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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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총서 (12)
목차
- 제1부
봄을 꽂다
오는가
너를 기다리며
혼자 노는 법
자매
퇴비
딸기농장
빈방
지구를 쓸다가
공간 예약
고해
그리마
미담을 찾습니다
팝업 북
햇빛 샤워
히비스커스
산속에서 헤매다
2부
알 수 없는 한 가지
물고기 비누
가을 상자
시인이랍시고 앉아있는 내게
그냥 날 내버려두세요
숨은 뿔이 솟아났어요
이 잔을 들겠느냐
서성이는 정물화
바운드, 바운스
탁구 판타지
공동의 적
토이 스토리
사이시옷
오래된 안녕
3월의 화살나무
레옹 마틸다
착지의 자세
3부
촌로 기행
꽃의 비말
뉴스를 맛보다
코로나 유감
달의 위상
별을 세다
꽃댕강나무
시든 사과
크로노스를 위한 변명
츤데레
거리에서
오작교
옥상 토끼풀
쓸데없는 짓
매미의 노래
불면의 구조
어라운드Around
4부
나약해지기 위한 독서
공중 부양 매달린
반 팔을 입고
모감주나무 열매 부딪히는
나비 이야기를 읽고
백일홍 서시
한 떨기 꽃 같은
귀여운 여인
마늘밭
몸빼 바지
시절 연가
나무 의자
해바라기
열 폭 병풍을 펼치다
융점
클릭하다
현기증
김은미 시집 해설
출판사 서평
희망이 사라진 시대의 희망 찾기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출산율 저하가 우리 사회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출산도 모두 기피하고 있다. 국가와 지자체는 많은 대책을 세우지만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놓는 대책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몇몇 제도나 경제적 지원만으로는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가장 근본적 원인은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기대가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제 사람들은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출산율이 낮아 우리 사회의 미래에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희망이 없어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다. 이렇듯 희망이 사라지면 사회를 유지할 동력이 사라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희망이다.
김은미 시인의 시들은 이 희망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렇다고 희망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절망을 과장하거나 반대로 근거 없는 낙관으로 쉽게 희망찬 미래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의 시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꿈과 행복을 가져오고 희망을 품게 하는지 찬찬히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일단,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희망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창 너머 스물네 시간
사선으로 서 있었을까
정지된 시간처럼 보이는
노란 카카오ㅡTㅡ바이크
뜨거운 커피 앞에 두고
빠르고 잔잔한 기교
음악 듣고 있으면
추웠던 몸속으로 스미는 위로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한 여자
무인카페 유리창에 비친 내 표정처럼
식어가는 종이컵
홀더 틈에서
내가 달그락거린다
- 「너를 기다리며」 전문
지금은 기다림이 사라진 시대이다.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해결하고 충족해야 한다. 이런 즉각적 욕망 실현을 위해 세상은 빠르게 발전해 오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카카오ㅡTㅡ바이크”도 “키오스크도” 다 그것을 위해 생겨난 신문물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물건들에서 기다림을 생각한다. 좀 더 빨리 움직여 기다림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공용 자전거의 모습을 보고 반대로 그것이 기다린 시간을 생각한다. 시인이 아니면 쉽게 가질 수 없는 시선이다. 시인은 또한, 무인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리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시간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기다림도 기다림을 만들어내는 그리움도 모두 없애고 있다. 문명의 이기들이 그 그리움의 간극을 지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애써 그 기다림의 시간을 음악을 들으며 즐기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그리움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이다. “내가 달그락거린다”는 말은 이 그리움의 정서가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그 순간의 느낌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 기다림에서 온다는 것은 다음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남동생도 오빠처럼 직장생활 끝내고 영농후계자
신지식인 대열에 합류해
논과 퇴직금을 합쳐 비닐하우스 지었다
후회 없다는 부부가 딸기 모종 심고
겉잎 따주며 꽃피기를 기다린다
반지 빠지는 줄 모르고 잎 따주는데
뒤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며
형님 딸기 옷 다 벗기지 말라고 걱정이다
꽃피면 호박벌 넣어 수정시키고
사진 찍어 보내준다고 하니
하얀 눈 덮인 12월
하얀 딸기꽃 피기를
꿈이 딸기처럼 빨갛게 매달리기를
- 「딸기농장」 전문
빨간 딸기의 탐스러운 모습과 희망의 느낌을 잘 연결한 작품이다. 시인은 아주 담담하게 동생네 농장에서 체험한 일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짧은 경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을 딸기의 이미지로 포착해낸다. 지금 여기의 먹음직스러운 딸기가 아닌, 앞으로 “빨갛게 매달리기를” 꿈꾸는 딸기가 훨씬 큰 행복감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행복은 희망에서 온다. 그리고 그 희망을 위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 기다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신탄진 재래시장 가시면 양살구나무도 괜찮아요
한그루 사다주세요
화분에 심었다가 당신 내게 땅 한 뼘 내밀면 옮겨 심으려구요
...(중략)...
울타리 넘어지고 반듯한 단열재 위 시멘트가 부어지면 큐브 건물이 올라가는군요
더 기다릴 수 없어요
옥상 텃밭으로 위로받을 수 없어 살구나무 한 그루 심으려구요
- 「공간 예약」 부분
시인은 살구나무를 심을 땅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시멘트가 부어지”고 “건물이 올라가”며 나무를 심을 땅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화분에라도 살구나무를 심어 그 꿈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어쩌면 시를 쓴다는 것은, 이 화분에 심은 살구나무를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장 실현될 수 없는 기다림을 끝없이 연기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헛된 희망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시인의 노력은 화분에 살구나무를 심어 나중에 얻게 될 땅에 당당하게 큰 뿌리를 내릴 살구나무를 꿈꾸는 행위와 닮았다.
희망은 관계의 복원과 그것을 통한 진정한 소통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수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복잡한 관계망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런 복잡성이 관계의 피상성을 만들고 사람들은 각각 뿔뿔이 혼자가 된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하고 살고 있다. 김은미 시인은 사람들 사이의 이 단절을 넘어서는 희망을 꿈꾼다.
관계를 맺기 위해
사이시옷 글자 한 개
더 갖고 있었으면
맺어진 뒤에도
허전함 느낄 때
떠오를 수 있도록
나뭇가지 ㅅ받침
정원사가 잘랐어도
나무가지
꽃을 피우고
잎도 잘 자라지
잘려 나온 사이ㅅ
옷걸이에 꽂혔다가
빠져도
단절은 아니야
잇는 본분을 잃지 않으니
글자 아래
존재감 없는 듯 보이지만
받침이 없었다면 세상에
세상은 얼마나 헐거워 졌을까
- 「사이시옷」 전문
시인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시옷”을 생각한다. 잘린 나뭇가지에서도 옷걸이에서도 사이시옷을 본다. 이 사이시옷이 없는 “나무가지”도 잘 자라겠지만, 그러나 이 사이시옷이 없는 세상은 너무도 허전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이시옷은 글자와 글자를 잇고 의미와 의미를 잇고 나아가 존재와 존재를 잇는 바로 그런 글자이다. 이 글자가 없다면 세상은 “헐거워”지고 사람들과 사람들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사람들의 외로움과 슬픔은 더 커졌을 거라고 시인은 상상하고 있다. 이것이 희망을 위해 관계를 확인하고 소통을 복원해야 할 이유이다.
다음 시는 시인의 이런 소망을 좀 더 강조해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고독의 허물 벗고
홀로 타인이 되어 가는 중
되돌아오는 메아리
이명인가
상상일까
집착을 부르는 떼창
- 「매미의 노래」 부분
시인은 매미들의 “떼창”에서 사람들이 함께 하는 어떤 세상을 상상한다. 그것은 고독 속에서 모두가 “홀로 타인이 되어 가는” 그런 현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소통의 부재 속에 매미의 떼창은 공동체의 복원을 향한 희망의 노래로 들렸을 것이다. 그게 이명이건 상상이건 시인은 이런 꿈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매미처럼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한다. 김은미 시인은 이 매미의 노래를 통해, 희망을 꿈꾸는 자로서의 시인의 사명을 생각하고 있다.
또한, 희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성형 틀에서 비늘 굳어진 시간
나이테 가지고 태어난 물고기 한 마리
작아 보인다고요
한세월 보냈어요
미끄러운 점액질 글리세린
조금 더 먹었더라면
손안에서 빠져나와 달아났을 텐데
목욕탕 거울 앞에서
동면에 들까요
달아나는 유일한 방법은
미끄러져 거품으로 흘러가는 것
가까이 다가가 작아지게 도와주는 것
풍경처럼 흔들린다면
향기라도 나눠 줄 텐데
다시 태어나고 싶을까요
하트나 장미
풍뎅이나 나비
네모나 동그라미
비 오는 날
비린내 난다고 환풍기를 돌려요
밖에선 향기가 난대요
- 「물고기 비누」 전문
시인은 물고기 모양의 세숫비누를 보면서 다른 것 되기를 꿈꾼다. 비록 물고기가 되어 다시 바다로 가거나 풍경이 되어 처마 끝에 매달리지 못하더라도 거품으로 사라져 향기로 남기를 바란다. 그렇게 사라지고 달아나 자유를 얻어야 집안에서 갇혀, 상해 비린내를 풍기는 그런 존재를 벗어날 수 있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세상은 우리를 사회 조직에 편입하여 법과 질서와 제도로 구속한다. 이 편안함 속에서 우리는 세숫비누처럼 점점 자신의 존재를 잃고 사라져 간다. 시인은 상상 속에서나마 이런 억압에 저항하고자 한다. 그것은 미끄러운 물고기가 되어 세상의 손안에서 빠져나가거나 거품으로 자신의 존재를 바꾸어 세상에 향기를 전하며 사라지는 것이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후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인지 모른다.
다른 것이 되는 삶을 꿈꾸는 것은 세상의 질서와 가치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것이다. 시인은 이것을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완료를 누르고 아차
삭제를 했는데 제 마음 읽었나요
습관대로 살고 싶어
당신을 클릭하면 짠 나타나는 꿈을 꾸었어요
번호를 누르고 종료를 누르면
내가 읽히나요
내 전부를 떠올려 주기를 바랍니다
왼쪽 신호를 주어야 하는
마지막 통과선
오른쪽을 눌러 방향을 바꿨더니
알면서 모른 척 해준 귀여운 당신
훈련되지 않은 손끝의 터치
마구 자란 풀꽃처럼 피어서
거칠게 뽑힌다 해도 괜찮아요
이미 머뭇거리는 손길의
감촉마저 알아버렸습니다
- 「클릭하다」 전문
시인은 약속된 기호를 “클릭”해야 하는 손동작이 오작동했을 때의 의외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 완료를 눌러야 할 때 삭제를 눌러 지우고 싶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표현하고, 왼쪽 깜빡이를 넣어야 하는데 오른쪽 깜빡이를 넣었지만 이와 상관없이 마음이 전달된 순간을 경험한다. 이 “훈련되지 않은 손끝의 터치”가 “마구 자란 풀꽃처럼 피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꾼다. 잘못 찾아든 길이 지도를 만들 듯 잘못한 “클릭”이 “당신을 클릭하면 짠 나타나는 꿈”이라는 희망을 만들 수 있다는 즐거운 상상을 시인은 하고 있다.
시인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제시하는 사람은 아니다. 희망을 말하는 것은 종교지도자나 정치지도자의 몫이다. 그들은 이것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또 지배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희망이 실현된 적은 거의 없다. 시인은 반대로 사라진 희망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희망을 제시하는 대신 무엇이 희망을 가로막고 있는지 또 무엇으로 희망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가 시인이다. 시인의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꿈꾸고 우리를 일상의 구속에서 해방하고 아련한 꿈에 대한 그리움을 제공한다. 그것이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희망의 약속이다. 김은미 시인의 이 시집에서 그 아름다운 희망의 언어를 만날 수 있어 기쁘다.
기본정보
ISBN | 9791192374437 | ||
---|---|---|---|
발행(출시)일자 | 2024년 02월 21일 | ||
쪽수 | 140쪽 | ||
크기 |
127 * 205
* 12
mm
/ 30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와편견 서정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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