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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도 걷는 사람

손현숙 시집 | 양장본 Hardcover
리토피아포에지 156
손현숙 저자(글)
리토피아 · 2023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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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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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시를 쓰고 싶은 것일까? 소가 신으로 보이는 그때는 아마도 사람의 육안과 뇌안은 닫히고 심안과 영안이 열리는 순간, 그것을 시라 이해하면 어떨까. 그 순간을 고스란히 받아서 포정은 소의 각을 뜨고, 시인은 문자로 시를 받아쓰는 고독하고도 절박한 삶의 방식. 시가 반드시 도, 는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봐야 하는 견자의 의무를 지고 가는 것은 분명하다. 시인의 시는 문자를 다루는 기술을 넘어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지평까지 끊임없이 밀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시간을 지나고 세상을 건너서 무심코, 무심한 시가 좋은 시라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런 시. 춤추는 것처럼, 음악이 흐르는 것처럼, 저 혼자서도 살아서 흘러, 고요해서 아름다운 시. 하늘의 별처럼 온 우주가 집중해서, 간절해서, 차라리 아무도 시라고 눈치채지 못하는 시. 절대로 늙지 않는 자연처럼 늙어서 꼬부라져도 늙지 못하는 짐승을 가슴에 들이고 사는 괴물. 그런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때가 시인으로는 정말로 시를 쓰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보다 시인이 앞장서지 말기를. 이유 없이 꽃이 피고 또 꽃이 지는 듯. 쌀 씻어 밥하는 일에서도 담담하게 시 한 편 건져 올렸으면 좋겠다./시인의 산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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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손현숙

손현숙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이 있으며,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가 있다. 연구서로 '발화의 힘', '마음 치유와 시'가 있다.

목차

  • 제1부
    멀어도 걷는 사람
    야생이 돌아왔다
    저 목련의 푸른 그늘
    홍화산사
    소식
    그 빗소리
    반음, 이상하고 아름다운
    슬픔의 각도
    산사나무에는 붉은 귀신이 있다
    사라진 발목은 모르는 일이다
    엽서처럼 눈이 온다
    소리로 오는 모습을 본다
    간빙기
    훗날
    신화처럼
    정오


    [중략]


    제4부
    모르는 쪽
    역병이 지나가면 다녀가세요
    절망을 견디는 한 가지 방법
    무명지
    리젝트
    타인의 출발
    엄마, 자꾸 누가 불렀다
    나비가 날개를 말리는 시간
    파묘
    그 많던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졸업
    카렌시아
    나는 그저 비겁해져서
    면회
    완성은 지루하다
    다시, 아비정전

    시인의 산문|손현숙 시인의 그늘, 혹은 조각들

책 속으로

멀어도 걷는 사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 숲으로 돌아가야 이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모르겠는 여기, 눈빛으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야생이 돌아왔다

유연하고 견고한 저 발바닥의 곡선은 개양귀비의 언덕과
강기슭을 거닐던 눈부신 저녁의 한 때를 기억한다
우리에 갇혀 있었던 조 씨 할아버지의 공작새
모이를 주는 사이 문틈으로 탈출했다는
소문은 아무래도 잘못이다 탈출이 아니라 본능이다
처음부터 가팔랐던 제 속의 벼랑,
거스를 수 없는 야생의 방식 앞에 내가 서 있다

중문을 지나 오색의 꼬리를 거느린 채 마당으로 들어오는
조용하고 태연한 저 몸의 권력,
나는 혼자 비상을 꿈꾸며 날개 밑에 공기를 품듯
입 안에 가득 공작새, 이름을 지어 불러본다
누가 저 유장한 말씀 앞을 가로설 수 있을까

난간에 뿌리내린 이름 모르는 식물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을 따라나선다, 나도
공작새처럼
배를 밀 듯 딱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는
목소리도 아니고
기척도 없는 달의 궤도처럼,
저 몸짓은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다

저 목련의 푸른 그늘

햇살이 꽃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꽂고 정오를 넘는다 나는 매일 저것들의 생기를 빤다 밤이 오면 입술에 흰피를 묻힌 채 잠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모르는 척,
나는 아침을 밟으면서 싱싱하다 꽃잎 한 장 넘기는 것은 내가 나를 낳는 일, 깊게 팬 쇄골의 그늘, 목젖까지 부푸는 저 목련의 푸른 그늘,

홍화산사

홍화산사에 꽃물 들더니 근심이 생겼습니다 찢어진 가지에서 애순이 돋을 적부터 도진 지병입니다 잊어야 하는 무엇들이 되돌아오는 것 같아, 꽃그늘에서 저만치 걸음을 걷는 무렵입니다

홍홧가루 자욱하게 터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골목 너머 아이들이 비눗방울처럼 부풀었다 꺼지는 그 순간에도 보리수나무 흰꽃 속에는 붉음을 채우고 있었던 걸까요 마당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나는 왜 검은 상복 같은 옷만 입는 걸까, 이미 옷은 노랗게 물이 든 다음입니다

고양이 울음은 영문을 모르겠고 저녁으로 기울어지는 하늘은 낮아서 이별입니다 고개를 꺾어 바라보는 그곳에도 바람은 곱게 불어줄까요 아직은 보리수열매가 익지 않아서 맨발로 땅을 밟아보는 지금 누가 생일 축하해, 잊었던 내가 문득 돌아옵니다 홍화산사, 울음 같은 붉음이 와글거립니다

소식

눈이 온다
발도 없고 입술도 없는 것이
조용한 몸짓으로 온다
한 가지의 동작만으로도
한 생이 가고 또 온다
저렇게 눈부신 한때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는 이 있을까
오래된 애인의 편지를 읽는다
나는 모르고 저만 아는,
달의 뒷면처럼
언제 저렇게 몸에 새기면서 살았을까
나 아닌 내가 나를 읽는 지금,
본 적 없는 내 뒷모습은
나일까, 나였을까, 우리는
서로 모르는 시간을 건너서
생각이 멈춰선 자리에서 돌아오는
꽃의 이름,
그만 그치면 좋겠다 싶었는데
발자국 위에 또 발자국을 찍는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의 방향에서
사향노루의 비릿이 몰려온다

그 빗소리

모르는 이의 부고를 받았다 문득 6월이 아팠다 보리수열매 발갛게 익어갈 때 등 뒤가 욱신거렸다 아픈 줄도 모르면서 팔다리 흔들고 사는 내가 아팠다 까닭 모를 물까치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뛰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다른 세상의 무엇들이 얼핏, 왔다 갔다 입술 꼭 다물어 말이 없다 모두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다 생생한데, 알겠는데, 손금 밑으로 손금이 칼금처럼 선명해지면서, 내 전생 어디쯤 내렸을 빗소리가 내 뒤를 밟고 오는 것 같았다

반음, 이상하고 아름다운

능소화 꽃둘레가 하늘 귀를 사르는 동안이었을 거다 아주 먼 데서 우레가 가는 길을 우레가 지나가고 머리 위로 뭉게구름 사소하게 다녀간 후, 푸른 잠에서 푸른 잠으로 날아가는 부전나비 한 쌍을 비스듬히 좇고 있었다 반백 년이 흐르고 나는 가난한 책장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낮별 떼가 하늘 사닥다리를 타고 반짝거렸다 어느 틈에 아침이 오후 두 시를 사시斜視처럼 데려왔다 바람은 비에 젖어 능소화 꽃둘레 무지개를 타고 올랐다 물에 불은 꽃잎이 담장을 기어오른다 허공에 한 금 한 금 긋는 고양이 비음 사이로 그림자를 등진 사내가 어깨의 햇빛을 털면서 왔다, 갔다 그의 뒷덜미에서 목소리가 부풀었다 졸음처럼, 남서쪽에서 잠비가 올라오는 중이라 했다 오만 년 전의 이야기다

슬픔의 각도

나는 기울어지면서 중얼거린다 그녀의 방, 그녀의 산책길, 그리고 함께 걷는 그 골목의 바람, 바람의 묘지들, 고개를 꺾어 바라보는 하늘, 별들 사이로 검은 물줄기, 밤으로 건너가는 발자국, 가다가 문득 뒤돌아다보는 그림자, 그림자에 그림자가 스며들 듯 아직 오지 않은 그때의 소리들, 그리고 또 가끔씩 불러보는 낯선 이름, 이상한 소용돌이, 그 무늬들을 받아쓰다 보면 둘째 절의 음가를 조금 높이 들어 올리는 웃음소리, 강가에 나가 있는 먼발치, 묵음으로 내리는 밤비, 무언의 증인, 말없이 사라지는 아, 목젖처럼 갈라지는, 어디론가 성큼 걸어 들어가는, 서둘러 발목을 따라가는, 느닷없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말, 말, 또 말……, 장미의 입술로 허공을 할퀴는, 허방 속으로 발을 빠뜨리는, 몸 깊은 곳에 정자로 새겨진, 찢어도 찢어지지 않는, 침묵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책장처럼 나는 지금……,

산사나무에는 붉은 귀신이 있다

산사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손가락을 치켜올리자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손바닥에 꽃잎을 받아내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와 이별 중이다 끝과 끝이 닿아서 무슨 모양을 이룰 것인가, 겨울나무의 직립에 대하여 오래 생각한 적이 있다 이별은 그 어느 부근쯤에서 왔지, 싶다
과거로 돌아가는 빨간약을 삼킬까, 고민했던 흔적, 나는 거기서 살기나 살았었는지 별점을 치러 문을 나서다 말고 전생을 지금 또 살고 있다는 생각, 너는 그때도 등을 보였고, 또 서성이면서 산사 꽃그늘 아래로 몸을 들인다 새들이 자꾸 봄을 물고 와서 물방울 같은 무덤을 짓고 간다

사라진 발목은 모르는 일이다

강변이었다 햇덩이가 사람들을 삼켰다 내 발목을 태웠다 발목 다음은 무릎이겠지, 각오를 한다 그것은 키 큰 나무가 성큼성큼 그림자를 키울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해의 붉음이 노을 쪽으로 울음을 운다 나는 왼쪽 무명지를 바른쪽 엄지로 세게 문지른다 발목 없이도 길을 갈 수 있을까, 인파 속에서도 얼굴은 선명하다 왜, 꿈속에서도 사람들은 붉음으로 쏟아지는가
노을을 끌면서 강물이 흘러간다 나는 한 장면을 붙들고 싶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누가 기울어진다 아는 얼굴이었는데 모르는 사람이어서 이름은 없다 바닥을 딛고 일어서려는데 내가 너무 멀다
사라진 발목은 모르는 일이다

엽서처럼 눈이 온다

물푸레나무, 역광으로 서 있다 허공 속으로 뿌리 내렸다 팔 벌린 가지에는 이파리 한 낱도 없다 눈썹 쓸 듯, 쓸어가는 구름 묵음으로 내리는 하늘 그림자
한 발짝 건너 또 한 발짝 근처가 없는 사람의 집, 그 어디쯤에서 발자국 풀어 살아도 되겠다
사람이 살기도 하고 살지 못하기도 하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땅 나도 저 땅에 발 들여놓은 적 있다 구릉에는 푹푹 눈이 쌓이고 비밀의 보유자들이 무언의 증인처럼,
한 발짝 건너 또 한 발짝 외딴 사람의 외딴 풍경, 번개와 우레가 들끓어서 피어나는 꽃, 구름이 땅속에서 돋아 하늘로 간다 발바닥은 쉴 곳을 모른다는데

기본정보

상품정보 테이블로 ISBN, 발행(출시)일자 , 쪽수, 크기, 총권수, 시리즈명을(를) 나타낸 표입니다.
ISBN 9788964121948
발행(출시)일자 2023년 12월 25일
쪽수 136쪽
크기
133 * 219 * 19 mm / 416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리토피아포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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