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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맑은 무늬가 된 세계

이명희 시집
더푸른시인선 3
이명희 저자(글)
더푸른출판사 · 2024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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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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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연이 가진 본질성과 근원성을 미학적 감수성으로 풀어낸 작품들
2020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을 통해 등단한 이명희 시인은 등단 당시 섬세함과 집요함이 장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상이 가진 본질성과 근원성을 시적 탐구로써 사유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직관적 형상으로 자리잡게 하는 힘이 뛰어났다”란 언술이 인상적이다. 그러한 본질성과 근원성 탐구가 확장된 것이 이명희의 첫 시집 『희고 맑은 무늬가 된 세계』이다. 이 시집에선 ‘생명의식’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데, 해설을 쓴 김효숙 평론가는 “생명의식을 관념에만 가둬 두지 않고 ‘자연’다운 비인간 생명체들과 호흡을 나누면서 살아갈 힘을” 얻으려는 이명희 만의 시적 방식을 긍정적으로 분석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 생명체의 목소리를”를 듣는 방식으로 이명희 시인은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이명희 시인은 자연을 “광대하고 막연한 것”으로 보지 않고 매우 구체적인 형상으로 파악한다. “생명체들과의 만남과 인간과의 만남을 구분”하지 않고 “식물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로 삼는다.

“인간의 소유물이 된 자연을 제자리로 돌려보내지는 못할지라도 아이 같은 감수성의 소지자가” 된 시인은 “비인간 생명체들과 호흡을 나누면서” 자연이 가진 본질성과 근원성을 미학적 감수성으로 풀어나간다. “1부와 2부에서는 숲 산책자에게 자연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무처럼 의연히 홀로서기를” 꾀하고, “3부에서는 선(禪)·신앙·마음 수양의 경험을 자연 경험과 견주어 생각해 본다. 복원이 불가능한 세계를 안타까워하면서 그 최전선에 있는 지금 이곳 문명인들이 바로 ‘나’라고 자각하도록 이끈다. 단지 기억 되살리기만으로는 복원이 불가능한 세계를 제시하면서 자연에 가장 늦게 도달하는 자가 문명인임을 일깨운다.”

잘 알다시피 “생명은 인간과 비인간의 평등 관계에서만 건강한 상호 호환이 가능한 것”이다. “일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관계는 종속의 형태가 되어 자연의 균형을 깨트린다. 타 생명체의 삶과 인간의 삶은 동격이며, 타 생명체가 사라지면 현세 인류가 사라질 가능성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한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이명희 시인은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가식 없이, 자연 속 대상물을 정밀하게 읽어 내고 거기에서 얻어진 몸짓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학적으로 시화시킨다.

한편 『희고 맑은 무늬가 된 세계』는 화성시문화재단의 ‘2024 화성예술활동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출간되었다. 이명희 시인은 이 사업의 선정으로 지역 문학계에서 인정받는 시인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 책의 총서 (4)

작가정보

저자(글) 이명희

이명희

경기 이천에서 태어났다. 2020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경기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작가의 말

모두가 나에게 무엇이든 주었다 받고 안 받고는 모든 차후의 일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힘든 일이 되었지만 나중에 보면 좋은 일이 더 많아졌다 무언가 생길 땐 모르고 지나치고, 알면서도 모르고. 가지지 못하였어도 결국 그런 모든게 양식이었고 내 피와 살이 되었다 나도 모른 채
하루라는 시공간 안에 얼마큼 하루를 내가 지닐 수 있을까 얼마큼 쓸 수 있을까 하루에 닿을까 하루가 닳을까 하루를 닮을까
시간을 지배하고 싶었던 적 있었으나 시간은 늘 앞서갔고 내 등을 난 볼 수 없다
단지 이끌려서 가는 무심결의 방향 바다 같은 바람 반달 분홍 햇살 풀잎 우듬지 소소함 사사로운 느낌이 있어서 날 인도한다 봄 흰 꽃들 숲 아름다운 사라짐 그 그늘에서 나는 자주 놀고 숨쉬고 걷고 지나간다

2024년 가을 이명희

목차

  • ■ 시인의 말 3

    1부
    내가 떨어뜨린 눈물 한 방울의 근황 11
    올리브그린 12
    뱀 사주를 가진 23세 B양의 입장문 14
    램프가 있는 저녁 16
    망종芒種 18
    무게에 관하여 20
    명랑 소녀 이름은 마고 22
    묘월생 24
    오리 26
    아웃사이더 28
    가깝고도 이상한 구름 30
    CT 32
    언제나 몇 번이라도 34
    하얀 이마 36
    환기-김환기전 38
    핑크 연 40
    2월 오전을 붙잡는다면 41
    그늘 에피소드 42
    노마드 44

    2부
    온유 49
    19세기의 호수에 비가 내리면 50
    심플라이프 52
    개를 끌고 가는 사람 54
    5월 벚나무에게 드리는 편지 56
    정오의 Monologue 58
    바라보다 60
    밥을 기다리는 동안 62
    몽유夢遊 63
    이동-호모 미그라티오 64
    저녁답 66
    푸른발부비새 68
    소소한 분홍 70
    루시 72
    곡우 생활기 74
    스트로브 잣나무 76
    청어 78
    김 난다 79
    식물 환상통 80

    3부
    원형들의 원형 85
    백자를 읽다 86
    방관자 88
    착지 90
    우화 92
    벚과 사이 시옷 94
    수국 96
    오월 97
    흰꽃기린 98
    곡신의 오후 100
    석류 102
    꽃사과 104
    빈집 극장 106
    가벼운 산책 108
    석모도 109
    카스테라와 피마자 110
    때때로 이야기가 112
    캄파눌라 114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116
    어떤 오후 118

    ■ 해설 _ 김효숙 _ ‘나’를 살게 하는 ‘그린’의 세계 119

추천사

  • 이명희 시의 산책자는 첨단 문명을 누리는 개인이지만 식물이 발산하는 다양한 감각에 집중할 줄 안다. 식물과 마주할 때 지각이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부단히 자신의 지각을 개발한다. 자연과 인간 간 거리가 멀어져야만 인간이 문명의 편의를 누릴 수 있다는 명제를 의심하면서 그 거리를 바짝 좁혀 놓는다. 인간과 식물이 서로 ‘곁’의 존재라 하여 개체가 지닌 특성이 통합되는 것은 아니다. 개체의 고유성을 서로 인정해야만 자연은 건강을 유지할 테니 말이다.
    주체는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지각이 예민하여 이것이 무뎌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비인간의 생명 조건을 무시하면서 부단히 인공 세계를 확장하려는 욕망을 품지만 주체의 말 없는 행위가 우리의 무지와 무딘 감각을 조용히 깨운다. 그는 문명의 진보를 찬양하는 일에 빠져 이 존재들을 망각한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여자-사람. 식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답고 생기 있는 생명체로 거듭나려는 시인-사람. 문명 속에서도 전력을 다하여 자신의 자리를 만들며 생명 활동을 이어가는 자연 쪽으로 우리를 불러 세우는, 적극적인 산책자다.

책 속으로

과하게 진하거나 연한 연두는 아니죠
나는 올리브를 좋아해서 그린이 되었어요
새순이라고 다 녹색이 아닌 걸요
올리브그린은 뿌연 솜털을 가진 그린
지치고
목마른 그린

나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거기에 없나요

녹색도 연두도 아닌 채
한 줌 물속에 결로 비출래요
플랑크톤으로 아메바로 돌말로 사는

오지게 고립되었어도 살아남았을
유인원의 뼛속에 담겨진 그린
삼월의 그린
한 떨기 살아있는 그린 속에
올리브
올리브

나는 떠도는 계절 속에 살아요
쓰고 쓰지만 단단한 씨앗을 품고
-「올리브그린」 전문

----


창문을 기웃거리면서 누군가 두드린다
손님이 오시나 했는데 보이지 않는 발이 여럿 흔들린다
되풀이되는 리듬을 타고 빙글, 돌고 돌며 나풀거린다
흩날린다 별가루처럼 흩뿌려진다

가볍게 힘을 뺀 허공 물결을 타고
덩굴감듯 오르다 그대로 스윙재즈
오늘 나를 찾아 온 눈발의 이름은 마고
철새의 흰뺨을 하고
내집 창문 밖 공중 무대에서
닿을 듯 비껴가며 살을 부빈다

망명자 같은 눈들
이승을 벗어나지 못해 겉도는 망령들
마구마구 나의 창문을 두드리고
엿보고 뭔가를 엿들으려 하는데,

태초에 잠이 쏟아지는 곳
아래로 흐르다 엎드린 밑바닥에 가닿으려고
묵음의 고요한 한낮 가운데로
추락이 아닌 착지가 되려고
고양이 낙법을 터득한 걸까
상처를 품지 않는 안착
소복소복이란 말이 함께 쌓이면
그 많던 소녀들의 발이 떠오르곤 했지
명랑한 소녀에게서 내가 나를 온전히 사랑하던
열세살 쯤 나도 보이곤 했는데

소설 같은 한낮에 오늘이 小雪이라고
한시의 라디오 진행자가 일깨워준다
꿈속 같은 한낮 나는 총총 눈발을 가진
명랑 소녀 마고가 종종 되어 가고
-「명랑 소녀 이름은 마고」 전문

-----------


구름과 만나기로 한다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사이
구름이 종종 내게 먼저 연락을 해온다

거절 방법을 모르는 나는 나도 모르게
만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밖에 있거나 집안에 있거나
도서관에 있거나 산책을 하거나
내게만 보이는 구름이 나를 따라다닌다

슬플 땐 검은 표정을 가지고
기쁠 땐 푹신한 표정을 내민다

알게 모르게 얽힌 관계의 그물
엄마도 언니도 아닌데 이상하다

구름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을까
내가 먼저 구름을 불러 들였을까

난 가끔 떠있는 기분이 들어
정착보다 유목이 유리한 유전자 인가봐

구름과 함께 먹구름 아래를 걸었다
나란히 같이 비를 맞았다

구름이 내게 속삭인다
난 네가 열두살 때 버린 상상이야
네가 뱉어버린 씨앗들이 자라나
여태껏 여물지 못해 떠도는 공상이야

떨구고 비운 꽃진자리 남아있는 여운이 다가온다
여백을 비운 자리에 여운이 앉아있다
-「가깝고도 이상한 구름」 전문

-------------


오후 내내 그늘과 어울려 논 적 있다
내가 먼저 발등을 보이면 무릎으로 기어가고
종아리 선을 서서히 넘어 다시
발등골 타고 도드라진 푸른 망으로
샅샅이 살피며 퍼져나간다
버찌나무 아래로 간다
까만 버찌가 그늘 속에서 빛난다
달디단 버찌를 향해
개미들은 솔솔 기어간다
그늘에 있으니
그늘 주변에 것이 더 잘 보인다
풀들은 쓱쓱 자라고
나의 근심은 도드라진다
짙어질수록 점점 눈에 뜨이고
난 햇볕과 어울려 놀 때
지나는 이는 버찌를 딴다
난 그늘을 보는데
한 번에 한 가지 밖에 하질 못하는데
지나는 이는 알맹이를 보고
오래도록 서서 한참을 따먹는다
개미는 솔솔 잘도 간다
어디로 먹이를 찾아 잰걸음 걸어가시나
오른발 무지에 난 상처 햇볕밴드 쬐이고
서늘함이 더 짙기 전 여길 벗어난다
풀들은 쓱쓱 자라고
긴풀들 한방향으로 등 구부려
오후를 반사해 숙인 자세로 넘긴다
내 통점의 강렬한 보호구역은 어디일까
한 점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 찾아
그늘을 데리고 그늘로 간다

*리스트레토, 더 농축된 에스프레소

-「그늘 에피소드」 전문

기본정보

상품정보 테이블로 ISBN, 발행(출시)일자 , 쪽수, 크기, 총권수, 시리즈명을(를) 나타낸 표입니다.
ISBN 9791198173683
발행(출시)일자 2024년 10월 30일
쪽수 136쪽
크기
127 * 208 * 13 mm / 320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더푸른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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