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검색어

실시간 인기 검색어

왕단의 중국 현대사

양장본 Hardcover
왕단 저자(글) · 송인재 번역
동아시아 · 2013년 02월 20일
8.6
10점 중 8.6점
(4개의 리뷰)
집중돼요 (67%의 구매자)
  • 왕단의 중국 현대사 대표 이미지
    왕단의 중국 현대사 대표 이미지
  • A4
    사이즈 비교
    210x297
    왕단의 중국 현대사 사이즈 비교 148x210
    단위 : mm
01 / 02
무료배송 소득공제
10% 19,800 22,000
적립/혜택
1,100P

기본적립

5% 적립 1,100P

추가적립

  • 5만원 이상 구매 시 추가 2,000P
  • 3만원 이상 구매 시, 등급별 2~4% 추가 최대 1,100P
  •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추가 최대 300원

알림 신청하시면 원하시는 정보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절판되었습니다.

키워드 Pick

키워드 Pick 안내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다른 연관 도서를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로, 클릭 시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최근 많이 찾는 순으로 정렬됩니다.

왕단의 중국 현대사 상세 이미지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수상내역/미디어추천

왕단의 살아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사 15강!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주역 왕단의 새로운 중국 현대사 『왕단의 중국 현대사』. 중요한 사건에 초점을 두고 거시적인 흐름을 보여주거나,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생애, 사상 등에 초점을 맞춘 대부분의 서적들과는 다르게, 1949년 정부 수립 이후부터 중국 공산당의 정치사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비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점을 토대로 ‘당·국 체제’라고 불리는 중국의 현 체제를 보여준다.

이 책은 거시적인 흐름과 사건에 대한 소개도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시점의 세부적인 사정과 일화 등이 주로 묘사되어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런 묘사를 통해 왕단은 일관되게 지난 60여 년 중국 공산당 통치자들의 죄과를 가차 없이 지적한다. 그의 논조에서는 마오쩌둥과는 다르다고 평가받는 덩샤오핑과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저우언라이 역시 실정의 책임을 비껴가지 못한다.
톈안먼 사태의 주역이자 지도자로써,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체험했고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외교적으로 추방당한 저자 왕단은 중국의 61년 동안의 역사 속에서 잊혀지거나 금기시되어, 외부에서 알지 못했던 사건과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관변 사학에서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내용, 중국이 은폐하고 왜곡한 중국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들을 파헤친다.

작가정보

저자(글) 왕단

왕단

저자 왕단(王丹)은 1969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산둥 성 취안청甄城이다. 1987년 베이징 대학교 국제정치학부에 입학했다가 1988년 가을에 역사학부로 전과했다. 재학 기간 신문ㆍ잡지를 편집했고 학원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89년에 ‘89 민주화 운동’을 조직하는 데 참여했고, 단식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톈안먼광장 보위保衛 지휘군’ 부총지휘자였다. 6ㆍ4 톈안먼 사건 이후 당국이 발표한 학생 수배자 명단 제일 앞에 올랐다. 체포된 후에 ‘반혁명선전선동죄’라는 죄목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석방 후에 정치적 반대 운동을 지속했다. ‘호조互助 기부금’을 모금하여 정치범 가족을 재정적으로 도왔고 시민 상서上書 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뉴욕에 본부를 둔 ‘중국 인권’ 조직 이사를 역임했다. 1995년 ‘정부전복음모죄’로 다시 체포돼 중국 공산당 당국에 의해 11년형을 선고받았다. 1998년 4월 19일 국제 여론의 압력으로 조기 석방돼 미국으로 추방됐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후보에 세 차례 올랐으며, 미국 민주재단 인권상, 민주교육재단 ‘걸출한 민주인사상’, ‘만인걸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그 뒤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서 동아시아학과에서 석사, 역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타이완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미국 UCLA 중국연구센터 방문학자, 영국 옥스퍼드 세인트 앤터니 칼리지 객원연구원 등을 역임했고, 타이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 중국인 민주서원 이사회 주석, 타이완 칭화 대학교 인문사회대학 객원조교수, 잡지 《공공 지식분자公共知識分子》 발행인 등을 맡으며 중국의 민주화에 힘을 쏟고 있다. 저서로 《왕단 옥중 회고록王丹獄中回憶錄》, 《왕단의 생각王丹觀點》 등 20여 종이 있다.

번역 송인재

역자 송인재는 한림대학교 HK연구교수이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로 중국 현대사상 분야에 관심을 두고 집필과 번역을 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1978년 이후 중국의 계몽ㆍ민족국가ㆍ문화 담론 연구-간양과 왕후이의 비판 담론을 중심으로〉(박사 학위 논문, 2008), 〈‘문명’의 발견과 해석, 그리고 중국의 비전〉, 〈20세기 전반기 중국의 ‘인권’과 국가〉(2012)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관념사란 무엇인가 1, 2》(공역, 2010), 《아시아는 세계다》(2011),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2013)가 있다.

목차

  • 옮긴이 서문
    서문

    제1강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3대 전투, 중국 공산당 세상의 터전을 닦다
    중국 공산당은 왜 국민당에 승리했나?
    개국 행사
    신정권의 공고화
    상공업 부르주아의 문제에 대한 대처 방법에서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다
    가오강 사건

    제2강 군사: 한국 전쟁
    공식 견해와 새로운 연구
    한국 전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한국 전쟁 발발
    한국 전쟁 전개
    마오쩌둥과 스탈린 각자의 속셈
    최신의 보충 자료

    제3강 도시: ‘삼반三反’ ‘오반五反’ 운동
    류칭산 사건과 장쯔산 사건: 삼반 운동의 발동
    호랑이 잡기: 삼반 운동의 전개
    부르주아의 약점을 틀어쥐어라:
    왜 삼반 운동에서 오반 운동으로 바뀌었는가?
    또 다른 호랑이들: 오반 운동의 전개
    상공업 부르주아가 말로로 향하다: 삼반, 오반 운동의 결과

    제4강 농촌: 토지개혁에서 인민공사까지
    토지개혁 운동
    Ⅰ 토지개혁 운동의 가속화 Ⅰ 토지개혁의 폭력성 Ⅰ 토지개혁 운동이 농촌의 사회구조를 바꾸다
    집단화의 길과 인민공사 제도
    Ⅰ 일괄 수매 일괄 판매라는 농촌 수탈 Ⅰ 농촌 집단화 정책의 출시 Ⅰ 전환점으로서의 1953년
    대약진에서 대기근까지
    Ⅰ 대약진의 발동과 첸쉐선의 암송 Ⅰ 대기근은 어떻게 형성됐나? Ⅰ 대기근의 대가 Ⅰ 대약진 정책의 사회적 악영향
    7000인 대회
    Ⅰ 3할은 천재이고 7할은 인재이다: 류사오치, 마오쩌둥에게 죄를 짓다
    Ⅰ 물러섬으로써 나아간다: 마오쩌둥, 류사오치를 쓰러뜨리기로 결심하다 Ⅰ 린뱌오, 기회를 잡다
    Ⅰ 꿈틀거리는 마오쩌둥의 충동 Ⅰ 왜 수천 명이나 굶어 죽고도 안정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제5강 지식인: 사상 개조, 후펑 사건 그리고 ‘반우파反右派’ 운동
    지식인에 대한 사상 개조
    Ⅰ 마오쩌둥은 본래 지식인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Ⅰ 영화 〈무훈전〉 비판 Ⅰ 《홍루몽》도 정치투쟁의 도구가 되다
    후펑 집단 사건
    Ⅰ 후펑이라는 사람 Ⅰ 이른바 문예 사상과 종파 활동의 문제 Ⅰ 일의 성격이 점점 변해가다
    Ⅰ 반혁명 집단 사건은 어떻게 조작됐는가
    반우파 운동
    Ⅰ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다 Ⅰ ‘57 세대’ 사람 Ⅰ 중국 지식인 엘리트가 일망타진되다
    Ⅰ 덩샤오핑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풍운 속의 나부낌: 중국 지식인의 운명

    제6강 당내: 루산 회의
    루산 회의: 펑더화이 숙청당하다
    Ⅰ 본래는 ‘신선회’였다 Ⅰ 펑더화이의 편지 Ⅰ 순장용 인형을 처음 만든 사람은 대가 끊긴다
    문화대혁명의 숙성
    Ⅰ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 운동: 마오쩌둥ㆍ류사오치 분립의 확대 Ⅰ 역시 문예부터 손을 대다

    제7강 외교: 중소 관계의 파열과 중미의 상호 작용
    중소 관계의 파열
    Ⅰ 일변도정책과 중소 우호 동맹 Ⅰ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Ⅰ 중국과 소련의 불화가 시작되다 Ⅰ 두 거대 국가의 분열이 공개됐다 Ⅰ 중소 논쟁의 후속 효과
    중미 관계의 해빙
    Ⅰ 마오쩌둥의 미국에 대한 속마음 Ⅰ 마오쩌둥이 미국으로 눈을 돌리다 Ⅰ 폴로 계획 Ⅰ 닉슨의 해빙 여정

    제8강 문화대혁명의 발발과 전개
    문화대혁명의 숙성
    Ⅰ 계급투쟁 이론은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이다 Ⅰ 문예 영역에서의 포석 Ⅰ <해서파관>
    Ⅰ 〈2월 개요〉에서 〈5ㆍ16 통지〉까지
    문화대혁명의 발동
    Ⅰ ‘중앙문혁팀’이 대권을 장악하다 Ⅰ 첫 번째 불은 베이징 대학교에서 점화됐다
    Ⅰ 마오쩌둥의 태도 Ⅰ 홍위병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다 Ⅰ 적색테러
    ‘1월 혁명’에서 ‘2월 역류’까지
    Ⅰ 전국 범위의 권력 침탈 물결 Ⅰ 원로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Ⅰ 문혁의 자세한 사정
    Ⅰ 모범극에 관하여 Ⅰ 농촌 하방

    제9강 문화대혁명의 종결: 린뱌오 사건에서 톈안먼 사건까지
    마오ㆍ린 연맹의 해체
    Ⅰ 마오쩌둥이 린뱌오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Ⅰ 린뱌오의 죽음과 〈571 공정기요〉
    Ⅰ 마오쩌둥은 왜 린뱌오에게서 등을 돌렸나
    원로 간부파, 다시 강호에 등장하다
    Ⅰ 덩샤오핑의 직권 회복 Ⅰ ‘문혁’ 말미에 접어들다
    ‘4인방’ 체포와 ‘문혁’의 종결
    Ⅰ 마오쩌둥 등 중국 공산당 원로의 잇따른 서거 Ⅰ ‘4인방’의 체포
    Ⅰ ‘문혁’을 성찰할 때 생각해보아야 할 다섯 가지

    제10강 덩샤오핑 시대의 개막
    덩샤오핑이 보낸 네 통의 편지
    ‘양개범시’ 배후의 권력 투쟁
    Ⅰ 양개범시의 제기 Ⅰ 덩샤오핑의 반격 Ⅰ 천윈이 덩샤오핑을 힘껏 끌어주다
    ‘진리의 기준 문제’ 토론
    Ⅰ 글 한 편이 정치투쟁을 일으키다 Ⅰ 보수파가 나서서 압력을 넣다
    Ⅰ 고위 관료들이 연이어 입장을 정하다 Ⅰ 천윈의 발언
    ‘11기 3중 전회’: 원로 간부파가 전승을 크게 거두다
    중미 수교
    시단 민주벽 운동
    Ⅰ 1980년대의 첫 번째 민주화 운동 Ⅰ 이론연구파 Ⅰ 민주벽 운동에 대한 덩샤오핑의 토사구팽
    Ⅰ 청년 세대, 경선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다.

    제11강 1980년대의 개혁개방: 후야오방에서 자오쯔양까지
    샤오강 사건과 농촌 개혁의 시동
    Ⅰ ‘문혁’이 조성한 민생 파탄 Ⅰ 식량을 먹으려면 (자오)쯔양을 찾아가고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찾아가라
    Ⅰ 샤오강촌 농민의 사적 토지 분배 Ⅰ 개혁은 아래에서 위로 시작됐다
    도시의 개혁은 개방에서 시작됐다
    Ⅰ 중국,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다 Ⅰ 외자 도입은 중국 경제 발전의 연료 Ⅰ 광둥 성의 특수한 지위
    개혁의 진행을 둘러싼 논쟁
    Ⅰ 중국 공산당 ‘12대’에서 후ㆍ자오 체제를 확립하다 Ⅰ 천윈이 보수파의 기치가 되다
    Ⅰ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개혁을 지지했다
    1980년대의 정치적 개방
    Ⅰ 중공 내부의 민주파 Ⅰ 계몽 운동과 사상의 사회적 활성화 Ⅰ 쉬량잉: 민주화 운동을 추진한 과학계 인사

    제12강 6ㆍ4 톈안먼 사건
    왜 1989년,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는가?
    89 민주화 운동의 진행 경과
    Ⅰ 후야오방의 서거, 학생 시위의 폭발 Ⅰ 〈4ㆍ26 사설〉이 학생의 정서를 격화시키다
    Ⅰ 단식 Ⅰ 계엄 반대, 베이징 시민이 거리에서 군용차를 막아서다
    Ⅰ 중국 공산당 당국,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다 Ⅰ ‘6ㆍ4’ 이후 전국의 백색테러
    89 민주화 운동의 의의
    ‘89 민주화 운동’과 ‘6ㆍ4 진압’에 관해 분명히 해야 할 몇 가지 문제
    (부록 )1 잊을 수 없는 밤
    (부록) 2 ; 《국가의 죄수》(《개혁역정》) 비밀을 말하다

    제13강 경제와 문화
    월극
    Ⅰ 중국 공산당 월극에 반하다 Ⅰ 월극을 이용한 대외 선전
    설날 특집 공연
    Ⅰ 한때는 시대의 상징이었다 Ⅰ 지금은 정부의 대변인이 됐다 Ⅰ 그래도 좋은 기억들은 있다
    중국 경제 발전에 얽힌 몇 가지 결정적 사건
    Ⅰ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Ⅰ 시장경제 체제의 확립 Ⅰ WTO 가입
    Ⅰ 국영기업은 어디로 갈 것인가? Ⅰ ‘3농’ 문제

    제14강 시민사회의 성장
    독립 영화 제작 운동
    Ⅰ 언제나 체제 밖에서 Ⅰ 중국의 독립 영화 제작 운동 Ⅰ 대표적 인물과 대표작
    대중매체 공간의 개척 노력
    Ⅰ 체제 내 대중매체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Ⅰ 인터넷은 중국을 바꿀 것인가
    (부록) 주요 신수대전 리스트
    인권 보장 운동
    Ⅰ 완전히 새로운 형식 Ⅰ 인권 보장 운동의 두 주요 집단: 변호사와 공공 지식인

    제15강 60년에 대한 회고
    개혁개방 30주년의 회고와 전망
    Ⅰ 개혁인가 개방인가? Ⅰ 중국 개혁개방의 몇 가지 특징
    시련으로 창백한 중화인민공화국
    Ⅰ 시련으로 창백한 공화국사 Ⅰ 정치 운동의 의의 Ⅰ 중국의 과거 청산 문제 Ⅰ 진보가 있지만 퇴보도 있다
    Ⅰ 혁명 - 시종일관 관철된 주제 Ⅰ 정부 수립 60년, 중국 공산당은 인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

    한국어판 출간에 붙여
    주석
    참고 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주역 왕단의 새로운 중국 현대사
타이완에서 베스트셀러 중국에서는 금서禁書!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인물 중심의 숨 쉬는 역사
개인과 시대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 스토리텔링 혹은 대서사시

오늘의 중국을 보다 온전히 인식하기 위하여!
중국이 은폐하고 왜곡한 중국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

1. 현재의 중국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반만년의 중국 역사보다 60년 중국 현대사가 더욱 중요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전통적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역사는 ‘가는 것을 살펴서 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道往而明來者也, 춘추번로, 동중서)’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현재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唐宋과 明淸의 역사보다, 현대 중국의 뿌리인 공산당 60년사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의 새로운 국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의 대국이며 바로 우리 이웃인 중국! 우리의 최대 교역국으로서 동반자이자 경쟁자! 그 위치만큼이나 우리가 중국을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은 충분하다. 따라서 중국에 관한 책도 많고 연구자도 많다.
그럼에도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다. 중국은 바로 우리에겐 금기인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사를 모른다면 지금의 중국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기존 중국 현대사에 관한 통사들은 대부분 중요한 사건에 초점을 두고 거시적인 흐름을 보여주었다. 또한 같은 분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생애, 사상 등에 초점을 맞춘 관련 서적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이런 소재들을 흥밋거리로 각색한 책들도 수시로 출간됐다. 심지어 과거에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동정적인 관점에서 중국 현대사를 ‘혁명사’로 서술하거나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었고,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에 따라 서술된 책이 번역된 적도 있다. 그러나 왕단의 중국 현대사는 1949년 정부 수립 이후부터 중국 공산당의 정치사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비판하며 다른 책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이는 ‘당黨ㆍ국國 체제’라고 불리는 중국의 현 체제를 보여주는 데 가장 적합한 접근법이다.

2. 왜 왕단王丹인가? 천안문 사태의 주역이 중국 현대사 왜곡을 온몸으로 저지한다.
역사는 기록자의 눈이다. 역사를 놓고 말이 많은 건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중국 현대사는 중국인이 기록한 책보다 외국인이 기록한 책이 더 많고 유명하다.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 은폐와 왜곡의 문제이다.
실제로 책은 타이완에서 출간 즉시 인문 사회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금서가 되었다. 중국 본토의 지식인들은 암암리에 대만의 친지와 유학생에게 부탁하여 몰래 복사해가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61년 동안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많은 부분이 잊혀졌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6ㆍ4 톈안먼 사건’등이 금기이다. 외국에서도 자료의 한계 때문에 중국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안개 속에서 꽃을 보는 격이다. 저자 왕단은 외부에서 알지 못했던 사건과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관변 사학에서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이 은폐하고 왜곡한 중국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들이다.
현재 중국의 정치ㆍ경제적 상황에는 낙관과 비관의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 비관론의 핵심 논리에는 경제 성장에 따른 부작용과 정치적 폐쇄성에 따른 내부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 당국도 이를 인지한 듯 지난 정권에서 후진타오가 ‘조화사회론’을 내건 데 이어 시진핑도 개혁 의지를 표방한 바 있다. 그러나 2013년 초부터 일어난 언론 검열과 그에 이은 인터넷 통제는 진정한 개혁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런 와중에 중국인이 쓴 제대로 된 현대사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중국 현대사는 중국학을 전공하거나 연구해온 외국 연구자들 책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는 실제적인 온도를 체험한 자가 기록하는 것이 온당하다. 왕단의 이른바 톈안먼 사태의 주역이자 지도자이다.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체험했고 중국인민공화국에 의해 외교적으로 추방당했다.
학생운동의 지도자는 학자로 변신한다. 하버드에서 동아시아학과 중국사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올곧은 비판정신으로 중국 현대사를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타이완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책이 시종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나, 미래를 전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면 거시적인 흐름과 사건에 대한 소개도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시점의 세부적인 사정, 일화 등이 주로 묘사되어 역사를 보다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런 묘사를 통해 왕단은 일관되게 지난 60여 년 중국 공산당 통치자들의 죄과를 가차 없이 지적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어떤 업적에 대한 인정, 동정적 자세는 조금도 볼 수 없다. 그의 논조에서는 마오쩌둥과는 다르다고 평가받는 덩샤오핑,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저우언라이, 문화대혁명 시기의 박해와 실각으로 동정적 평가를 받는 류사오치도 실정의 책임을 비껴가지 못한다. 오직 1980년대에 정치 개혁의 자세를 견지하고 당시 학생운동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만이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왕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사는 국가 폭력과 사회적 공포가 서로 교차된 역사라고 말한다. ‘두려움’이라는 말을 제쳐놓고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과 중국의 정치 생활에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가져다준 깊숙한 영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후펑 사건은 사실 1950년대 중국의 정치적 공포 시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이다. 이와 비슷한 정치 운동은 1949년 이후 멈춘 적이 없고, 정치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잔혹한 진압이 일어나고 사회적 공포 심리가 자라났다. 역사에서는 두려움의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쌓여가면서 곧바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절정, 즉 문화대혁명으로 치달았음을 볼 수 있다.

3. 한권으로 충분한 중국 현대사 15강의
초심자에서 전문가까지, 쉽고 깊은 교양 중국 현대사 명작의 탄생!
심입천출(深入淺出)- 깊게 들어가 얇게 내보이는 것. 전문적인 학술과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교양이란 이름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쉽게 만들려면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을 빼먹기 일쑤이고 중요한 것을 거론하려면 아무래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 판단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차치하게 마련이다.
책은 타이완 칭화대학에서 강연한 것으로 지금의 대학생 수준이면 이해할 정도의 난이도이다. 동시에 타이완 대학생들에게는 관심과 열정이 높은 중국 대륙의 현대사이므로, 꽤 정제된 논리와 학문적 수준 또한 갖고 있다. 학기 말 학생들의 교수 평가 결과, 최고의 명강의로 평가받았다.
또 책은 중국 현대사라는 제목에 걸맞게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부터 문화혁명, 톈안먼 사태를 거쳐 개혁개방과 최근의 시민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중국 현대사의 핵심을 총망라했다.
따라서 책은 바쁜 한국인들이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단 한 권의 중국 현대사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4. 보여주기(showing)와 말하기(telling)의 입체적 구성, 역사를 소설처럼 읽게 하다.
역사책은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 매우 흥미로울 수도, 매우 따분할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편년체적 정치사를 중심으로 한 책은 매우 따분하다. 그렇지만 왕단은 강의를 전제한 탓인지, 독특하고 흥미로운 서술을 보이고 있다. 우선 중국 현대사를 가늠할 15강의를 선정하고 이를 인물 중심의 소설적 서술로 진행한다. 따라서 ‘역사를 살아가는 한 개인’이라는 서사체적 재미가 쏠쏠하다.
동시에 구성에서도 매우 입체적이다. 이른바 역사적 사건을 적확한 묘사와 적절한 인용, 수많은 일화들을 통해 드러내면서, 서술자의 개입 역시 만만찮게 도전적이다. 적절한 인용에서는 저자의 방대한 자료조사와 공부의 내공이 드러나고, 서술자의 개입에는 서슬 같은 비판적 시각이 살아 꿈틀거린다. 책을 읽는 동안 꼼짝 못하고 몰입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정치에만 의존해서 마오쩌둥에 대해 정치적 강자나 지도자의 이미지를 굳혀왔다. 그러나 역사 속 당사자의 기억에 접근하면 마오쩌둥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는 ‘살인’으로 나라를 다스리거나 자신의 전우를 숙청하면서도 낯빛이 바뀌지 않던 폭군이었다. 그러면서도 주변의 여인에게는 항상 쩔쩔맸다. 만년에 그의 시중을 들었던 장위펑張玉鳳은 그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마오쩌둥을 지켰던 경호실장이 떠날 때도 마오쩌둥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마오쩌둥은 말년에 유신庾信의 〈고수부枯樹賦〉를 즐겨 읽었다. 반복해서 읽은 끝에 전체 줄거리를 외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 심은 버드나무가 한남에 무성하더니, 이제 보니 잎은 다 떨어지고 강가에 서 있는 모습 서글프구나. 나무조차도 이와 같거늘 사람이 어찌 견딜 수 있으랴!”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이런 복잡한 개성과 처량한 듯 보이는 말년의 심경은 역사에 영향을 준 그의 정치적 결정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왕단은 서문에서 인간화, 개인화, 생활화를 더 강화한 역사 서술 방식을 택했다고 뚜렷이 밝히고 있다.
“과거 우리의 역사 서술은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질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시간, 사건, 원인에 대한 분석, 심지어는 데이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등장조차도 사건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역사에서 우리는 사실상 진정한 ‘개인’을 볼 수 없다. 우리가 역사에서 마주하는 인간은 모두 어떤 유형의 인간 중 한 사람이거나 비교적 대표적인 인물이다. 결코 그나 그녀 개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구체적인 개인성을 드러내는 것, 예를 들면 개인성, 심리 상태, 신체상태 더 나아가 성생활도 역사 속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왔다. 단지 이런 부분은 너무 경시됐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다룰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뿐이다. ‘팔괘’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런 구체적인 내용을 발굴하고 고찰해야만 역사가 생생해지고 재미있어질 수 있다.”

5. 책의 주요 장면
@ 6ㆍ4 톈안먼 민주화 운동

중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1989년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 참가자가 탱크를 막아서고 있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으로 상징되는 톈안먼 사건은 중국의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책은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생생하게 일지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진: 1989년 6.4 톈안먼 민주화 운동 시기의 왕단

잊을 수 없는 밤!

1989년 5월 19일 밤, 톈안먼 광장에는 7일 동안 단식 농성을 한 수천 명의 학생과 광장에서 응원해주던 수십만 명의 학생과 민중이 있었다. 이들은 광장에서 놀랄 만한 소식을 들었다. 중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고 몇몇 군대가 작전 부대로 지정돼 명령을 받아 베이징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광장의 군중 감정은 격앙됐다. 단식 지휘부는 토론을 거쳐 단식을 즉각 중단하고 광장의 모든 학생이 무기한 반계엄 연좌시위를 할 것을 결정했다. 계엄군이 곧 광장으로 들이닥치자 이 학생운동이 생사존망의 고비에 이르렀다고 여겨졌다. 지휘부뿐만 아니라 톈안먼 광장 전체에도 비장한 분위기가 가득 찼다. 당시 나는 이런 생각만 했다. ‘베이징 대학교의 단식단은 내가 13일에 베이징 대학교 남문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다. 이 최후의 시각에 나는 반드시 베이징 대학교 대오로 돌아가서 학우들과 함께 서야겠다.’
베이징 대학교의 단식단은 톈안먼 광장의 서북쪽 코너에 있었다. 군대가 광장에 진입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부딪힐 것이다. 나는 도착해서 모두가 이미 일어서서 현재의 정세를 열렬히 토론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늘 저녁 우리가 진압의 위험에 닥치게 된다는 것이 모두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학우들에게 둥근 원을 만들도록 했다. 여학생이 가장 안쪽에 있고 밖에는 남학생이 서면서 겹겹이 원을 만들었다. 군대가 광장에 들이닥치면 우리는 ‘(군인들이) 때려도 맞서 싸우지 않고 욕을 해도 맞서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질서 있게 후퇴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대오의 최선두에 설 수 있도록 보장해서 모두가 지휘를 듣고 임의로 행동하지 않기를 바랐다.
말소리가 아직 멈추지 않았을 때, 그전에 서측 관람대에서 연좌하면서 응원하던 베이징 대학교 교사 후원단 단원들이 베이징 대학교 주둔지로 와서 내게 교사로서 학생을 보호하는 것은 그들의 천직이라고 말했다. 이 가장 위험한 시각에 나에게 무조건 자신들을 학생 대오의 가장 앞에 앉히라고 요청했다. 나는 선생님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여교사도 있었다. 나는 그분에게 대오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 나는 여학생이 아니라 교사이다. 나는 학생 한 사람이라도 내 앞에 앉아 있게 할 수 없다.” 이 말을 듣고 많은 학우가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선생님을 대오의 앞에 앉게 했다.
……
나는 격해져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갑자기 또 시민 행색을 한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왔다. 그들은 모두 체격이 건장했다. 맨 앞에 선 사람이 내게 오늘 밤 군대가 도시로 진입할 것이라고 하니 자신들이 긴급히 광장으로 가서 학생들을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조건 베이징대 대오의 가장 앞에 앉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배우는 사람들이고 국가 미래의 희망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이처럼 가볍게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탱크가 오면 가장 먼저 우리를 치고 가게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한 사람이 더 있으면 학생 한 사람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 말을 끝낸 후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고 곧바로 대오의 가장 앞에 가서 앉았다.
이렇게 되면서, 이날 밤 베이징대 대오는 여학생이 가장 안쪽, 남학생이 그 바깥쪽, 그 밖에는 교사, 가장 밖에는 시민이 배치된 구도를 형성했다.
- 제12강 <6ㆍ4 톈안먼 사건> 중에서

@ 한국 전쟁

한국 전쟁의 숨은 전말이 드러난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각자의 속셈, 오랫동안 중국이 ‘조선 전쟁’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하고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마오쩌둥은 한반도의 정세 변화가 중국에서 자신의 정치적 포석에 영향을 주기를 원치 않았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북한이 일단 공격하면 지지하고 중국 군대 중 세 개의 조선인 부대와 무기를 북한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김일성에게 당분간 남한을 공격하지 말라고 권했다. 그 당시 스탈린도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 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스탈린의 주된 고려 사항이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김일성은 아주 실망하고 낙담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얻어냈다. 그 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선즈화는 2009년 5월 12일 미국 UCLA 중국연구센터에서 열린 강좌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1950년 1월 17일 주중 북한대사의 환송회장에서 김일성은 술에 취해 크게 울부짖으며 소련 관리들에게 자신의 조선 통일 계획 완수를 지원해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주 북한 소련대사는 이에 아주 난처해했다. 결국 9월에 스탈린에게 이 상황을 전보로 알렸다.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중국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여전히 모스크바에 있었다. 2월 17일에 마오쩌둥이 중국으로 돌아온 뒤 3월 10일에 스탈린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4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양측은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서 논의했다.
김일성은 25일에야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때 소련은 이미 김일성의 계획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이 반드시 마오쩌둥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는가?
……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그때는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미국 측은 장제스의 정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줄곧 중공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강구했다. 그리고 앞으로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한 후 중미 합작을 이룰 공간을 찾으려 했다. 중국 공산당 군대가 난징을 함락한 후 국민 정부는 광저우로 옮겼다. 주중 소련대사도 국민당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주중 미국대사는 베이핑에 남았다. 중미 간의 상호 작용에는 본래 각종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이 이런 상황을 당연히 모를 리 없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는 당연히 사회주의 진영의 어떤 국가가 미국과 협력 관계를 발전해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중공과 미국이 모종의 협력 관계를 수립할 가능성을 막을 방법을 찾아 이러한 추세를 막으려 했다.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중국을 강제로 미국과 정면으로 대적하도록 해서 중국과 미국의 동맹 가능성을 철저히 막아버리고 중공을 사회주의 진영 속에 가두어버리려는 것이 스탈린의 깊은 속셈이었을 것이다.
- 제2강 <군사 : 한국전쟁> 중에서

@ 대약진 운동과 대기근

왜 4000만 명이 굶어 죽는 거대한 재난이 발생하고도 중국에 대규모 항거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대기근을 겪으면서 중국의 통치 기반은 동요되지 않았는가? 이는 인류 역사상 모두 불가사의하게 들리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
이런 분석이 성립 가능하다면 우리는 진정 중공 정권을 지탱하는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4000만 명의 아사를 초래하는데도 안정적 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폭력과 기만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하나의 주제처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적 현상, 더 나아가 현실적 문제를 해석할 수 있다.
- 제4강 <농촌 : 토지개혁에서 인민공사까지> 중에서

@ 마오쪄둥: 자기모순의 결정체

마오쩌둥이 지식인에게 가졌던 태도는 굉장히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 자처하면서 지식인을 아주 중시했다. 몇몇 대가급 지식인들을 특별히 예우했고 “대학자와는 담소하고 일반 백성과는 왕래하지 않는[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환경을 조성했다. 역사의 변화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시하면서 “소설이 당을 반대할 수 있다”라는 논조를 제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하며 지식인은 농민이나 노동자보다 아는 것이 적다고 말하며 철저한 개조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나는 줄곧 지식인은 지식이 없다고 말해왔다. 이 말은 정확하다. 지식인의 꼬리날개는 손오공의 꼬리보다 더 길다.” 이러한 그의 심리는 ‘문혁’ 발발 이전 그가 내부에서 후계자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후계자 선발 조건을 거론할 때 전형적으로 반영됐다. 마오쩌둥은 “젊고 배운 것이 적고 입장이 틀림없어야 한다”라고 명확히 말했다. 젊고 입장이 확고해야 한다는 조건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운 것이 적은 것’을 후계자 선발의 조건으로 집어 말한 것에는 마오쩌둥의 속마음에 있는 지식에 대한 멸시가 충분히 반영됐다. 나중에 그가 뽑은 후계자들을 보면, 왕훙원과 화궈펑 모두 이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마오쩌둥이 입에서 나온 대로 지껄인 말이 아니라 오랫동안 형성돼 갖게 된 관점이었다. 이런 모순된 심리 뒤에는 그가 공부했던 경험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제5강 <지식인 : 사상 개조, 후펑 사건 그리고 ‘반우파反右派’ 운동> 중에서

@ 중국 지식인 계층의 소멸

운명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이런 공포감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다.
……
그 밖에 군중 운동의 위력으로 지식인들이 저항할 수 없도록 했던 것도 하나의 주된 원인이다. 이런 상황을 후핑은 이렇게 말한다.

대다수 우파가 나중에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한 주된 원인은 바로 그들이 광범위한 군중의 일치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관점이나 주장이 흔들리거나 의문시됐고 결국 자기부정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관점의 옳고 그름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당신의 관점이 여러 사람의 일치된 반대에 부딪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쉽게 자기 회의와 부정에 빠질 것이다.

중공과 마오쩌둥이 혁명 과정에서 그처럼 군중 운동에 열중했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은 건국 이후 점점 자각적으로 독립된 인격을 포기했다. 그리고 혁명, 개인의 자기 개조, 군중의 의지를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 시대 지식인의 집단적 현상이기도 했다.
- 제5강 <지식인 : 사상 개조, 후펑 사건 그리고 ‘반우파反右派’ 운동> 중에서

@ 덩샤오핑: 목숨을 건 4통의 편지

덩샤오핑은 수차례의 정치 운동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분히 그의 정치적 성격에 강건함과 온화함이 조화돼 있어서 융통성 있는 정치적 행동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일생에서 네 통의 편지를 씀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전망을 지킬 수 있었다.
첫 번째 편지는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했을 때 중국 공산당 중앙 총서기 시절에 쓴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의해 류사오치와 손을 잡았다고 간주되고 ‘중국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 2인자’로 몰려 비판 투쟁을 당했다. 1967년 6월 20일부터 7월 5일까지 덩샤오핑은 장장 3만 자에 달하는 〈나의 자술〉을 마오쩌둥에게 써 보내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이 편지 덕에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류사오치처럼 군중에의해 비판 투쟁을 당해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장시로 하방을 보내 노동 개조를 시켰다. 다른 개국공신의 운명과 비교하면 이는 불행 중 커다란 다행이었다.
두 번째 편지는 1971년 11월 덩샤오핑이 린뱌오의 추락사 소식을 들은 뒤 쓴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재기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곧바로 마오쩌둥에게 4,000여 자 분량의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린뱌오를 비판하는 한편 일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마오쩌둥은 이 편지에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72년 8월 3일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게 세 번째 편지를 써서 중국 공산당 중앙사무처 왕둥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편지에서 덩샤오핑은 다시 한 번 일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1976년 4ㆍ5 사건 이후 덩샤오핑은 다시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오쩌둥 사후 그는 또 한 번 기회를 얻었다. 이에 화궈펑에게 편지를 써 화궈펑의 지도를 “영원히 뒤집지 않고” 옹호할 것이라고 밝혀 화궈펑의 신임을 얻었다. 예젠잉과 리셴녠의 원로 간부의 지지 아래 덩샤오핑은 다시 한 번 복귀했고 곧이어 화궈펑이 떠밀리듯 실각하면서 중공의 새로운 지도 집단의 핵심이 됐다. 이 네 편의 편지는 덩샤오핑이 자신의 정치적 앞날을 위해서 기꺼이 잘못을 인정하는 수완을 보여준다.
- 제10강 <덩샤오핑 시대의 개막> 중에서

@ 닉슨의 만리장성 가는 길: 70만이 하룻밤에 눈을 치우다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중국을 방문해서 처음으로 베이징 땅을 밟았다. 중국 측은 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닉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베이징의 몇몇 지명을 고쳤다. 예를 들면, ‘반제反帝의원’은 ‘수도의원’으로 ‘노농병대로’는 ‘디안먼地安門대로’로 개칭했다. 닉슨도 노력을 했다. 미국 대통령은 어느 국가를 방문하든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을 타야 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저우언라이의 전용기 ‘IL-18기(소련제 Ilyushin-18)’에 탑승함으로써 중국의 주권에 대한 존중을 표시했다. 그리고 ‘에어포스원’은 그 뒤를 따라 비행했다.
닉슨은 베이징에 도착한 지 세 시간 뒤에 바로 마오쩌둥을 만났다. 양측이 악수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화제를 뿌렸고 또 전 세계를 바꾸어놓았다. 이번 베이징행을 통해 미국인은 많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있을 수 있는 기이한 상황에 대해서 견문을 넓혔다. 시야를 넓힌 셈이다. 사후 기록에 따르면 예정된 일정에 따라 닉슨은 24일에 만리장성에 가야 했다. 그러나 23일 저녁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저우언라이는 닉슨과 함께 체육 공연을 관람하던 도중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다음 날 닉슨은 베이징의 대로에서 눈이 사라지고 도로변에 눈이 높게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순조롭게 만리장성에 갔다. 알고 보니 그 전날 밤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베이징 시에서 60~70만 명을 동원해서 댜오위타이釣魚臺부터 만리장성까지 가는 길의 눈을 치웠던 것이다.
이날 또 다른 일화도 있었다. 닉슨이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는 영하의 날씨였는데도 길가에서 사람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이는 분명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 결과 이 조직된 ‘장기 두는’ 사람은 아주 긴장했을 것이다. 닉슨의 부인이 지날 때도 그들은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닉슨은 그것을 보더니 “정말로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로군”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저우언라이에게 보고했고 이 일에 저우언라이는 몹시 화가 났다. 그리고 다음 날 만났을 때 닉슨에게 “우리가 하는 일 중 꾸며낸 일도 좀 있습니다”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 제7강 <외교: 중소 관계의 파열과 중미의 상호 작용> 중에서

@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의 적색폭력

베이징 다싱大興 현에서는 홍위병이 과잉 살육을 했다. “1966년 8월 다싱 현에는 열세 개 공사의 48개 대대가 있었는데 불과 5~6일 만에 지주, 부농, 반혁명 분자, 악질 분자, 우파 분자와 그 가족 325명을 죽였고 22가구의 사람들이 피살됐다. 그중에는 80여 세의 노인도 있었고 태어난 지 38일밖에 안 되는 영아도 있었다.” 교육학자 양둥핑楊東平은 당시 자신이 직접 목격한 폭력 행위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근처 농촌의 한 지주의 집에서 베이징의 여자 홍위병을 처음으로 직접 보았다. 그들은 ‘지주 부인’을 벽돌 위에 무릎 꿇리고 베이징어로 욕을 하면서 가죽띠로 때렸다. 넘어지려고 하면 다시 벽돌 위에 꿇어앉히고 계속 때렸다. 처참한 울부짖음이 들렸고 붉은 피가 흥건했다. 우리는 누구도 전에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 그 부인은 후에 맞아 죽었다.

더욱 깊이 살펴봐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심리 분석이다.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외부 순찰을 신청했다. 나는 걸으면서 자책을 했다. ‘저들의 계급적 감정은 아주 깊다. 투쟁 정신은 얼마나 강한가! 나의 프티부르주아적 감정은 극복할 도리가 없는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혁명에는 맞지 않나 보다.’

폭력은 시범 효과를 갖는다. 폭력이 혁명을 겉으로 보여줄 때 이런 시범 효과는 더욱 강렬하게 확장할 수 있다. 이는 ‘문혁’이 시작한 뒤 폭력 행위가 전국에 널리 퍼지게 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 제8강 <문화대혁명의 발발과 전개>중에서

@ 시민들의 인권 보장 운동

대규모 군중 사건 이외에 최근 몇 년 동안 연이어 인터넷의 역할에 역할을 빌려 새로운 시민 인권 보호 활동 방식이 등장했다.
첫째, ‘판쭈이飯醉’. 모여서 밥을 먹는 방법이다. 2009년에 예술가 아이웨이웨이가 항저우에서 200여 명의 네티즌을 불러 모아 밥을 먹었다. 20개의 탁자가 펼쳐졌고 그 자리에서 아이웨이웨이가 제작한 인권 보장 관련 내용의 CD를 나누어주었다. 2010년 8월 베이징의 네티즌들이 푸젠에서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투옥됐던 유징유游精佑의 출소를 환영하기 위해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는 전 체제 내 인사 두광杜光, 반체제 인사 후스건胡石根, 모즈쉬莫之許 등 40~50명이 참석했다. 한 평론가는 옛 소련의 대문학가 솔제니친이 《붉은 수레바퀴》에서 같은 종류의 역사적 현상을 소개했음을 특별히 거론한다. “이때 러시아 각지에는 마치 전염병이 생긴 것처럼 대형 연회를 여는 분위기가 유행했다. 사람들은 돈이 있든 없든 함께 모여 밥을 먹고 그 기회를 빌려 즉석연설을 해서 차르의 권리 제한과 헌정 실현을 호소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의 ‘판쭈이’ 활동과 아주 비슷하다.
둘째, ‘헌화’. 구글 중국이 인터넷 검열에 항의하기 위해 대륙 지역의 검색 엔진 서비스를 중단하기로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젊은 네티즌들이 구글 베이징 본부 문 앞에 가서 헌화를 함으로써 의사 표현의 자유가 사망한 것에 대한 애도를 완곡하게 표했다.
- 제14강 <시민사회의 성장>중에서

@ 중국의 과거 청산 문제, 국가의 폭력이 비호받는 이유

60년의 교훈을 회고하면서 모든 책임을 마오쩌둥과 4인방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히 가장 큰 책임이 있고 죄도 있다. 그러나 문혁 전후에 비판 투쟁의 대상이 됐던 원로 간부들이 타격을 받았다고 해서 전반기 30년 집권의 책임을 씻어버릴 수 있을까?
류사오치를 예로 들어보자. 박해를 받고 처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당 내외와 중국 민중으로부터 널리 동정받는다. 그러나 사실대로 따져보면 당내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의 분위기를 앞장서서 조장한 사람은 바로 류사오치이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표현을 제안했을 뿐 아니라 개인숭배를 적극 고취했던 사람이다. 1958년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 장원톈 등 중국 공산당 원로들이 마오쩌둥에 의해 무참히 타격받는 현실을 보았을 때도 류사오치는 여전히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를 굳건히 지지했다.
결국 류사오치 자신이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의 최대 희생자가 됐지만 그렇다고 류사오치가 바로 이런 개인숭배라는 나쁜 풍속을 만든 사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류사오치,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등의 전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마오쩌둥 한 사람이 중국을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난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오늘날 마오쩌둥의 책임만을 묻고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의 책임을 간과한다면 이런 역사는 진실한 역사가 아니다. 이런 허구적인 역사는 어떤 유익한 경험적 교훈도 줄 수 없다.
이런 성찰에 대해 경제학자 허칭롄何淸蓮은 “중공 정치의 ‘희생양’ 기제”라는 개념을 분석의 기본 틀로 제시한다. 그녀는 이렇게 지적한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서 정치투쟁을 거칠 때마다 새롭게 자리를 이어받은 지도자는 자신의 통치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늘 습관적으로 잘못을 범한 책임을 실권을 잃은 인물 어느 한 사람 혹은 여러 명에게 떠넘긴다.”
- 제15강 <60년에 대한 회고>중에서

@ 중국사 100년의 중심축은 ‘혁명’

‘문화대혁명’ 초기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열정을 품고 뛰어들었는가에 대해 학자 천자치는 민중이 운동의 합법성에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혁’의 무서운 점은 바로 동기가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함을 자인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고 경기하는 방식으로 마오쩌둥에게 충심을 보였다. 인류의 고난 대부분은 동기가 순수하다는 핑계 아래서 자행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문혁’에 참가한 사람들의 동기는 다름 아닌 마오쩌둥의 호소에 호응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계속 혁명’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이 호소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관건은 여전히 다분히 ‘혁명’이라는 두 글자에 있다. 아편 전쟁 이후 중국사 100년의 중심축은 ‘혁명’이었다. 1949년에는 여파가 아직 출렁이고 있었다. 천자치가 지적한 ‘동기가 순수하면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라는 심리는 바로 ‘혁명’의 신성성의 엄호 아래 보이지 않게 성장한 뒤에 국민성 안으로 침투한 것이다. 이런 ‘혁명’ 담론의 파괴성은 제도와 문화의 여러 가지 요소 때문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국인의 사유 패턴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자행한 ‘6ㆍ4’ 진압의 경우, 자기변호의 이유는 바로 진압이 ‘사회 안정에 유리하고 경제 발전에 유리하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동기가 순수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동기가 순수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둔다)’라는 사유이다. 그러나 이 말이 여전히 많은 중국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사유는 아주 많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
- 제15강 <60년에 대한 회고>중에서

기본정보

상품정보 테이블로 ISBN, 발행(출시)일자 , 쪽수, 크기, 총권수, 원서(번역서)명/저자명을(를) 나타낸 표입니다.
ISBN 9788962620672
발행(출시)일자 2013년 02월 20일
쪽수 558쪽
크기
148 * 210 * 35 mm / 852 g
총권수 1권
원서(번역서)명/저자명 中華人民共和國史十五講./王丹

Klover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200원 적립

10점 중 7.5점
/집중돼요
재밌습니다
10점 중 10점
/집중돼요
중국현대사에 대해서 알고싶어서 선택했고 유용할것같다
10점 중 7.5점
/추천해요
중국 내 민주화 운동을 했던 저자의 책이기 때문에 중국늬 시민사회 등 가려진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다만 덩샤오핑 이후 중국정치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참고해야 할 것 같다.

문장수집 (0)

문장수집 안내
문장수집은 고객님들이 직접 선정한 책의 좋은 문장을 보여주는 교보문고의 새로운 서비스입니다. 마음을 두드린 문장들을 기록하고 좋은 글귀들은 "좋아요“ 하여 모아보세요. 도서 문장과 무관한 내용 등록 시 별도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리워드 안내
구매 후 90일 이내에 문장수집 작성 시 e교환권 100원을 적립해드립니다.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주문취소/반품/절판/품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판매가 5,000원 미만 상품의 경우 리워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2024년 9월 30일부터 적용)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

이 책의 첫 기록을 남겨주세요.

교환/반품/품절 안내

  • 반품/교환방법

    마이룸 > 주문관리 > 주문/배송내역 > 주문조회 > 반품/교환 신청, [1:1 상담 > 반품/교환/환불] 또는 고객센터 (1544-1900)
    * 오픈마켓, 해외배송 주문, 기프트 주문시 [1:1 상담>반품/교환/환불] 또는 고객센터 (1544-1900)
  • 반품/교환가능 기간

    변심반품의 경우 수령 후 7일 이내,
    상품의 결함 및 계약내용과 다를 경우 문제점 발견 후 30일 이내
  • 반품/교환비용

    변심 혹은 구매착오로 인한 반품/교환은 반송료 고객 부담
  • 반품/교환 불가 사유

    1)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단지 확인을 위한 포장 훼손은 제외)
    2)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악세서리 포함) 등
    3)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예) 음반/DVD/비디오,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4)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1)해외주문도서)
    5)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이상 ‘다운로드’를 받았거나 '바로보기'로 열람한 경우
    6)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7)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8) 세트상품 일부만 반품 불가 (필요시 세트상품 반품 후 낱권 재구매)
    9) 기타 반품 불가 품목 - 잡지, 테이프, 대학입시자료, 사진집, 방통대 교재, 교과서, 만화, 미디어전품목, 악보집, 정부간행물, 지도, 각종 수험서, 적성검사자료, 성경, 사전, 법령집, 지류, 필기구류, 시즌상품, 개봉한 상품 등
  • 상품 품절

    공급사(출판사) 재고 사정에 의해 품절/지연될 수 있으며, 품절 시 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이메일과 문자로 안내드리겠습니다.
  • 소비자 피해보상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1) 상품의 불량에 의한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 해결 기준 (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2) 대금 환불 및 환불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함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 관련한 안내가 있는 경우 그 내용을 우선으로 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드라이브
이벤트
  • [sam] 교보문고 북앤플러스알파 요금제
  • [sam] 12주년 이벤트
01 / 02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