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동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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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사동 연대기』는 1520년 즈음 세상을 떠난 강릉김씨부터 1915년 졸한 송병화까지, 무덤으로 혹은 삶의 흔적으로 이사동에 자리한 일곱 명의 인물들을 스토리텔링한 소설집이다. 이 책은 주인공들의 문집이나 문중에서 내려오는 역사적 문헌, 전문가들의 연구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결합되어 각 인물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480여 년을 기다리다 남편 곁에 묻히게 된 강릉김씨, 선친이 모셔진 이사동 솔숲 아래 연못을 만들고 자연과 함께 지낸 송담 송남수, 죽은 남편 금암 송몽인의 시를 모아 금암집을 펴낸 여흥민씨, 서자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송희갑, 우국충정의 마음을 보여준 사우당 송국택, 선조들의 묘비에 지극한 정성을 쏟은 동춘당 송준길, 그리고 봉강정사를 지어 제자들에게 절의정신을 심어준 난곡 송병화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사동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이들의 이야기는 삼강오륜 같은 유교이념 없이도 자연스레 사람 사이의 도리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작가정보
목차
- 책을 펴내며
당신에게로 ‘강릉김씨의 그리움’
기다림 속에서
변치 않는 사랑
당신은 저 멀리로
깊어 가는 마음의 병
곱디고운 비단신
마침내 당신 곁으로
송담에 사노라네 ‘송남수의 효성’
아침 문안 인사
평화로운 일상
우연한 방문객들
하늘도 감동한 효자
피운암에서의 하룻밤
시로 남은 어제 이야기
금암집으로 남은 당신 ‘여흥민씨의 사랑’
금암집으로 남은 당신
비 오는 날의 그리움
아름다운 밤
마침내 찾아온 이별
사랑하는 그대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꾼 시인 ‘송희갑의 꿈’
봄바람에 꽃잎 떨어지고
서러움을 타고 난 아이
댓잎에 맺힌 눈물
새로운 세상을 찾아서
할 수 있다는 믿음
예상치 않은 제안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뵈러 고향으로
꽃비 내리는 날
네 가지 벗과 함께 ‘송국택의 의리’
동지전에 소신을 담아
풍문으로만 듣던 그 위인
변치 않는 의리
경이직내 의이방외
사우당에 담긴 뜻
소화동천의 위로
묘비에 새긴 간절함 ‘송준길의 정성’
예학의 시대
우락재의 벗들
지극한 효성으로
묘역에서의 다짐
예를 남기다
사한리 마지막 선비 ‘송병화의 지조’
광영지에 담긴 뜻
삼월 삼짇날의 시강회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고
치욕을 잊지 않으려
초상화를 남기다
오적당의 스승님
부록
관련 자료
참고 문헌
책 속으로
p11
기다리고 있었지요. 언제나 그대 만날 날만을 꿈꾸었답니다. 저 비단 신을 신고 당신에게로 갈 그날을. 끝도 없이 이어지던 어둠이었는데, 아득한 세월을 견디고 또 견디며 기다려온 나날들이었는데, 꿈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지요. 겨우내 차갑기만 하던 바람이 누그러진 어느 날이었던가요. 산자락 가득 아지랑이 피어나며 가지마다 새싹 돋아나던 날. 햇살은 부드러운 금빛을 품고 봉분 위로 따뜻하게 내려앉고 언 땅은 느리게 숨을 쉬며 뿌리 깊은 곳부터 살아나기 시작한 그날. 사백 하고도 팔십여 년. 그 하세월 어느 한순간이라도 잊은 적 없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던 날이 우리에게도 와 주었던가요? 지난 시간을 생각하니 그저 아득해집니다.
p17
당신은 다시 한번 웃음 지어 보였지요. 아, 이 한없이 따뜻하기만한 미소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금방 오리라 기약은 했지만 여기 회덕에서 안악까지 그 먼 거리를 어찌 자주 오갈 수 있을까요? 나는 애써 고개를 숙였습니다. 당신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니까요. 하인들이 마지막 남은 물건들을 마차에 올렸고, 당신을 태운 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당신을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꽉 쥔 채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행과 함께 점점 멀어져가는 당신을 바라보며 그 멀고도 먼 길을 가늠해 보았습니다.
p27
그리고 그날, 우리는 만났습니다. 당신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득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날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당신은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지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모든 회한들이 사라졌습니다. 손을 내밀어 당신의 손을 맞잡는 순간, 그 긴 세월의 어둠도, 고독도, 그리움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당신과 내가 함께 있다는 것. 이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그것뿐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비단신 꺼내 신고 나들이하기 안성맞춤인, 당신 손길처럼 따뜻한 봄바람이었지요.
p32
구부정한 허리와 가슴께까지 길게 자란 수염, 손에 쥔 지팡이는 그가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하얀 창의 위로 옥색 도포를 단정히 걸친 모습에서는 여전히 선비다운 기품이 묻어났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글과 시로 깨달음을 남긴 학자의 풍모였다. 그는 지팡이에 천천히 힘을 싣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집 뒤 언덕 너머에 있는 부모님의 묘역. 매일 아침 그곳을 찾는 일은 그의 오랜 습관이자 의식이 되었다. 팔십을 넘긴 나이에도 그의 걸음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흰 수염이 가볍게 흔들렸고, 도포 자락이 발목을 스치며 조용히 출렁였다. 묘역에 도착한 그는 지팡이를 옆에 세워두고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p45
“더욱 감탄스러운 건 어르신께서 남기신 시문들입니다. 조선팔도를 누비며 각 고장의 풍경을 담으셨다니, 우리 회덕 땅과 사한리의 정취도 얼마나 아름답게 기록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송남수는 찻잔을 기울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내 스무 살 적부터 산수를 좋아해 아이 하나 데리고 나귀 한 마리 끌고 경치가 좋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다녔고, 그때 보고 느낀 감상을 기록하였다오. 다 좋아서 한 일이라오.”
p56
내가 남편의 시를 모아오면, 그의 친구이자 당대의 명필이었던 죽창 이시직이 정갈한 필체로 옮겨 적었다. 남편과 오래도록 필담을 나누며 서체를 논하던 벗. 그는 붓을 들 때마다 온 정성을 담아, 마치 남편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단정하고도 기품 있는 글씨를 써 주었다. 그렇게 탄생한 시편들은 다시 비래암의 지숭 스님께 전해졌다. 스님은 그것을 받아 한 자 한 자 나무 판목에 담았다. 날이 선 조각도가 문장을 새길 때마다, 먹을 머금은 붓이 종이에 스며들 듯, 그의 시구가 나무에 살아났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엮은 책을 펴내며 친정 외숙부가 서문을 써주었다. 빙호옥경이라 했던가.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빛난다며, 외숙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글은 그랬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결함이 있었다. 아니, 글뿐만이 아니라 생김새며 목소리며, 고결한 마음가짐까지, 그가 가진 모든 것이 그러했다.
p64
“어떻게 늘 그렇게 많은 생각들이 흘러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지난번에도 갑천의 풍경을 그렇게 근사하게 표현해 냈잖아요.”
신기한 듯 묻자, 남편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건 아니고, 그냥 갑천이 나에게 불러주는 걸 받아 적는 것뿐이라오.”
“그런 게 어딨어요. 말도 안 돼요.”
“허허, 정말 그렇다니까요. 강이 흘러가는 물소리며, 강변에 서 있는 갈대와 연꽃까지, 모두 다 나를 불러요. 자기들 좀 봐달라고. 그러니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정말 그런 걸까. 갑천이, 이 달빛이, 그리고 이 순간이 정말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걸까. 그는 모든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은빛 달빛 아래 사랑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새삼 감사하고도 벅찼다.
p73
사립문을 열자 고향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봄빛이 들판을 물들이고 있었다. 흐드러진 복숭아나무 아래 초록이 돋아나고, 언덕 위 버드나무는 여린 잎을 흔들며 속삭였다. 흙담 아래 달빛처럼 노랗게 핀 민들레 위로, 바람에 실린 복숭아 꽃잎들이 나비처럼 흩날렸다. 익숙한 봄 풍경이건만 병든 몸으로 마주한 지금,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기만 했다. 고향에서도, 타향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신세였던가. 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나도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흩어질 운명이었을까. 바람이 불자 가지마다 매달려 있던 꽃잎들이 화르르 떨어지고, 내 가슴 속에서도 옛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선명히 떠올랐다.
p79
“어떠냐? 앞에 있는 저 대나무를 시로 써 볼 수 있겠느냐?”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그 안에 묘한 따스함이 스며 있었다. 나는 조용히 대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밤새 쌓인 눈이 담장 위 대나무 가지마다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초록빛 잎새 끝마다 알알이 맺힌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잎사귀들은 고요 속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견디는 듯했다. 잎사귀 사이로 작은 참새들이 눈을 헤치며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 차갑고 적막한 풍경 속에서, 작은 참새들의 모습이 내 안의 깊은 곳을 건들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던 내 서러움과 고독이 울컥 솟구쳐 올랐다. 시린 눈을 덮고 있는 대나무도, 그 사이를 오가는 작은 새들도 다 서글퍼보였다.
p83
‘하면 된다.’
스승님께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나는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초당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신분보다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길은 열린다고, 서자로 태어났어도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p100
송국택의 동지전은 임금에게 올려졌다. 이후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그는 관직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안겨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에 대한 의리는 그의 가야 할 길이었고, 놓쳐서는 안 될 불씨였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다시 길어지는 것처럼, 그의 의지는 더욱 단단해져갔다.
p117
강화도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명의 연호를 지키려 했던 순간에도, 그는 한 번도 이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계 선생께서 가르쳐 주셨던 '경이직내 이의방외'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정표가 되어 주었고, 그 말씀을 등불 삼아 일평생을 걸어왔다. 송시열이 조용히 물었다.
“형님,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송국택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는 수없이 많은 길이 있었지만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였다.
“내 갈 길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언제나 변함없는 의리의 길이지.”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송시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다정함과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자네도 이렇게 같이 걷고 있지 않은가.”
송시열은 말없이 웃었다. 두 사람은 복사꽃이 흩날리는 길 위를 걸었다. 그 길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의리의 길이었고, 앞으로도 내내 함께 가야 할 그들의 여정이었다.
p123
이제 막 켜놓은 등잔불 아래, 세 명의 선비가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우락재의 주인 동춘당 송준길, 그리고 그를 만나러 온 우암 송시열과 초려 이유태. 이들은 당시 정치와 학문을 좌우하던 인물들이었다. 논산 사계학당에서 같이 공부했던 세 사람은 나이도 비슷해서 송준길이 한 해 위이고 나머지 둘은 동갑이었다. 푸릇푸릇하던 젊은 시절부터 환갑을 맞아 수염이 하얗게 될 때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오랜 동지였다.
낮 동안 세 사람은 송준길의 안내로 사산을 오르내리고, 장군봉과 송담산을 거닐며 선조들의 묘역을 둘러보았다. 예법에 어긋남 없이 묘비와 석물을 정비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단순한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되었고, 그렇다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되었기에 과례와 비례 사이의 균형을 고민해야 했다.
p135
묘비 하나를 세운다는 것은 조상의 덕을 기리는 마지막 의무이자 후손으로서 다해야 할 도리였으나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서로 뜻을 모아 자금을 준비해야 했으며, 묘비문의 내용을 쓰는 찬자讚者와 글씨를 쓰는 서자書者, 그리고 비석 머리에 두전을 올릴 인물을 섭외하기도 해야 했다. 그 많은 과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묘비문의 찬자를 구했으니, 그것도 당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대학자의 작품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그는 서신을 천천히 읽고서는 깊은 감회에 젖었다.
p143
산들바람이 광영지 앞으로 스쳐 지나가자, 젊은 유생들의 갓끈이 가볍게 흔들렸다. 갓 아래로 스물을 넘나드는 얼굴들이 보였다. 사한리에 봉강정사를 짓고 학문을 펼치는 송병화의 제자들이었다. 송경식과 송병관, 그리고 가장 어린 김성연을 포함한 십여 명의 유생들이 봄 햇살 아래 시강회를 위해 모여들었다. 이미 도착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이들 사이로 뒤늦게 올라온 이들이 속속 합류하고 있었다.
p156
“아닙니다. 빼앗긴 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땅 곳곳에서 자존심을 걸고 나라의 혼을 지키는 우국지사들이 계십니다. 그 귀한 분들을 그리려고 합니다. 제가 나라를 위해 할 일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울컥 눈물을 짓는 채용신의 부탁에 듣던 이들도 같이 눈물을 글썽였다. 송병화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선생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받아들이리다. 시골 늙은이의 얼굴을 한 번 담아보시오.”
기본정보
ISBN | 9791189632076 |
---|---|
발행(출시)일자 | 2025년 02월 24일 |
쪽수 | 194쪽 |
크기 |
145 * 210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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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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