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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순 저자(글)
시와사람 · 2024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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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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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순의 시 세계는 시의 특질을 두루 구비하면서, 시적 형상화해 놓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미지의 구현을 밑바탕으로 깔고 있다. 어느 한 시에서만 아니라, 모든 시 곳곳에 이미지를 배치해놓고, 그게 입체감을 이루어 멋스런 이미저리를 구축하고 있다. 이처럼 시는 주제 노출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그릇에 시의 의미를 담아내는 게 좋은 시로 가는 지름길이다. 주제를 건드리지 말고, 에둘러 표현하되 이미지 구현, 미적 가치의 그릇에 담아 표현할 때, 시적 형상화 점수가 높게 된다. 이와 더불어, 낯설게 하기, 즉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어, 이애순 시들은 싱그럽다. 새로운 해석이 없으면, 시는 밋밋해지고 기시감이 들고 싱싱한 맛이 없다. 시를 읽고 싶게 만드는 오솔길, 그게 바로 낯설게 하기이다. 특히 유럽의 시에서 강조되고 있는 이 낯설게 하기는 우리 현대시에서도 이제는 자리잡고, 많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애순의 시에서는 감성의 다채로운 세계가 시마다 소개되고 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감성의 세계, 그게 손바닥 위에 올려져 친근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배치해 놓아, 독자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 박덕은(문학박사, 전 전남대 교수, 문학평론가)

이 책의 총서 (82)

작가정보

저자(글) 이애순

이애순

·월간 《한맥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삼행시 문학상 대상 수상
·윤동주 별 문학상 수상
·8·15 광복 문학상 수상
·전시작가 문학상 수상
·한·불 문학상 수상
·산해정 치유문학상 수상
·한실문예창작 회원
·탐스런문학회 회장

목차

  • 반딧불이 암자에 머물다 / 차례


    시인의 말 _ 5
    축시/ 박덕은 _ 6


    제1부

    그리움은 또 오고 _ 18
    고백 _ 20
    마음이 좀 그래 _ 22
    너를 떠나보내며 _ 24
    잊어버릴 수 있을까 _ 26
    비 그리고 나 _ 28
    돌아오지 않는 지금 _ 30
    골고타, 보랏빛에 스며들다 _ 32
    물망초 되어 _ 34
    사랑비 _ 36
    그리움 _ 38
    고뇌 _ 40
    회개의 울음 _ 42
    저 눈밭에 핀 사랑꽃 _ 44
    마타리꽃 _ 46
    저 세상 너머 _ 48
    봄의 숨소리 기다림 되어 _ 50
    영원한 첫째를 꿈꾸며 _ 52
    삶이 그러하듯이 _ 54


    제2부

    기다리며 _ 58
    마음속 하얀 장미 _ 60
    12월 춤사위 _ 62
    여인이여 _ 64
    사랑이 차오른다 _ 66
    사랑 _ 68
    가을 어귀에서 _ 70
    보랏빛 연가 _ 72
    아쉬움 _ 74
    우정의 시간 _ 76
    가을에 피는 이슬꽃 _ 78
    외손녀 은율이 _ 80
    이별 _ 82
    그 어떤 인연 되어 마지막 춤을 _ 84
    풀꽃 _ 86
    가을 여인 _ 88
    연민·1 _ 90
    연민·2 _ 92
    기도 _ 94
    이별 후 _ 96


    제3부

    젖어들어 _ 100
    소슬바람 _ 102
    인생 _ 104
    가을에 물든 기다림 _ 106
    해바라기 _ 108
    붉은 저 달 _ 110
    누구인가 _ 112
    이슬꽃 _ 114
    구월의 환희 _ 116
    가을에 만난 사랑 _ 118
    관심 _ 120
    장맛비 _ 122
    노을 물든 독백 _ 124
    금붕어 동무 되어 _ 126
    무지개 마음 물들이고 _ 128
    애호박 _ 130
    보랏빛 사랑 _ 132
    소녀처럼 _ 134


    제4부

    새들의 잔치 _ 138
    언제쯤일까 _ 140
    치유 _ 142
    소환 _ 144
    내 마음 _ 146
    하루살이 _ 148
    고백 _ 150
    순응하며 _ 152
    님의 소리 _ 154
    봄의 향연 _ 156
    회개하는 바람 앞에 서다 _ 158
    여정 _ 160
    반딧불이 암자에 머물다 _ 162
    사계 _ 164
    설경 속에 흐르는 우정 _ 166
    어느 하루 _ 168
    회상 _ 170
    낙엽 _ 172
    상념 속에서 _ 174
    인연 _ 176


    평설/ 박덕은 _ 180

책 속으로

그리움은 또 오고



궁핍한 마음의 대물림은 날마다 계속되기에
지친 영혼이 쉬어 가는 이곳
흩뿌려진 햇빛 찬란한데
사연 품은 저 자갈들 어루만지는
개울 소리
옛 그대로이다

가을볕을 꼬들꼬들 말리는 소슬바람
이파리에 낮잠 즐기다
흔적 없이
이 마음 거슬러
들락날락 넘나들며
읊조리는 음절
우울함인가
보고픔인가

울음이 제 몸을 내던지며
한 겹 한 겹 쌓여지는
연민
저 붉은 노을 속에서
파닥거리고 있다.







고백



읊조리는 가랑비
가슴에 파고들어
그리움 쓸어내린다

해 질 녘을 입은 서녘의 틈에서
빼꼼히 내민 노을 속
두근거림이 내린다

해맑은 한마디
입술에 안겨
눈물 서린 미소로 머무른다

간절한 필체가 켜켜이 쌓인
연보라 엽서에
반짝거린 작은 별빛
머릿속 후비는 뭉클함
내려놓는다.







마음이 좀 그래



언제나 그렇듯
하루가 다정스레 손잡고 길 떠나는
밤 나그네 배웅한다

자정과 적막의 체온이 내려가는
초여름 찬 기운이
스멀스멀 마음속
수다떤다

바라보는 눈빛이 애잔하다
꽉 찬 생각들 어찌할 바 몰라
시시때때로 쏘아댄다

우울과 눈물의 비망록 속에서도
지긋이 내리감고 침묵하는 이
조그만 상처
부풀리며 떠벌리는 이
지난날의 잘못
곱씹는 이
모두 이런저런 내면 속
불안 안고 살아간다.






너를 떠나보내며



별빛과 기다림 건너는 불면의 밤
그 파르르 떨리는
순간이 사라지고 있다

위태롭게 길들여진 이별의 안쪽에서
닿을 듯 닿지 않은
그 너머로
달빛 서리는 미묘함 속
계절은 또다시
시공간을 초월하며
영혼의 언어로
누군가를 바라본다
달무리 스쳐가는
쓸쓸한 바람
옷깃 여미며
이곳에 머문다.






잊어버릴 수 있을까


적막이 서둘러 발을 들여놓는
고즈넉한 밤
봄바람이 어둠 뚫고
햇귀 맞이한다

잠시 기억 속 생각들
빛살 사이로
들쑥 날쑥 헤집으며
떠나려 한다

상실을 버티며
꼬깃꼬깃 구겨놓은 아픔의 틈에서
짓눌리던 감성도
아파 슬프게 울며
마음까지 찢어놓고
비틀거리며 따라나선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손짓하는 이별도
추억에 묻힌 밀어도
한켠에 고이 정 접어 둔 채
따라나선다.






비 그리고 나



살짝이 밖으로 나와
고즈넉한 모퉁이길
때늦은 저녁의 얼굴로
홀로 서 있다
가랑비가 마중을 한다

가로등 불빛
물방울 맺힌 거미줄 사이
연분홍 꽃잎들

이슬 머금은 마음
위로의 시간에
어쩌면 우린
한 송이 작은 안개꽃일지 몰라

빗소리와 어둠으로 묵상 중인 골목을
걸어가는 발자욱에
빗물이 소롯이 안긴다.

출판사 서평

| 평설 |

이애순 시인의 첫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박 덕 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애순 시인은 광주광역시 동구 북동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신앙인으로, 주로 봉사활동을 하며 지낸다. 간혹 비가 내리고 화창한 날, 시를 쓴다. 그리하여 월간지 《한맥문학》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문단데뷔를 하였다. 남양주 문학상 우수상, 삼행시 문학상 대상, 윤동주 별 문학상, 8·15 광복 문학상, 한국·쿠바수교기념초대 전시작가문학상, 파리올림픽개최기념초대 한·불 문학상, 산해정 치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은 탐스런 문학회 회장, 한실문예창작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실문예창작 소속 탐스런 문학회에 나온 지 벌써 2년이 넘어섰다. 그동안 한결같이 시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매주 1편씩 시 창작을 한 결과, 이제는 어엿한 시인이 되어, 이렇게 멋진 시집까지 펴내게 되었다.
이애순 시인의 시 세계로 들어가 탐색해 보기로 하자.

살짝 스쳐 떠나는
바람이려니 했다
돌이킬 어제의 지점은 사라져서
그렇듯 다가와 머물다
바람처럼 가는 게지

시간이 쌓인다
익살스러운 한마디
눈길이 감싸 준다

보이지 않는 걸
바라보는 것
고요히 물들어 간다

저벅저벅 망상의 길목 배회하다
하루가 떠나는 그때
소환한다
추억하는 한 토막.
- 「관심」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관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 관심의 사전적인 뜻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임’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것에 찍힌 마음의 발자국을 말한다. 심장에서 빠져나간 발자국이 님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그건 님을 향한 관심의 시작인 것이다. 관심이 없다면 님 앞에서의 서성거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애써 몸 밖으로 흘러나간 눈빛이 님의 언저리를 돌면서 배회한다면 님을 향한 관심이 지극한 것이다. 님과 함께 있지 않았는데도 함께 있는 듯 초조한 자신의 숨소리가 느껴진다면 님을 향한 관심이 극대화된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관심을 시적 화자는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다. 이 모든 관심이 “살짝 스쳐 떠나는/ 바람이려니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저벅저벅 망상의 길목 배회하다/ 하루가 떠나는 그때”서야 어떤 추억을 소환한다. “추억하는 한 토막”이 님을 향한 그리움인지, 젊은 날에 불타올랐던 열정인지, 어떤 아쉬움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바람처럼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발자국을 다시 찍고 있다는 것이다. 관심의 끈을 놓치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시적 화자는 잠시 머물다 바람처럼 가는 게 인생이라며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고, 눈길이 감싸 주고, 고요히 물들어 가다 보면, 관심 갖지 않을 수 없다. 하루가 망상의 길목 배회하다 떠나는 그때, 추억의 한 토막을 소환해서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관심의 세계를 좀 알 것 같다. 슬쩍 스쳐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잠시 머물러 있을 때, 그 순간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 최선을 다하는 관심, 최선을 다하는 정성, 이게 삶의 보람, 삶의 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시,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간다.

초록을 낳는 봄날의 목소리로
바람이 분다
시린 추억들
입가에 맺힐 때
우리 만날까요

이슬 닮은 그대
마음에서 깨어나

가슴 쥐어짜는 그리움으로
우리 만날까요

서정적 감흥이 속성으로 자라는
버드나무 아래
생각에 잠긴
그 간절한 바람끼리
우리 만날까요.
- 「노을 물든 독백」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뭔가 아쉬운 듯 “우리 만날까요”라고 외치고 있다. 시적 화자에게 어떤 설렘이 다가온 것일까. 덩달아 마음의 떨림이 번져 온다. 금방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이 망설임 끝에 몸 밖으로 뛰쳐나가 님에게로 달려나갈 기세다. 님의 심장에 꽃피는 모든 그리움을 바치고 올 기세다. 그만큼 설렘은 강력한 사랑으로 읽혀진다. 이 시는 마지막 연까지 모두 설렘의 파문이 몸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가 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시제가 "노을 물든 독백"이다. 나 혼자만의 웅얼거림이다. 어떤 설렘도 아직은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가만 가만 마음을 기울이면 당신의 귓속에도 내가 있는 것 같고, 당신의 눈 속에도 내가 있는 것 같은데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일단 독백일지언정 과감하게 내보내야 한다.
초록을 낳는 봄날의 목소리로 바람이 불 때, 시린 추억들 입가에 맺힐 때, 우리 만날까요. 이슬 닮은 그대가 마음에서 깨어나 가슴 쥐어짤 때, 그리움으로 우리 만날까요. 서정적 감흥이 속성으로 자라는 버드나무 아래서, 생각에 잠긴 그 간절한 바람끼리 우리 만날까요. 독백으로 그쳤지만 그래도 괜찮다. 자신의 그리움을 알았으니 내일은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무디어진 감성, 세월의 때가 끼어 가는 감성, 고운 빛이 사라지고 빛바래 어두워지는 감성, 돌아보지 않아 눅눅해진 감성, 늘 외면당하여 쓸쓸해진 감성을 일깨워, 다시 생동하는 감성, 설렘 가득한 감성, 간절함이 살아 있는 감성끼리 만날까요. 우리 그러면 안 될까요. 자꾸 묻는 시적 화자가 왠지 고맙기까지 하다.

쓸쓸함을 소문처럼 몰고 다니는
소슬바람이
어둠 안고 내려앉는
알 수 없는 그 자리

맑은 생각 하나
마음에 들어와
그네를 탄다

시간은 쌓여 가고
새벽 눈물 풀잎에 맺힐 무렵
가슴 밑바닥에 내려놓고 떠난다

살가운 어둠의 잔등에 올라앉아
별빛에 고개 숙인
밤에만 피어난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사랑꽃

어쩜 우린
마음은 닮아 있어도
이제 떠나야 하는 길 위에
누군가 물들이겠지.
- 「이슬꽃」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이슬꽃을 눈여겨 보고 있다. 이슬에 젖은 새벽의 지문을 만지고 있으면, 어린 시절이 두터운 시간의 옷을 벗고 들어설 것만 같다. “맑은 생각 하나/ 마음에 들어와/ 그네를 탄”다. 맑은 생각이 어린 시절의 추억인지 꿈인지 해독할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생각을 하면 맑아지는 건 분명하다. 그 생각이 그네를 타고 있으니 평온하고 행복하다. 어둠은 거대한 적막으로 밀려들고 있지만 맑은 생각 속에서 그네를 타고 있어 괜찮다. 그 그네 속에서 밝은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짙어가는 생의 어지럼증을 치유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 이슬은 “별빛에 고개 숙인/ 밤에만 피어난/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사랑꽃”이 된 것이다. 찬바람이 불어오지만 나만의 사랑꽃이 피어나기에 괜찮다. 지난날의 아픔과 버거움을 이겨내고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만의 사랑꽃”이 있었기 때문이다.
쓸쓸함을 소문처럼 몰고 다니는 소슬바람이 어둠 안고 내려앉은 자리에 이슬이 맺힌다. 맑은 생각 하나 마음에 들어오더니, 이슬 되어 그네를 탈 무렵, 시간은 쌓여 가고 새벽 눈물이 풀잎에 맺힌다. 그것은 가슴 밑바닥으로 내려온다. 밤에만 피어나는 사랑꽃, 아무도 모르고 시적 화자만이 알고 있는 꽃이다. 그 사랑꽃과 시적 화자의 마음은 서로 닮아 있다. 시의 섬세한 감성 속으로 이끌고 가는 솜씨가 아주 좋다. 시가 이처럼 무수한 감성의 세계로 안내해 주고, 그 세계를 보여주고, 그래서 감성의 폭, 이해의 폭, 시야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면, 시의 특질과 시의 임무는 완수되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궁핍한 마음의 대물림은 날마다 계속되기에
지친 영혼이 쉬어 가는 이곳
흩뿌려진 햇빛 찬란한데
사연 품은 저 자갈들 어루만지는
개울 소리
옛 그대로이다

가을볕을 꼬들꼬들 말리는 소슬바람
이파리에 낮잠 즐기다
흔적 없이
이 마음 거슬러
들락날락 넘나들며
읊조리는 음절
우울함인가
보고픔인가

울음이 제 몸을 내던지며
한 겹 한 겹 쌓여지는
연민
저 붉은 노을 속에서
파닥거리고 있다.
- 「그리움은 또 오고」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그리움이 꿈틀거리는 내면을 탐구하고 있다.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다고 해서 그리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마음의 허기가 더 크다.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린 자본 앞에서 우리는 더 갖고 싶은 자본의 욕망을 떨치기 어렵다. 그 욕망 때문에 그리움은 늘 뒷자리로 밀려난다. 어제보다 오늘 더 갖기 위해, 남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자본의 욕망에 얽매여 있다. 그 욕망 때문에 “궁핍한 마음의 대물림은 날마다 계속되기에/ 지친 영혼이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시적 화자는 그곳이 바로 그리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맞다. 그리움 속에서 쉼을 얻고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 그리움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내일을 살아간다.
지친 영혼이 쉬어 가는 곳, 햇빛이 찬란하고 개울 소리 옛 그대로 싱그럽게 흐르고 있는 그곳이 그리움의 주소지다. 가을볕 꼬들꼬들 말리는 소슬바람 아래 읊조리는 건 우울함인가 보고픔인가. 연민은 한 겹 한 겹 쌓아지는데, 저 멀리 붉은 노을은 파닥거리고 있다. 이미지 구현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보고파 하는 마음, 외로운 마음, 울음 섞인 연민 등이 그림 같이 그려지는 정경과 함께 독자들에게 감정의 파노라마를 안겨 주고 있다. 이처럼 다채로운 감성을 발굴해 보여 주는 작업, 이는 시의 특질 중 아주 중요한 것이 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하루가 다정스레 손잡고 길 떠나는
밤 나그네 배웅한다

자정과 적막의 체온이 내려가는
초여름 찬 기운이
스멀스멀 마음속
수다떤다

바라보는 눈빛이 애잔하다
꽉 찬 생각들 어찌할 바 몰라
시시때때로 쏘아댄다

우울과 눈물의 비망록 속에서도
지긋이 내리감고 침묵하는 이
조그만 상처
부풀리며 떠벌리는 이
지난날의 잘못
곱씹는 이
모두 이런저런 내면 속
불안 안고 살아간다.
- 「마음이 좀 그래」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나그네를 떠나보내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나그네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상징이다. 서러움일 수도 있고 절망일 수도 있고 아쉬움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다. 나그네의 사전적인 뜻은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다. 시적 화자가 왜 ‘나그네’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우리에게 다가온 부정적인 감정들을 나그네처럼 가볍게 맞이하고 배웅하고 싶다는 의도일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발목 잡히지 말고, 그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고, 가볍게 나그네를 배웅하듯 떠나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음의 집에서 영구히 입주하지 않도록 나그네로 대하며 배웅해야 한다.
시적 화자는 길 떠나는 밤 나그네를 배웅한다. 초여름 찬 기운이 마음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들어 수다떨고 있다. 바라보는 눈빛이 애잔하고, 꽉 찬 생각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따금 힐끗 쏘아댄다. 우울과 눈물의 비망록 속에서 여러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침묵할 것인지, 상처 부풀리며 떠벌릴 것인지, 잘잘못을 곱씹을 것인지 고민에 빠져 있다. “모두 이런저런 내면 속/ 불안 안고 살아간다”며 현대인의 마음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상처가 깊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는 익숙한 풍경도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나그네처럼 배웅해야 한다. 여기서도 섬세한 감성의 세계가 포착되고 있다. 그 세계가 선명한 이미지로 구현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적막이 서둘러 발을 들여놓는
고즈넉한 밤
봄바람이 어둠 뚫고
햇귀 맞이한다

잠시 기억 속 생각들
빛살 사이로
들쑥 날쑥 헤집으며
떠나려 한다

상실을 버티며
꼬깃꼬깃 구겨놓은 아픔의 틈에서
짓눌리던 감성도
아파 슬프게 울며
마음까지 찢어놓고
비틀거리며 따라나선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손짓하는 이별도
추억에 묻힌 밀어도
한켠에 고이 정 접어 둔 채
따라나선다.
- 「잊어버릴 수 있을까」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적막 깔린 고즈넉한 밤에 생각에 잠긴다. 「잊어버릴 수 있을까」라는 시제에서 시적 화자의 아픔이 느껴진다. 잊고 싶지만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별을 했는지,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꾸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이별의 상처가 클수록 “추억에 묻힌 밀어”는 달달했을 것이다. “상실을 버티며/ 꼬깃꼬깃 구겨놓은 아픔의 틈에서/ 짓눌리던 감성”이 아직도 시적 화자를 아프게 하고 있다. 그 감성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말처럼 쉽지 않다. 이별의 아픔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내일을 향해 달려나가기에, 우리는 그 상처를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별로 인해 어떤 자상을 입었는지, 어디를 다쳤는지 알지 못하기에 상처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고즈넉한 밤이 지나고 봄바람이 불어와 햇귀를 맞이하고 있다. 그때 추억은 빛살 사이로 헤집으며 떠나려 한다. 구겨진 아픔에 짓눌려 있던 감성도 슬프게 운다. 울다가 마음까지 찢어놓고 비틀거리며 떠난다. 그때 손짓하던 이별도 밀어도 한켠에 정 접어 둔 채 따라나선다. 감성들 중 몇 개를 골라, 이미지로 바꿔 배치하는 솜씨가 세련되어 있다.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잡고 있는 듯하다. 시는 주제 노출을 극도로 꺼려 한다. 주제의 의미와 방향은 제시하되, 에둘러 가야 한다. 이미지로 길을 만들고 방향을 제시하고 깃발을 세워야 한다. 그 이미지 속에 저절로 주제와 의미와 철학이 드러나도록 해야 시다운 시가 된다. 그 모범 사례를 제시해 주는 것 같은 시라서, 더욱 마음이 행복하다.

늦가을이 뒷짐지고
어슬렁어슬렁 빠져나가는
십일월 해 질 무렵
찬비가 바람 타고
가슴에 파고든다

계절의 무심함이
한 획 긋는 하루
햇살이 따스하다

여름과 초록의 수다가 지워져
빛바랜 떡갈나무
시간에 의지한 채
구절초 바라보는
눈빛이 아련하다

빗방울 듣는 소리에
숨소리 내보내며
어둠이 짙어 간다.
- 「그리움」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그리움에 젖어 있다. 낙엽을 비롯한 십일월의 걸음은 낮은 곳으로 향한다. 제 빛깔이 태어났던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일까. 그 말없는 그리움이 십일월을 채색하고 있다. 가을은 이울 대로 이울어 앙상한 뼈마디 드러내고 있다. 한때 뼈와 살을 채우며 초록으로 웃었던 날도 있었다. 초록의 날들이 사라지고 없지만 “계절의 무심함이/ 한 획 긋는 하루/ 햇살이 따스하”다. 그리움을 대하는 시적 화자의 자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늘 그리움이 따스할 수만은 없다. 어떤 날은 “빛바랜 떡갈나무/ 시간에 의지한 채/ 구절초 바라보는/ 눈빛이 아련하”다. 그리움은 하나의 빛깔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태풍처럼 몰아치다가도 가뭄처럼 바짝 말라버리기도 하고 애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시적 화자는 그리움에는 직접 손대지 않고, 주위 정경을 스케치해 나간다. 늦가을이 뒷짐지고 어슬렁어슬렁 지나간다. 찬비는 바람 타고 가슴에 파고든다. 계절의 무심함이 하루의 한 획을 긋는다. 햇살은 따스하다. 여름과 초록의 수다는 지워지고, 빛바랜 떡갈나무가 구절초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이 아련하다. 빗방울 소리 속으로 어둠이 짙어가고 있다. 이 시 역시 이미지 구현의 진수를 보여 준다. 이미지를 그려놓고, 그 그릇 안에 그리움의 감성이 고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움을 손대지 않고도, 독자로 하여금 그리움의 감성을 짙게 느낄 수 있게 한다면, 그게 바로 시의 특질로 가는 길인 것이다.

입김의 시간이 다정하고 따스한
12월이 떠나간다
위로의 바람 지금 어디에

해조차 숨어 버린 시간 너머
비구름 스며드는 가슴에
그리움 솟구친다

님 오지 않고
무심한 겨울비 속으로
안타까움만 일렁일렁

구슬픈 노랫가락 되어
연신 토해내는
마음 빈 곳

적막에 꿰인 겨울을 방목하는
외로운 바람
눈구름 건드리며
길 떠난다.
- 「기다리며」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오지 않는 님을 그리며 시를 쓰고 있다. 시적 화자의 기다림이 막막하게 느껴진다. 기다림이 키운 가혹한 쓸쓸함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무심한 겨울비 속으로/ 안타까움만 일렁일렁”과 “구슬픈 노랫가락 되어/ 연신 토해내는/ 마음 빈 곳”과 “외로운 바람/ 눈구름 건드리며/ 길 떠난다”에서 쓸쓸함이 읽혀진다. 특히 “마음 빈 곳”이 더 아리게 한다. 그 빈 곳은 님이 없는 곳이지만, 아직도 아니 앞으로도 님을 기다리는 자리인 것이다. 님은 없는데 님을 향한 기다림으로 그 빈 곳을 채운다니, 안타깝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별 후에 사랑의 가치를 깨닫고 그 소중함을 깨우치는지도 모른다. 이별의 시간이 길수록 그만큼 기다림의 시간은 깊어져간다. 기다림의 언저리에서 하루를 살고 한 계절을 살고 그렇게 세월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다.
12월이 떠나가고 있다. 위로의 바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해조차 숨어 버리고 비구름뿐, 쓸쓸한 가슴에 솟구치는 그리움뿐. 무심한 겨울비 속으로 안타까움만 일렁일 뿐. 마음 빈 곳에는 구슬픈 노랫가락이 흐르고, 적막에 꿰인 겨울을 방목하는 외로운 바람뿐. 그것마저 눈구름 건드리며 길 떠나고 있다. 사물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야가 눈길을 끈다. 낯설게 하기, 즉 새로운 해석은 시에서 감초 역할을 한다. 시가 신선해 보이게 하는 낯설게 하기, 이 시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잎의 무게를 빼 체중이 가벼워져
우뚝 늘어선 은행나무
동그란 길섶에 안긴
손바닥 정원

강아지풀꽃
다소곳이
꼬리 곧추세운다

시린 바람에
쓸쓸히 춤추는
은행잎 노랑나비 되어
펼치는 황금빛 향연

오르락 내리락
포물선 그리며
사뿐히 풀섶에 안기는
추억

바닥의 체온 올려 주기 위해
길 위에 겹겹 구르며
쌓여 간다
시간이 흐르고
바람 타는 겨울밤 익어 간다.
- 「12월 춤사위」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초겨울의 은행나무를 관찰하고 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은행잎을 노랑나비로 해석하고 있다. 동화적인 해석이 아름답다. 그 순수한 해석이 있기에 “황금빛 향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상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동심의 세계를, 동화적인 관점을, 몽상가의 시야를 갖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순수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은행잎을 노랑나비로 해석하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 시가 그 새로운 관점의 문을 열 수 있게 다리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잎의 무게를 빼 체중이 가벼워진 은행나무, 손바닥 정원에 서 있다. 그 아래 강아지풀꽃이 꼬리 곧추세우고 있다. 시린 바람에 쓸쓸히 춤추는 은행잎들, 이들이 펼치는 황금빛 향연이 아름답다. 오르락 내리락 포물선 그리며 풀섶에 안기는 모습에서 시적 화자는 어떤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아마 노랑나비처럼 동화적이고 순수했던 어느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길 위에 겹겹 구르며 쌓여 가는 모습, 그 뒤로 시간이 점차 흐르고, 바람 타는 겨울밤이 익어 가고 있다. 시적 표현, 시적 형상화가 왜 아름다운지, 모범 사례를 보고 있는 듯하여, 기분이 상쾌하다. 좋은 시를 대할 때, 다가오는 행복한 감성, 이게 이 땅에 시를 있게 하고, 시를 사랑하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꼼지락꼼지락 햇살 뭉쳐 올려놓는
두 개의 손가락 사이사이
엉덩이에 승리의 꽃 수놓는다

무지개 피어오른 두 살배기
뒷짐지는 손바닥 경이롭다

빼꼼히 뒤꿈치 들며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새끼발가락
용기 기특하다

삐죽삐죽 솟구친 까망 머리카락
세어 보는 구월의 바람
하늘로 솟아 치켜 세운 머릿결
리듬 타며 메아리 되어
장난기 걸어 올린다

힘 솟는
저 희망찬 한 발 한 발
불안한 세상의 종종걸음 떠받치기 위해
위대함으로 우뚝 선다.
- 「외손녀 은율이」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외손녀의 모습을 행복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뒤따르지만 할머니는 그렇지 않다. 부담감이 없기 때문에 손주가 그리도 이쁘다고 한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위로 햇살이 내려와 앉고 달빛이 내려와 몸을 푸는 것도 이쁘게 보인다. 아니, 감탄을 한다. 삶의 축복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며 환호성을 지른다. “무지개 피어오른 두 살배기/ 뒷짐지는 손바닥 경이롭다”와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새끼발가락/ 용기 기특하다”에서 손녀를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삐죽삐죽 솟구친 까망 머리카락/ 세어 보는 구월의 바람”이라는 표현이 재밌다. 손녀에 대한 사랑과 손녀의 귀여움이 엿보인다. 손녀에 대한 사랑은 “힘 솟는/ 저 희망찬 한 발 한 발/ 불안한 세상의 종종걸음 떠받치기 위해/ 위대함으로 우뚝” 서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햇살 뭉쳐 올려놓은 두 개의 손가락, 그게 엉덩이에 승리의 꽃 수놓고 있다. 두 살배기 손녀의 뒷짐지는 손바닥, 빼꼼히 뒤꿈치 들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발가락, 솟구친 까망 머리카락, 메아리 되어 장난기 걸어 올리는 머릿결, 희망찬 발걸음 한 발 한 발, 불안한 세상의 종종걸음을 떠받치기 위해 위대함으로 우뚝 선 듯한 손녀의 걸음걸이. 표현 하나 하나가 시적이다. 시적 형상화가 아름답다. 손녀에 대한 관찰이 예술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시의 감칠맛이 살아 있어 행복하다.

흙의 어깨 겯고 결속 다진
흙담 아래
흙내음에 취하고
코끝이 만개한다

풀잎에 이슬 머금은 틈새
초록 동그라미
보름달 닮았다

님 새끼손가락 걸고
깔깔 웃음 허공 가르며
달 바라본다

지금은 요만큼
내일은 알 수 없지
만삭의 달 유전자 물려받아
퉁실퉁실 부풀어오른 널
어찌할까.
- 「애호박」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애호박에 눈길을 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애호박은 초록의 몸으로 해와 달을 섬기며 봄을 낳고 여름을 낳고 있다. “만삭의 달 유전자 물려받아”서인지 “초록 동그라미/ 보름달 닮았”다. 그래서인지 애호박이든 늙은 호박이든 풍요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주방에서도 호박 하나만 있으면 찌개든 볶음이든 조림이든 어떤 요리도 가능하다. 넉넉한 보름달처럼 말이다. 그 느낌은 “님 새끼손가락 걸고/ 깔깔 웃음 허공 가르며/ 달 바라”보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
흙의 어깨 겯고 결속 다친 흙담 아래 흙내음에 취하고 코끝이 만개한 애호박. “코끝이 만개”에서 유머가 느껴진다. 코끝이 만개했기에 초록의 몸으로 둥글어졌을 것이다. 풀잎에 이슬 머금은 틈새 초록 동그라미 닮은 애호박, 님의 새끼손가락 걸고 깔깔깔 웃음 지을 때 바라본 달 같은 애호박, 만삭의 달 유전자 물려받아 통실통실 부풀어오른 애호박, 표현이 싱그럽다. 애호박 하나에 쏠리는 시적 화자의 아름다운 눈길과 해석, 그게 신비롭다. 인간의 감성을 부드럽게 곱게 우아하게 이끄는 시의 특질이 여기서도 반짝이고 있다. 시가 있는 한, 인류의 방향, 인간의 심성이 고운 쪽으로, 순수 쪽으로, 미적 가치 쪽으로 기울 거라는 확신이 든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
한 모금의 물약이 잠을 제조한다는
수면 내시경이 빚어낸 오후
반나절이 더 지나갔건만
무의식에 스르르 감겨진 두 눈에
평화가 깃든다
얼마나 갔을까
꽝 소리에 그때서야 두 눈이 열린다
마무리 짓고선 초침이 지나간다
과다 복용한 잠을 해독한 후
들숨과 날숨이 함께하는
가슴 끝자락에 파란빛 감돈다.
- 「어느 하루」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어느 하루 나른한 한때를 묘사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최소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는다. 일반으로 내시경을 하면 오롯이 불편함을 느껴야 하지만 수면 내시경으로 검사를 받으면 잠깐의 잠에 빠지기만 하면 된다. 그 잠깐의 잠을 “무의식에 스르르 감겨진 두 눈에/ 평화가 깃든”다고 말하고 있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보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처럼 불안했는데 오히려 평화가 깃든 것처럼 느껴졌다니 다행이다. 수면 마취가 잠의 씨앗을 시적 화자의 몸에 뿌리내리도록 안전하게 잘했는가 보다.
시적 화자는 수면 내시경을 받은 후, 반나절 내내 스르르 감겨진 두 눈에 평화가 깃든다. 어느 순간 두 눈이 열리고, 초침 소리가 들린다. 과다 복용한 잠을 해독한 후, 정상적인 숨을 내쉰다. 그때서야 가슴 끝자락에 파란빛이 감돈다. 시적 화자는 아마 어떤 검사를 받기 위해 수면 내시경을 하러, 잠시 마취의 시간을 가진 듯하다. 잠들어 있다가, 무의식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순간까지 시적 형상화해 놓고 있다. 이미지 구현으로 배치된 시의 세계가 한 폭의 그림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어떤 순간도 인간의 감성 속으로 들어가, 그림처럼 시적 형상화해 놓을 수 있다면, 독자들은 보물찾기하듯 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시 속에 담긴 다채로운 감성들을 만난 독자들이 보다 긍정적이고 보다 순수하고 보다 아름다운 심성으로 무장하길 기도해 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애순의 시 세계는 시의 특질을 두루 구비하면서, 시적 형상화해 놓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미지의 구현을 밑바탕으로 깔고 있다. 어느 한 시에서만 아니라, 모든 시 곳곳에 이미지를 배치해놓고, 그게 입체감을 이루어 멋스런 이미저리를 구축하고 있다. 이처럼 시는 주제 노출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그릇에 시의 의미를 담아내는 게 좋은 시로 가는 지름길이다. 주제를 건드리지 말고, 에둘러 표현하되 이미지 구현, 미적 가치의 그릇에 담아 표현할 때, 시적 형상화 점수가 높게 된다. 이와 더불어, 낯설게 하기, 즉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어, 이애순 시들은 싱그럽다. 새로운 해석이 없으면, 시는 밋밋해지고 기시감이 들고 싱싱한 맛이 없다. 시를 읽고 싶게 만드는 오솔길, 그게 바로 낯설게 하기이다. 특히 유럽의 시에서 강조되고 있는 이 낯설게 하기는 우리 현대시에서도 이제는 자리잡고, 많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애순의 시에서는 감성의 다채로운 세계가 시마다 소개되고 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감성의 세계, 그게 손바닥 위에 올려져 친근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배치해 놓아, 독자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앞으로도, 꾸준히 시 창작 활동을 하여, 제2, 제3시집, 나아가 시선집으로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일상생활, 신앙생활 등도 성실히 꾸려나가면서, 틈틈히 시 창작을 하는 여생을 통해, 후회 없는 알찬 삶이라는 열매를 거둬 가길 바란다. 늘 성실하게 문학반에 개근하다시피 나와 시 창작 열정을 쏟아준 그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멋져 보인다.

기본정보

상품정보 테이블로 ISBN, 발행(출시)일자 , 쪽수, 크기, 총권수, 시리즈명을(를) 나타낸 표입니다.
ISBN 9788956657479
발행(출시)일자 2024년 11월 16일
쪽수 208쪽
크기
130 * 213 * 14 mm / 443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오늘의 시와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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