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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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가 가장 혼자였던 시절
역경 속에서 길어낸 희망의 찬가
작가정보

朴景利(1926. 12. 2.∼2008. 5. 5.)
본명은 박금이(朴今伊).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으로 등단, 이후 『표류도』(1959), 『김약국의 딸들』(1962), 『시장과 전장』(1964), 『파시』(1964~1965) 등 사회와 현실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시각이 강한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토지』의 집필을 시작했으며 26년 만인 199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토지』는 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를 꿰뚫으며 민족사의 변전을 그리는 한국 문학의 걸작으로, 이 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장으로 우뚝 섰다. 2003년 장편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며 미완으로 남았다. 그 밖에 『Q씨에게』 『원주통신』 『만리장성의 나라』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생명의 아픔』 『일본산고』 등과 시집 『못 떠나는 배』 『도시의 고양이들』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이 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해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을 운영하며 문학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여류문학상, 월탄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칠레 정부로부터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문학 기념 메달을 받았다.
2008년 5월 5일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목차
- 1. 환상의 새
2. 작가는 왜 쓰는가
3. 삶의 진실
4. 인간만으로 살게 하소서
5. 생명은 ‘시행’ 아닌 진실 자체
6.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7. 풍요의 잔해로 신음하는 대지
8. 영원한 강자는 없다
9.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
10. 온유한 모성은 어디로
11. 씨앗을 닮으려는 흙일은 즐겁다
12. 외유내강
13. 지나치면 되돌아오고, 못 미치면 더 걷고
14. 나의 문학적 자전(自傳)
15. 선생의 권위와 방송 코미디
16. 치유받은 내 영혼
17. 고향에 가면 더욱더 이방인
18. 둥지 잃은 새들
책 속으로
살구가, 자두가 여물 무렵이면 우리 뜰에는 어디서 오는지 꾀꼬리들, 까치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든다. 그러면 나는 인심 후하게 멀리서 새들을 숨어 본다. 먹고 살아라, 새야. 밥찌꺼기나 먹다 남은 라면 따위를 씻어 돌 위에 올려놓으면 참새들이 찾아온다. 먹고 살아라, 새야. 개미도 벌도 배추벌레도 모두 먹고 살아라._p.47
날로 산적되어 엄청난 쓰레기로 변하는 비생명체는 땅의 숨통을 막아가는 것이다. 땅은 신음하며 쓰레기를 감당하고 인간은 그 쓰레기 위에 좌정해 있다면 전율을 느낄 것이다. 부패되지 않는 것은 도깨비방망이같이 견고하고 편리하기만 한 것인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거시적(巨視的)으로 현실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가는 생명, 그 대열에서 인간만 제외된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_p.59-60
새는 날갯죽지 하나로 망망대해, 수만 리 장천(長天)을 목마름과 배고픔과 또 무서운 폭풍을 견디며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데, 그 높고 먼 곳을 행여 야망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높은 곳은 출세요, 먼 곳을 정복이라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오늘처럼 많은 부모나 사회 전반에서 젊은이들을 야망으로 내모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_p.70
결국 사소한 일이나 막연한 것에서 오는 절망이란 생각이 빚어낸 고통인 성싶다. 나는 수차의 엄청난 일들을 겪는 그 와중에서 마음의 평형을 경험한 일이 있다. 사람마다 다 겪어본 일이겠지만 그런 경우 체념(諦念)일 수도 있었고 굳은 신념(信念)에서 오는 수도 있겠으나 모두 나를 버린다는, 모든 것을 던져버린다는 거미줄 같은 희망까지도 끊어버린다는 결심에서 얻어지는 평형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절실했던 삶의 순간들이었는지 모른다._p.79-80
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몇 번을 내다보았는지 청석들은 빗물에 젖어 아름다웠고 바닥에는 제법 물이 괴어 있었다. 빗속에 산수유가 만발하고 덩달아 개나리 진달래도 꽃망울을 열었으며 과수도 개화(開花)를 서두르고 있었다. 불을 질렀던 잔디밭도 한결 빛깔이 달라졌다. 씨앗을 뿌린 밭에는 싹이 트고 어제까지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 어쨌든 봄맞이 준비는 식물도 나도 끝을 낸 셈이며 여름맞이를 시작한 나는 비 탓으로 원고를 쓰고, 저녁에는 끊어다 놓은 광목으로 작업복이나 만들어야겠다._p.82
간밤에 내린 비 탓인지 보송보송 수목이 우거진 산허리가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인다. 평소 냉담했던 내 마음이 먼 산에 기우는 것은 아마 가까운 곳에 눈을 감고 싶은 심정 때문일까. 내 힘이 쇠하고 내 목구멍에서 소리가 눌려 없어지기 때문일까. 진실로 역리의 힘이 이다지도 거대한 것을 깨닫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으련만. 가꾸면 생명은 자란다! 그 믿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높게 들려오기 때문인지 모르겠다._p.90-91
예술이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그 소재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나 작자에게 언어는 소재(素材)일까? 합당치 못한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여 사물이 소재라면 언어는 다만 전달의 수단이거나 구성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목적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인이나 작가가 언어에 민감한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시인, 작가 아닌 사람은 언어에 둔감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언어란 만인공유(萬人共有)의 것으로 시인, 작가보다 훨씬 민감하게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고 각별히 관심 없는 듯하면서도 사람들은 누구나 언어를 칼날로도 느낄 수 있고 부드러운 손길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황의 전달이며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_p.123-124
출판사 서평
“문학은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 불러들여서 하는 게 아니다”
고통을 구원으로 승화시킨 문학을 향한 박경리의 간절한 소망들
“원주로 내려온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떠한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생애의 불길을 태워보겠다는 내 문학적 소망이었다.” 박경리는 「인간만으로 살게 하소서」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한때 그는 절망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글을 썼고, 가족과의 호구(糊口)를 위해 밤을 밝혀야만 했다. 병고(病苦)와 맞섰는가 하면, “몰이꾼들에 쫓기는 한 마리 사슴”이 되기도 했다. 그의 분노와 고통과 비애는 글을 쓰는 행동으로 지탱이 되었으며, 글쓰기는 곧 구원이 되었다.
또 다른 에세이 「나의 문학적 자전(自傳)」에서 박경리는 김동리를 ‘내 문학의 아버지’로 지칭했다. 그는 김동리에 대해 자신이 쓴 ‘졸렬한 시 속에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발견한 분이라고 적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전했다는 말로써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한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팔자예요. 문학은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지, 불러들여서 하는 건 아니에요.”
이 책 곳곳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박경리의 내면이 엿보인다. 그의 어머니는 박경리를 보고 늘 별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존엄에 상처를 받았을 때, 심정적으론 생명을 내거는 지경까지 가는 나를 나는 제어하지 못한다”라면서 『토지』의 최치수에게 자신이 투영된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고 적었다. 나아가 “인간의 존엄과 소외”가 자신의 “문학의 기저(基底)가 아니었나 싶다”고 고백한다.
「나의 문학적 자전(自傳)」에는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나온다. 여학교 시절, 아버지가 학비를 송금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는 짐을 싸서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러곤 학교를 그만두라는 아버지에게 “당신이 공부시켰냐?”며 따지고 들다 따귀를 맞는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재혼한, 너무나 젊은 아버지에게 박경리는 ‘존중해야 할 두렵고 어려운 딸’이자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그가 원주로 내려온 이유는 또 있다. 나중에야 스스로 밝힌 것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사위 김지하가 유신 체제하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원주교도소에 수감되자 옥바라지하는 딸을 위해 딸과 손자가 있는 원주로 온 것이다. 이 책에는 손주들을 위해 집 안마당에 손수 연못 겸 풀장을 만드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어찌나 그 일이 즐거웠던지 아침 일찍이 시작해서 해 저무는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적었다. 그러고 나서 바라본 마당에는 “산수유가 만발하고 덩달아 개나리 진달래도 꽃망울을 열었으며 과수도 개화(개화)를 서두르고 있었다”라면서 지금부터 비를 탓하며 미뤄둔 원고를 쓰고 “저녁에는 끊어다 놓은 광목으로 작업복이나 만들어야겠다”고 적은 원주에서의 그의 삶에 관한 기록은 독자들에게 깊은 사색과 함께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겨울을 견뎌낸 나의 나무들이 환희에 차서 간지럽게 일렁이고”
아픔과 사랑을 품은 모든 생명에 보내는 박경리의 연서(戀書)
원주로 이사한 초기, 박경리는 서툰 살림에다 사소한 일조차 힘겨워하며 가슴이 뛰곤 한다. 우물의 모터가 한겨울 추위에 얼어붙자 그는 우물가에서 펌프질을 하여 겨우 물 한 양동이를 길어 오던 중 눈밭에 미끄러진다. 그러곤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소리를 내어 운다. 사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허허로운 벌판에서 그의 울음소리를 들어준 것은 자연의 뭇 영신(靈神)들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원주로 거처를 옮긴 후 짙은 소외감 속에서 하루하루 삶을 개척해나간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자연이었고, 그 시기를 보내면서 박경리는 자연에 대해 더 큰 애정을 갖게 된다.
「치유받은 내 영혼」에서 그는 “고추며 옥수수며 모조리 결딴을 내던 들쥐를 퇴치하는 고양이 가족, 방에는 짖어주는 강아지, 발소리가 나면 웅덩이에서 건져온 모기의 유충과 실지렁이를 받아먹으려고 모여드는 붕어들-. 이들을 거둬 먹이는 것으로 아침이 열린다”고 적고 있다. 거름으로 쓰려고 구해온 어마어마한 분량의 닭똥을 손으로 뭉치고 또 뭉쳐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리는 “기막히게 고달픈 작업”을 하는 동안 외로움이나 한탄이 없는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연은 과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내 영혼을 언제 이토록 실하게 치유해주었을까.” 하며 감탄한다.
박경리는 사람들이 그 대지의 모성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거대한 기계문명의 발전과 “사악하고 전투적이며 미래를 망각한 오늘의 물질적 충족에 급급한 인간상”을 보며 하루에도 수차례 절망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생명은 아픔이요, 생명은 사랑이다. 아픔과 사랑이 사라져가는 세상, 나는 인간에 대하여 혐오를 느낄 때가 많다. 아픔과 사랑이 없을 때 생명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생존도 확약할 수 없는 것 아닐까.” 하는 그의 목소리는 지구 존폐의 갈림길에 선 세기말적 비극을 바라보는 작가 혹은 문학의 역할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늘날 작가는 총체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왜 쓰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창조는 정신의 소산입니다. 틀과 본도 정신의 소산입니다. 기능과 창조는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합니다. 그 공평한 자리에 서서 우리는 물으며 발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그의 글이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박경리 17주기 추모 기획
#다산책방 〈박경리 산문선〉 출간!
한편 다산책방에서는 2026년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을 준비하며 한국 사회와 문학의 중추를 관통하는 그의 방대한 작품들을 새롭게 출간하고 있다. 대하소설 『토지』와 장편소설선에 이어 진행하고 있는 이번 기획은 박경리 작가의 산문과 시를 아우르며, 오랫동안 유실되었던 미발표 작품도 포함되었다. 올해 집중적으로 출간되는 〈박경리 산문선〉은 지난 2023년에 다시 출간된 『일본산고』에 이은 다산책방의 기획 산문선이다. 새롭게 개정된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는 작가의 육필 원고를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전 판본의 오류들을 바로잡았다. 또한 현대의 독자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끔 다듬으면서도 고유한 문장과 표현, 시대를 드러내는 단어들은 그대로 두어 작가의 목소리를 오롯이 전하고자 했다.
기본정보
ISBN | 9791130663067 |
---|---|
발행(출시)일자 | 2025년 02월 06일 |
쪽수 | 132쪽 |
크기 |
136 * 212
* 16
mm
/ 423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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