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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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 척 낯선 얼굴로 너는 또 문을 민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송희 시인은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이 있으며,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다. .
이 책의 총서 (21)
작가정보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이 있으며,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다. 가람시조문학상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제20회 고산문학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작가의 말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마음을 물들이고 싶다.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품는
사람을 기억한다.
시는 내게 다리 같고,
낡은 책 같고,
지울 수 없는 염료 같다.
- 2024년 10월, 이송희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거울을 표절하다 13
배꼽의 둘레 14
환승의 시간 16
연관검색어 18
더 어두워지기 전에 19
일기 속 우기 20
몽유 21
꽃꽂이 22
굳어간다는 것은 23
철길 위의 시간 24
회전문 25
어떤 종점 26
이사 27
흘러내리는 기억 28
해변으로 가요 30
청소 31
풍선 32
제2부
보수동 책방골목 35
염색 36
다시, 극락강역 38
우리는 안녕 39
생일을 축하해 40
다시, 바다의 시간 42
왕비 이야기 43
거리 두기 44
블랙아웃 45
폭설의 형태 46
비의 감정 47
미끄럼틀을 타다 48
겨울비 50
어떤 가족 52
이상기후 54
창 56
제3부
서랍의 시간 59
삭제되다 60
액자식 구성 61
블루스크린 62
떠도는 거울 63
테이크아웃 해주세요 64
백지의 이면 66
업데이트 67
엔딩 크레딧 68
당신은 섬처럼 70
금 간 꽃병 71
분리수거 72
겨울의 환 73
모자이크 74
AI 쇼핑 76
제4부
어떤 동거 79
스토킹 80
그림자 노동 81
프레임 82
편집의 방식 83
일인칭 84
서로이웃 85
우리 사이 86
유튜브 바로가기 87
화이트아웃 88
가스라이팅 89
커튼콜 90
리모델링 중입니다 91
주말부부 클리닉 92
겨울의 부조 93
그녀의 옆집 94
해설 / 경쾌한 언어로 적은 주관적인 기억_이정현 98
책 속으로
네 얼굴은 수시로 표정을 바꿨어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한동안 어지러워서 한 곳을 맴돌았지
깍지 낀 연인들이 눈 밖으로 사라지면
가끔씩 멀리서 봄냄새가 흘러왔지
아침을 지나오다가 납빛이 된 네 얼굴
별들이 떨어져도 컵 속 물은 고요해
싸늘한 눈빛이 어제를 돌아 나올 때
모른 척 낯선 얼굴로 너는 또 문을 민다
─ 「회전문」 , 본문 25쪽
색을 잃은 감정들이 차곡차곡 담긴다
지나간 사랑도 그 위에 놓인다
방안의 장롱 밑에는 수북한 먼지뿐
추웠던 계절들은 분리수거가 되었을까
자꾸만 어긋나서 들썩이는 세간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옮겨지는 중이다
벽에는 꽃무늬 벽지들이 시들고
느릿한 더듬이로 갈 곳을 짚어본다
우리는 말을 버린 채
불안하게 실려 간다
─ 「이사」 , 본문 27쪽
키오스크 앞에서 커피를 주문한다
레귤러 사이즈에 휘핑크림 얹은 후
순서를 기다리면서 놓친 말을 곱씹는다
바닥에 가라앉은 시간마저 버리면서
멈출 수 없는 바퀴로 사는 나를 또 돌린다
안내된 문구를 따라 바코드를 찍는 오후
샷 추가된 피로가 종이컵에 쌓이는 동안
등 뒤의 모래시계도 쉼 없이 흘러간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그림자가 되어간다
─ 「그림자 노동」 , 본문 81쪽
출판사 서평
이번에 펴낸 이송희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는 모두 4부로 나뉘어져 총 64편의 시조로 구성되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 마음을 물들이고 싶다”고 말한다. “시는 내게 다리 같고, / 낡은 책 같고, / 지울 수 없는 염료 같다”는 고백이야말로 시인의 삶과 시쓰기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일체(一體)임을 증명한다.
이번 신작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에서도 시적 화자는 어떤 대상을 응시하며 주관적인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반복하며 시를 쓴다. 눈에 들어온 사물과 풍경은 모두 화자의 개인적인 기억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된다. ‘배꼽’은 “내 울음의 뿌리”(「배꼽의 둘레」)가 되고, 내리는 비를 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일기 속 우기」)를 떠올린다. ‘몽유병’은 “네 이름 썼다 지운 자리”(「몽유」)로 명명된다. 화자는 ‘꽃꽂이’를 하면서 “당신의 젖은 혀를 단숨에 자른다/ 피투성이 잘린 말이 조각조각 쌓인”(「꽃꽂이」)다고 적는다. 화자의 주관을 통과하면서 사물과 풍경들이 상기하게 만드는 것은 ‘나’와 끝내 함께 할 수 없었던 ‘당신’과의 추억이다. 그리고 화자는 철길 위에서 읊조린다. 마치 철길처럼, 지금 ‘나’와 당신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약속처럼 간격을 유지했다
같은 곳을 향하여 꿈꾸는
은빛 창문
적당히 바람이 불고
그리움도 덜컹거려
─ 「철길 위의 시간」 부분
관념을 경유하지 않는 동물들의 언어는 명쾌하다. ‘나’가 자신의 감정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당신은 내 곁에 없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누구와도 같지 않으므로, 당신은 ‘나’를 오래도록 아프게 한다. 연인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지만, 그 관계와 사랑의 의미를 이별 이후에 알게 된다. 언어는 유예된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기억은 “낯선 방문객”(「스토킹」)처럼 느닷없이 엄습하고, 은밀히 편집된다. 지리멸렬한 생에 활력을 불어넣다가도 짙은 무력감을 선사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그리운 사람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만 뚜렷해진다. “기억은 돌아갈 수 없는, 나를 불러 세”(「흘러내리는 기억」)우고, 현실의 결락감을 채우는 동력이 된다.
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갇혀 “색을 잃은 감정”(「이사」)들을 새롭게 채색한다. 그러나 고통과 아쉬움은 역설적으로 남은 생을 버티는 힘이 된다. “시간이 저문 뒤에야 보이는 자화상”(「꽃꽂이」)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무언의 약속조차 없는 무미건조한 삶일 것이다. ‘이사’는 말 그대로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지만, 시인은 이사 가는 풍경을 '기억', 혹은 '삶'의 특징과 겹쳐놓는다. 지나간 시절에는 “지나간 사랑”이 있고, “추웠던 계절”이 있지만, 그것들은 분리수거가 되지 않는다. “자꾸만 어긋나서 들썩이는 세간”처럼 ‘나’의 육신도 세월이 지날수록 낡아갈 것이다. 세월이 지난 기억이 흐릿해지면서 우리는 서서히 언어를 상실한다.
사람은 사랑에서 비롯된 슬픔을 통과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사랑하는 자아는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확대”(지그문트 바우만)된다. 세계의 곳곳이 비장소로 채워질수록 그런 감정들은 의미를 잃는다. 그러면서 '관계'의 의미도 재정립된다. 지금-여기의 세계에서는 ‘관계’ 대신 ‘네트워크’라는 말을 선호한다. ‘네트워크’란 곧 연결하는 동시에 연결을 끊을 수 있는 망(matrix)을 의미한다. 네트워크 속에서 연결하기와 연결 끊기는 동등하게 적법한 선택이며, 동일한 지위를 누린다. ‘연결’은 곧 ‘가상적 관계’다. 장기적인 헌신은 구차한 것으로 치부된다. 시인은 「서로이웃」에서 이 '연결'의 허망함을 담담한 어투로 적는다.
문 앞의 택배 상자엔 강아지 사료뿐
벨을 힘껏 눌러도 반응이 없더군요
일면식 한 번도 없는 달력이 넘어가요
어디선가 흘러나온 아나운서 일기예보
내일의 날씨는 구름 가끔, 흐리다네요
여전히 모르는 얼굴이 이웃 추가돼 있네요
─ 「서로이웃」 부문
층간 소음, 분리수거, 흡연, 애완견 등으로 인한 갈등 외에는 이웃들이 서로 관심을 끊은 풍경을 담은 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서로이웃'이라는 네트워크를 언급한다. 그래도 현실의 이웃은 복도에서, 분리수거장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 소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블로그(blog)의 ‘서로이웃’은 좀 다르다. 상대를 ‘이웃’으로 설정하면서도 서로의 실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눈팅’을 하다가 가볍고 무책임한 댓글을 작성한다. 그러다가 상대가 업로드한 내용이 불편하거나 지겨우면 클릭 한 번으로 관계를 끊는다. 자판을 치는 횟수를 줄이고 강렬한 느낌 전달을 위해 고안한 각종 줄임말과 신조어, 이모티콘 등이 대화를 대체한다. 무겁고 더디고 너저분하고 느려터진 ‘현실의 관계’와는 달리 가상적 관계는 훨씬 말쑥하고 깔끔하고 ‘사용자 친화적’이다.
슬픔을 예약했어요 / 다음 주 토요일로
울고 싶은 날이죠 / 취소는 안 된대요
실연의 주인공을 따라 / 한강변으로 갈게요
추가된 옵션으로 웃음을 구매하면 / 자동으로 당신도 업데이트될 거래요
또 다른 감정들을 모아 / 장바구니에 담아둬요
─ 「AI 쇼핑」 전문
가상적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들을 몰아낸다. 이 관계에서는 헌신이 무의미해진다. 원할 때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게 해주는 장치들은 우리의 불안을 덜어주지 못한다. 네트워크 안에서 사람들은 “모르는 당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검색창을 뒤적이며/ 길고 짧은 댓글에 내 몸을 끼워 맞춘”(「유투브 바로가기」)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단절과 ‘거리 두기’에 적응한 사람들은 더욱 쉽게 네트워크에 길들여진다. “마스크를 쓴 입들이 떠다”(「왕비 이야기」)는 풍경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코로나19 이후 아동들의 언어 습득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었다. 사람의 입모양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부터 스마트폰과 컴퓨터 자판에 익숙해진 그들은 서서히 “누구도 꺼내지 못한 거울”에 갇힌다.
내게서 격리된 내가 허물을 벗고 있다
손과 발이 묶이고 입마저 가려진 채
누구도 꺼내지 못한 거울 속에 갇힌다
침묵이 고인 식탁, 홀로 씹고 삼킨 말은
소화되지 못한 채 구석에 쌓인다
베란다 화분 속에는 불안이 자란다
─ 「거리 두기」 부분
시인은 “흐릿해진 문장을 손끝으로 짚어가며”(「블랙아웃」) 주관적인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그 기록은 지금의 세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비장소와 네트워크로 구성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시를 쓰는 이유는 자명하다. 삶의 상투성에 투항한다면 ‘나’가 당신을 기억하는 행위는 공허한 반복에 불과하다. 고유한 고독을 포기한다면, ‘나’는 비장소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네트워크의 세계에 안주한다면 ‘나’는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규정하게 되리라. 자멸적인 나르시시즘으로 가득한 언어를 편리하다고 느낀다면 ‘나’의 언어도 그와 닮아갈 것이다. 시인은 “뭉개진 나를 꺼내”어 “기억을 두드리”면서 쓴다. 시집에 나열된 짧고 간결한 시들은 혐오가 만연한 세계에서 시인이 작성한 ‘댓글’과도 같다.
귓속에 맴도는 말이 / 모래알로 흘러내린다.
뭉크의 절규를 저벅저벅 걸었다
허방에 헛디디고 늪지에 빠진 발
경계가 지워진 곳에 / 덩그러니 몸만 남아
하얗게 물든 밤과 캄캄한 낮의 시간
그 속에 갇혀서 제자리만 맴돌던,
뭉개진 나를 꺼내어 / 기억을 두드린다
─ 「화이트아웃」 전문
이정현 문학평론는 “발랄한 시들을 읽으면서 희미한 슬픔을 느끼게 되는 건 생의 필연적인 ‘어긋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의 기억은 당신을 붙들지 못하고, 이 세계의 질주를 멈추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자의 슬픔. 그것이 생의 비애”라고 평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이 순간 어둠속에서도 발랄한 영혼의 시를 쓴다. 시인은 그것만이 남루한 생을 위로할 방법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만 같다. 또한 시인이 몸과 영혼이 숨을 쉬며 시를 쓰는 이유일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94366003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10월 16일 | ||
쪽수 | 111쪽 | ||
크기 |
126 * 190
mm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작가기획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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