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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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시인 임유영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10월의, 10월에 의한, 10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다음 시집에선 보이지 않는 것들, 안 보이면서도 확실히 거기에 있는 것들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냄새, 기운, 공기, 느낌 같은 비물질적인 것들. 만약 이 책에서 술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서 나는 냄새다. 10월의 냄새다.
─본문 중에서
시와 시 아닌 것 사이에 깨어야 할 벽도 차려야 할 법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그이니, ‘시의적절’의 취지에 애초 맞춤할 수밖에 없는 시인일 것이다. 산문인가 하고 읽다보면 이것이 시이고, 시로구나 끄덕이다보면 그것이 에세이가 되는 분방함이 있다. 하긴 ‘술을 숨긴 적’은 있어도 그 숨김을 고백하는 단에서야 이미 더없이 솔직한 쓰기다. 10월 추수 지나 남은 곡식은 술을 담그는 데 쓴다 하니, 시인의 신명이 그리고 결행이 어디서 오는지 짐작하기에도 적절한 달 10월이었을 테다.
시와 글과 거기에 머리 맞댄 예술들, 시인의 넓고도 유연한 애정이 어디서 왔을까, 그 일상과 단상들 통해 엿보게도 된다. 특히나 시인의 삶 또한 결국 사람의 속이고 사람의 사이구나 한다. 책 속에서 친구들 이름 하나하나 부르며 일상을 매김할 때, 그것이 꼭 달력 속 날들 하루하루 꼽는 일 같다. 그것이 임유영이 말하는 매일의 사랑이고 매일의 쓰기일 것이다. 어김없이 취하고, 숨김없이 쓰고, 남김없이 나누는 사랑이 여기 있다. 얼큰하고도 덜큰한 10월의 냄새가 있다.
내 마당이 보이는 책상에 앉아서 쓰겠지. 그땐 정말 앞이 깜깜했고, 참 힘들게 살았었다고, 젊은 나를 가엾게 여기고. 잔인한 운명과 고난을 증언하고. 하지만 빈 주머니에 주먹만 두 개 넣고 다니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그리 다르지도 않다고.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노라고. 나이가 들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여전히 많다고 겸손을 담아 진심으로 쓰겠지. 가벼운 수치심 같은 건 잘 이겨내겠지. 아름다운 마당에 속수무책으로 자라는 식물의 색과 모양이 계절마다 바뀌는 걸 관찰하면서, 잡은 벌레를 놓아주겠지. 그리고 말할 거야. 내가 예전부터 이런 걸 참 좋아했다고.
─본문 중에서
이 책의 총서 (16)
작가정보
목차
- 작가의 말 마시기 좋은 계절 7
10월 1일 시 예언 13
10월 2일 에세이 파리의 공기 50cc 17
10월 3일 에세이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23
10월 4일 시 그 빛 31
10월 5일 에세이 빌고 싶은 마음 35
10월 6일 낭독용 시 성물 45
10월 7일 에세이 바텐더 49
10월 8일 연작시 우울한 여자 57
10월 9일 연작시 슬픈 여자 61
10월 10일 연작시 행복한 여자 65
10월 11일 에세이 과거로부터 69
10월 12일 시 악령시장 77
10월 13일 시 까마귀는 발이 세 개 81
10월 14일 관람 후기 휴먼스케일 85
10월 15일 시 사향 93
10월 16일 메모 익명의 중독자들 97
10월 17일 에세이 만신전 103
10월 18일 시 전라감영 109
10월 19일 시 실제로 일어나는 일 113
10월 20일 에세이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랴? 117
10월 21일 시 연해주 125
10월 22일 에세이 섬광 129
10월 23일 시 한국의 재배식물 135
10월 24일 에세이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137
10월 25일 시 아스파라거스가 있는 정물 145
10월 26일 시 가드닝 149
10월 27일 에세이 쉬운 소나타 153
10월 28일 시 행성 159
10월 29일 에세이 물 한 사발 163
10월 30일 시 회고와 전망 169
10월 31일 에세이 작고 성가시고 끈질기게 173
책 속으로
몰라서 못 본 미욱한 빛이 내 안에도 참 많았는데. 지금은 붙잡고 싶어도 다 떠나고 없다. 언제 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커먼 어둠 속에 손을 욱여넣으면 축축하고 물렁거리는 것만 잡힐 뿐이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평생 살아야 한다.
정말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새까맣게 몰랐다면 그것들이 있다가 없이 된 건 어찌 알았을까.
저기 봐라. 먼 하늘에 내 얼굴 하나 날아간다.
_10월 1일 「예언」, 15~16쪽
그는 아주 사소하고 사악한 거짓말로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를 집요하고 고통스럽게 괴롭힐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니 사실상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가 없다.
그의 본성이 이토록 악하다는 사실은 오직 신만이 이해하시리라. 이 악취 나는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리라.
“기쁨.”
그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 사랑한다.
미칠 듯 사랑한다.
_10월 4일 「그 빛」, 33~34쪽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오래오래 지운다. 첫 시집에 실린 시 「미래로부터」는 2020년 봄에 초고를 썼다. 그때도 나는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쓰고 싶었다. 내내 혼자 말하고 혼자 듣던, 저주처럼 염불처럼 줄줄 외는 고백 같은 건 다시 하기 싫다. 그런데 쓰다보면 가족들이 자꾸 시에 나온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자꾸만 튀어나온다. 죽은 사람마저 곧잘 되살아나 나를 망치려고 온다. 고요하고 한적한 성의 풍경. 지우려고 애쓰면 분명 떠오르는 것들. 매일 책상 앞에서 다짐한다. 시에서 가족을 빼자. 집을 빼자. 몸을 빼자. 고통과 슬픔을 빼자. 아직도 피 흘리고 있는 사건들을 빼고 쓰자.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빼자. 유년기를 빼자. 소년기도 빼자. 구체적인 날짜, 지명과, 헛것들도 빼자. 귀신, 유령, 천사, 신, 무당, 모두 빼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빼고, 그래, 계절과 날씨도 빼자. 전부 다 빼고 쓰자. 물론 잘 되지 않는다. 보다시피. 항상 내가 쓴 글이 읽자마자 사라지는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과거의 모든 사실과 기억도 꿈결처럼 바람처럼 가벼이 흩어져 사라지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전 지어진 성벽처럼 언제나 있다.
_10월 11일 「과거로부터」, 74~75쪽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무언가에 중독되었거나 중독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한쪽밖에 고를 수 없다. 한번 중독되면 멈출 수 없으며 멈출 수 있다면 중독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 일찍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희망이구나, 희망. 중독은 희망이구나.
_10월 12일 「익명의 중독자들」, 100쪽
한동안 여성 시인들의 첫 시집을 찾아 읽었다. 그들의 최근 대표작 대신, 꼭 처음, 첫 시집이어야만 했다. 그 책들을 읽으면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고, 쓸 수 없었고, 이따금 무엇이든지 쓰고 싶어졌다. 중간이 없었다. 그들처럼 나를 바닥까지 가라앉히고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지만. 나는 이제야, 뻔뻔하게도, 그러나 어설픈 포즈조차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아직 깜깜하지만, 그래도 가고 싶은 곳이 있다.
_10월 29일 「물 한 사발」, 167쪽
출판사 서평
◎ ‘시의적절’ 시리즈를 소개합니다.
시詩의 적절함으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제철 음식 대신 제철 책 한 권
난다에서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열두 권의 책. 매일 한 편, 매달 한 권, 1년 365가지의 이야기. 이름하여 ‘시의적절’입니다. 시인에게 여름은 어떤 뜨거움이고 겨울은 어떤 기꺼움일까요. 시인은 1월 1일을 어찌 다루고 시의 12월 31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하루도 빠짐없이, 맞춤하여 틀림없이, 매일매일을 시로 써가는 시인들의 일상을 엿봅니다.
시인들에게 저마다 꼭이고 딱인 ‘달’을 하나씩 맡아 자유로이 시 안팎을 놀아달라 부탁했습니다. 하루에 한 편의 글, 그러해서 달마다 서른 편이거나 서른한 편의 글이 쓰였습니다. (달력이 그러해서, 딱 한 달 스물아홉 편의 글 있기는 합니다.) 무엇보다 물론, 새로 쓴 시를 책의 기둥 삼았습니다. 더불어 시가 된 생각, 시로 만난 하루, 시를 향한 연서와 시와의 악전고투로 곁을 둘렀습니다. 요컨대 시집이면서 산문집이기도 합니다. 아무려나 분명한 것 하나, 시인에게 시 없는 하루는 없더라는 거지요.
한 편 한 편 당연 길지 않은 분량이니 1일부터 31일까지, 하루에 한 편씩 가벼이 읽으면 딱이겠다 합니다. 열두 달 따라 읽으면 매일의 시가 책장 가득하겠습니다. 한 해가 시로 빼곡하겠습니다. 일력을 뜯듯 다이어리를 넘기듯 하루씩 읽어 흐르다보면 우리의 시계가 우리의 사계(四季)가 되어 있을 테지요. 그러니 언제 읽어도 좋은 책, 따라 읽으면 더 좋을 책!
제철 음식만 있나, 제철 책도 있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기획입니다. 그 이름들 보노라면 달과 시인의 궁합 참으로 적절하다, 때(時)와 시(詩)의 만남 참말로 적절하다, 고개 끄덕이시라 믿습니다. 1월 1일의 일기가, 5월 5일의 시가, 12월 25일의 메모가 아침이면 문 두드리고 밤이면 머리맡 지킬 예정입니다. 그리 보면 이 글들 다 한 통의 편지 아니려나 합니다. 매일매일 시가 보낸 편지 한 통, 내용은 분명 사랑일 테지요.
[ 2024 시의적절 라인업 ]
1월 김민정 / 2월 전욱진 / 3월 신이인 / 4월 양안다 / 5월 오은 / 6월 서효인
7월 황인찬 / 8월 한정원 / 9월 유희경 / 10월 임유영 / 11월 이원 / 12월 김복희
* 2024년 시의적절은 사진작가 김수강과 함께합니다. 여전히 아날로그, 그중에서도 19세기 인화 기법 ‘검 프린트’를 이용해 사진을 그려내는 그의 작업은 여러 차례, 오래도록, 몸으로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시간으로 그리는 사진과 시간으로 쓴 시의 적절한 만남은 2024년 열두 달 계속됩니다.
기본정보
ISBN | 9791194171133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10월 01일 | ||
쪽수 | 180쪽 | ||
크기 |
122 * 185
* 17
mm
/ 30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의적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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