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송 제국 쇠망사
송나라 건국 초기부터 멸망까지 약 300년의 역사 중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정치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덕치를 바탕으로 한 송 왕조의 정치는 문화적 풍요로움을 가져왔지만, 조공을 바치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외교 정책은 사실상 전쟁의 주도권을 주변국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어떤 시대보다 황권이 강했던 송나라는 결국 국내외 갈등과 분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쇠락하여 원나라에 패하고 만다.
덕치의 시대를 연 송나라는 어떻게 멸망했을까
300년의 역사에서 쇠망의 흔적을 찾다
당나라 멸망 이후 혼란했던 ‘오대(五代)’ 시대를 끝내고 960년 건국한 송나라는 무력 대신 문치를 추구하며 평화의 시대를 유지했다. 주변국과 화의를 맺는 한편, 과거제도를 통해 사대부들을 적극 조정에 등용하면서 황권을 강화했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문화적?경제적으로도 번영했다. 그러나 과도한 관리 등용과 국방비 지출 등 국가 재정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에 변법을 마련해 국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조정 내부의 분열로 실패했고, 금나라와 맺은 협약 관계가 복잡한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점차 국력이 쇠해 1279년 멸망한다.
이 책은 송나라 건국 초기부터 멸망까지 약 300년의 역사 중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정치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역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꾼 왕안석(王安石)의 변법은 구체제를 지키려는 반대파에 밀려 실패했고, 여기서 파생된 당파 싸움은 서서히 송나라의 국력을 약하게 만들었다. 조공을 바치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외교 정책도 사실상 전쟁의 주도권을 상대국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어떤 시대보다 황권이 강했던 송나라는 결국 국내외 갈등과 분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쇠락하여 원나라에 패하고 만다.
작가정보
저자(글) 자오이
1965년생. 현재 난징대학교 중문학과 고전문헌대학원 교수로 중국 고전문헌학, 중국 문화사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고 있다. 중국 교육부에서 진행한 육조시대 연구와 도교 경전 자료 정리 등과 같은 대형 연구 과제를 맡을 정도로 전공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대표적인 소장학자다. 문헌학과 문화사 분야의 연구는 물론 이를 바탕으로 당대의 역사를 서술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대송 제국의 쇠망: 서풍에 떨어진 푸른 잎大宋帝國的衰亡: 西風凋碧樹》, 《구처기丘處機》, 《패도주의: 북송 왕안석의 개혁 비평王?義利: 北宋王安石改革批判》 등이 있다.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한중통역번역학과를 졸업했으며, 국제회의 동시통역을 전공했다. 가톨릭대학교 및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에서 중국어 통번역 강의와 동시통역사로 활동하며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화폐전쟁》, 《관점》, 《시진핑》, 《공자가 내게 인생을 물었다》, 《한비자에게 배우는 처세술》, 《본색本色》, 《시간이 너를 증명한다》, 《출가》, 《국가는 왜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가》, 《적벽대전 1, 2》 등 다수가 있다.
목차
- 주요 인물 소개
제1장 비극을 부른 4전의 땅
어지러운 시절|변량으로 천도하다|분쟁과 평화의 경계에 서다|문인들의 전성시대|사대부와 군사 양성의 전략|궁하면 변혁을 추구한다
제2장 개혁을 이끈 인물들
이상주의 개혁파, 범중엄|송나라에 인재가 넘치다|왕안석의 경제 개혁|왕안석 변법의 공과 과|시사時事의 중심이 된 변법파|사대부들의 감정적인 복수전|피할 수 없는 파벌 싸움
제3장 남송시대, 절반의 국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송 휘종|금과 연합하여 요를 정벌하다|정강의 난|죽음의 고비를 네 번이나 넘긴 고종|부드러운 덕치로 천하를 다스리다|진회의 직권 남용이 점점 심해지다
제4장 실패로 돌아간 평화의 시대
황제와 진회, 의기투합하다|성공한 수비와 실패한 공격|번성하는 도시, 임안|남송 제국의 새로운 시대|학술과 정치를 결합한 주희의 등장|원칙을 지킬 것인가, 실리를 추구할 것인가
제5장 권력 문제의 폐단이 드러나다
스스로 낮춘 황제들의 속사정|황제, 제도 위에 군림하다|잘못된 북벌 계획|한탁주의 실수|황태자 폐위 사건의 진상|재상의 권력을 문제 삼다
제6장 차지하는 자와 빼앗기는 자
문명의 길에 한 발 다가서다|몽고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양양전투: 제국 최후의 일격|송나라의 마지막 충절지사, 문천상|애산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다
마치는 말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책 속으로
태조는 한 명의 사대부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자손에게도 이를 당부했다. 이토록 관대하고 온후한 황제는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문인을 양성하려면 두둑한 봉록과 정치적 특권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남아도는 병사와 함께 필요 없는 관리들이 많아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송나라의 관제는 전당의 제도를 답습했지만 두드러진 변화를 주어 실질적으로는 변화무쌍한 만화경을 방불케 했다. 허와 실이 공존하고 복잡하여 눈이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가령 한나라, 당나라 이후 이른바 ‘관(官)’과 ‘질(秩)’을 구분해 ‘관’은 업무를 맡기고 ‘질’은 등급을 매겨 상호 연관되면서도 별개의 존재로서 질서정연한 체제를 형성했다. _70~71쪽, 〈제1장 비극을 부른 4전의 땅〉 중에서
왕안석은 최종적으로 참신한 경제 정책을 선택했다. 가령 행정 수단으로 토지세 등급을 정하고 금리가 상대적으로 낮은 정부 대출(청묘법), 그리고 돈을 내면 노역을 면제해주는 제도(고역법) 등이다. 그 실질은 모두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고 계획하는 행위로, 국가가 생산과정의 이익을 향유한 후 경제의 발전을 추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개혁은 어떤 면에서 심지어 원시 국가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가령 국가의 전매제도와 물가 억제, 유통분야에 대한 직접 통제를 통해 상업 이윤을 제한하는 조치는 실질적으로는 고대의 제도에서 변천해왔으며, 다만 내용이 좀더 현실에 접근했을 뿐이다. _ 125쪽, 〈제2장 개혁을 이끈 시대의 인물들〉 중에서
송 제국은 동경에서 패배한 후 계속 뒤로 밀리며 원래 국토의 절반을 잃었다. 적의 사나운 공세에 백년 기업(基業)은 이미 처참하게 무너졌다. 거의 4년 동안 조정은 겨우 살아남았으며 조씨(趙氏)의 명맥을 유지한다는 것은 도피를 위한 핑계였다. 금나라 군대가 내부 문제로 인해 대외공격이 잠시 무뎌진 사이, 송은 국가 전반의 재건에 힘써야 했다. 물론 동남쪽 한 귀퉁이의 반쪽 땅만 남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산하를 다시 개건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 엄밀히 말해 고종은 획기적인 정치 변혁을 추진하지 않았다. 화친을 강구하는 것 말고는 쇠미해진 형세를 돌이킬 주관적 동기가 부족했다. 국가에 대한 땜질식 운영으로 연명하는 그의 동기는 단 한 가지였다. 송 제국이라는 낡은 ‘전차’가 그런대로 굴러가 자신의 황제 자리를 보전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_ 243~244쪽, 〈제3장 남송시대, 절반의 국토〉 중에서
순희 연간은 옛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는 분수령이었다. 남쪽으로 천도한 후 출생한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하여 장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뛰어난 인재들을 가로막아 그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주희, 진량, 신기질 등은 모두 국가를 위해 결정적 역할을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중략) 정치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역량도 마찬가지로 역사의 진보를 추진했다. 2세대의 뛰어난 인재들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처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정신은 무궁한 시공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으니, 누가 감히 인생의 최고 경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_ 317~318쪽, 〈제4장 실패로 돌아간 평화의 시대〉 중에서
한탁주는 친필로 결재하는 수단으로 대간 인선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략) 조정에서는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황제의 결재가 중서성을 통해 나가지 않은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으며, 이 모든 것이 한탁주가 황제를 좌지우지한 결과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파면당한 간관 황도는 한탁주가 “황제의 어필을 내세워 원래의 간관을 축출하는” 수법은 과거 채경이 전횡하던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주희가 상주하여 황제에게 진언하고 한탁주가 권력을 전횡하여 한탁주가 “임금의 권위를 끌어내렸다”고 지적함으로써 사건을 원칙의 문제로 끌어올렸다. 제발이 저린 한탁주는 오히려 반격에 나섰으며, 황제를 충동질하여 주희를 파면했다. _ 353쪽, 〈제5장 권력 문제의 폐단이 드러나다〉 중에서
황제 일행은 신회현(新會縣) 애산(厓山)으로 옮겼고, 이때 문천상은 마침내 육수부와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상대의 서신을 읽으면서 길게 탄식할 뿐이었다. 이때 진의중은 달아나고 없었으며, 황제 곁에는 육수부와 장세걸만 남아 있었다. (중략) 장세걸은 힘이 다했다. 그는 제병의 거처로 가서 황제를 데리고 배를 타고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육수부는 그렇게 가다가 붙잡혀 황제가 능욕을 당하는 일이 두려웠다. 결국 제병을 들쳐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함께 목숨을 끊었다. 육수부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과 권세와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 송 제국의 빛나는 최후를 장식한 것이다. _462~463쪽, 〈제6장 차지하는 자와 빼앗기는 자〉 중에서
출판사 서평
송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쇠망의 길을 걸었다?
태평성세의 시대는 어떻게 서서히 무너지게 되었나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太祖)는 황포가신(黃袍加身)에 따라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유혈 사태 없이 황제가 된 그는 덕과 인을 베푸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허나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무신 대신 문신을 중시했으며, 과거 제도를 통해 사대부를 조정대신으로 등용했다. 태종(太宗)은 지방 번진 세력을 약화시키고 지방군을 금위군으로 합병하는 등 황권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자 강북 지역의 국경을 확정하고 강남 지역을 통일했으며, 주변국과는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는 화의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주요 정책들을 정비하자 사회와 경제가 안정되었으며, 인문과 예악(禮樂) 등을 향유하는 문화가 만연해 그 어떤 왕조보다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성세의 시대는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진종(眞宗) 재위 후 요나라 대군이 수도인 변량 근처까지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요나라와 극적으로 ‘전연의 맹(?淵之盟)’을 맺고 평화를 유지했다. 이후 진종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천지에 제사를 올리는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하면서 과도하게 경비를 지출했다. 여기에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세수 부족 문제, 남아도는 병사와 관리들의 봉록 지급 문제까지 겹쳐 재정 적자가 이어졌다. 조정 내에서는 황후 곽씨(郭氏)의 폐위를 둘러싸고 파벌이 형성되어 붕당 싸움의 서막을 열었다. 저자는 3대황제들의 재위 동안 있었던 경제적?정치적 사건들을 자세히 서술하면서, 송나라는 탄생 초기부터 쇠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제한다.
왕안석의 변법은 왜 반쪽짜리 성공만 거두었을까
개혁과 보수의 갈등이 결국 당파 싸움으로 이어지다
송 조정의 사대부들은 황제의 뜻에 따라 유학을 숭상하며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그렇기에 개혁을 시도해야 하는 순간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신종(神宗)이 등용한 왕안석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송나라가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개국 후 100년간 송나라가 무사한 것은 오랑캐의 세력이 흥성하지 못해 비롯된 요행일 뿐이라고 하면서, 변법을 통해 전면적인 경제 제도를 도입한다면 국가 재정을 확보해 국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즉, 국가의 경제 개입 및 재정 수입과 규모 확대(모역법, 보갑법, 보마법), 소상인과 소작농 보호(균수법, 청묘법), 세금 차등 징수(방전균세법), 부정부패 단속(창법) 등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해 개혁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식(蘇軾)과 사마광(司馬光) 등 왕안석의 개혁안을 반대한 사대부들은 국가 사직의 존망은 국력의 강약이 아닌 도덕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왕조의 지속과 교체는 빈부가 아닌 풍속에 달려 있다고 고집했다. 저자는 이 두 인물을 필두로 각자 다른 도덕적 가치로 날을 세운 정치 싸움과 내부 분열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신종 사후, 왕안석의 변법은 점차 원래의 의미가 퇴색된 채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제도로 변했고, 송 조정은 왕안석의 변법을 유지하자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이 틈을 노린 기회주의자 채경(蔡京)은 자신의 취미에만 몰두하며 조정을 돌보지 않은 휘종(徽宗)의 환심을 사고, 그 권력을 이용해 약 20년간 폭정을 지속했다. 황권을 남용해 욕망을 채웠던 간신의 등장은 결국 북송시대의 몰락을 초래했다.
어리석은 외교 정책의 결과는 멸망이었다
개혁을 회피하고 안위에 머무른 제국의 최후
송나라 후반으로 갈수록 주변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평화를 유지했던 외교 정책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휘종은 금나라와 연합해 요나라를 정벌하여 선대의 위업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금나라와 맺은 협공 조약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 결과 금나라는 요나라 영토를 점령한 다음 송나라의 전략 요충지를 하나씩 점유하며 마침내 황하 이북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이때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흠종 대신 아들 고종(高宗)이 황하 남쪽 임안에 수도를 세우고 남송시대를 열었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천자는 악비(岳飛)와 한세충(韓世忠) 등 금나라에 대항할 만한 명장을 기용하기도 했으나, 결국 국가의 안위보다는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던 재상 진회(秦檜)의 말에 따라 금나라와 화의를 맺는다. 이후 칭기즈칸이 몽고(원나라)를 일으켜 그 기세로 금나라를 멸망시킨 뒤, 남송을 점령하면서 3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송 제국은 무력하게 사라지고 만다.
저자는 송나라의 최후를 두고 “중국 왕조 최초로 이민족에게 철저히 패하는 치욕을 경험했다”고 평한다. 송나라는 덕치와 평화 전략으로 태평성세를 이루었지만,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했으며, 외교적으로도 먼저 스스로를 낮추는 전략으로 외적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경제적?문화적 자원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었던 송나라의 기풍은 도리어 급변하는 주변의 상황을 흐릿하게 인지하도록 만들었다. 개혁을 꺼린 황제와 사대부들은 나라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변화를 기피하고, 상황을 회피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더불어 간신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폭정을 방치했다. 중국의 그 어느 왕조보다 찬란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송나라의 멸망 과정을 읽으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62209448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10월 26일 |
쪽수 | 480쪽 |
크기 |
157 * 233
* 43
mm
/ 826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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