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다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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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총서 (245)
작가의 말
이렇게 하나씩 지워가고 있다.
2022년 7월
정가을
목차
- 제1부
아는 얘기ㆍ13/태양이 나뭇가지 위아래로 티눈처럼 솟아 있어 한번 웃고 차고로 뛰어갔다ㆍ14/로그인 시도가 감지되었습니다ㆍ16/마우스포인터ㆍ18/조촐한 회식ㆍ19/오늘의 백일홍ㆍ20/Bibbidi?Bobbidi?Booㆍ22/하품할 때마다ㆍ24/주머니 속 귤 두 개가 따뜻해지고 있다ㆍ26/청도ㆍ27/브런치ㆍ28/비단무늬 물뱀 입술 피어싱ㆍ30/장산행ㆍ32/나와 다른 옷의 태도ㆍ34
제2부
빌어먹을 다짐들ㆍ37/하얗게 된 사람들ㆍ38/델타크론ㆍ40/나도개피ㆍ42/밀푀유나베ㆍ43/모란은ㆍ44/거지덩굴ㆍ46/푸른 노루귀ㆍ48/본색ㆍ50/재건축ㆍ51/아이라인ㆍ52/시클라멘ㆍ54/파래ㆍ56/뒤로 더 많이ㆍ58/oilㆍ60
제3부
크랙 위ㆍ63/10시 33분 38초ㆍ64/거울의 레트로ㆍ66/남남바람꽃ㆍ68/망ㆍ69/사과의 중심ㆍ70/양ㆍ72/살필 줄 알아야 해ㆍ74/운ㆍ75/물의 집ㆍ76/욕조에 누워ㆍ78/파 재래기ㆍ79/핑거라임ㆍ80/대답ㆍ82/일어서면 어지럽고 기대면 조금 달아오르는ㆍ83/삼월ㆍ84
제4부
으름꽃ㆍ87/접촉자ㆍ88/양지꽃ㆍ89/귤밭 옆 신축 빌라ㆍ90/R36ㆍ92/복도를 걷는 사람들ㆍ93/1511호ㆍ94/그와 만두ㆍ96/무궁ㆍ97/청도 2ㆍ98/소문ㆍ99/편도염ㆍ100/꿈ㆍ102/누구나 반할 색ㆍ103/자몽들ㆍ104
해설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105
책 속으로
물 한 컵 돌고 그다음 빨간 글씨 쓰인 투명 컵에 술이 채워진다 사람 수만큼 젓가락이 놓였다 오늘 조금만 마실 거야 내일 너무 힘들면 안 되니까 세 칸 기본 안주 접시 놓이자마자 잔을 들었다 비워진다 내부 민원이 더 힘든 거 알지 우리 멤버가 지금 너무 좋으니까 그리 알고, 채워진다 틈틈이 바람 좀 쐬어가며 일해 계속 앉아 있는 게 몸에 안 좋은 거 알지, 벙벙하게 채워지고 못 들을 척 비워지고 어제 그 할머니 어떻게 됐어 양로원에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밥을 해 먹을 수 있지만 그게 안 될 때 가고 싶다고 혼자서 혼자로 살 수 없을 때 갈 수 있는 곳이 요양원이에요 양로원에는 지금 가야 하고요 이야기하고 눈 마주치고 이야기하고 웃다가 한숨짓고 이야기하고 다른 걸 원하는 게 아니라고
- 「아는 얘기」 전문
한숨 자고 나온 그
두 뼘 커져 있다
보랏빛 입술 침 마를 때마다 등 곧추세웠는데
그때마다 투명색 구멍이 생겼다
잊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바벨을 달았다
산 채로 먹힌 자들이 지르는 비명
비단무늬 입술
자꾸만 커지고 있다
■ 시인의 산문
너와 내가 쓰는 언어가 달라
종일 비 온다.
낮에 헤매었던 개울가
유채꽃 닮은 그 새들은 돌아갈 집이나 있었을까.
새들이 흘려놓은 슬픔을
온전히 옮기고 싶어져서
온종일 비 온다.
마당으로 나와
동백꽃 나무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혼자 조금 외롭게 있으니 꽃이 보이는구나
백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세로로 일어났다 사선으로 앉기를
반복하는 매화노루발
쇄골이 삐져나온 어깨가 단단해지고 있다
- 「비단무늬 물뱀 입술 피어싱」 전문
오늘, 붙은 먼지인가 했는데 몸이 마르더니 떨어졌다
오늘, 그제서야 앉아서 보는데 흰 점의 등이 생겼다
오늘, 출근시간 환승역 승강장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 구멍에 구멍보다 조금 크게 그물망을 잘라 얹고 손가락 두 마디 높이로 흙을 깔고
오늘, 뿌리를 잘 세운 뒤 빈 공간에 흙을 채운다
오늘, 공기가 통하도록 너무 누르지 않는다
오늘,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떨어지면 훑어도 되는데
오늘, 절대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 「빌어먹을 다짐들」 전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
두터운 검은 외투 골라 입고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 집 나선다
지하철역 아이들 신발 골목이 들썩인다
새들이 구름을 메고 먼 산 넘어가고 있다
제멋대로 부푼 보도블록 속력을 낸다
어제는 IPA 맥주를 마시다 소파에 쓰러져 한겨울 아무도 없는 숲속을 헤매며 우는 꿈을 꾸었다
번뜩이는 눈이 박힌 머리 하나 점프하여 내 손을 물어 달려드는 그를 온몸으로 떨쳤는데 또 엉겨 붙어 이층으로 도망가며 소리쳤다
나 아닌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듯 고양이를 어루만졌다
해가 지면서 노란 커튼은 세로로 물들었다
그들은 사라졌는데 수백 개 부드러운 꼬리가 봉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상하게 바닥에 쌓이는 것은 없었다
국밥을 말아 먹고 왔다는 검은 옷들이 저녁의 안부를 묻고는 대강 사라졌다
모니터를 보는데 머리가 메스꺼워 책상에 쓰러지다 코뼈가 부러졌다
돼지 뼈 국물에 불은 모란 꽃잎 회색 벽에 달라붙어 부글거렸다
귀에서 피가 흘러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흰자위가 전부인 일몰의 꼬리 끝에 꼬리가 매달린 발톱이 목을 할퀴었다
갈라진 목에서 파란 꽃잎으로 나체를 두르고 있는 그가 튀어 나왔다
- 「델타크론」 전문
#1
지하철 문 열리자 가슴께까지 접어진 상자 견고한 건물처럼 지어져 있다 허리 굽혀 손수레 방향을 튼다 바퀴가 빠지지 않게 힘껏 당긴다 집으로 간다
#2
지하철 문 닫히고 물 아직 차지 않았는데 에어컨 바람에 옷 여민다 슈트 소매 끝 물 배어 나왔다 비닐 깔고 의자 바닥에 몸 걸쳤을 뿐 물속보다 더 깊은 길 차가워진 손바닥 무릎에 닿게 해본다 졸고 있는 척하는 무릎을 감싸본다 옆에 있는 남자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3
오후 5시 기침이 새어 나와 건물 밖으로 나간다 열 감지기는 지쳤다 목에서 피 맛이 났다 고개 들어 하늘 보는데 휘갈겨진 구름 모양 아름다웠다
#4
봄여름가을겨울 거리두기 3단계가 되면서 사계절이 모였다 봄 44세 오십견 겨울 백내장 수술 아가미 세포 생성하는 시간 가을 도다리가 고마웠다 여름은 다소 풍채가 좋아지는 것이 고민이긴 하지만 주말, 함께 빡세게 일했다 유리문이 파래서
- 「파래」 전문
벨이 울리면서 얼굴 하나 그려졌다 등부터 뗐다가 바로하고 앉는다 네 과장님 가을 씨는 봄에서 바로 넘어왔어요? 여름은 배우지도 않고? 한낮 우체국 다녀오는 길은 금방이었는데 걸쳐 입은 겉옷 벗을까 말까 아스팔트 건조한 도로가를 왔다 갔다 했다 수화기 내리니 얼굴이 까맣게 변했다 여기는 수돗가입니다만, 에둘러 가기 시작한 대답이 쉽게 보였나 궁금한 건 짐작하지 말고 물어봐야지 직장인 스트레스라고 아무도 모르게 검색해 본다 서너 가지 색으로
- 「대답」 전문
출판사 서평
정가을 시인의 시세계에 발을 내딛었을 때 먼저 부딪치는 기이한 점은 바로 판타지 풍의 장면 제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판타지 장르의 장면 제시는 지금 우리 시대의 가장 뜨거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작동하여 사람들의 현실적 심리를 대변해준다. 멀티미디어의 대두와 사이버 공간을 통한 사회적 교감, 더 나아가 메타버스를 통한 사회적 관계망의 형성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이 과거 전원 내지 공장을 배경으로 한 아날로그적 현실이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매체의 변화와 맞물려 전개되는 시적 풍경은 그 매체에 얹혀사는 현대인의 심리적 투사와 전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한다면 매체와 현실의 구분은 있어야 하는 것이 보통의 정상적 사유로 보이는데 정가을 시인은 현실적 공간에 사이버 공간을 겹치게 하고, 그 겹친 공간 속에 현대인이 기생해 있다는 인식을 함으로써 비틀린 세계 인식, 즉 환상적 세계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그리는 디지털 공간으로 펼쳐지는 현실 인식은 매우 환상적이고 게임적인, 그래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다음 시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뭐랄까 태어났는데
게임 바탕화면 속
수만 번 긴 칼에 휘둘려
검은 숲에 던져졌다가
똑같은 모습으로 생성되지만
계속 자고 있는 캐릭터
뭐랄까 태어났는데
중세의 왕국
수백만 번 창에 휘둘려
핏빛 강물에 던져졌다가
똑같은 모습으로 생성되지만
계속 강물에 던져지는 캐릭터
뭐랄까 태어났는데
현대의 옥상
수천만 번 캘빈 총에 휘둘려
푸른 옥탑방에 쌓였다가
똑같은 모습으로 생성되지만
계속 석탄처럼 쌓여가는 캐릭터
햇살이 손등에 한 줄로 꽂히고 있다
처음의 작은 점
- 「거울의 레트로」 전문
이 시는 이번 시집에서 정가을 시인의 의식을 대변하는 작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시는 판타지 장르로 그려지고 있는 게임 속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현실의 풍경은 아니다. 그렇지만 게임 속의 환상적인 내용과 모습이 당대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하고 묻는 것이 시인의 의도라 할 수 있다. 판타지 장르가 보여주는 문법, 즉 클리세에 따라 이 시의 캐릭터는 환생(빙의/귀환)을 거듭한다. 각각의 다른 시대와 장소에 나타나도(태어나도) 똑같은 미션을 수행하는, 즉 그 시대와 장소에 주어진 생애를 살아나간다. 게임 속의 캐릭터나 현실 공간 속의 인간이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 내지 존재라는 점은 같다. 경계를 해체하고 차이를 부정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지만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그 점에서 현실적 삶의 공간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시선은 매우 익살스러우면서도 전복적이다.
이 시의 문제성은 그 제목에서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거울의 레트로’, 우선 생각해봐야 할 것이 이 ‘거울’과 ‘레트로’를 시인이 사용한 의도다. 알다시피 거울은 반영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물건이다. 그런데 그 거울을 중첩해놓고 사용하면 거울은 그 반영을 서로 계속 반복하여 무한복제, 다시 말해 무한증식의 매우 환상적인 장면을 만든다. 여기서 ‘레트로’가 그것을 말해주는 문구다. 레트로라는 단어의 뜻이 과거의 것을 그대로 좇아하려는 것으로 본다면 모방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것은 거울의 반영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모방의 모방, 반영의 반영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무한복제와 증식을 가리키는 의미로 아주 복잡한 현실과 의식을 대변하는 낱말로 기능한다. 때문에 ‘자기반영성’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라면 ‘거울의 레트로’가 바로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을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시인이 이런 제목을 쓴 의도를 풀어본다면, 이런 자기복제, 혹은 무한증식이 갖는 판타지 풍의 이야기는 불확실성과 임의성이 전면화된 오늘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실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기본정보
ISBN | 9791158965525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7월 14일 | ||
쪽수 | 128쪽 | ||
크기 |
126 * 205
* 10
mm
/ 28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인동네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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