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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편견 기획시리즈 9
김승 저자(글)
실천 · 2023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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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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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의 『속도의 이면』은 크게 4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주옥같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총서 (6)

작가정보

저자(글) 김승

계간 《시와편견》 둥단
《시와편견》 공동주간,
시편작가회회장, 시사모·한국디카시학회 회장
《모던포엠》 자문위원, 현대시학회 회원
시집 『오로라 & 오르가즘』, 『물의 가시에 찔리다』, 『시로 그림을 그리다』, 『속도의 이면』을 펴내다.

목차

  • 1부
    비를 켜다

    골디락스 존
    구토
    끄자
    누리예수님
    반항
    비를 켜다
    십자가 아래서
    오르골
    오컴의 면도날
    이것은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이혼
    일방통행
    제임스 웹
    토리노의 말
    투표

    2부
    용실호텔

    11시 11분
    광명을 지나며
    다시 금남로에 서다
    뚜껑
    반동
    상고대
    손수건
    쇳밥
    용실호텔
    중독
    진영
    카스트 외전
    코알라
    피에로 다리
    하느님도 배달의 민족을 사랑하신다
    회개

    3부
    죽음이 오는 방식

    개미귀신
    구 회 말
    꽃의 비명
    낙법
    누름돌
    리클라이너
    세라믹 나이프
    속도의 이면
    와인 래그
    와치 와인더
    유튜브
    죽음이 오는 방식
    진인사대천명
    포스트잇
    핑크뮬리

    4부
    대기표를 들고

    고드름
    꿈틀거리다
    뉴로링크
    대기표를 들고
    물속의 집
    밤을 지우다
    서로 사랑하여라
    선잠
    소바와 냉면
    스틸녹스
    시집과 감귤
    신세계
    차가운 말만해요
    혈서
    시집해설_복효근

책 속으로

[시집해설]

시로 쓴 혈서, 길 끝에서 불사르는 노을빛 시혼

_김 승 시인의 시집을 읽다

복효근(시인)

1.

김승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두 개의 축이 시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구에 찾아올지 모를 생물학적 종언을 염두에 둔 시인 자신의 심경, 그리고 동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약자의 삶에 대한 관심이다. 문학은 자신의 삶과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길을 열어가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은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타파하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비판적이며 참여적인 기능을 가진다.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시인이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물학적 종언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치명적 병마와 싸우면서(뒤에 살펴보겠지만 시인의 경우 ‘싸운다’는 이 상투적인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온 생을 바쳐 쓴 시편들인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언젠가 그 끝을 맞이하게 운명지어져 있다. 고등지각력을 가진 인간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 자신에게 닥쳐올 이 운명적 미래의 부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서 두려움을 넘어서고 어떻게 종언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 고뇌하고 탐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시인의 삶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집약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한 자신의 고통 속에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아픔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포함시켜 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김승 시인에게 사회적 관심, 특히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지속적인 시적 주제를 이루고 있었다. 시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또 하나의 축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경우, 그리고 이번 시집의 경우 문학의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편의상 나누어 살펴보겠지만 기실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시인의 시혼을 떠받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십 층 펜트하우스
꼬물거리는 자동차와
저녁놀을 내려다본다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공포

날아오르고 싶었던 만큼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

무너지지 않는 아파트의 신화 위에
맞지 않은 헐거운 옷

몸을 키워도
줄여도 맞출 수 없는
찢어버리고 싶은 날개

언제부터 나를 믿지 못하는 계절이 시작되었는지

만국기가 휘날리던 국민학교
담장 밑에 차려진 막걸리집
뿌연 먼지와 화약 냄새가 뒤섞인
가을 하늘

나머지들에게 주던 노트 한 권의 좌절과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들 이야기만 반짝거렸고
무성하게 흔들리던 나뭇잎 아래
다리가 짧은 아이는
늦가을 매미처럼 울기만 했지

콩밭 끝에 묻힌 엄마는
호미질만 하고 있는지
돌아올 생각도 않는데

속살을 파고든 개미처럼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가려움
거머리가 머리까지 올라가
죽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당집의 요령처럼 흔들리는 저녁

갑자기 속이 메스껍다

「구토」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대비적으로 그려진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다리가 짧은 화자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에서 등수에 들지 못했다. 화자는 ‘나머지들’로 분류되어 노트 한 권을 받아들고 늦가을 매미처럼 처량하게 울었던 절망을 회상한다. 가난한 엄마는 밭에서 돌아올 줄 모르고 기괴하고 무섭기 그지없는 어른들의 이야기만 떠오른다. 가난과 소외를 일찍이 경험한 화자는 어느새 “날아오르고 싶은 욕망으로” “무너지지 않는 아파트 신화”를 따라 40층 펜트하우스 고급 아파트에서 살며 아래를 내려다 본다. 부를 이루었으나 만족감이나 행복이 아니라 “등줄기를 훑고 내려가는 공포”를 느낀다. “몸을 키워도/줄여도 맞출 수 없는” “맞지 않은 헐거운 옷”, 날개를 찢어버리고만 싶다.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면서 “언제부터 나를 믿지 못하는 계절이 시작되었는지” 화자는 묻고 있다. 그리고 속이 메스껍다. 구토증을 느낀다.
여기서 구토는 생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념으로 인간이 사물의 본래적인 모습을 마주할 때 느끼는 생경하고 부조리한 감정이다. 싸르크르의 「구토」에서 로깡땡은 조약돌을 집어 든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조약돌은 물수제비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우연적' 존재로서 해변에 놓여 있을 뿐이고, 그가 이제까지 '물수제비'라는 본질에 의해 실존한다고 생각했던 조약돌이 사실 인간이 정해놓은 이념적 틀과 가치체계에 갇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너무도 익숙해서 거기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문득 존재감을 드러낼 때 다가오는 낯선 느낌, 또는 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습관의 지배하에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어색해지는 느낌. 사르트르는 이처럼 존재 자체가 전적으로 우연성에 따르며 필연성을 상실했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느껴지는 현실의 메스꺼움을 '구토'라고 하였다.
싸르트르의 「구토」에서 로깡땡이 겪는 구토의 의미와 온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화자도 로깡땡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리가 짧아 등수에 끼지 못하고 매미처럼 울던 자아와 펜트하우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아의 존재론적 괴리, 모순된 욕망 앞에서 어떤 것이 진짜 자아인지 실존적인 고뇌를 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를 매순간, 문득문득 경험한다. 그러니까 이 시집의 시편들은 시인의 삶과 그가 속한 사회의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고뇌의 기록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2

아직 살아있나 죽음이 아침마다 묻습니다
생은 죽어가는 기분이 어때하고 저녁에 인사합니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별처럼
몸을 두고 벌이는 전쟁

말을 버리기로 합니다
의미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생각을 지우기로 합니다

먼지와 먼지 사이로
물을 나르는 일이 삶의 전부입니다

입안에 들어가는 건 먹을 것이 아닙니다
신을 죽인 대가로 치르는 고통의 재생산

두 겹에서 네 겹으로 늘어나는 채찍에
피 흘리는 몸이 점점 가벼워짐을 느끼는

지금은 정오입니다

「토리노의 말」

니체가 45세 때에 급속히 몸이 쇠약해져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그는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으며 흐느껴 울었다. 「토리노의 말」은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이 일화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 광장. 프리드리히 니체는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다. 그 토리노 광장에서 늙은 말이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한다. 보다 못한 니체가 달려가서 늙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운다. 말 대신 채찍을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라며 울다가, 미쳐버린다. 이웃에 의해 집으로 옮겨진 니체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웅얼거린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는 식물인간에 가까운 삶을 10년간 살다가 56세에 세상을 떠난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시인의 생애는 니체의 그것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 치명적인 병마로 투병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죽음과 생이 육체를 두고 번갈아 묻는 질문에 화자는 “말을 버리기로 합니다/ 의미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생각을 지우기로 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화자는 “두 겹에서 네 겹으로 늘어나는 채찍에/ 피 흘리는 몸이 점점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 고통은 “신을 죽인 대가”라고 자인한다. 말을 버리고 의미를 포기하고 생각과 결별한 결과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듯이 죽음을 섭리로서 수긍하고 수용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몸은 구 회 말 투아웃 노 주자/ 아직 방망이를 놓을 수 없는 나/ 더그아웃에서 소리쳐 응원하는데/ 무성영화처럼 들리지 않는다// 패색이 짙은 병실이지만/ 홈런 한방에 희망을 걸고/ 비급여 고액 치료제를/ 장모님과 의논하는 아내/ 잠든 척 돌아누운 채 숨을 멈춘다.”(「구 회 말」) 홈런 한 방에 마지막 명운을 건 것처럼 비급여 고액 치료제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는 가족의 고통 또한 화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절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녀 중 하나가 “밤마다 자면서도 아프다고” 호소한다. 해 뜨면 엄마는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구두를 신고 거리를 활보하는 꿈을 꾸며 구두를 사 모으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극한의 병고를 치르고 있는 자신만큼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걸로 보인다. 한편 화자는 책을 사 모은다. 책은 외면의 한 방법이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도피처를 마련해보는 것이다. “쓰러진 꿈을 세우는 데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책”을 무덤 삼으려는 것이다.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아이와 엄마에게 ‘죽음마저’ 용서받아야 하는 운명 앞에서 소용없는 고해성사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아이의 엄마는 달려간 병원의 복도 끝에서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피는 꽃이라고/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그 끝을 기다”릴(「대기표를 들고」) 것이다. 이 절망 끝에 희망의 꽃이 과연 필까?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절망보다 오히려 희망이다.
“몸이 자석이 아닌데 먼저 보고 달려드는” 수많은 시계들 속에 화자는 산다. 시계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새 세상을 제시하며 죽은 책 속에 갇혀 있다고” 화자를 책망한다. “초침이 칼날처럼 날아오고” 이어서 분침의 칼날이 날아오고 “시침이 마지막 공격수처럼 묵직한 힘으로 척추를 치고 지나간다.” “발목에 찬 시계는 발목을 썰고 있었고 주머니의 시계는 허벅지를 자르고” 있는 고통의 극한을 그려내고 있다. 그 고통 속에 “쉽게 훔칠 것 같은 그녀의 꿈은 놓쳐버리고”(「선잠」) 만다. 그 절망의 한 중심에 ‘그녀’가 있다. 그녀에 대한 부채 의식이 죽음마저 놓아주지 않는다.
“몸은 더구나 “눈 감아도 검어지지 않는 밤을 건너며” “죽음처럼 까만 잠을 기대하면서”(「스틸녹스」) 깨어있는 시간에 몰려오는 공포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하여 수면유도제 스틸녹스를 삼키는 그 심경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희망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 오르는 희망이라는 단어
뿌리마저 없애고
지혜와 용기를 키우는 일

매일 죽어가면서 해야 할 몫이다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
부서지는 햇살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 것

발걸음 하나하나에 새기는 후회와 용서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 뒤에 오는 희열
죽어감에 감사하는 일

자유롭다는 것은 구속으로부터가 아니라
원하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

희망으로부터 자유가 진정한 해방이며
구원의 길임을

돌아오지 못할 길이 더 아름답다

「일방통행」

시인은 정면돌파를 택한다. 우회할 길이 없다. 이 길이 일방통행임을 인정하자. “손을 놓을 때는 과감하게 놓아야 한다”라고 미련을 두지 않는 결별을 다짐한다. “더 부드럽게 낙하지점에 낙하하기 위하여” “가슴에 구멍을 내며/가을을 준비하는 담쟁이”(「낙법」)처럼 그 길을 따르기로 한다. 꿈도 기도도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도 놓기로 한다.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부질없는 일 같은 것, “부서지는 햇살에게 안부를 묻지 않는 것.” 의미를 두지 않는다. 희망마저 두지 않는다. 비로소 진정한 해방과 구원은 희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화자는 제임스 웹을 통해 블랙홀을 본다. “텅 빈 공간/ 모든 걸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블랙홀// 어머니 가슴처럼 모두 내어주고 남은 상흔/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놀라운 모성”을 본다. 그 빈 곳을 향해, “그 속으로 이제 다가가고자” 한다. 그렇다고 고통이 끝난 것은 물론 아니다. 다시 고통이 몰려온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회피하고 도피할까 했던 그 통증은 아니다.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알리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알리는/ 환희의 통증”인 것이다. 제임스 웹이 보여준 블랙홀을 통해 화자는 더욱 선명하게 그 빛을 보았다. (「제임스 웹」)돌아오지 못할 길이 더 아름답다는 것, 우리가 가는 길은 일방통행이라는 것을 보았다.
시인은 모든 것을 놓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 길은 가능하다고 한다. 시인의 시에 ‘비’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의 내적 심경를 반영하는 심리적 상관물이다. 그는 비가 “목적 없이 내린다”고 한다. “비는 호수에 내려 무의미의 왕관을 만들며 내린다. 비는 이유도 의도도 없이 내린다. 발가벗고 뛰어내려 만나는 사람마다 가슴 한복판으로 파고든다.” 목적도 이유도 의도도 없이 찾아온 비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밤마다 달이 떠오른다고 매일 자살한다. 반항하고 혁명을 꿈꾸다가 결별한다. (「이혼」) 다시 말하면 니체에게처럼 화자에게 말도, 의미도 생각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고통받는 이 순간의 나는 본질에 앞서 실존할 뿐이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익숙한 삶에 대하여 느끼는 낯선 이 감정과 태도, 이것이 로깡땡의 ‘구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전의 삶과 결별일 뿐이다.
시인의 시에는 비가 내린다. 내려서 “꿈이 젖는다/ 목까지 차오르는 그리움”이 된다. “길거리를 붉게 물들이고/질퍽한 꿈에 달라붙는다.” 얼핏 죽음을 예감하는 어두운 감정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읽힐 수 있으나 그렇지만은 않다. 비는 “가슴 한복판으로 떨어져” 시인의 꿈은 “소용돌이친다.” 그 꿈의 실체는 “윤회를 끝내고 싶다”는 소망이다. 불교의 용어를 빌리면 니르바나를 향한 꿈인 것이다. 육도윤회를 멈춘 그 자리가 열반이다. 천국이나 그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자리다. 화자는 “삶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교향곡”이어서 “몽유병 환자처럼 안개를 덮어쓰고 새벽을 기다려” “하프를 타듯 비를 켠다” “그치지 않은 빗소리는 죽음의 속삭임으로 감미롭다.”(「비를 켜다」) 준비가 되어있다. 그 빛을 향하여 블랙홀을 향하여 화자는 한 발 더 다가간다.

아침마다 덥수룩하게 자란 생각을 잘라냅니다

밤새 웃자란 생각은 쉽게 잘리지만
고정된 관념은 쉽게 잘리지 않네요

그제는 먼지처럼 구석에 쌓여있던 책을 버렸습니다
눈이 맞아 신혼집에 데려와 각주까지 사랑하던

어제는 옷과 신발 서류 가방을 버렸고
오늘은 일기장과 필기구를 버리겠습니다
마침표를 찍기 위한 한 자루 붉은 펜만 남기고

여분의 옷도 가져가지 말라시던 그분의 말씀 따라
생각도 웃자라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르고
표정도 말도 면도하겠습니다

옹이처럼 굳은 신념을 제거하기 위해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겠습니다
내일은

「오컴의 면도날」

절망을 얘기하되 결코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희망마저 의미를 두지 않는다. 블랙홀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놀라운 모성”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화자는 마침표를 찍을 붉은 펜 한 자루만 남기고 ‘과감하게’ 다 잘라낸다. 면도를 하며 웃자란 생각도 잘라낸다. 그의 도피처가 되어 주고 꿈꾸게 하던 책도 버린다. 옷과 신발, 서류 가방, 일기장과 필기구를 버린다. 다 버리고 잘라내지만 평생을 통해 굳어버린 고정관념이 쉽게 가실 리 없다. 그러나 표정도 말도 다 면도해버리고 여벌 옷마저도 생략하고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는 바에야 옹이처럼 굳은 신념, 고정관념이라고 남겠는가? 그것들에 의해 규정되던 나는 그것들 없이도 이제 나로써 스스로 규정될 수 있게 되었다. “빈 곳에서 시작하여 빈 곳에서 끝나는” 블랙홀이 화자 자신이었음을, 블랙홀이 그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줄 준비가 된 것이다.

3.

앞에서 생물학적 존재로서 한 개인이 겪는 극한의 병고 속에서 드러나는 감정과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철학을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시인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와 모순과 고통에도 눈감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갖는 구조적 한계와 모순, 그것이 파생시키는 고통에 주목한다. 또한 폭압적 정치 현실이 약자에게 강요하는 고통을 주시한다. 잃지 않아야 할 소중한 인간적인 가치가 소멸되어 가는 현실 세태에도 시인의 눈길은 피해 가지 않는다. 시인의 안에는 소명의식으로서 굳게 자리 잡은 사회 역사의식이 있다.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향한 건강한 비판의식이다. 시로써 육체의 병고와 생물학적 죽음과 마주하고 한편으론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병폐와 마주하는 것이다.
시인이 우리 사회가 갖는 병폐에 맞서는 방법은 날카롭고 핏발 선 구호가 아니다. 대신 그는 정치 현실이나 세태와 문명을 풍자의 방법으로 비판하거나 잔잔한 고백과 회개의 방식을 취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옳음에 대한 믿음과 밝아오는 은유의 빛이 있다. 공감에서 비롯된 인간적 온기가 있고 연민이 있다.
우리 현실의 폭압은 은폐되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법이나 제도

기본정보

상품정보 테이블로 ISBN, 발행(출시)일자 , 쪽수, 크기, 총권수, 시리즈명을(를) 나타낸 표입니다.
ISBN 9791192374345
발행(출시)일자 2023년 12월 15일
쪽수 160쪽
크기
126 * 206 * 13 mm / 326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시와편견 기획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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