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들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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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진정한 의학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관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시(詩)와 깊이 닿아 있다. 따라서 시와 의학의 융합은 직관, 상상력 그리고 창의적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풍부하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의학과 시가 과학과 예술로 구분되어 각각의 영토에 제각기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의학과 시의 사이에 놓여있는 고급스러운 구별을 헐어내고 사귀어 서로 오가는 통섭(通涉)의 능력을 갖춘 의사시인의 능동적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의 총서 (298)
작가정보
저자(글) 한국의사시인회
*박세영
2019년 『시와문화』 등단
시집 『바람이 흐른다』 『날개 달린 청진기』
현재 박내과의원 원장
*한현수
시집 『내 마음의 숲』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2008)
2012년 『발견』 등단
시집 『오래된 말』 『기다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 『눈물만큼의 이름』 『사과꽃이 온다』
분당 야베스가정의학과 원장
*홍지헌
2011년 『문학청춘』 등단
시집 『나는 없네』 『자작나무는 하염없이 하얗게』
현재 서울 강서구 연세이비인후과 원장
*정의홍
강원도 강릉 출생. 서울의대 졸업 후 안과의사가 됨
2011년 『시와시학』 등단. 한국시인협회회원
시집 『천국 아파트』 『북한산 바위』 『꽃씨를 심으며』 등
2014년 귀향하여 안과 개원의로 일하고 있음.
*김세영
2007년 「미네르바」 등단
시전문지 『포에트리 슬램』 편집인
시집 『하늘거미집』 외 4권, 디카시집 『눈과 심장』
산문집 『줌, 인 앤 아웃』
제9회 미네르바 문학상, 제14회 한국문협 작가상
*김기준
2016년 『월간시』 등단
시집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사물에 대한 예의』
수중 시집 및 수필집 『그 바닷속 고래상어는 어디로 갔을까』
수필집 『나를 깨워줘』
*박권수
2010년 『시현실』 등단
시집 『엉겅퀴마을』(2016), 『적당하다는 말 그만큼의 거리』(2020)
현재 나라정신과 원장
*손경선
2016년 『시와정신』 등단
2015년 제14회 웅진문학상 수상
시집 『외마디 경전』 『해거름의 세상은 둥글다』 『꽃밭 말씀』 『당신만 몰랐다』
현재 손경선내과의원 원장
*최예환
2017년 신라문학대상 시조부문 대상
2018년 『월간문학』 등단, 2018년 『좋은시조』 신인작품상
시집 『혀』
*윤태원
1966년 목포 출생
가톨릭의과대학 졸업
목포 태원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2016년 『열린시학』 신인문학상
*김호준
2014년 『시와사상』 등단
시집 『너의 심장을 열어보고 싶은』
현재 대전 참다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근무 중
*김연종
시집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청진기 가라사대』
산문집 『닥터 K를 위한 변주』 『돌팔이 의사의 생존법』
*김완
2009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지상의 말들』 『바닷속에는 별들이 산다』 등
2018년 송수권 시문학상 남도 시인상 수상, 현재 김완 혈심내과 원장
*송명숙
2019년 『시와세계』 등단
시집 『투명한 진료실』
아이편한 소아청소년과 의원 소아과 전문의
*주영만
1991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노랑나비, 베란다 창틀에 앉다』 『물토란이 자라는 동안』
*서화(본명 서종호)
2015년 『신문예』 시 등단
현 부천시민의원 진료원장
*유담
2013년 『문학청춘』 등단
의학과 문학 접경 연구소 소장
시집 『가라앉지 못한 말들』 『두근거리는 지금』
산문집 『늙음 오디세이아』 『의학에서 문학의 샘을 찾다』
*김경수
1993년 『현대시』 등단
시집 『이야기와 놀다』 『편지와 물고기』 『산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달리의 추억』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다른 시각에서 보다』 등 문학ㆍ문예사조 이론서 『알기 쉬운 문예사조와 현대시』
계간 『시와 사상』 발행인, 부산 김경수내과의원장
*박언휘
경북 울릉도출생, 호는 포 (佈春)
국제 PEN 문학 홍보이사, 한국시인협회기획인사
『시인시대』 시계간지 발행인
이상화기념사업회이사장, 대구여성문인협회 회장
저서 『박언휘 원장의 건강이야기』 『선한리더십』 『안티에이징의비밀』
『청춘과 치매』 『시집,울릉도』 등
박언휘종합내과원장, 한국노화방지연구소이사장
박언휘 슈바이쳐나눔재단이사장
*서홍관
전북 완주 출생.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창비 신작시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현재 국립암센터 원장
시집 『어여쁜 꽃씨 하나』 외 4권
작가의 말
우울한 시절이다. 우울한 처방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우울한 봄날을 통과하려면 과열된 심장에 냉각수를 보충하고 메마른 전두엽에 감성을 수혈해야 한다. 알약의 개수가 자꾸 늘어간다. 햇빛 찬란한 봄의 난간을 조심해야 한다.
목차
- 서문·5
초대시
마종기·12
이원로·17
박세영
무등산의 희망봉·24
씨앗들의 합창·26
순리는 어디로 가고·28
한현수
꼬막잡이·32
밤마실·33
사월·35
홍지헌
가족여행·38
아주 깊은 곳에·39
뜬금없는 생각·40
정의홍
철둑 길 아래·42
남도 기행 1·43
남도 기행 2·45
김세영
와디의 기억·48
자연스러운 일·51
바람의 결·53
김기준
스파게티가 익어가는 봄날·58
모란을 기다리며·60
마취 의사·62
박권수
만월리 박 씨·66
엄마의 머리빗·67
병아리유치원·68
손경선
괭이밥·72
주꾸미 샤부샤부를 먹다·74
어떤 문답·76
최예환
밤바다에서·78
무스카리 1·79
무스카리 2·81
윤태원
쓰읍·84
내가 사라져도·85
나는 나를·87
김호준
불안 1·90
불안 2·91
어느 집착·92
김연종
비핵화 선언·94
사각지대·96
뼈를 묻다·98
김완
타인들의 집·100
라면을 끓이며·101
우수雨水·103
송명숙
진료 중입니다·106
4월, 봄·107
오후 3시·108
주영만
안과 바깥 4·110
안과 바깥 5·112
안과 바깥 6·114
서화
오감五感·116
기도의 강·117
시초始初와 끝·119
유담
시선의 졸음·122
정기검진·124
겨울 동백·126
김경수
인사하는 책·128
사랑은 떠나가는 기차·130
나무 의자·132
박언휘
사랑의 마그마·136
울릉도의 꿈·138
달밤·140
서홍관
근무는 어때요?·142
소록도 화장터에서·143
기와불사·144
책 속으로
2024년 봄, 개화 시기가 조금 늦어졌다.
날씨도 우울하고 꽃들도 우울하고 뉴스도 우울하다. 의료 대란이라 하기도 하고 의정 갈등이라 칭하기도 하는, 집단 우울증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단단히 마음을 추수려보지만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다. 꽃들이 길을 만들지 않고 새들이 둥지를 떠나면 진한 녹음도 푸른 죄수복처럼 무거워진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에서 우리는 조금씩 시들어간다.
2024년 여름, 사화집 발간이 조금 늦어졌다.
야생의 꽃들이 들판 여기저기에 피어 있다. 만나면 반갑고 못 만나도 가슴 설렌다. 하수상한 시절, 가장 잘한 건 언어의 집 한 채 지은 것이다. 詩는 보이지 않던 긴 터널의 시간이었다. 묵언의 시절에 뿌려 놓은 씨앗들의 합창이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사화집 발간에 도움 준 황금알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늘 격려와 용기를 주신 마종기 시인과 이원로 시인, 무거운 마음을 기꺼이 열어주신 회원들께 감사 인사 올린다.
2024년 6월
한국의사시인회 회장 김연종
□초대시
동생의 기일 외 1편
마 종 기
사순절 중에도 봄은 기지개하며 눈뜨고
꽃들의 기도 소리에 유독 관심이 가던 시절,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리는 가야 할 길을
황홀하게 취해서 간 것뿐이야, 그렇지?
그 길이 이렇게 오래 만나지 못할 길인 걸
우리가 정말 몰랐을 뿐이야. 그렇지?
그래 그것뿐이다. 우리는 사랑이란 게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다는 걸 몰랐다.
저기 표정 죽이고 떠나는 나비 한 마리
그 그림자가 되어버린 동생의 기일,
애벌레의 어두운 시절을 기억할 리 없지만
이마에 바른 재도 다 지워지고
긴 꿈 깨어났다고 우리까지 흔드는구나.
후회도 없이 세상도 지워버리는구나.
그해에 나비가 웃기만 하던 이유는
산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몰라서였을까.
그 사이의 낙심과 무서움을 몰라서였을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니겠지?
내처 달려온 길이 얼마나 긴지 보이지 않네.
헤어져 살아온 날들은 늘 밤으로 이어지고
젊었던 날 잠 못 들고 불을 켜던 별들이
이제는 낮 동안에는 내 가슴에서 살고
밤이 되면 하늘에서 네가 되는구나.
저 끝없는 봄, 동생의 나비들.
겨울의 응답
1.
처음에는 흐린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나를 감싸는 줄 알았지, 그런데
누구의 입김인지 잔바람을 타더니
아, 함박눈이, 함박눈이 내렸어.
확실히 그게 첫눈이었지.
사각사각 눈 내리는 소리 흐려지면서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다 하는 말이
사방에서 내게 들려왔어. 한데
왜 그 인사가 확 눈물 나게 했을까.
매해 빌려서 사는 오피스텔을 나와
걷는 사람 드문 광화문 근처의 저녁,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거야.
어두워지는 사직공원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 들고 반갑게 눈을 받아먹으면서
거봐라, 거 봐라, 하면서 나를 놀리데.
아무도 보지 않은 광대놀이 한 평생이
지난날은 잊어, 어쩔 수 없었잖아, 한다.
얼마나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참는 법을 몰라 여직 헤맨 것이었는지,
그래서 당신의 응답은 눈이 된 것인지.
2.
그래, 이제는 눈치 안 보고 말하지만
사는 게 늘 춥고 흐리고 무서웠지.
젊었을 때부터 신이 나서 장난하듯
하루라도 다 잊고 버틸 수가 없었어.
내가 살던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었고
내가 맡은 역은 칼과 피와 살과 약,
사람을 살리려 애쓰다 죽이기도 하는
수고했다 말 듣기보다는 공포에 질려
밤에도 마음 놓고 편히 잘 수가 없었어.
정말이다, 두 손 놓고 살 수가 없었다.
내 실수 하나로 사람을 다치게 할까 봐.
내리고 또 내리는 사직공원의 함박눈
하늘을 다 채우고도 앞을 가리는 눈,
-------------------
울타리 밖 외 1편
이 원 로
울타리 밖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려나
한 손에 청진기
다른 손에 망원경
박동과 숨소리 따라
원천을 더듬으며
기원을 엿보려는
꿈과 동경의 눈빛이지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16세기 밤하늘을 열었지
적외선 망원경은 지금
빅뱅의 문턱을 서성대지
신비는 벗길수록
더욱 놀라워지고
기적은 넘을수록
더욱 경이로우리
길 위에서
너머에서 왔기에
거기를 바라보리
안 보이고 안 들리지만
마음에 닿아 끌기에
늘 거기로 기울이지
숨어 있는 네트워크
오묘한 무선통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리
놀라운 메시지가 수없이
위아래를 오르내리지
경이와 경외에 잡혀
보내오는 신호를 따라
무수히 가려진 신비의
장막을 하나씩 들치며
한없이 위로 기어오르지
우리는 모두
저 너머를 향한
채울 수 없는
갈망의 길 위에서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리
□한국의사시인회 시인들
*시인의 말
기후 변화로 인하여 자연의 질서가 무너져 비정상의 세상이 되어버린 지금, 자연의 진리를 깨우치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공존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새 생명을 바라보듯 파릇하게 다가온 희망을 사유라는 틀로 시를 쓴다.
속도 경쟁의 시대에 느리게 걸어 보는 여유와 함께
무등산의 희망봉 외 1편
박세영
1.
흙을 밟는다 바람이 흐른다
어서 오라 손짓하는 무등산
중머리재를 타고 넘는
무등의 햇살과 바람을 보라
얼굴 붉히며 꽃단장했던 너
빛고을의 한을 무등에 품고
토끼등 산비알을 휘감는다
인고의 세월을 얼리기도 했던
다가선다 그댈 향하여
휘몰아치던 눈보라를 뚫고
지친 마음을 달랬던 기억
바스락거리며 바람을 탄다
2.
천왕봉을 바라본다, 천지인
울퉁불퉁한 너덜겅을 지나
따스한 장불재에 피어난 야생화
억새는 이울고 희망의 춤을 춘다
가없는 바다 미지의 하늘로
지평선 너머 솟구치는 주상절리
미끄러질 듯 펄럭이는 서석대
울긋불긋 인정人情의 띠를 두르고
호랑나비가 가파른 숨을 날린다
땀방울 없이 그대 앞에 설 수 없다
무등산의 희망봉, 천지인이여
한반도의 기상을 세워라
순리는 어디로 가고
전 지구적인 고온 현상과 북태평양 고수온으로
대기에 수증기가 다량 유입되어 한없이 팽창한다
봄에는 논바닥이 갈라지고
저수지가 제 속을 보이더니
이젠 비가 너무 와서 탈이다
잠수교는 잠수 모드에 들어가고
문지방까지 넘실댄다
소와 돼지는 허우적거리며 목놓아 울고
구조대는 베니스의 상인처럼
곤돌라 타듯 지나간다
물먹은 자가용을 두고 나와 부르짖는 소리
폭우에 앞차만 따라가다
영문 모르고 눈앞이 캄캄해져 가는
지하 차로에 갇힌 별들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아비의 눈물
둔탁해진 동작으로 출동에 때를 놓치고
2023년 7월은
천재지변과 인재가 뒤섞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맑은 하늘에 번개 치며 소나기 퍼붓는다
기후 변화
누가 순리를 뒤바꾸고 있을까
박세영 2019년 『시와문화』 등단, 시집 『바람이 흐른다』 『날개 달린 청진기』
현재 박내과의원 원장
비핵화 선언 외 1편
김연종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을 갖자고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서로를 닦달하며 맹세했다
완전하진 않더라도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평화를 이어가자고
그래도 살아가리라 이왕이면 두 손 꼭 붙잡고
궁벽한 초야를 마치고 서약했다
불완전하고 검증 불가능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전쟁만은 피하자고
전쟁 같은 30년이 흘렀다
침대와 부엌엔
미사일과 핵잠수함이 떠다니고
거실과 현관엔
철조망과 핵 쓰레기가 널려있다
DMZ의 긴장과 권태
긴박한 일탈과 지루한 일상
비핵화를 포기했다
불완전하고
검증 불가능하며
언제든 돌이킬 수 있을지라도
비무장지대 같은 혼인만은 유지하자고
사각지대
시집 한 권 보내고 싶었는데 주소를 물어보기는 겸연쩍고 주소를 알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누구인지 가물거리고
혼사 소식을 들었는데 모바일 단체 청첩장이라 가기도 쑥스럽고 안가기도 체면이 아니라
계좌번호만 확인했는데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신문 동정란 보고 병원장 등극한 동창 소식 접했는데 축하 전화도 축하난도 어색해서
우물쭈물하다 보니 어느새 퇴임 소식
부고를 접하고 망자 대신 장례식장을 확인하는데 주중에는 시간이 없고 주말에는 거리가 멀어
핑계 대신 반가운 계좌번호만 하릴없이 바라보고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말없이 ‘좋아요’만 누르고 사라진 지인에게
메신저를 통해 안부나 전할까
전화로 직접 목소릴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페친 삭제
김연종 2004년 『문학과 경계』 등단, 시집 『극락강역』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 『청진기 가라사대』, 산문집 『닥터 K를 위한 변주』 『돌팔이 의사의 생존법』 등
출판사 서평
문학 속의 의학, 의학 속의 문학, 진료실의 시인들의 소박하고 찬란한 시편들!
말라 뒤틀렸다 붉디붉게
물들어 펼쳐진 진홍빛 저고리
매웁디 매운 마음을 품고서
노란 꿈을 저미고 저며 야위어도
생이 비틀어질 때까지
독을 품고 있었던 너
어느 누구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농염한 자태
꿋꿋이 변색하며 검붉어질 때까지
등을 기대었던 황금 토양에서
발가벗겨진 채 내밀었다
점막을 찌른다
반질반질하게 잘생긴 것들
볼품없이 척추가 휜 것들
하나의 집념만으로 모였다
이제는 비틀리고 꼬여도
알알이 떨어뜨리며 내려놓는
씨앗들의 합창, 좌르르
참고 참다 이제는
노랗게 흘려보내도 좋은 씨앗들
고추의 눈물인가
나의 눈물인가
-박세영, 「씨앗들의 합창」 전문
박세영의 시 「씨앗들의 합창」은 이번 의사시인회 12집의 표제시이다. 고추를 소재로 하여 생명과 고통, 그리고 그 안에서의 희망을 다룬 시이다. 고추가 겪는 변화를 통해 인간의 삶과 고난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 연에서는 붉게 물든 고추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말라 뒤틀렸다 붉디붉게”라는 진술에서 고추가 마르고 붉어지는 과정을 묘사하며, “진홍빛 저고리”는 고추의 강렬한 색감을 형상화한다. 이는 고추가 겪는 고통과 함께, 그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고추는 “매웁디 매운 마음을 품고서” 자신이 지닌 고통과 집념을 나타낸다. 이는 삶의 고난을 견뎌내는 인간의 모습과 겹친다. “노란 꿈을 저미고 저며 야위어도”라는 태도는 꿈과 희망을 잃어가는 과정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고추의 집념을 보여준다.
고추는 “어느 누구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농염한 자태”를 지닌다. 이는 신산스러운 현실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검붉어질 때까지” 변색하며 삶의 끝까지 버티는 모습은 인간의 굳은 의지를 상징한다. 이는 고추가 “황금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처럼, 결국 고난을 이겨내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성장통인 것이다. “발가벗겨진 채 내밀었다”라는 진술은 고추가 씨앗을 내놓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관능적인 면모와 함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고 있다. 고난을 통해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과정에서 “점막을 찌”르는 행위는 필연적인 고통을 수용성을 의미하고 있다.
씨앗들은 “반질반질하게 잘생긴 것들”과 “볼품없이 척추가 휜 것들”로 묘사된다. 이는 다양성의 존재들이 모여 하나의 생명력을 이루는 여정을 나타낸다. “하나의 집념만으로 모였다”라는 구절은 이들이 고통을 견디며 함께하는 힘을 강조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씨앗들이 “비틀리고 꼬여도 알알이 떨어뜨리며 내려놓는” 모습을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묘사한다. “씨앗들의 합창, 좌르르”는 그들이 하나 되어 만들어내는 생명력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참고 참다 이제는 노랗게 흘려보내도 좋은 씨앗들”은 이제는 고통을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고 있을 터이다. 고추의 눈물이 “나의 눈물인가”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시는, 고추와 인간의 삶을 동일시하며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씨앗들의 합창」은 고통 속에서도 생명과 희망을 잃지 않는 존재의 이유와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고난을 견디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작품이다.
인간의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의사는 의학의 과학적 특성과 더불어 희로애락과 다양한 감성을 지닌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이해의 접촉점인 인문학과 그 바탕이 되는 문학에 관심을 주어야 완전한 의사로 행세할 수 있을 것이다.
좌뇌파로서의 과학자와 우뇌파적인 감성과 인문학을 두루 겸비해야 환자에게는 이해심 많은 훌륭한 의사, 자신에게는 편향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향유하는 행복한 의사가 될 수 있을 터이다.
한국의사시인회 결성 12년이 되었다. 회원들이 모여 첫 시집 『닥터 K』를 펴낸 이후 열한 권째 시집이다. 의사의 일상은 그리 한가로운 것이 아니고 그 틈새 시간에 시를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 전국의 훌륭한 의사 시인들이 밤잠을 밀어두고 섬세한 인간애를 시의 행간에 심어 놓은 것을 살필 기회가 왔다. 과학자인 의사가 어떻게 환자라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을 함께 아파하고 또 함께 눈물 흘리는지를 볼 기회가 왔다.
더불어 의사라는 인간이 목석이 아니고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지키며 불완전한 자신을 깨워 이겨나가는지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시를 사랑하는 이런 모임과 꾸준한 시집 발간은 이 나라에 의료문화를 널리 전파하고 의사의 질을 높이는 데도 한몫을 하리라는 믿음을 준다.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詩를 사랑하는 의사들이 함께 모였다. 아직 詩는 탄생하지 않았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68150812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6월 27일 | ||
쪽수 | 144쪽 | ||
크기 |
128 * 210
* 12
mm
/ 313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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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황금알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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