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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조영란 시집
시인동네 시인선 155
조영란 저자(글)
문학의전당 · 2021년 0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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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간극에서 표류하는 일상의 감각들
2016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조영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가 시인동네 시인선 155로 출간되었다. ‘간극’은 글쓰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계’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글쓰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계로서의 간극은 또 다른 글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것은 어떤 시간, 또는 경험과의 단절점이 또 다른 시간이 시작되는 지점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간극’에 대한 감각으로 인해 조영란의 시에서 ‘쓰기’와 ‘삶’은 평행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 책의 총서 (244)

작가정보

저자(글) 조영란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대를 졸업했다. 2016년 《시인동네》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를 아끼는 가장 현명한 자세』가 있다.

작가의 말

설명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그 영원의 공백에
시가 있다고 믿는다.

이제 눈부신 허기를 견딜 일만 남았다.


2021년 6월
조영란

목차

  • 제1부

    간극 ㆍ 13
    너라는 오지ㆍ 14
    눈사람 만들기ㆍ 16
    작자미상 ㆍ 18
    조율 ㆍ 20
    회전목마 ㆍ 22
    다행이라는 불행에게ㆍ 24
    뜻밖의 무늬ㆍ 26
    유리병 ㆍ 27
    파수꾼 ㆍ 28
    유일한 서사ㆍ 30
    자전거 배우기ㆍ 32
    균형 ㆍ 34
    언젠가의 상상ㆍ 36
    불시착 ㆍ 38
    모과에 불을 밝히듯이ㆍ 40
    커튼콜 ㆍ 42


    제2부

    자석 ㆍ 45
    보풀 뜯는 밤ㆍ 46
    조련 ㆍ 48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ㆍ 50
    초인종이 울린다ㆍ 52
    노란 의자에 앉은 부인ㆍ 54
    매듭 ㆍ 56
    부추 키우기ㆍ 57
    바늘의 기분ㆍ 58
    블라인드 ㆍ 60
    달리기 시합ㆍ 62
    담배의 맛ㆍ 64
    조용한 의자ㆍ 66
    에어캡의 고백ㆍ 68
    모래시계 ㆍ 70
    리넨셔츠 ㆍ 72
    볼링 ㆍ 74
    수건돌리기 ㆍ 76


    제3부

    보호색 ㆍ 79
    환승 ㆍ 80
    불씨 ㆍ 82
    립스틱 ㆍ 84
    용수철의 힘ㆍ 86
    팝콘이 뛴다ㆍ 88
    빈방의 빛ㆍ 90
    마지막 상징ㆍ 92
    사랑 ㆍ 94
    거미줄의 날들ㆍ 95
    몽유의 방ㆍ 96
    분기점 ㆍ 98
    백색소음 ㆍ 100
    뿌리 생각ㆍ 102
    기타 이야기ㆍ 104
    마늘 보고서ㆍ 106
    뻗댄다는 말ㆍ 108

    해설
    간극(間隙)의 감각/고봉준(문학평론가) ㆍ 109

책 속으로

입술을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이념처럼

형체도 없이
나의 지표가 되어버린 세계

섣불리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세계

가면이든
최면이든

끝내 가닿을 수 없는
당신의 세계

너무 오래 지척에 갇혀 있는
온전한 세계
- 「간극」 전문


얼마나 마음을 단단히 뭉쳤는가가 이 작업의 묘미입니다

움켜쥘 것 없는 손은 생략해도 무방합니다
발이 없어도 어디든 가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좀 더 풍성한 은유가 따라올 것입니다

모자를 머리 위에 올려놓아 보세요
햇빛의 사적인 감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코는 적당히 비뚤어지는 게 좋습니다
앞뒤 없이 한없이 둥글기만 한 것들에게 모서리가 생길 것입니다

맨땅을 뒹굴게 하고 싶겠지만 참아야 합니다
흰 옷에 얼룩을 묻히는 것은 불안을 사랑하는 일
점점 얼어붙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니까요

웃을지 울지는 알아서 결정하세요
어차피 보여줄 건 텅 빈 미래인 걸요

우리는 사라질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완성을 소망하며 쓸데없이 한 시절을 바칩니다

보이나요?
미치도록 뜨거운 심장 때문에 전 생애가 무너져 내리는 한 사람

당신의 솜씨입니다
- 「눈사람 만들기」 전문


목발을 잃어버리고
나는 왼발 다음에 오기로 했던 오른발을 기다렸다

밤은 언제부터 어두웠던 거지?

아침은 더디 오고
마음을 다해도 몸은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

실패를 높이로 받아들이고
좌절을 문턱으로 여기는 날이 많아졌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한 발로 이토록 오래 서 있어야 하다니

내가 진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절뚝거리는 하루는 누구에게나 있다
재활에 대한 장전(章典)이 있다면
어떤 걸음이건 뼈가 아파야 한다는 것

가능에 대한 절실함으로 힘껏 발을 뻗는다
뼛속으로 빼곡히 차오르는 생의 밀도,
하얗게 일어서는 중심
- 「균형」 전문


우린 샴이었던 거야

숨결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고

전류처럼 뜨거운 피를 서로에게 이식하고도
몰랐던 거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게
두 개의 심장이 하나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

한 집에 살면서도
평생 서로를 찾아 헤매듯이

너무 가까워서
우린 더 아팠던 거야
- 「자석」 전문


당신을 펼치면 비문의 세계가 열린다

단락을 나누듯
짧은 기침 몇 지나고 나면
발작적으로 뛰는 심장의 운율
자리를 바꿔 앉은 감정의 오타 같은 것

몇 병의 취기로도 잠들 줄 모르는 기억은
텅 빈 가슴을 채우며 빼곡해지는데
붉게 표시해둔 우울은 성급한 나를 위한 선물이었으리

한순간도 당신인 적 없던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상투적인 농담들을 지우고 나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민낯의 그늘

행간에 빠진 것은 침묵일까
열린 결말은 언제 닫힐까

쏟아지는 질문 앞에서 나는 자꾸 문맥을 잃어버리고
끝내 마침표를 찾지 못하고
어디쯤에 밑줄을 그어야 하나

좀 더 그럴듯한 결핍을 위해
열렬히 실패하며 스스로 정물이 되어버린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전문

■ 시인의 산문

손수 지은 완두콩밥을 드시고 아버지가 자상한 표정으로 엄마한테 물었다. “완두콩 보면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평생 모나지 않게 살다가 완두콩처럼 동글동글 작아진 엄마는 생각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연한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그 미소를 보며 아버지는 아득한 변방의 이방인처럼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완두콩 철이 되면 내 생일이 가까이 왔다는 걸 알고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아버지는 완두콩을 소쿠리에 담아 와 엄마 앞에 놓고 껍질 까는 시늉을 해보였다. “껍질 까는 것마저 잊으면 안 돼요.” 두꺼운 망각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 엄마
는 점점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

출판사 서평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흔히 ‘역사철학테제’로 불리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그 미래 속의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문장을 “매 순간이 메시아가 도래할 수 있는 좁은 통로”라고 옮긴다. 유대인에게 ‘미래’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역사적 진보의 필연적 산물로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당시 좌파 진영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자 벤야민이 ‘시간’과 ‘해방’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시집 해설의 첫머리에서 무거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역사’나 ‘해방’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벤야민은 시간, 즉 매 순간을 ‘메시아’가 도래할 수 있는 해방의 시간으로 이해했는데, 이는 ‘시간’을 과거에서 기원하여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것으로, 또한 각 시간들을 양적으로 균질한 시간으로 간주하는 근대적인 시간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메시아’나 ‘해방’ 같은 단어들을 제외하면, 이러한 시간 인식, 즉 매 순간을 새로운 세계가 개방되는 가능성/잠재성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일상’을 대하는 시인의 그것과 유사하다.

용수철은 제 몸에 날개가 있다고 믿는다
트램펄린 위를 구르던 발들이
멀리 날아가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유는
용수철의 비상을 믿기 때문이다

날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지켜온 평온한 둥지 속에서도
도무지 깃들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공중을 향한 그리움이 있어
체념의 깊이만큼 높이 튀어 오르는 것

누구의 마음속에나 허공을 타진하는 날개는 있고
내게는 남모르는 깃발 하나 있었기에
자꾸 발목이 접질릴 때마다
그토록 심한 몸살을 앓았던 건지도 모른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아무도 모르게 키워온 깃털들이
비명도 없이 뽑히고 있었다는 것
더 이상 떨어질 일 없어 안심했던 곳이
결국 바닥이었다는 것

이제는 반동에 기대어 내가 나를 쏘아 올릴 시간

발끝에 단단히 힘을 준다
바닥의 기억을 털어내며 일어서는 그림자
까마득한 천공 속으로
요동치며 날아가는 뜨거운 날개들
격렬한 혁명처럼 거짓말처럼
- 「용수철의 힘」 전문

조영란의 시는 ‘일상’의 순간들에서 새로운, 낯선 세계를 끄집어낸다. ‘끄집어낸다’라는 표현은 자칫 어떤 세계가 그 순간 안에 내재하고 있는 듯한, 그리하여 시인이 손을 뻗어 꺼내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의 순간들에서 새로운, 낯선 세계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발견’과 ‘창조’가 혼재된 상태에 가까울 듯하다. 철학자들의 설명처럼 ‘가능성(possibility)’이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현실화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잠재성(potential)’이 현실적인(actual) 존재는 아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차원이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세계가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가리킨다면, 익숙한 ‘일상’의 순간들에서 새로운, 낯선 세계를 끄집어내는 시적 발견은 세계를 ‘잠재성’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상 모든 시인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의 순간들, 특히 ‘일상’의 시공간을 새로운, 낯선 세계로 변주하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아니, 그 방식이 바로 예술이고 시이다. 시는 일상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익숙한 시공간을 해체하는 것이고, 이 해체?변주를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변주와 그 경험은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사실은 모두에게 다른 방식으로 경험될 뿐만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그리하여 신비감은 물론이고 감각적인 긴장과 자극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는 상황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실상 우리의 지각 경험이 만들어내는 동일성이 허구적인 것임을 폭로한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또는 일상과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다만, 경험과 동떨어진 인식이, 관념과 이성을 통해 실제적 경험이 재구성됨으로써만 그것들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될 따름이다. 조영란의 시가 보여주듯이, 시는 이 동일성을 뒤흔듦으로써 익숙한 세계 안에 익숙하지 않은 세계들이 응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기본정보

상품정보 테이블로 ISBN, 발행(출시)일자 , 쪽수, 크기, 총권수, 시리즈명을(를) 나타낸 표입니다.
ISBN 9791158965198
발행(출시)일자 2021년 07월 23일
쪽수 128쪽
크기
127 * 205 * 10 mm / 189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시인동네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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