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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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에 정복될 때까지의 고대 이집트의 문명에 대해 역사, 문화, 종교, 사회, 정치체제 전반에 걸쳐 흥미진진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시리즈 (2)
작가정보
저자(글)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
미국의 고고학자이자 이집트학자, 역사학자이다. 1899년부터 1908년까지 이집트어 사전을 간행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현지 조사를 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그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시카고대학에 오리엔탈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브레스테드는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투탕카멘 무덤의 문장(紋章) 해독을 도왔다. 20세기 초 고대역사 연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1985년 미국역사협회에서는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 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A.D. 1000년 이전의 역사를 기술한 영문서적에 시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저서로는 〈쉽게 배우는 중국어음운학〉, 〈상고중국어 음운체계와 한국어 어휘의 어원〉이 있고 역서로는 〈십족을 멸하라〉, 〈한어음운사십강〉(漢語音韻史十講)(공역)이 있다.
목차
- ■ 저자 서문 v
제5권 제국: 첫 번째 시기
13장. 새로운 국가: 사회와 종교 3
14장. 왕국의 통합: 제국의 흥기 29
15장. 투트모세 왕가의 불화와 하트셉수트 여왕의 통치 45
16장. 제국의 통합: 투트모세 3세 69
17장. 제국 120
18장. 이크나톤의 종교개혁 168
19장. 이크나톤의 몰락과 제국의 해체 200
제6권 제국: 두 번째 시기
20장. 아몬의 승리와 제국의 재건 227
21장. 람세스 2세의 전쟁 261
22장. 람세스 2세의 제국 282
23장. 제국의 마지막 쇠퇴기: 메르넵타와 람세스 3세 310
제7권 쇠퇴기
24장. 제국의 몰락 361
25장. 사제와 용병: 리비아인들의 패권 381
26장. 에티오피아인들의 패권과 아시리아의 승리 401
제8권 복구와 종말
27장. 복구 435
28장. 마지막 투쟁: 바빌론과 페르시아 455
■ 왕들의 연표 475
■ 참고문헌 482
■ 찾아보기 483
책 속으로
[머리말]
겨울철마다 나일 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이집트 역사에 관한 최신 저작물이 나와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운 좋은 여행객들 외에도 인류 역사에서 초기 근동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점차 커지는 또 다른 집단이 있다. 나일이 생명을 주는 물을 넓은 지중해의 한복판에 쏟아붓듯이, 미개함에서 그토록 일찍 벗어난 나일 유역의 멋진 사람들의 문명이 이집트로부터 남유럽으로 전해졌다. 서방세계의 우리는 이집트에서 남유럽으로 전해진 이 풍성하고 다양한 문화의 영향에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다. 유프라테스강이 마찬가지로 지중해로 흘러들었다면 우리가 바빌론에 진 빚도 나일 계곡에 진 빚만큼 그렇게 컸을 것이다. 남부유럽의 초기 인류 역사를 통틀어, 또한 태고 시대가 보다 나은 문화에 의해 대체되고 나서 오랫동안, 군사적 우위로 보든 순전히 문명의 우월성으로 보든 우리가 지중해 유역의 지배세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이집트이다. 문명에 있어 초기 유럽의 후손인 우리에게, 커튼을 올리고 우리 조상들에게 그토록 귀중한 유산을 물려준 시대를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갈망하는 제삼의 아마도 가장 다수 집단인, 즉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을 쓰면서 이 연구자들을 모두 고려했다.
이 역사서가 쓰인 방식은 어느 정도 그 사용을 전제로 한 것이다. 나일 계곡 사람들의 초기 생활에 대한 우리 지식의 출처는 매우 빈약하고 성격상 부적절하다. 정보 자료는 여기에서 그리고 필자의 Ancient Records of Egypt(?이집트의 고대 기록?) 제1권 pp. 3-22에서 더 논의될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연구실에서 사용되듯이, 자료들은 주로 출판물 형태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출판물은 대부분 그러한 작품의 제작에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비문의 정확성과 조심성을 확보하기 전에 편집되었다. 어떤 종류의 비문이든 정확하게 옮기기는 쉽지 않다. 러스킨같이 중요한 문서들을 그토록 꼼꼼하고 뛰어나게 관찰한 사람도 짧은 라틴어 비문을 놀라울 정도로 부정확하게 옮길 수 있다. 그의 유례없는 Mornings in Florence(?피렌체의 아침?)에서, 그는 자신이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그토록 감탄했던, 무덤을 덮은 대리석 판 위의 짧은 비문을 재현한다. 나는 그가 옮긴 이 여덟 줄의 짧은 비문을 원본과 비교했다. 그는 한 단어의 철자를 잘못 쓰고, 중세의 라틴어 두 단어(“et magister”)를 완전히 누락시켰다. 위대한 예술비평가의 이 같은 경험은 훈련받은 신중한 고문서학자의 경험만큼 흔하다. 잘 알려진 폴리타르크(Politarch, 선출된 행정관) 비문들은 8가지 다른 출판물에 등장하는데, 이 출판물들은 각각 정확한 사본을 얻기 전에, 어느 정도 중요한 부분에서 다른 것들과 달랐다. 뉴욕에 있는 오벨리스크 아랫부분의 청동 게 위에 새겨진 그리스어와 라틴어 비문은 오랫동안 잘못 읽혀 왔다. 연도를 잘못 추정해 몸젠(Mommsen)은 이집트가 초기 로마의 지방이었다는 잘못된 이론을 이끌어냈다. 상형문자에 대한 해독이 불가피하게 초보적이었던 이집트학 초창기에는, 오늘날에도 신뢰할 수 있는 사본을 제작할 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본 담당자가 필요했다. 이집트학이 빠르게 이 초기의 불충분함에서 벗어났다면 지금 모든 것이 다 잘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적절한 방법들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내려왔다. 비록 완전히 정확한 상형문자 문서가 현재 매년 발행되고 있지만, 그래도 필자의 견해로는, 간행된 표준 이집트 문서 다수가 금석학의 다른 분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불완전함과 부정확함을 어느 정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필자의 첫 번째 책무는 가능한 모든 경우에 있어 출판물을 넘어 원래 기념물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많은 세월을 소비하고 유럽의 많은 수집품 속에서 오래 체류해야 했다. 관련 사업이 이러한 작업에 가장 큰 도움이 되어왔다. 네 곳의 독일 로열 아카데미(베를린, 라이프치히, 괴팅겐, 뮌헨) 위원회를 위해 이집트 기념물을 수집하고, 독일 황제가 기금을 마련한 이집트 사전에 이 기록물들이 쓰일 수 있게 하려고 유럽 박물관으로 파견된 덕분에, 필자는 유럽에 있는 이집트의 역사적인 기념물을 모두 실질적으로 원본을 보고 모사할 수 있었다. 아직 이집트에 있는 자료들의 경우, 필자는 많은 자료를 직접 베껴서 이용할 수 있었다. 특히 테베와 아마르나에서는 그곳 무덤에서 모든 역사적인 비문을 모사했고 기자(현 카이로)의 박물관에서도 모사할 수 있었다. 필자의 사본에 포함되지 않은 이집트 기념물 중에서 탁본은 대부분 렙시우스(Lepsius)가 만들고 현재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막대한 소장품에서 발견한 것이다. 다른 것들의 경우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사전을 위해 진행한 광범위한 조사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이따금 동료가 필요한 조사를 제공했고, 자료를 얻지 못한 곳에서는 내가 모든 중요한 사례에 대규모 원본 사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밖에 필자가 출판에만 의존한 기념물은 매우 적다. 그리고 그러한 출판물은 대부분 현대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졌고, 원본만큼 훌륭하다. 그러므로 대체로 이집트인들의 역사에 대한 본서의 설명은 현존하는 원본 기록 자체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언어에 대한 우리 지식은 지난 20년간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아직 대체로 역사적인 기록물을 다룬 포괄적인 연구에 적용되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수집된 자료를 역사학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리의 향상된 언어학 지식을 고려해 초기 연구 결과와 관계없이 처음부터 기록물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대부분은 편견 없이 연구한 후에야 기록물에 대한 더 이전의 번역이나 설명을 참조했다. 기록물에 대해 새롭게 문법적으로 연구하고 원본에서 개정된 사본을 참고해, 역사적인 기록물을 번역해 몇 권의 책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출간된 번역서들은 최초의 기록에서 시작해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인들에 정복당해 이집트가 국가적 독립을 최종 상실할 때까지 연대순으로 정리된 것이다. 사실에 대한 특별한 주장이 어떤 기록에 근거하는지 알고 싶은 독자는 역사적인 서문 및 주석과 함께, 쉽게 얻을 수 없는 수백 가지 간행물에 흩어진 원본 문서들을 영어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역사책에서 각주에 있는 숫자 Ⅰ, Ⅱ, Ⅲ, Ⅳ는 번역서의 권수를 나타낸다. 네 개의 로마자 뒤에 오는 아라비아 숫자들은 ‘쪽수’를 나타내는 ‘p.’가 있는 경우 외에는 번역문 내에서 나누어져 번호가 매겨진 단락을 나타낸다.
번역된 기록물 네 권에, 연구 자료에 대해 이렇게 전문적으로 논의함으로써, 필자는 그렇지 않았다면 이 역사서에 부담이 되었을, 연구 자료와 관련된 의문점들이 해결되었기를 바란다. 동시에 제시된 모든 사실의 근거자료를 쉽게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보통의 독자들에게는 이집트학계 내부 인사들에게만 알려진 전문적이고 진기한 간행물의 수많은 각주는 전혀 의미가 없다. 비록 독자 중 극소수만이 인용된 자료를 입증하려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의 기록과 기록의 출처와의 모든 연관성을 분리하는 극단적인 조치도 필자의 견해로는 마찬가지로 나쁘다. 그 극소수 독자에게 그러한 인용문은 아주 귀중하다. 왜냐하면 필자가 연구자이던 시절에, 현재 받아들여진 학문적 사실들을 얼마나 어렵게 원본 자료까지 추적할 수 있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연구가 이 분야의 현대 지식에 어느 정도 공헌했다면, 그것은 원 자료의 재검토, 각 기록물과 관련된 모든 자료의 수집 및 참고를 위해 편리한 형태로 이 자료들을 모으고 번역한 데 있다. 이 책의 새로운 결과는 어떤 것이든 이 과정과 방법을 따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록문서와 대조되는 어마어마한 유형(有形)의 기록물의 경우, 이 저서는 이용할 수 있는 방대한 자료에 대한 재검토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집트 고고학은 발달 초기에 있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고학에서 이미 완성된 근본적인 연구와 조사는 이 영역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따금 기록문서는 내가 활용해 온 이 방면에서 새롭고 예상 밖의 빛을 비춰 왔다. 고고학과 문헌학의 역량을 다 갖춘 사람은 이집트학의 결과물을 만드는 작업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들을 많이 찾을 것이다. 또한, 종교 영역에서는 양만 따져도 너무 많아서 문서의 철저한 재검토가 불가능했다. 이집트 종교에 관한 연구는 시작되었을 뿐이다. 예비 연구조차 완성되려면 수십 년이 지나야 할 것이다. 예비 연구는 연구자가 경이로운 기록물들에 대해 전반적인 조사와 균형 잡힌 재구성을 하게 해 줄 것이다. 필자는 오로지 아마르나 시기와 태양에 대한 신앙에만 특별히 관심을 쏟아 왔다. 이크나톤의 유례없는 종교개혁에 대한 모든 문서와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알려진 모든 태양 찬가가 수집되고 검토되었다. -전자의 경우 원본에서 수집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집트 종교에 대해서는 필자가 각주와 전문 독자가 자주 접하는 다른 저작물에 종종 밝혔듯이 에르만의 감탄할 만한 안내서(Handbuch)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비록 20년이 넘었지만 에르만의 Aegypten(?이집트?)는 여전히 이집트인의 삶에 대한 표준 필수 안내서이다. 이 책은 이 저서를 쓰는 데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 나는 물론 에두아르트 마이어(Eduard Meyer)의 총망라된 결정적인 Chronologie(?연대학?)에서도, 특히 더 이른 시기 역사에 대해서 도움을 받았다. 나는 또한 그가 Geschichte des alten Aegyptens(?고대 이집트의 역사?)에서 사이스 시대를 분석적으로
출판사 서평
13 새로운 국가: 사회와 종교
당시 흐모세 1세가 직면했던 국가의 건설 작업은 메넴헤트 1세가 제12왕조 초기에 완수한 재조직과는 실질적으로 달랐다. 아메넴헤트 1세는 그의 시대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을 다루었고 기존 정치조직들을 그 독자성을 해치지 않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종했다. 반면 아흐모세는 옛 형태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는 변화 과정에 처한 구성 요소들로 정부 조직을 건설해야 했다. 소스의 축출로 끝이 난 사건의 경과는 아흐모세에게 새로운 국가가 가져야 할 형태를 결정해 주었다. 당시 아흐모세는 오랜 군사 행동과 여러 해 동안 이어진 포위 작전을 통해 효율적으로 조직되고 하나로 뭉쳐진 강력한 군대의 수장이었다. 그 기간 그는 전쟁터에서는 장군이었으며 국가의 수반이었다. 정부의 성격은 이러한 상황에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되었다. 이집트는 군사국가가 되었다. 대체로 호전적이지 않은 이집트인들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군사국가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힉소스와의 오랜 전쟁은 그들을 군인으로 성장시켰다. 아흐모세의 대규모 군대는 아시아에서 수년을 보냈고, 심지어 리아의 부자 도시에서도 그보다 더 길거나 짧은 기간 동안 머물러 있었다. 전쟁을 철저히 익히고 전쟁을 통해 아시아에서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이집트 전역이 수 세기 동안 꺼지지 않는 정복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었다. 직업 군인에게 개방된 부(富), 보상, 승진이 군 경력에 대한 변함없는 동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았을 중간층이 이제는 열정적으로 군대에 합류했다. 주로 베의 가문과 가까웠던 귀족계급의 생존자들에게 군인이라는 직업은 모든 직업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 되었다. 그들이 테베의 무덤에 남긴 전기에서, 그들은 파라오의 편에 서서 자신들이 겪었던 전투와 그가 그들에게 수여했던 훈장에 대해 가장 만족스럽게 말하고 있다. 모든 기록이 완전히 소실되었을 많은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한 바나의 아들인 흐모세의 일대기 같은 군사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고왕국시대에 파라오의 아들들은 행정관직을 맡았으나, 이제는 군의 장군이 되었다. 그 후 한 세기 반 동안 군의 업적에 관한 이야기가 이집트의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당시 군대는 새로운 국가의 지배 세력이었고 주요 동력이었다. 군대의 조직체계는 당시 상비군이라는 이유만으로 옛날의 민병 조직보다 훨씬 뛰어났다. 군대는 삼각주에 하나, 상류 지역에 하나로 크게 두 사단으로 나뉘었다. 리아에서 이집트 군대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으로는 역사상 최초로 군사병법과 병력의 적절한 전략적 배치를 배웠다. 군대를 사단으로 나누고, 부대를 양익과 중앙부대로 나눴다. 심지어 적의 측면을 우회하는 측면 이동이 행해졌음을 추적할 수 있고, 전투 대열을 분명히 밝힐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더 이전 시기의 기념물에 단순히 전쟁으로 기록된 어수선한 약탈 원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사진1). 오래된 활과 창 외에 군대는 이때부터 전투용 도끼도 갖추었다. 그들은 화살을 일제히 쏘는 법을 배웠다. 당시 이집트의 무서운 궁수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공포의 대상이 된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소스는 이집트에 말을 가져다주었다. 이집트의 군대는 당시 처음으로 대규모 전차 부대를 보유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기병대는 아니었다. 이집트의 솜씨 좋은 장인들은 곧 전차(사진2)의 제작기술을 익혔다. 파라오의 마구간에는 아시아에서 얻은 수천 마리의 최상의 말들이 있었다.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서 파라오는 항상 정예 부대의 경호원과 그가 가장 총애하는 군 장교들을 대동하고 대중 앞에 등장했다.
그러한 힘을 등에 업고, 그는 절대 권력으로 다스렸다. 누구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근대적 의미의 왕에 대한 조언자나 여론의 작은 소리도 없었다. 근동의 통치자들은 심지어 오늘날조차 거의 이러한 불편함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강력한 권력을 쥐고 왕좌에 있으므로 모두가 그의 발 앞에 있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는 곧 궁중 동료들의 꼭두각시가 되고 예전처럼 하렘의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런 때에, 즉 파라오가 약해 보일 때 이집트에서는 그 후 자주 그랬듯이 유능한 대신(大臣)은 왕조를 뒤엎고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소스를 축출한 사람은 그 상황을 완전히 지배했다. 그는 분명히 내부의 무질서와 외부의 침입이 2세기 동안 이어진 혼란 속에서 당시 등장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기본정보
ISBN | 9788968178283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2월 10일 | ||
쪽수 | 508쪽 | ||
크기 |
153 * 225
* 38
mm
/ 86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
||
원서(번역서)명/저자명 | (A)history of Egypt,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ersian conquest/Breasted, James Henry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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