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도서+사은품 또는 도서+사은품+교보Only(교보굿즈)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20,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Box 기준 : 도서 10권
로그아웃 : '서울시 종로구 종로1' 주소 기준
이달의 꽃과 함께 책을 받아보세요!
1권 구매 시 결제 단계에서 적용 가능합니다.
해외주문/바로드림/제휴사주문/업체배송건의 경우 1+1 증정상품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패키지
북카드
키워드 Pick
키워드 Pick 안내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다른 연관 도서를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로, 클릭 시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최근 많이 찾는 순으로 정렬됩니다.

수상내역/미디어추천
왜곡과 망각을 넘어 ‘빵과 장미’를 찾아가는 여정
작가정보
1953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이며 임시직 타이피스트, 공장 노동자,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했다. 특히 ‘빵과 장미’ 파업의 주무대인 로렌스시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근무한 바 있다. 《스미소니언 매거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등에 기고하며 『사코와 반제티』, 『자유의 여름』, 『아이들과 장난감을 바꾸어낸 남자』 등을 지었으며 이 책들은 뉴욕 공립 도서관이 꼽은 25권의 책, 워싱턴 포스트 올해의 책,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2017년 이 역사적인 로렌스 파업의 역사, 현재, 미래를 위한 유산에 공헌한 개인과 기관을 기리는 ‘빵과 장미 명예의 전당 상’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외교학과(대학원)를 졸업하고 캐나다 요크 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어나더 경제사』, 『위기 이후의 정치철학』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거대한 전환』,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 『도넛 경제학』 등이 있다. 유튜브 채널 ‘홍기빈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목차
- 추천사: 왜곡과 망각을 넘어 ‘빵과 장미’를 찾아서
머리말: 영웅적인 투쟁, 새로운 공동체
1부 아메리칸드림, 희망과 악몽
1장 빵 네 덩이 파업
2장 이민자들의 도시
3장 메리맥강 전투
4장 성조기와 총검
5장 다이너마이트 음모
6장 통제 불능에 빠지다
2부 역사의 법정에서
7장 두 쪽이 난 나라, 미국
8장 아이들의 탈출
9장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10장 1912년, 의회 청문회
11장 미국식 양탄자
12장 “자유의 깃발이 여기에 있다”
맺음말: 헌신자와 순교자
옮긴이 해제: 영원한 현재의 이야기
주│참고문헌│찾아보기
추천사
-
왓슨은 1912년 로렌스 파업을 극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다시 살려냈다. 지리적 환경과 상세한 개인사를 예리하게 주시하면서 뉴잉글랜드 산업 지역의 윤곽을 포착해냈으며, 다양한 유럽 이민자 집단들이 살아가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이 싸움의 주요한 등장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념적 신조들과 개인의 상황들까지 그려냈다. …… 왓슨은 능숙한 이야기꾼으로서, 현대 미국의 형성에 지적 자양분이 되었던 급진파들의 이상, 보수주의자들의 악몽, 이민자들의 열망에 대해 감동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왓슨은 1912년의 추웠던 겨울에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벌어졌던 극적인 섬유 공장 파업을 풍부한 자료에 기반하여 공평하고도 빠른 필치로 그려냈으니, 이를 보면 지금은 반쯤 잊혀진 미국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 이 이야기 자체에서도 눈을 떼기 힘들지만, 왓슨은 이를 다시 느린 속도로 미국의 모습을 바꾸어버렸던 더 큰 개혁의 물결 속에서 조망하였다.
-
색다르면서도 설득력이 강한 책으로서, 일반적인 역사 보고서를 훨씬 뛰어넘는다.
-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하지만 학문적으로 균형을 갖춘 서사가 여기 있다. 왓슨은 단순한 방식으로 욕설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19세기 중엽의 산업 지대 형성 과정, 파업 이전 20년간 벌어졌던 이민자의 유입, 산업의 경제학 등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또한 공장 소유주들을 단순히 악마화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이 파업의 물결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가운데 스스로 연설하고, 행진하고, 시련을 견뎌내는 모습을 지혜롭게 그려내고 있다. 로렌스 파업을 사실적이면서도 현장감 있게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노동 문제 그리고 미국의 진보주의 시대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마땅히 읽을 필요가 있다.
-
이제는 너무나 많이 잊혀진 사건들을 멋지게 재구성한 책.
책 속으로
이 아이디어는 유럽에서 맨해튼을 거쳐 들어온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연맹 회원들은 파업에 돌입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굶주림과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지지자들의 가정에 맡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동자들은 아이들을 먹이고 돌봐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 파업에 집중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2월 7일부터 사회주의 일간지인 《뉴욕 콜》을 통해서 뜻있는 가정들을 모으는 광고를 내보냈다.
“아이들을 맡아주세요”
로렌스시에서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의 아이들이 배가 고픕니다. 엄마 아빠들은 굶주림과 싸우고 있으며, 굶주림 때문에 파업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기꺼이 모든 고통을 참아내지만, 어린것들이 아파하는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또 밥을 달라고 보채는 소리도 차마 듣지 못합니다. 노동자 여러분, 그리고 파업에 연대하는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이 투쟁이 끝날 때까지 노동자들의 아이를 맡아주실 분들은 우리 신문사로 이름과 주소를 보내주세요. 지금 당장 연락주세요.
《뉴욕 콜》로 수많은 편지와 전화가 쏟아졌으며, 탈출할 아이들 700명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모든 신청자는 면접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가정 방문까지 거친 후에 선별되었다. 《뉴욕 콜》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당신들의 아이들을 보내주세요!” 《일 프롤레타리오》의 헤드라인 문구는 더욱 따뜻했다. “그 아이들을 우리 아이들로 삼겠습니다.”
저녁 8시가 되기 직전, 붉은 깃발 수십 개가 군중들 머리 위로 펄럭였고 헤드라이트로 플랫폼을 비추며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치 일제히 신호라도 받은 듯이 〈라 마르세예즈〉의 허밍이 시작되어 기차가 완전히 정차할 때까지 계속 커져갔다. 그다음에 갑자기 환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각종 모자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잠시 후 곤히 잠든 조그만 아이들을 업은 남자들이 객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나이가 좀 있는 아이들도 나왔고, 두 줄로 대열을 지었다. 아이들은 콘크리트 바닥을 쿵쿵 밟아 행진하면서 연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 우리는 누구? 우리는 누구?”
“맞아요 우리는! 맞아요 우리는! 맞아요 우리는!”
“파업 노동자! 파업 노동자! 파업 노동자!”
출판사 서평
왜곡과 망각을 넘어 ‘빵과 장미를 찾아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의미하는 빵과 풍요로운 문화를 즐기는 삶을 의미하는 장미. 노동자의 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의 염원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압축하여 호소력 있게 빚어낸 말이 또 있을까? 사실 ‘빵과 장미’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1911년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은 〈빵과 장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는 행진하고 행진한다 / 숨져간 무수한 여성들이 울부짖으며 함께 간다 / 우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그녀들이 부르던 빵의 노래를 부른다 / 허드렛일에 지친 그녀들의 정신은 예술도 사랑도 아름다움도 거의 알지 못했다 / 맞다,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우리는 장미도 얻기 위해 싸운다
이 오펜하임의 시와 여기에 곡을 붙인 주디 콜린스의 노래, 그리고 지치지 않고 노동계급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하는 켄 로치의 영화에서 우리는 ‘빵과 장미’를 만난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는 빵과 장미라는 이름의 사회 프로그램이 수백 개나 되고 이 사건의 본고장인 로렌스에서는 배고픈 사람에게 따뜻한 밥을 주는 음식 창고 ‘빵과 장미’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로렌스 파업’ 혹은 이 파업에서 여성 노동자가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라고 쓰인 피켓을 들었다 하여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 불리는 이 투쟁이 어떻게 일어났고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풍부한 영감을 주는 투쟁임에도 이 빵과 장미의 실체는 철저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공식 역사’는 전설적인 노동운동의 지도자와 굶주린 노동자들이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어낸 이 사건을 철저히 묻어버렸다. 미국의 주요 역사 교과서 열두 권 중에 무려 열 권이 이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두 세대가 흐르는 동안 파업 진압에 나섰던 로렌스 시 정부, 보수적인 교회, 공장주들, 권력 기관은 이 파업이 세계산업노동자연합(IWW)이라는 외부 선동 세력이 일으킨 난장판이라고 선전했으며 이를 공식 역사로 만들어버렸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세계대전 전야의 ‘빨갱이 사냥’과 호전적인 분위기에서 당시 파업에 가담했던 노동자들은 짓눌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세상을 떠났고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다시 기록할 책임은 후손들과 역사가들에게 남겨졌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멋진 티셔츠처럼, 유행으로 소비되며 이미지와 실체가 유리된 빵과 장미라는 기호 뒤에 숨겨진 투쟁의 전체상을 복원하기 위해 왓슨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꼼꼼히 수집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두텁게 기술해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1912년의 로렌스로 인도한다. 학술서가 아닌데도 각주와 참고문헌이 2000여 개에 이른다.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파업 중 하나는 1912년 1월 12일 한겨울에 일어났다.
24센트, 빵 세 덩이 파업
1912년 매사추세츠 주 정부는 노동시간을 주 56시간에서 54시간으로 줄였다. 공장주들은 줄어든 노동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기계의 가동 속도를 높였고 임금까지 깎아버렸다. 깎인 임금은 24센트, 빵 세 덩이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공장 여기저기에서 “임금이 적다, 임금이 줄었다!”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맨 먼저 폴란드 여성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모두 함께 “나가자!”고 외치기 시작했으며 이에 동조한 노동자들이 우르르 길거리로 쏟아져나갔다. 목격자의 회상에 따르면 이 파업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전기 불꽃”처럼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1만 명으로 불어난 파업 대오는 미국인이 아니었다. 다수가 영어를 모르는 전 세계 51개국에서 온 이민자들로 각자 모국어로 소리 높여 외쳤다. 이탈리아어로 시오페로, 프랑스어와 포르투갈어로 그레베, 폴란드어로 스트라이쿠야, 리투아니아어로 스트레이코킴, 이디시어로 슈트라이켄, 독일어로 스트라이크, 요컨대 “파업!”이었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건설된 도시 로렌스
애초에 로렌스는 영국 섬유 도시의 참상을 목도한 이들이 이와는 전혀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며 건설한 도시였다. 도심 건물은 벽돌과 석재로 짓고 3층을 넘지 않아야 했으며 한 필지에 한 주택, 한 거주지에 한 가족만 살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이상주의는 20세기 자본의 탐욕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졌다. 메리맥강의 수력을 이용한, 세계에서 가장 큰 섬유 공장들이 잇달아 들어섰고 공장주들은 모직물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를 전 세계에서 끌어들였다. 로렌스는 곧 거대한 빈민가로 변해버렸다. 도시 한가운데 빈민촌이 생겨났으며 쓰레기와 생활하수가 골목을 채우고 운하로 밀려들었다. 아이들은 빈민가의 미로 같은 골목에서 놀고 싸우고 각자의 언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1912년의 로렌스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구 8만 6000명이 18제곱킬로미터 면적에 쑤셔 넣어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불꽃 하나만 튀어도 활활 타오를 가연성 도시였다.
희망이 악몽으로
이 섬유 도시의 지배자는 아메리칸 모직의 소유주 윌리엄 우드였다. 포르투갈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우드는 도금鍍金 시대에 평범한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뎠으나 불과 몇 십 년 만에, 미국을 대표하던 자본가인 록펠러와 카네기보다 부유한 거물이 되었다. 그는 로렌스시에 주민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불렀던 대공장을 지었으며 여기에 1470대의 동력 배틀을 놓고 노동자들을 경주마처럼 몰아댔다. 결과는 자명했다. 기계에 몸이 부서진 사람, 베틀이나 물레 사고로 불구가 된 사람이 부지기수였고 습하고 탁한 공기 속을 떠도는 섬유질을 흡입해 10년 안에 3분의 1일 죽어나갔다. 퍼시픽 공장의 경우 사흘에 이틀 꼴로 사고가 났다. 용케 사고와 질병을 피할 수 있었다 해도 몸이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로렌스시의 의사와 성직자의 평균수명은 예순다섯 살이었고 공장 보스들은 쉰여덟 살이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경우 고작 서른아홉 살이었다. 파업이 벌어지기 한 해 전 로렌스의 사망자 1500명 중 거의 절반이 여섯 살도 안 된 아동이었고 500명 이상은 첫돌도 맞지 못한 아기들이었다. 로렌스는 미국에서 영아사망률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노동자들은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에 보통 여섯 명이나 여덟 명이 살았고 침대 하나에 네 명이 자기도 했다. 이런 막장 같은 환경에서 불붙은 파업은 전쟁처럼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합(IWW)이 파업을 지도하다
당시 미국노동총연맹(AFL)은 조합원 200만 명을 자랑하는 거대 조직이었다. 이들은 백인 숙련 노동자들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며 여성과 아동, 이민 노동자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섬유 도시 로렌스는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여성과 아동이었으며 대다수가 기계 부품처럼 대체 가능한, ‘하잘것없는’ 존재들이었다.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던 이들은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던 IWW에 지원을 청했다. IWW는 인종, 성별, 국적, 기술을 가리지 않고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밑바닥 진창까지 내려갈 각오가 되어 있는 이들이었다.
IWW의 조직가 조지프 에터가 로렌스에 도착했다. 영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등 5개 국어에 능했고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민자, 부랑자 같은 가난한 무리들을 헌신적인 파업 노동자로 거듭나게 한 에터는 민족별, 직종별로 갈가리 찢겨져 대립하던 로렌스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무엇보다 폭력 사태를 경계했다. “파업 투쟁에서 흐르는 피는 항상 노동자들의 피”이며 총을 든 군인들에게 빌미를 주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에터는 자신의 연설을 이탈리아어로 되풀이했으며 다른 이들이 나와서 프랑스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등으로 통역을 해주었다. 에터는 열네 개 민족 단위에서 대표자를 뽑아 56인으로 구성된 파업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여기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군대와 경찰 그리고 노동자의 전투
파업 노동자는 최대 2만 8000명에 이르렀으며 시장은 민병대를 소집했다. 미국에서 노사관계가 폭력으로 얼룩질 때마다 민병대는 여러 차례 파업과 폭동 진압에 투입되었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로렌스에서도 수십 수백 명이 죽어나갈 터였다. 에터는 1주일 내내 도시를 뛰어다니며 노동자와 민병대의 충돌을 막았고 쉼 없이 연설하며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노동자들에게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릴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프롤레타리아가 일으킨 반란의 불꽃은 세상의 어떤 소방 호스로도 끌 수가 없습니다.”
파업의 불길이 잦아들긴커녕 더욱 활활 타오르자 스캔런 시장은 민병대를 추가 동원하고 모종의 공작을 수행할 요원을 채용했다. 며칠 후 로렌스시 여기저기에서 다이너마이트가 발견되었다. 무려 스물여덟 개로 우드의 집과 공장, 병기창, 경찰서를 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놀랍게도 경찰들은 다이너마이트가 숨겨진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결국 찾아냈다. 다이너마이트는 에터가 매일 신문을 받아 가는 장소 바로 옆의 구두닦이 가게에서도 발견되었다. 분명 누군가 ‘심어놓은’ 것이었다. 노동자와 공장주, 시 정부의 적대감은 높아졌고 도시의 공기는 긴장으로 더욱더 팽팽해졌다.
파업이 길어지고 노동자와 아이들이 굶주리자 프랑스계 벨기에인 협동조합이 수프 주방을 열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아침과 오후 하루 두 번 수프를 먹었고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도시 밖에서는 파업 기금을 보내고 달걀과 가축 같은 현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기운을 차린 노동자들은 매일 모여 행진하고 토론하고 노래를 부르며 피켓라인을 지켰다. 여러 사안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회복력과 재생력이 생기면서 파업에 더욱더 힘이 실렸다.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으므로 노동자들은 자기 자리에서 더욱더 발판을 다졌고 파업 대오에는 정서적 감정적 열기가 더해졌다.
사망자가 발생하다
협상의 전망이 보이지 않자 도시는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노동자들은 일거리도 먹을거리도 없이 3주를 버텼으며 “미국에 오면 배부르게 먹고 잘살 수 있다”며 그들을 꾀어들인, 아메리칸 모직 상호가 떡하니 찍힌 광고문구가 죄다 거짓이었음을 깨달았고 윌리엄 우드를 더더욱 증오했다. 또한 동지의 등에 칼을 꽂는 파업파괴자들을 미워했고 경찰에 맞서 싸웠으며 경찰은 곤봉을 휘둘러 노동자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런 폭력 사태의 와중에 한 여인이 총을 맞았다. 이름이 안나 로피조로 알려진 이탈리아 여성이었다. 경찰은 부인했지만 목격자들은 로피조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업을 진압하려던 로렌스 당국은 결국 결정적인 한 수를 놓게 된다. 파업을 지도하는 에터를 체포한 것이다. 경찰은 에터가 로피조의 사망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에터는 현장에서 1500미터나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IWW는 ‘빅 빌’ 헤이우드와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을 비롯한 조직가들을 추가 파견했고 이제 미국 자본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헤이우드가 파업을 지휘하게 된다.
아이들의 ‘출애급’과 경찰의 폭력
수프 주방이 가동되고 도시 밖에서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가져오고 미국 전역에서 크고 작은 돈을 보내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유럽에서는 실행되었지만 미국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헤이우드에게 제안한다. 아이들을 굶주림과 위험을 피해 지지자들의 가정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엄청난 위험이 수반된 계획이었지만 파업위원회는 이 계획을 승인했고 사회주의계 일간지인 《뉴욕 콜》에 뜻있는 가정들을 모으는 광고를 내보냈다.이 신문사로 수많은 전화와 편지가 쏟아졌으며 신청자들은 모두 면접을 보고 가정 방문까지 거친 후에 신중히 선별되었다. 2월 10일 아이들 100여 명이 로렌스를 떠나 뉴욕을 향했다.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는 5000명의 군중이 모여 붉은 깃발을 흔들고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아이들을 맞았으며 호텔 조리 노동자들이 만찬을 준비했다. 당시 “파업 투쟁의 영혼”이라 불렸던 플린은 이렇게 회상했다. “이 아이들의 시위는 내가 본 가장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나는 지난 토요일에 본 것처럼 인간의 형제애가 솟아나는 광경은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이들의 ‘출애급’은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었는지라 이것이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가의 힘겨루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미국인이 깨닫게 되었다. 철강, 석유, 섬유 트러스트를 구성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며 상원의원이든 하원의원이든 마음먹은 대로 ‘제조’해 정부를 움직이던 대자본가들 반대편에는 매일 빵 한 조각과 당밀로 끼니를 때우며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해야 하는 장삼이사들이 있으며 이렇게 나라가 두 쪽 나 있는 현실을 절감했던 것이다.
아이들조차 굶게 만드는 매정하고 야만적인 도시라는 오명을 자초한 로렌스시 당국과 경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 탈출을 막기로 했다. 2월 23일 경찰들이 플랫폼과 대합실 사이에서 통행을 가로막고 도발하면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목격자들은 여자들에게 매타작을 하고 아이들을 헝겊 인형처럼 집어던지고 임신한 여인의 유방과 배를 구타한 끔찍한 행위를 상세히 묘사했다. 모든 미국인은 로렌스 기차역에서 경찰이 한 짓에 질려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언론뿐만 아니라 공직을 맡은 이들도 좌우 가리지 않고 책임 추궁에 가세했다. 하지만 수많은 목격자가 있고 숱한 언론의 보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렌스시, 성직자, 공장주들은 경찰의 폭력 행위를 철저히 부인했다. 이들은 향후 몇 십 년간 도시의 역사와 이미지를 통제하기 위해 일관된 입장을 고수했으며 이들이 만들어낸 ‘판본’만이 유일한 역사 기록이 된다.
“여성들의 지지 없이 승리한 파업은 없다”
파업은 남성이 주도했지만 그렇다고 여성 노동자들이 그저 배경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IWW와 플린이 전폭 지지하는 가운데 로렌스 여성들도 전투 준비를 했으며 남자들과 똑같이 분노하고 단결했다. 공동주택 지구 전역에서 여자들은 건물 복도나 길모퉁이에서 만나 전략을 토의했으며 얼마 안 되는 먹을거리를 함께 나누고 피켓라인에서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팔짱을 끼었다. 경찰에 맞서 싸우고 자랑스럽게 끌려갔으며 적대적인 판사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파업의 대의를 고수했다. 로렌스시 검사는 경찰 한 명이 남성 노동자 열 명을 상대할 수 있지만 여성 노동자 한 명을 상대하는 데는 경찰 열 명이 필요하다고 한탄했다. 파업 기간 중에 체포된 여성 노동자는 모두 130명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마더 존스가 말한 대로 “여성들의 지지 없이 승리한 파업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파업 승리!
기차역에서 일어난 경찰의 폭력 행위에 태프트 대통령이 진상 조사를 지시하고 로렌스 사태를 두고 의회가 청문회를 열기로 하자 자신들의 사회적 위신과 평판이 추락한 사태에 공장주들은 겁을 먹었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교착상태가 거의 두 달 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섬유업계의 제왕 윌리엄 우드는 전 미국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처리하지 못한 주문이 산처럼 쌓여갔고(7만 1500건에서 17만 5000건으로) 연방 정부 차원의 조사가 임박하자 결국 우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로렌스시와 같은 파업 사태가 벌어질까 두려워하던 공장주들이 일제히 알아서 임금을 올렸다. 로렌스 파업 노동자들 덕에 임금 인상의 혜택을 본 노동자들이 30만 명에 달했으며 그해 섬유 노동자들의 주머니에 1200만 달러가 더 들어갔다. 전혀 조직되지 않았던, 서로 말도 통하지 않던 노동자들이 IWW의 지도를 받아, 미국 전역의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무력과 자본, 언론에 맞서 승리했으니 이는 분명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파업 투쟁의 경험이 많은 IWW는 4주에서 6주 안에 승리하지 못하는 파업은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지만 로렌스의 노동자들은 두 달이 넘는 파업 투쟁에서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이 짧은 승리는 곧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된다. 이 도시의 ‘명예를 지키려는’ 관변단체 로렌스 시민연합은 잇달아 팸플릿을 발행해 노동자들을 공격했으며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이 언론 매체들이 이를 거들었다. 다이너마이트 심어놓기 공작은 짧게 다루고 지나갔으며 매일 이어간 파업 노동자들의 민주적 회합이나 질서정연하게 운영되어 수천 명을 먹인 수프 주방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심지어 기차역에서 경찰이 여성과 아이들을 곤봉으로 구타한 일은 없었다고 대놓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로렌스 파업이 본래 찢어지게 가난했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투쟁이었다는 사실이 완전히 가려져버린다. 이들은 ‘외부 세력’에 모든 책임을 돌렸으며 1912년 파업에 참여한 이들은 미쳐 날뛰는 폭도로 몰아갔다.
지금 우리의 ‘빵과 장미’에 대해
1950년대 들어 로렌스에 있던 세계 최대의 섬유 공장들은 시대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주민들도 바뀌었다. 최근에 로렌스로 이민을 온 이들은 이 도시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오래 살아온 주민들은 1912년 파업을 입에 올리려 들지 않았다. 1962년에는 로렌스 파업 50주년을 맞아 신문들이 기사를 내보냈지만 여전히 IWW와 파업 노동자들을 비난하고 매도했으며 학교에서는 당시 어떻게 외부 세력이 도시를 장악하고 혼란에 빠뜨렸는지를 설파하는 공식 판본을 달달 외웠다. 증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며 이 멸균 처리된 공식 판본이 영원히 파업에 대한 공식 담론이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78년 새로 선출된 시장이 그해 파업에 가담했던 노동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고, 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이 파업의 참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1980년부터는 로렌스 파업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고 이는 점차 ‘빵과 장미 축제’로 불리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증언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축제는 점차 정치적 성격을 잃고 마을 잔치 분위기를 띠었다. 더불어 빵이나 장미는 물론이고 이 도시의 역사에서 1912년 파업이 얼마나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언급하는 이야기도 듣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이 “빵과 장미”라는 별명은 계속 붙어 다녔고, 주민들은 그토록 고통스럽고 쓰라린 파업에 어쩌면 이렇게 경쾌하고 밝은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많은 이들이 편지와 전화로 신문과 잡지 편집자에게 항의했지만 이 이름은 그대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 아름답고 우아한 ‘빵과 장미’라는 이름이 로렌스 섬유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말해주는 바는 거의 없다. 이들이 공장을 박차고 나와 하나로 뭉쳐 행진하고, 노래하고, 서로를 먹이고 돌보아 승리를 얻은 지 정확히 112년이 지났다. 이들의 투쟁을 시적으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 켄 로치가 영화 〈빵과 장미〉에서 주인공의 입을 통해 외치듯이 “빵도 장미도 결코 거저 얻을 수는 없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고난을 겪고 죽어갔음에도 지금 우리 역시 빵에, 장미에 여전히 목이 마르다. 1912년 로렌스 노동자들의 투쟁에 ‘빵과 장미 파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일하는 우리’가 모든 장벽을 넘어 연대하고 간단없이 투쟁함으로써 비로소 빵과 장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98796615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8월 23일 | ||
쪽수 | 544쪽 | ||
크기 |
149 * 220
* 36
mm
/ 1035 g
|
||
총권수 | 1권 | ||
원서(번역서)명/저자명 | Bread and Roses/Watson, Bruce |
Klover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200원 적립
문장수집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주문취소/반품/절판/품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판매가 5,000원 미만 상품의 경우 리워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2024년 9월 30일부터 적용)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