경험을 재구성한다. 위험한 선물 서사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광기만의 독특한 사고 과정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서사는 당사자들이 직면할 수 있는 고난과 어려움을 인정하는 동시에 광기가 지닌 창조성과 독특한 관점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체험을 새로운 해석적 맥락에 위치시킨다.
마지막으로, 목소리 듣기 운동Hearing Voices Movement, HVM에서 비롯된 치유의 목소리 서사는 정신의학이 ‘환청’으로 간주하는 목소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 ‘목소리 들림’ 현상을 정신병리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대신,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와 의미 있는 인간적 경험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목소리는 “삶의 문제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나타내는 ‘메신저’”이기에, 당사자(목소리 청자)가 해당 목소리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이 서사의 핵심은 목소리에 대한 당사자 자신만의 독특한 이해에 있다. 목소리와의 특별한 관계를 발전시킴으로써 당사자는 목소리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화해’로 나아가는 길: ‘광기’가 문화적 자원이 되는 사회를 꿈꾸며
라셰드가 제기한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우리를 ‘사회적 대화’라는 최종 종착지로 이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쓰일 수 있다. 정신장애 당사자들 그리고 매드운동이 제기하는 인정 요구에 이 사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사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광기를 치료해야 할 질환으로 바라보는 정신의학과 그 틀을 깨고 광기의 창조성과 타당성을 제시해 보이는 당사자운동 사이의 극심한 대립은 쉬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 대립 구도는 사회적 대화에 존재하는 깊은 간극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여기서 라셰드는 달성된 결과로서의 화해가 아닌 태도로서의 화해를 논하며 대화에 필요한 태도와 기술을 섬세히 벼려나간다. 대화에 앞서 우리(모든 사회구성원)는 “다른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타당성을 검증받고 자리 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그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즉 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기획이 중요하고, 또 그 타당성을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일이 상대방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의 말/주장을 경청할 수 있다. 이 경청 속에서 화해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매드 서사에 다가갈 때 필요한 태도는 바로 이것이다.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정신의학의 관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무시와 오인을 초래하므로, 매드 서사를 이해하려는 (사회구성원들의) 진지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 물론 이해와 화해의 태도를 확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해물은 수없이 많다. 무관심, 부정, 방관자 효과부터 (타인과의) 정서적 연결의 부재,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까지, 우리의 관심을 가까운 지신을 넘어 더 많은 타인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라셰드가 보기에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타인을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여기는 우리의 편협한 생각이다. 이를테면, 어떤 타인을 우리와 같이 고통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인간의 핵심적 가치와 역량을 결여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화해를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물일 수 있다. 이런 편견들을 뒤집고 타자를 자신과 같은 능력/역량을 지닌 존재로 바라볼 때 화해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라셰드는 광기와 관련한 작업의 중요한 향후 과제가 “우리를 성공적인 화해로 이끄는 대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개념과 방법을 찾는 데 있다고 지적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작은 단초를 앤 스위들러가 제시한 ‘문화적 레퍼토리cultural repertoire’ 개념(“문화란 상징, 이야기, 의례 그리고 세계관의 ‘공구 키트tool kit’이며, 사람들은 이 키트를 자신이 가진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다양한 형태로 사용할 수 있다”)에서 발견한다. 매드 서사와 성공적 화해를 이룬다면, 우리는 의학적, 심리학적 관점을 넘어 광기와 관련된 문화적 레퍼토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광기가 문화적 자원이 된다면, 어떤 이들이 그 자원을 활용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매드 서사가 단지 당사자뿐 아니라 사회의 더 많은 이들에게 수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당장 광기의 현상을 경험하는 이들, 심각한 사고장애나 인지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그런 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 이들까지. 우리는 언제든 그와 같은 정신적 어려움,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존재다 결국, 사회는 반드시 광기와의 대화를 시작해야만 한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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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68730649
발행(출시)일자 2023년 06월 21일
쪽수 572쪽
크기
141 * 210 * 37 mm / 729 g
총권수 1권
원서(번역서)명/저자명 Madness and the Demand for Recognition/Mohammed Abouelleil (Wellcome Trust ISSF Research Fellow, Department of Philosophy, Birkbeck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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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 되고자 하며 무엇일 수 있을까

『미쳤다는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라는 논쟁적인 표제는 사실 많은 내용을 함축한 질문이다. 이전까지 미쳤다는 것은 정신병원과 같은 수용시설에 갇히거나 설사 지역 사회에서 살게 되더라도 원자와 같이 뿔뿔이 흩어져 어떤 집단적 정체성도 가질 수 없는 부정적 고립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낙인은 공고해서 미쳤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사회관계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저자는 질문한다. 미친 것을 정체성의 계기로 삼아보자고. 그러면 미친 이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도래하는 것일까?

저자는 매드 운동과 정체성의 인정을 연관 짓는다. 치료나 서비스 개선에 초점을 두는 의료나 복지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발적인 당사자 운동의 입장에서 ‘미쳤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성소수자 운동이 ‘퀴어’라는 정체성을 통해 결집하고 사회적·문화적 인정을 얻어냈듯이 아직 뒤처져 있는 매드 운동도 ‘미쳤다는 것’을 경유하여 긴 역사동안 배제되고 주변화 되었던 ‘미쳤다는 것’에 포함되는 이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는 성원권을 얻어내고 ‘미쳤다는 것’ 특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하나의 문제는 그동안 ‘미쳤다는 것’을 의료화 시키고 시설화 시켰던 권력과의 대면이다. 질병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질병은 구성된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질병의 범주는 권력과 지식과 주체화 양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권력은 어떤 지배계급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정체성을 우리 모두가 참된 방식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권력은 인간 자체를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과학을 토대로 환자와 건강한 사람, 시민과 범죄자, 그리고 정상과 변태성욕자를 구분하는 과학적 기준을 제시한다. 개인은 권력이 제시하는 합리적 기준에 복종함으로써 사고, 행동, 정체성에 있어‘자기 반성적’인 주체가 된다. 권력은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미쳤다는 것에 진단을 내리는 의료행위와 기준이 되는 규범과 주체화 양식은 그 자체로 권력의 실천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가 저항을 구성하고자 할 때 우리는 무(無)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정체성을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말한 권력과 지식과 주체화의 양식에 포섭되어 자신도 모르게 억압을 생산하고 실천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정체성과 규범의 억압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수 있을 때 ‘미쳤다는 것’은 잠재적인 가능성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평등해지기까지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매드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중에 정체성의 여러 갈래를 탐구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과 실패한 정체성을 구분 짓는 저자의 입장이다. 기존의 정체성의 한계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정체성만을 광기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몫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치안의 영역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눈다. 어떤 말은 진지한 담론으로 어떤 말은 소음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말하고 볼 수 있는 자리를,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자리를 배정한다. 여기서 능력주의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고 그것은 조화로운 질서로 포장된다. 하지만 해방의 정치에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존의 지배의 질서를 거부하면서 ‘평등의 정치’를 요구한다. 이때 정치란 아무나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등의 전제를 놓치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 우리는 불평등을 인정하고 이를 무한히 축소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평등을 현실에서 끊임없이 입증하고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평등과 해방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평등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가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정의의 원칙을 지향하는 사회라면 평등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평등은 정치공동체의 밖에서 인식되거나 누릴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평등한 권리를 행사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를 지속적으로 공동의 세계 속에서 관철하려는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확보하고 누릴 수 있다. 정신장애인에게 저마다의 개성이란 이 세상에 단 하나이고 유일무이하며 변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긍정일 뿐 아니라, 공통의 권리를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한에서만 비로소 질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가정을 의미하던 사적 경제 활동이 대중의 유일한 관심사가 된 사회이다. 그것이 ‘사회적 영역’으로 부각되면서,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에만 매몰된 순응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정치 영역을 되살리고 행위가 소통, 연대, 협력을 무한히 창출하는 특이성들이 연결되는 공간을 그려볼 수 있다. 경제 지상주의에 빠진 정치 문화를 벗어나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사유하고, 대화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은,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나눌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 공론장이 사라진다면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있는 매드 서사는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질병과 병리를 넘어 광기의 사회적 의미를 다양화함으로써, 일반적이지 여러 차이들을 좀 더 폭넓게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매드 프라이드는 우리의 개인적·집단적 강점을 포함하는 매드 정체성, 매드 공동체, 매드 문화를 기념한다. 또한 매드 프라이드는 정신의학의 역사와 광기의 경험 속에서 우리가 느끼도록 강요받은 수치심과 맞서고, 정신의료제도와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억압에 저항한다. 매드 프라이드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광인인 우리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10점 중 10점
/집중돼요
광기를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병리적 징후로 판별해보자면 나르키소스(자기 몰입)적 요소, 에코(자기 혐오)적 요소 혹은 아비투스적 요인이 중첩돼 발현되곤 합니다. 인정 욕구를 향한 투쟁과 좌절, 그 배경을 이루는 사회문화적 자본의 차이에서 생기는 벽이 광기의 만성화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후의 폐쇄적 단일 형상성에 포획되는 차이의 인정 욕구가 아닌, 그것을 넘어서 해방적 자유의 잠재성을 배양하는 포용적 인정 욕구를 대안으로 구상할 수 있습니다. 타자의 욕구와 그 배경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욕구에 내재한 한계를 극복하는 데 적용하는 '간극'의 보편성 테제가 그것입니다. 책의 '매드운동'도 정신병과 비정신병의 경계없이 포용과 연대의 간극을 보편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10점 중 10점
/도움돼요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10점 중 10점
/도움돼요
일상을 위한 치료냐 인류를 위한 숭배냐!
미쳤다는 것은 어느 것임을 선택하기!
10점 중 10점
/쉬웠어요
우리와 다른 이의 감수성을 사유할 수 있는 책
10점 중 10점
/쉬웠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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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을 향한 동기는 목적론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심리적 본성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규범적 지위가 부정되었다고 인식할 때 인정을 요구하게 되는데, 인정 담론을 구성하는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통찰을 인지할 때 비로소 그런 인식을 얻을 수 있다.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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