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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605
차호지 저자(글)
문학과지성사 · 2024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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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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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그렇게 쓰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어요”

공간의 가장 안쪽에서
집요한 시선으로만 포착되는
현실과 환상의 어름
약동하는 물음표로 가득한 너른 틈의 설계자
차호지 첫 시집 출간

2021년 제2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차호지의 첫 시집 『시작법』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05번으로 출간되었다. 총 4부로 나뉘어 묶인 51편의 시에는 “좁은 공간에서 혹은 한정된 시야로 혹은 제한된 관계 안에서 특정한 장면을 만들어내거나 사유를 확장해나가는”(심사평) 시인만의 개성적인 작법이 뚜렷하게 투영되어 있다.
차호지의 시에서 편편이 등장하는 공간은 사면의 벽과 천장과 바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상자’(「설계자」)나 ‘방’(「소음」)과 같은 육면체의 형태는 물론 ‘열차’(「열차」), ‘천변’(「저글링」), ‘공중’(「공중」)까지 아우른다. 둘레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이러한 공간들이 전면적으로 막혀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까닭은 시 속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놓일 장소를 설계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꾸린 공간은 “창문이 완전히 없”는 경우가 “좀처럼 없”(「바퀴의 왕」)기에 바깥의 공기가 선선히 들어올 수 있고,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도 “바람은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 나”(「아쿠아플라넷에서」)가고는 하며, 환상은 그 바람을 타고 현실 속으로 자유롭게 틈입한다.
이때 벽을 상상하며 직접 세우는 일은 폐쇄를 더 견고하게 할 뿐인가? 아니면 세워진 벽을 언제든 부정하고 허물 수 있다는 점에서 잠정적인 탈출과 맞닿아 있는가? 시 속 설계자들이 그들이 직조한 공간을 좀체 벗어나지 않기에 이러한 의문은 특히 커진다. 공간의 바깥을 “밟는다고 해서 갑자기 어딘가로 떨어지지는 않을”(「산책」) 테지만, 이들은 폐쇄된 공간 안쪽에 들어앉아 충실하게 잔류한다.
확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러한 머묾이 정해진 질서를 충실하게 감각함으로써 그것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치열한 태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완전한 허공에 붕 떠서 살아갈 수는 없다. “점점 더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올라도, “더는 올라갈 높은 건물이 없어 가장 높은 건물 위에서 제자리 뛰기 하”여도 그곳에조차 천장이 있다. 그러므로 머리에 닿는 것이 천국이 아닌 천장임을 알면서도, “엉엉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파도 “천장에 머리를 자꾸만 부딪”(「공중」)치는 일은 유의미한 시도로 읽힌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아쿠아플라넷에서」)는 법이다.

이 책의 총서 (466)

작가정보

저자(글) 차호지

시인 차호지는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의 말

어디를 찾아가고 있었다
바다 위의 섬
작은 섬

생각을 계속하고 싶었는데
화면은 밝고
시끄럽고

빈집이 하나 있었다
떠난 지 오랜
미래의 집

2024년 6월
차호지

목차

  • 시인의 말
    1부
    시작법 | 안내 | 캉기 | 모험 | g | 시놉시스 | 대화 | 면적 | 사랑하는 사람 | 설계자 | 바퀴의 왕 | 박멸 | 창문
    2부
    그 시절 | 도망자 | 소음 | 이사 | 역할 | 녹음기사 | 돌 | 경도 | 공중 | 가마 | 두통 | 단체
    3부
    순서 | 2인실 | 의인법 | 카운터포인트 | 사랑 | 끝 | 여기서부터는 다른 작품입니다 | 모빌 | 그네 | 아쿠아플라넷에서 | 열차 | 제자리 | 목소리
    4부
    봄 | 오토 | 저글링 | 연행 | 스노볼 | 커튼 | 시차 |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 긴 외침 이후에 | 매듭 | 산책 | 어디야? | 신작
    해설
    이후의 이야기 · 홍성희

책 속으로

선생님. 진짜 같은 말을 하라고 하셨지요. 모두 거짓말인 걸 알고 있다고요. 거짓말이지만 진짜처럼 보이는 그런 말을, 진심을 다해서 해야 한다고요. 복잡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요. [……] 선생님, 말씀해주신 것보다 절차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사라졌다,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정말 제 눈앞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겠지요? 선생님, 저는 배운 대로 잘하고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 제가 본 선생님을 못 본 척하고, 진심으로 못 본 척하고 여기 있는 문장들을 못 본 척하고 서명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겠지요? 네?
-「시작법」 부분
 
모두가 적이며 나와 연대하는 것들은 바퀴의 왕을 구하려는 바퀴들인 것, 이를 떼어내어 바닥에 뿌리면 그로 인해 번성한 바퀴들이 쉼표와 쉼표 사이에 숨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나는 빵 조각을 발치에 두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바퀴를 밟아 죽이고 있다 터진 바퀴의 머리 위 빵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며 그것을 다시 뭉쳐놓는다 그리고 가능한 한 바닥으로 바닥으로 묻는다 그것은 모든 바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바퀴의 왕은 왜 스스로 굶어 죽지 않는가?

바퀴의 왕은 왜 스스로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지 않는가?
-「바퀴의 왕」 부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너와 나의 발 사이에 놓인 바닥에 붙은 껌을 바라보면서. 머리 위 햇볕이 뜨겁다. 수없이 밟힌 껌은 이미 검어져 껌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점점 바닥으로부터 유리될 것처럼 흐물거렸고 자세히 보면 그것이 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로 밟으면 발바닥에 들러붙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너에게 한 발 다가갈 것이다. 너 역시 줄곧 바닥을 보고 있었으므로 거기 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너는 처음부터 껌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닥에는 껌 이외 아무것도 없다. 나는 힘을 준 왼발로 몸을 지지하고 오른발을 우리 둘 사이로 내딛는다. 나는 정확히 껌을 밟게 될 것이다. 이후 어느 방향이든 간에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 신발이 붙었다 떨어질 것이다. 이 오후가 지나 바닥이 식을 때까지 우리는 그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사랑」 전문

저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저의 콧잔등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걸고 여기로 저기로 끌고 다녀주세요. 그것이 비인도적인 처사라 느껴지신다면 나의 양 손목에 끈을 묶어도 좋아요. 느슨할 정도로만요.

그러니까 끌고 가주세요. 어디든 좋아요.

제 발로는 어디를 걷고 있어도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주변을 보는 게 무서워요. 이름들을. 거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이름들이거든요. 그건 이미 없어진 자리거든요.

지난봄 이후로

땅이 파이고 건물이 무너지고 물에 잠기고 난 뒤에도 저는 다시 살고 그 사람도 살고……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드는 저 사람을 몇 번째 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와 나는 또 작별을 말하겠지요? 그는 자신이 몇 번째로 다시 돌아온 사람인지 알고 있을까요? 저는 또 몇 번째일까요?
-「연행」 부분

편히 누워 잠들지 못한 지 오래여서 앉은 자세로 잠이 들었을 때 고정되지 못한 머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느끼면서 잠에서 깨어나지도 잠에 다시 들지도 못하고 있을 때처럼 커튼은 움직이고 있다.

고통스러운 것 같다고 나는 쓴다.

커튼 앞에서 커튼을 일부러 들춰 보지 않아도 거기에 작은 새 한 마리도 존재할 리 없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커튼은 희고 투명하다.

어느새 공사는 끝난 것 같다. 공기 중에는 평온한 기운이 감돈다. 새가 다시 울기 시작하고 그러자 좀더 멀리서 다른 새가 답을 하듯이 운다.

정말 답을 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새의 말도 모른다.
-「커튼」 부분

출판사 서평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형상에는
눈길이 가게 마련이었다”
─시작, 법(始作, 法): 움직임에 몰두하며 시작하기

열차는 만석이고 창가에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나란히 한 방향으로 앉아 있다. 사람들은 거의 창밖을 보고 있다. 바깥을 보는 것이 좋아서라기보다 움직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 열차가 순환한다면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움직이는 바깥 풍경을 보다가 아까와 비슷한 풍경을 발견하고 그제야 이곳이 아까 보았던 풍경과 같은지 지도로부터 확인하여 그것의 맞고 틀림을 가늠하는 놀이에 온 하루를 다 썼을지도 모른다. 열차가 정차하고 다시 출발할 때마다 천장에서 무수히 발소리가 들렸다. 플랫폼에서 보았던 얼굴들은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다시 기억나지 않았다.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열차에 앉아 있으면 나도 다시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열차」 부분

공간 안팎의 움직임을 분주하게 좇는 시선이 함께하기에, 단순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사방이 에워져 있음에도 차호지의 시는 결코 정적이지 않다. 마치 “움직이는 아기 새 모양 모빌이 그리는 원 모양에 마음을 빼앗겨서 줄곧 움직이는 아기 새 모양 모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모빌)는 것처럼, 저글링을 하는 누군가가 공을 놓쳤을 때 “아까 그 자세로 가만히 멈춰 있는 그” 대신 “세 개의 공이 어디로 향하는지 쳐다보게”(「저글링」) 되는 것처럼, 움직임에는 이목을 잡아끄는 힘이 있고 시인은 기꺼이 “움직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열차」)긴다. 움직임마다 바싹 따라붙는 특유의 눈길은 얼핏 고요한 듯 보이는 일상의 장면에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밀도 높은 관찰은 풍경의 디테일을 선명하게 만들어 찰나의 사소한 미동에도 생경한 느낌을 불어넣고, 이에 시인은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들이 움직이고 있으면 왜 저건 움직이고 있을까”(「바퀴의 왕」) 자문한다. “이제 다 썼고 더는 쓸 게 없다고 생각하는 때에”도 사물들은 “꼭 다시 움찔거”(커튼)리기에 이 물음은 끝날 수 없고, 움직임이 계속되는 이상 “사물이 사물이었던 시대”(「돌」)는 저물게 되며, “말을 하면” “움직이는 사람이”(「제자리」) 되게 마련이므로 시인은 외부의 움직임에 몰두하는 관찰자의 자리에서 나아가 스스로 시적 움직임의 주체가 된다. 차호지의 시 쓰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해를 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이 아주 많을 때 그 말은 떠오른다”
─시, 작법(詩, 作法): 틈새에서 질문하며 쓰기

나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면 여기 있는 문장을 읽을 때 눈동자가 움직이는 속도. 다음, 다음으로.

[……]

나는 천천히 말하려고 노력한다.

시간은 움직이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을 쫓고 있다. 그건 이미 내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걷는 나의 뒤쪽에서 앞서 걷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등을 보면서

모르겠어?

[……]

나는 열린 문을 닫으면서 거울을 본다. 보고 싶지 않아도 거기에 거울이 있다. 나는 거울에 없었는데 잠시 후에 생겨났다.

등을 돌려서 등을 보지는 못하는데도

어째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시차」 부분

세계를 끈덕지게 관찰하는 일, 그리고 이것으로 시를 쓰는 일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시차가 발생한다. 응시의 앞에는 그보다 선행하는 움직임이, 창작의 앞에는 그보다 선행하는 골몰이 있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나중이 되어서야” “그런 말을 했었구나 하고 뒤늦게 그랬었구나 생각하”(「산책」)는 것처럼, 어떤 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그 순간을 글자로 옮겨 적을 수 있다. 차호지는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시차를 작법의 도구로 활용한다.
시차를 인지하고 씀으로써 더 한껏 벌어지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은 또 다른 틈에 대한 인식으로 흐른다. 꽉 닫혀 있는 듯한 공간에도 언제나 문이 있음을, 그리고 문은 무언가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틈임을 새삼스럽게 환기한다. 그렇게 시인은 시적 공간의 가장 안쪽에 있으면서도 바깥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로 힘껏 끌어오며, 그 갈피마다 끼어드는 의문을 문 너머의 독자와 공유한다. 당신의 좌표는 현실과 환상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당신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쓰는 일은 결국 안과 밖이 맞닿아 생기는 어름을 어루만져보는 행위이고, 이는 곧 틈새의 폭을 가늠하며 수많은 가능성의 공간을 설계하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홍성희가 짚고 있듯 “말의 힘은 말 자체가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 놓여 있”고, “이야기가 무언가를 움직이게 한다면 그 힘은 그것이 그려낸 닫힌 세계의 내용만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와 다른 하나의 이야기,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동시에 만들어지는 ‘사이’들에 있을 것이다”.

[……] 자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묻는 소리가 또 들렸다. 나는 안쪽에 있었다. 그 사람은 바깥에 있었다. 너는 어디야? 나는 목소리를 내보았다. 답은 없었다. 나는 닫혀 있는 문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문은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까이 가자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거기서 찬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다시 완전히 닫았다. 닫았다가 열었다가 해보았다.
-「어디야?」 부분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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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32042923
발행(출시)일자 2024년 06월 26일
쪽수 126쪽
크기
128 * 206 * 11 mm / 286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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