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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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누구나 손에 들어야 할 역작!
이 책은 철학서이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모든 혼동과 뒤엉킴은 철학을 통해 풀어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치적 실천도 강화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태어났다. 지구 전역에 걸쳐 분노의 함성이 높아지고 있다. 파시즘의 모태라고 할 만한 세력들이 도처에서 발호하고 있다. 그러나 니먼은 절망으로 손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더 많은 희망을 열망할 의무가 있다고 목소리 높인다. 간결하면서도 논쟁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냉철하게 빛나는 선언문이 우리를 찾는다.
작가정보
(Susan Neiman)
도덕철학자이자 문화평론가. 1955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과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예일 대학과 텔아비브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철학회와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아인슈타인 포럼의 이사로 있다. 저서로 《독일인들에게서 배운다: 인종 그리고 악의 기억(Learning from the Germans: Race and the Memory of Evil)》, 《도덕적 명징성: 성인 이상주의자를 위한 안내서(Moral Clarity: A Guide for Grown-Up Idealists)》, 《근대 사상에서의 악: 철학의 대안적 역사(Evil in Modern Thought: An Alternative History of Philosophy)》 등이 있다. 미국, 독일, 영국의 다양한 매체에 도덕철학, 계몽주의, 형이상학, 정치 등에 관한 글을 쓰며 철학이 현실 세계에 적용될 때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연구해왔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외교학과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캐나다 요크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위기 이후의 경제철학》 등이 있고, 역서로는 《거대한 전환》, 《카를 마르크스》(제59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부문 수상), 《광장과 타워》, 《둠: 재앙의 정치학》 등이 있다. 유튜브 채널 ‘홍기빈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목차
- 1장 들어가며
2장 보편주의와 부족주의
3장 정의와 권력
4장 진보와 파멸
5장 좌파란 무엇인가?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 좌파는 워크가 아니다
주
추천사
-
“인터내셔널은 인류를 단결시킨다.” 〈인터내셔널가〉 영어 가사 1절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노동계급도 아니고 민족도 아닌 인류! 이런 철저한 보편주의가 좌파의 기본 가치이자 최종 목표였다. 그러나 ‘워크’라는 낯선 수식어를 단 오늘날의 ‘좌파’는 오히려 부족주의를 내세우며 끝없는 분열과 경쟁의 먹이가 된다. 이에 맞서 저자 니먼은 ‘좌파 됨’의 참뜻을 선명히 일깨운다. 푸코나 슈미트 같은 저자가 끼친 그릇된 영향에서 벗어나 계몽주의라는 출발점을 재평가하자고 촉구하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설 길은 계몽주의의 폐기가 아니라 그 완성에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논쟁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길 잃은 21세기 좌파에게는 벼락같은 깨침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진보’, ‘좌파’, ‘노동’, ‘페미’, 이 모든 말이 분열과 고립화의 딱지로 전락해가고 있는 이 불모의 땅에서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재출발을 열망하며 고뇌하는 이들의 필독서다.
-
최근 읽은 책 중 저자와 가장 치열하게 다투며 읽은 책이다. 처음에는 좌파라는 말에도, 워크를 향한 비판에도 거리낌을 느끼며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중반쯤 읽을 때부터 저자의 혹독하고도 논리적인 주장에 완벽하게 설득되기 시작했고, 내가 가진 진보적 입장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게 됐다. 간결하고도 강인한 글이다. 모두가 피해자의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달려가며 “트라우마의 숲”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 상황에 나침반 역할을 한다. 나와 타인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허무주의가 아닌 희망을, 몽롱한 지적 유희가 아닌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킬 구체적인 지적 자원을 쥐어준다. 저자의 열정과 지성 그리고 가차 없음에 박수를 보낸다.
책 속으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반동적 민족주의가 모든 대륙에서 발호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론을 바로잡는 일이라는 게 과연 가장 절박한 당면 과제일까?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에 대고 진정한 좌파의 입장이 아니라고 비판을 가하는 것은 사실 나르시시즘의 한 예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워크의 무리를 가르는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이는 단지 스타일이나 톤의 문제가 아니다. 좌파의 입장에 선다는 의미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들이다. 우파가 좀 더 위험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우파 쪽으로 휘청거리는 흐름에 우리가 맞서고자 할 때 꼭 필요한 것들을 오늘날 좌파가 스스로 빼앗아 없애버리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23년 10월 7일의 하마스 학살에 대한 워크의 반응은 이론이 어떻게 하여 끔찍한 실천으로 이어지게 되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_12쪽, 1장 〈들어가며〉
비록 우리가 어떤 사람과 만나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외모일 때가 많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가진 다양한 여러 정체성을 인종과 젠더라는 단 두 가지 요소로 축소하는 일은 모든 것을 외모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될 뿐이다. 인간의 경험에서 유독 이 두 차원에 초점을 두는 것은 곧 가장 큰 트라우마를 경험한 차원에 초점을 두자는 이야기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역사의 주체를 더는 영웅이 아니라 희생자에 둔다는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오늘날 정체성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이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치르는 가운데 전통적인 형태의 영웅주의의 가치를 드높이려는 충동은 사그라들었다. 역사의 희생자들에게로 초점을 옮기려는 충동이 나타났고, 그 시작은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갈구였다. 그간 역사는 승자들의 이야기였으며 희생자들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는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짓이었다. 육신의 죽음을 당한 이들을 기억에서 한 번 더 죽이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입장을 뒤집어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서사로 넣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된 잘못을 바로잡는 행동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마땅히 주목을 받게 된다면, 우리의 공감과 동정만이 아니라 시스템 차원에서의 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서도 응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노예들이 스스로 비망록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주체성을 향한 발걸음을 떼어놓은 것이었고, 존재에 대한 인정을 얻어냈다. 그리고 그러한 인정의 보상 또한 비록 느린 속도이긴 했지만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었다. (…) 그러나 우리가 희생자의 입장을 다시 써나가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_45~46쪽, 2장 〈보편주의와 부족주의〉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도대체 권력이 아닌 것이 있는가? 분명히 아닌 게 하나 있다. 권력은 정의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의라는 개념 자체가 특정한 형태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에 맞서기 위한 무기로 발명되었다는 게 푸코의 완고한 주장이다. “만약 어떤 싸움에서 정의가 주된 쟁점으로 떠오른다고 해도, 이는 그저 권력의 도구로서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든 저 사회에서든, 언젠가 사람들이 각각의 자격에 따라 보상을 받고 잘못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정의가 쟁점이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뒷부분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곧 정의의 본질을 부인하는 것이다. 어느 문화에서건, 또 인간 세상이든 신들의 세상이든 이는 정의의 변치 않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격에 따라 보상을 받고 잘못에 따라 처벌을 받기를 꾀한다. 어떤 상황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항의는 곧 미덕을 갖춘 이가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행복을 얻지 못한 상황에 대한 항의이다. 언젠가 푸코에게 감옥 개혁 운동에 참여하느냐는 질문이 던져지자, 푸코 자신은 감옥의 상태와 같은 뻔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저 “무죄인 자와 유죄인 자를 가르는 사회적·도덕적 구별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런 따위의 구별은 죄수 본인들도 던지지 않을 질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죄 없는 자와 죄지은 자를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유죄와 무죄 사이의 도덕적 구별을 부인하는 것은, 곧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도덕적 구별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_131~132쪽, 3장 〈정의와 권력〉
아마도 진보라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은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의상 진보란 본래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것은 진보라고 하지 않으며, 오로지 미래에(내일 아침이라면 제일 좋겠다)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만이 진보가 된다. 앞의 세대가 이루어 놓은 일을 진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토록 힘들게 싸워 이루어 놓은 것들이라는 게 조금만 지나면 원래부터 당연히 그랬어야 할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종 분리라는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자라난 세대는 그게 없어졌다는 게 어떤 성취인지를 알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런 게 옛날에 존재했다는 것에 놀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데 이러한 망각이야말로 바로 인종 분리를 뒤엎기 위해 싸워온 이들의 목표였다. 즉 인종 분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누가 이토록 야만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받아들였는지를 의아하게 여기는 세상이 오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오늘날이라면, “창자를 뽑고 몸을 네 조각으로 자르기”라는 처형 방식을 폐지하자는 데 모두 찬성하도록 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인종 분리의 폐지 또한 마찬가지의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오늘 우리가 겪는 문제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_234~235쪽, 4장 〈진보와 파멸〉
이러한 불일치는 얼마든지 서로 용인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지만, 이제는 저 사람의 의견이 나와 불일치한다는 건 곧 나에 대한 해꼬지라는 식으로 경계가 모호해진 터라 결국 이 때문에 갈등이 터지게 된다.
우리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오로지 개인적인 것만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식이 되면서 희망을 포기하게 되었다. 당신을 어떤 대명사로 지칭할지를 바꾸어내는 것이 마치 대단한 급진적 변화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목에 핏대를 세우며 대명사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그것 말고는 달리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희망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논리는 단순하다. 만약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힘 있게 행동할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할 수 없다면, 종말론자들의 모든 예언이 현실이 될 것이다.
_272쪽, 5장 〈좌파란 무엇인가?〉
보편주의가 특정 이익을 은폐하는 목적으로 오용되었다는 것 때문에, 보편주의 자체를 포기할 것인가? 정의에 대한 주장이 권력에 대한 주장을 감추는 치장일 때가 있었다는 것 때문에, 정의의 탐색 자체를 포기할 것인가? 진보로 나아가는 여정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진보에 대한 희망 자체를 멈출 것인가?
실망이란 아주 절실한 감정이며,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은 실망을 용감하게 직시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실망을 우주의 구조로 읽어내어 거대한 의구심의 교향곡을 작곡하였고, 이것이 현재 서구 문화의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다. 물론 그러한 음악은 곳곳에서 쏟아지고 있으니, 그 음악을 들은 이들을 모두 진화심리학이나 카를 슈미트의 저작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철학 서적이라고는 한 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이들도 지금 우리를 휘어감은 이데올로기의 조류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번창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일반적인 설명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순한 설명을 원한다면 더욱 좋다.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들은 하나로 합쳐져서 인간 욕망의 모든 복잡성을 오로지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환원하는 사기성 보편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자기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경제학, 철학, 생물학 등의 지지를 받는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면서, 그 밖의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는 다 자기기만이거나 지독한 이기주의를 감추기 위한 과대 포장일 뿐이라고 선고를 내린다.
_274쪽, 5장 〈좌파란 무엇인가?〉
출판사 서평
“길 잃은 21세기 좌파에게 벼락같은 깨침의 선물이다.”_장석준(사회학자)
“저자의 열정과 지성 그리고 가차 없음에 박수를 보낸다.”_하미나(작가)
좌파의 입장에 선다는 것에 관하여,
용감한 도덕철학자가 건네는 날 선 성찰
경계가 흐릿하다. 우리는 소위 ‘깨어 있으면(stay woke)’ 좌파라 생각하고, 좌파라면 ‘깨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러할까? 이 시대 가장 중요한 목소리 중 하나인 도덕철학자 수전 니먼은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오히려 “아주 중대하고 위험한 실수”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칭 좌파, 요컨대 “워크(woke)”라는 낯선 수식어를 단 이들과 본래의 좌파는 “아주 다르기”에 한데 묶여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좌파 진영과 언뜻 서 있는 입지가 겹쳐 있을 뿐, 애초 그들을 형성하고 실천으로 이끄는 지적 뿌리와 자원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여기, 분노와 절망을 넘어 깊은 연대로의 회복을 꾀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왼쪽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망각한 시대에 건네는 강렬하고도 도발적인 비평과 성찰을 담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이다. 기실 많은 것들이 오른쪽으로 기우뚱 기울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러하고, 지구 전체가 그러하다. 이때야말로 좌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책 속 문장들은 강조한다. 요 몇 년 미국 사회는 “워크 논쟁”으로 뜨겁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에만 매달리느라, 다른 위험에 처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이 과정에서 좌파가 가졌던 사상과 정신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책은 말한다. 한국 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은 피부로 감지했지만, 어디가 어떻게 그러하냐는 대목에서는 속 시원한 모색이 어려웠던 독자들에게 참으로 시기적절하게 도착한 저작물이다. 대단히 지성적인 동시에 열정과 희망이 흘러넘치는 이 시대 가장 날카롭게 빛나는 선언문이 뜨끔 아프면서도 갈증이 해소되는 맹렬한 읽기의 체험으로 독자를 이끈다.
보편주의, 진보, 정의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후 일생 대부분을 독일에서 보냈으며 포츠담에 있는 아인슈타인 포럼의 이사로 재직 중인 니먼은 오랜 시간 도덕철학, 계몽주의, 형이상학, 정치에 관한 글을 쓰며 철학이 현실 세계에 적용될 때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연구해왔다. 그는 이 책 역시 “철학서”라고 몇 차례에 걸쳐 강조한다. 워크를 분석하거나 사례를 나열해 비판하는 책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으며, 이 작업이 갖는 중요성에는 그도 십분 동의한다. 하지만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생각과 사상의 문제에 천착한다. 저자의 관심사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좌파’로, 좌파가 오늘날까지 자주 내걸어왔으며 또 여전히 열망하는 철학적 이상에 관한 명확한 개요를 제시하는 것이다(34쪽).
니먼은 초판 출간 직후 홍보 차 유럽을 순회하던 중 호주 언론 〈퀼레트(Quillette)〉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집필이 “아주 시급하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밝힌다. 그간 좌파 진영의 많은 이들은 워크의 부상을 두고, 우파 진영의 공격 또는 음모론의 산물이라고만 여겨왔다. 그러나 니먼은 좌파의 시각에서 워크의 과도한 행태를 명확히 문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초 좌파와 워크가 한데 묶이며 사람들에게 혼란을 낳는 이유 중 하나는 워크 또한 전통적으로 좌파의 것으로 여긴 감정들, 요컨대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과의 공감, 억압받는 이들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분노, 역사적으로 저질러진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굳은 결의 등에서 태어났다는 데 있다. 그러나 워크의 실천과 담론의 밑바탕에 자리한 “이론”이 모든 좌파적 입장에서 핵심이 되는 철학적 사상과 충돌한다는 데 중대한 문제가 있다. 부족주의가 아닌 보편주의의 지향, 정의와 권력의 확고한 구별, 진보의 가능성에 관한 강력한 믿음이 그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진보 좌파의 주류 담론 자리를 차지해버렸고, 이제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담론 지형에서 확산되고 있는 워크가 이렇듯 좌파의 기본 가치이자 최종 목표를 해체해버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늘날 워크는 보편주의의 가능성, 정의, 진보에 대한 신념을 잃은 채 끝없는 분열과 경쟁의 먹이가 되고 있다. 니먼은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워크의 사유 방식을 떠받치고 있는 이론을 파헤치며, 워크식 탈식민주의가 좌파 혹은 리버럴이 견지해온 모든 원칙을 뿌리째 뽑아내 버렸음을 똑똑히 직시하도록 이끈다.
미셸 푸코는 어쩌다
워크 좌파의 대부가 되었는가
책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계몽주의로, 워크에 따르면 이는 유럽중심주의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와 동의어이다. 니먼은 이를 두고 “전혀 사실무근”인 데다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오히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했다고 역설한다. 보편주의적 사상에 기초하여 식민주의에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75쪽). 그러나 미국 대학들에서 시작된 “계몽주의 때리기”로 인해, 계몽주의는 속절없이 세상 모든 원흉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워크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유산으로 내려온 인식론적 틀과 정치적 전제를 거부하는데,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이들은 계몽주의 사상을 형성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또 사상가들의 저작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모든 진보적 지식인이 그러하듯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저자는 매서우면서도 섬세한 눈과 손으로 장막에 가려져 있던 계몽주의의 지적 유산을 펼쳐 보인다. 루소, 디드로,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투쟁이 기초로 삼았던 보편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97쪽). 또한 이들은 진보의 가능성을 착실하게 믿었고,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198쪽). 니먼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대해 표준처럼 자리 잡은 독해 방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폭로하는 데 공을 들여왔는데, 이는 그들이 오늘날 지배적 철학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보, 정의, 연대의 개념을 제공하는 까닭이다.
한편 워크가 계몽주의 사상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에는 20세기 사상의 두 거장 푸코와 슈미트의 공이 크다고 저자는 혹독하게 지적한다. 책은 실로 다양한 저작물을 함께 살피며, 이들의 학문적 여정을 검토한다. 이들이 미친 악의적인 영향력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들의 사상은 근대 세계에서의 권력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정의와 권력 사이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보에 대한 개념을 축소하고 훼손했다. 푸코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진보를 이루려는 많은 노력, 세상을 개선하기 위한 그 모든 노력이 종국에는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학교든, 집이든, 감옥이든, 다른 기관이든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훨씬 더 미묘한 형태의 지배와 통제라는 주장을 들으면, 억압 메커니즘에 맞서 싸우고자 무엇을 하건 우리 또한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진보에 대한 희망은 꺾이고, 결국 허상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치의 법 이론가였던 슈미트는 또 어떠한가? 그는 인간이라는 보편주의적 개념은 유대인이 비유대인 사회에서 권력을 얻으려는 특정 이익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발명해낸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는 계몽주의가 내세우는 보편주의라는 것이 점점 비백인화되고 있는 세계에서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유럽의 특정 이익을 은폐하고 있다는 오늘날의 주장과 위험할 정도로 가깝다. 워크 안에 슈미트의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이 니먼의 주장이다.
포기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함께 더 많은 희망을 열망하기 위하여
애초 워크의 기원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블루스 가수 레드 벨리(Leadbelly)가 1938년 발표한 노래 〈스코츠보로 소년들(Scottsboro Boys)〉에서 “깨어 있으라(stay woke)”라는 구절로 처음 등장했다. 억울하게 강간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오랜 국제적 항의로 누명을 벗게 된 아홉 명의 흑인 소년에게 헌정된 노래였다. 이후 워크는 불의에 맞서 깨어 있고 차별의 여러 증후를 언제나 감시하자는 의미로 쓰여왔지만,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전성기를 맞으며 활활 불타올랐다. 오바마 집권기에 성년을 맞은 젊은이들에게 오바마 가족은 ‘당연한 규범’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선 트럼프 가족은 이들에게서 그 규범과 그것이 이끌던 모든 가능성과 기대를 빼앗았다. 이렇듯 낙담한 젊은이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워크 운동을 일으켰고, 시대에 뒤처질 것을 두려워하는 출판사와 대학교수와 대기업이 허둥지둥 이 운동에 올라탔다.
워크는 그 시작점은 주변화된 개인에 대한 관심과 염려였지만, 이제는 여러 정체성 가운데에서도 가장 심하게 주변화된 부분에만 초점을 둔다. 그 결과 모두가 “트라우마의 숲”에 빠져 피해자의 자리를 선점하고자 한다. 워크는 부당한 피해와 상처를 바로잡아 회복하려 했지만, 권력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의의 개념은 옆으로 아예 밀어젖혔다. 워크는 스스로 저지른 범죄의 역사를 제대로 보라고 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역사는 범죄의 역사라고 결론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니먼은 워크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공포스러운 것”이라 역설하고, 우파적일 수밖에 없는 일련의 이데올로기에 식민화 당한 상태인 워크 운동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파시즘의 모태라고 할 만한 세력들이 전 지구적으로 발호하여 도처에서 정치적 권리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 이들에 맞서 동맹체를 이루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러 정치적 권리를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그 정치적 입장의 이름이 무엇이 되었건 모두 힘을 합쳐야 하는 때라는 것이다(248쪽). 따라서 진지한 민주주의자라면 누구나 찬성하고 뭉칠 수 있는 철학적 아이디어를 제시하고자 하는 게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지면에서 내내 부르짖은 진보, 정의, 보편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책은 빼앗긴 ‘좌파’라는 단어를 되찾아 오기 위한 여정을 담고 있다. 재차 강조하건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철학서이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이 모든 혼동과 뒤엉킴은 철학을 통해 풀어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치적 실천도 강화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이 책은 태어났다. 철학의 쓸모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 발견하고 다른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더 크게 확장하는 데 있다. 책은 독자들을 바로 그 발견과 확장의 순간으로 이끈다. 지구 전역에 걸쳐 분노의 함성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선 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니먼은 절망으로 손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더 많은 희망을 열망할 의무가 있다고 목소리 높인다. 이 시대 가장 신중하고 원칙적인 좌파 사상가가 좌파의 미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책을 들고 링 위에 올라섰다. 간결하면서도 논쟁적이고 정열적이면서도 냉철하게 빛난다.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기본정보
ISBN | 9791193166468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4월 25일 |
쪽수 | 296쪽 |
크기 |
126 * 204
* 26
mm
/ 457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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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정치로 해결함에 있어 ‘뭣이 중한디?’를 환기한다는 점에 있다. 철학 사상의 계보적 발전과 사회 현상의 결과로 진보 좌파는 어느새 천착하는 의제들은 젠더, 환경, 인종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그러나 진보좌파들은 정체성 정치에 골몰하다 결국 각자 정체성의 테두리에 갖춰 ‘부족주의’로 전락, 진보좌파의 지향점인 ‘보편적 선’을 잃어버리고 결국 진보의 동력도 잃어벼렸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핍박한 역사가 있으므로 하마스의 테러를 용인한다던가 Black lives matter 시위를 할 때 흑인이 아니라면 자격을 획득하지 못하므로 다른 인종은 끼지 말라 하는 등의 문제이다.(실제로 난 해당 시위가 한참일 때 지지하는 포스팅을 했는데 나의 어떤 방법론이 옳지 않으니 게시물을 내리라는 디엠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종으로 인한 갈등은 아직은 표면적으로 와닿지는 않으나 다양한 진보의제를 래디컬하게 추구하는 세력에서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해당 이슈를 논하는 것 자체를 막아버린다던가 하는 일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특정한 사례는 언급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이 의제가 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는 이러한 정치적 태도들은 결국 해당 의제의 진보를 위해서도 도움이 안된다는 것에 있다. (다만 해당 의제를 잘 소화하고 잘 전달하는 몇몇 ‘스타’들은 나올 수 있겠다.)
진보좌파가 가야하는 길은 어찌되었든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 더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람다운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서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정도로 나는 이해했다.
내가 한국 사회에 보탬이 될 게 뭐가 있겠냐만서도 사실 우리나라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하는 안타까움이 들 때면 진짜 거짓말 안보태고 울적해질 때가 있다. 정치의 실종. 합의의 실종. 그저 극성의 래디컬하고 자극적인 메시지에 더 귀기울이는 기성 정치권은 신물나면서도 대안처럼 일어나는 목소리에도 그렇게 마음을 주기 어려운 부끄러운 나날 속에서 그래도 더 꿈꿔야 할 일은 남았다는 실마리를 주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북토크를 갔고 역자이신 홍기빈 소장님과 장석준 선생님의 깊은 통찰을 엿보고 올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