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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김성진 시집
시와편견 기획시리즈 8
김성진 저자(글)
실천 · 2023년 11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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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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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의 이번 시집 「에스프레소」에는 응축된 시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시인의 말〉에서 풍기는 ‘시 쓰기’의 간절함과 더불어서 시적인 언어에 끝내 닿을 수 없는 시인으로서의 필연적인 한계가 그것이다. 게다가 시집 내 작품들마다 드리운 어둠이 무척이나 짙게 다가오기도 한다. 스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시공간(“악몽”)에 내몰린 자의 가냘픈 운명을 상기시키면서 또 한편으로 “웬만해서는 감성적 마음을 꺼내 보이고 싶지 않”다는 시인의 단호한 내면의 곡절이 작품들마다 벽처럼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총서 (6)

작가정보

저자(글) 김성진

2016년 《시와사상》 시 등단
2015년 《에세이문학》 수필 등단
시집 『억울한 봄』 『에스프레소』
수필집 『그는 이매탈을 닮았다』 등
진주문인협회 회장
《시와편견》 편집장
《에세이문학》 편집위원

목차

  • 1부
    바흐의 저녁

    등藤
    마지막 버스
    하층민
    바흐의 저녁
    메타인지
    41병동
    카르페 디엠
    비의 통증
    작업표준서
    주거에 대한 소고
    폐소공포증
    우물에 빠진 저녁
    허블망원경
    허블씨 은퇴를 앞두다
    에스프레소
    고목
    연하선경


    2부
    바닥론

    안개주의보
    미래 지우기
    지족댁
    블랭킷 에어리어
    턱도 없는소리
    푸른 달

    바닥론
    새도우
    아직도 배송 중
    이사하는 날
    자개농
    불편한 진실
    발자국화석
    묘지에서
    개 짖는 소리
    줄녹색박각시



    3부
    압축풀기

    실업2
    우연히 알게 된 것
    대금산 진달래
    시몽詩夢
    하지감자
    과민반응
    김치볶음밥
    고래의 여행
    사라진 나침반
    압축풀기
    업業
    선사시대에서 온 아이
    일기예보는 고장 나고
    집밖은 위험해
    한파
    무아경에 들다


    4부
    심심한 고갱님

    명태조림
    벌의 습관
    배꼽
    지금
    낡은 아침
    진양호
    지구사편찬위원회
    질량보존의 법칙
    총선
    오보
    그리고
    섬 하나
    심심한 고갱님
    물의 윤회
    갈증
    늙은 산
    우전雨前을 우리며
    소문
    시집해설

출판사 서평

어둠이 밀고 들어오는 시간

정재훈(문학평론가)

어둠은 사랑의 권리이고 꿈꾸는 사람, 이미지를 보는 사람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십사 시간 불 켜진 상점들로 가득한 빛의 도시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권리를 파기한다. 이곳에서는 거꾸로 이미지의 소멸, 사랑의 소멸이 일어난다.

〈시인의 말〉에서 마지막 구절을 보라. “나는 여전히 詩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악몽과 더불어 내면의 곡절에 드리운 어둠이 떠오른다. 이러한 어둠은 어느 시인에게든 도망칠 수 없는 시간으로 보인다. 아마도 운명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운명이 뒤섞인 어둠은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꿈, 그리고 남들이 보지 못했을 어떠한 이미지를 보고자 하는 이들의 권리는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무수한 습작들을 흘려보낸 끝에 가까스로 건져낸 희미한 시적인 것들은 단순히 창작의 소산물로 불려서는 안 된다.
이곳의 관습과 상식으로 통용되지 않으며, 무엇과도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누군가의 사랑이자 꿈일 테다. ‘시인’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자들에게 유일한 사랑이자 비범한 꿈이며 이곳에서 볼 수 없던 생경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시’는 “빛의 도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태어난다. 어둠을 짊어진 자들이 피워낸 사랑의 불꽃은 멀리서 보면 마치 밤하늘에 뜬 별빛처럼 보였으리다. 시인이 걸었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무수한 익명의 그림자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품었던 사랑과 꿈이 소멸되고 탄압받기를 원치 않던 이들에게 저 별빛은 희미한 구원의 손길이었을지도 모른다.

밤은 시간이 보내준 비우기 형식이다.

허공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궁금했을 때 덜커덩, 고요를 밟으며 온다. 적막을 깨는 포효가 공유되는 기분이다. 막차를 기다려본 사람은 시간의 무게를 안다. 바닥을 움켜잡은 바퀴소리, 기다림은 음률이 된다.

우주 속 존재감이 어느 정도냐는 물음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조차 없는 안개의 무게다. 배추 속을 채우듯 밤은 차곡차곡 저장되고 있다. 흔들림을 맡기고부터 잠은 부풀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마디를 만든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허공의 무게가 가볍게 보이는 건 우주와 호흡하는 생명체기 때문이라고 한다.

속눈썹 끝에서 바람이 가물거리며 불어온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사색하는 후각이 반갑기도 하다. 밤이 감각을 무디게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척 한다. 공허한 불안감에 등골은 식은땀이 흐른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표정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길은 가깝지만 금세 다가오지 않는다. 부러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생각이 촉을 띄우고 있을 뿐이다.

붉은 꽃받침 위 불거진 유두는 입김만 스쳐도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다. 벌초를 마친 무덤 같다. 숨을 들이마시면 소독 냄새가 가깝게 다가온다. 가볍다는 것은 포용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는 또 다른 말이다. 시간은 한없이 아주 한없이 무겁게 흘러간다.

- 「마지막 버스」 전문

막차 시간에 접어든 버스정류장의 적막한 분위기가 익숙한 이들에게 “시간의 무게”는 남다를 것이다. 육중한 바퀴가 마지막 정류장 바닥에 쏟아냈을 한숨 소리, 덜컹거리는 버스의 진동이 하루 일과를 마친 고단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위 시의 정류장은 도심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을 것 같다. 적막과 고요가 짙게 드리운 그곳은 당장에 어느 변방을 떠올리게 한다. 노선의 가장 끝이자, 그 바깥으로서 또 다른 길목인 버스정류장은 마치 우주와도 같은 생경한 세계가 된다. 가시거리가 제로(0)에 가까웠을 육중한 “안개의 무게”를 짊어지면서 화자가 오로지 “생각”의 “촉”을 높게 세워 저편의 “우주”가 내쉬는 “호흡”까지 상상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거두는 시간이다. 마치 미지의 우주 “생명체”와도 같은 어둠의 갑작스런 손길이 한낮의 관습을 모조리 거둔다. 시인의 어둠은 세상 만물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던 빛을, 그 (의미적) 명료함을 소거시킴으로써 독자인 우리를 “공허한 불안감”으로 밀어 넣는다. 익숙했던 감각이 의심되고, 안개에 의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어둠은 희열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잊힌 감각(“촉”)이 다시 되살아나 불안감으로 인해 잔뜩 숙이고 있던 “고개를 빳빳이” 쳐들게 만들고, 기어코 저승과 이승의 경계(“벌초를 마친 무덤”)를 넘나들게 한다. 관습으로 무뎌진 감각이 밤이 되어서야 마침내 눈 뜨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 눌렀던 벨이 이제야 들립니다
설익은 오이 꼭지처럼 쓴맛입니다
아무리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요, 재즈음악이 들려옵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하루라고 해 두지요
안과 밖, 중간 즈음에 소리가 존재합니다
경계에서 생긴 쓴맛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네요
하루를 깨끗이 씻어 욕조에 넣어버립니다
목덜미가 서늘해 옵니다
바닥까지 발이 닿지 않아 숨이 가빠옵니다
지나간 것은 다시 지나가지 않습니다
욕조 속 온기는 그렇게 죽어갑니다
황홀한 음악이 들려왔고
잘린 슬픔이 하나씩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벨소리는 어제를 하나하나 해체합니다
떠난다는 말이 이제야 들립니다

- 「에스프레소」 전문

누군가는 마지막 정류장을 앞두고 “벨”을 눌렀을 것이다. “오래전”에 눌렀던 벨소리가 이제야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디든 기착지일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안과 밖, 시작과 끝은 정해지지 않았다. 도착을 앞두고 울렸을 그때의 벨소리는 이후에도 다시 울릴 것이기에 끝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니 “아무리 울어도” 그 울음은 끝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눈물”은 아직 흐르지 않은 것이기에 더 울어야 할 시간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언젠가 또 다시 울음이 계속될 것이기에 눈물은 여전히 눈물로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울음은 음악처럼 감정을 전이시킨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어느 누구도 저 소리(울음/음악)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귀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가 행인의 발목을 붙잡았듯 시인의 시 또한 우리를 깊고 진한 존재론적 매혹에 사로잡히게 한다.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건넨 “떠난다는 말”이 처음에는 무척이나 쓴맛을 느끼게 했을지라도 그것을 가만히 음미하다 보면, 떠나려는 이와의 소중한 인연과 함께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선사하는 감미로움이 뒷맛으로 다가오는 때도 분명 있었으리라. 이처럼 시인에게 어둠은 단지 쓴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 시에서 우리가 존재로서 마주하게 될 세계의 안과 밖, 또는 사랑의 시작과 끝이라는 “경계에서 생긴 쓴맛”이 자아내는 “오랫동안”의 여운은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쓴맛을 넘어 또 다른 맛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황홀한 음악” 뒤에 감춰진 “잘린 슬픔”의 뒷맛을 느낄 줄 아는 이만이 존재에 대해 더 깊고 진한 고민을 할 수 있다.

밤夜을 반으로 가르자 웅덩이가 나왔다.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앉는다. 낡은 하늘은 죽은 아버지의 눈보다 깊다. 비가 오면 산이 되고 눈이 오면 동굴이 된다. 입구가 무너져 내린다. 목소리가 울리지 않아 주저앉고 만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눈을 뜨지 않는 것뿐.

눈을 감았을 때 말했을지도 모른다. 머리맡의 전화기에서 신호가 울려도 손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귀속에 담장을 만들고 있는 게 분명하다. 보이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눈과 귀가 없는 터널에서 까마귀들만 울고 있다.

빗방울이 툭, 떨어진다.
소름이 돋고
파동은 점점 커져 모든 바닥을 숨기고 있다.
땅은 젖어오는데 빗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떨어진 물방울 하나처럼
세상의 모든 공포는 바닥에 있다.

죽은 바람이 나뭇잎을 흔든다. 고개는 여전히 왼쪽으로만 돌려진다. 심장이 오른쪽에 있다.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낮은 구멍이 보인다. 철창으로 막혀 있고, 표지판엔 폭발물의 카운터 다운이 시작되고 있다. 살아있는 폐광이다. 사람들은 동굴을 빠져나갔지만, 나는 나갈 수 없다. 누군가가 입구를 막아버릴 것이 분명하다.

- 「폐소공포증」 전문

“밤(夜)을 반으로 가르자 웅덩이가 나왔다.”라는 구절을 가만히 음미해 보자.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가른다는 것은 겉을 감싸고 있던 확실한 의미에 감춰져 그동안 보이지 않은 낯선 의미를 음미하고자 함이다. 게다가 그것을 정확히 반을 가른다는 것은 그 안에 가장 내밀한 중심을 마침내 바깥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거기에서 나온 (밤의) “웅덩이”는 그야말로 내밀한 장소이다. 무심코 길을 걸었을 어떤 이에게는 발견되지 않았을, 어둡고 습한 웅덩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시인의 마음(〈시인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동굴”과 “입구” 그리고 “소리”의 공통점도 누군가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일 테다.
위 시의 화자가 느꼈을 이른바 ‘폐소공포증’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본다면 어떨까. 여기에도 여러 개의 관습적 의미의 층위들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위 시의 화자가 “이곳을 벗어나야만 한다.”라고 느낀 절박감은 시의 정경을 감싼 겉표면에 불과하다. 그 안을 갈라서 들여다보면 “땅은 젖어오는데 빗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적막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게 된다.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며 공포를 느낀다거나 무기력에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말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진리를 마주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동굴”을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이며, ‘시인’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자들의 형벌과도 같은 운명이다.

천국은 지붕 위에 있다고
몸은 바람에 떨고
조건 없이 두 손을 모으게 하는
절대 전능의 단호한 침묵
구원인가 형벌인가
늘 고통 속에서 기다리며 견디고 있을 뿐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은 믿을 수 없어
주먹을 쥐고 중지를 편 채 하늘을 찔러
독재자를 향한 충성의 다짐처럼
우렁차게
빌어먹을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답은 없어
그것이 전지전능이라면 신神과 난 도긴개긴
구원의 빛이 아니라 유혹의 빛인가 봐
세상의 중심처럼 넓고 깊게 보이다가
낙엽 한 잎보다 가볍기도 해
분노가 출렁거려
나를 믿지 마라
누가 저 높은 곳에 유혹을 걸어두었나
이미 죽었던가
원래 살아 있지 않았던 것
헝클어진 머리
부스스한 조명은 바닥을 비춰
바람과 독대하는 푸른 고요가 잠시 지나가고
식은땀이 등줄기에 흘러내린 것
그것은 아름다운 전율
캄캄하고 독특한 소리를 거쳐 절정이 올 때까지
쉴 새 없이 유혹하고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비겁해
위선으로 세운 물렁한 성
갈라지는 성벽 아래 차가운
바람이 불어

- 「벽」 전문

앞서 “귓속에 담장을 만들고 있는 게 분명하다”(「폐소공포증」)고 느꼈듯이 인간의 몸은 본래 ‘죽음’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적 한계에 놓여 있다. 김성진의 시적 세계에서 죽음은 “헝클어진 머리”와 “부스스한 조명”으로 무대화된다. 이로써 엿볼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사유는 어둠과 함께 뒤섞여 있다. 마치 도깨비불을 연상시키는 “푸른 고요”와 독대하고 공포를 느낀다(“식은땀이 등줄기에 흘러내린 것”). 죽음은 아직 살아 있는 자들 앞에 벽처럼 거대하게 서서 “절대 전능의 단호한 침묵”을 일관한다. 화자가 바라본 벽 너머에는 “원래 살아 있지 않았던 것”들이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로 기습적인 출몰을 준비한다. 그것들이 이곳으로 출몰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악몽’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또 한편으로 “아름다운 전율”이다. 두렵고 절망스러워도 그 감춰진 이면에는 삶에 대한 아름다운 진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누군가는 죽음 앞에서 겨우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화자에게 이것은 지금까지 기다려 온 낯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구원”의 순간이다. 죽음은 삶이라는 예측 불가한 바닥 위에 온갖 관습과 “위선으로 세운 물렁한 성”이 무너질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물렁한 성(城/聲)이 바닥으로 남김없이 흡수될 때, 그것은 분명 빗소리처럼 “캄캄하고 독특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갈라지는 성벽 아래”로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차가운 / 바람”이 내는 소리도 이처럼 기괴하게 들렸지만, 화자의 시선은 줄곧 어둠 속에 깃든 “유혹의 빛”에 머물러 있었다.

그만 바닥을 뚫어야지
동그랗게 물고기 눈을 끔벅거리는 사람들
곧 모란동산에 꽃이 활짝 필거라는
그것은 전망이 아니라 차라리 소망

바닥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늘 거칠고 평평하지 않아
단 한 번도 한곳에 머무른 적 없어

딛고 일어설 바닥 하나쯤 있었으면 해
이왕이면 넘어져도 깨지지 않는
모랫바닥 같은 탄력을 지녔으면 해

바닥 아래에 꿈을 잡아당기는 자석이 있나봐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불안해

세상을 힘껏 받쳐주고 있는
그냥 딛고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
바닥은 정상 바로 그 아래에 있어

- 「바닥론」 전문

바닥은 언뜻 보면 치열한 생존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이것은 뚫거나 평평하게 만들어야 할 대상이 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에 집착할수록 바닥에는 과거에 회자된 무수한 “전망”들과 갖가지 이론들이 뒤엉켜 밟힌다. 그래도 이 거친 바닥에서 살아남아야만 하고, “이왕이면 넘어져도” 충격을 덜 받을 수 있는 “탄력”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세상은 소리친다. 동그랗게 눈을 치켜뜨고 사방을 경계하며 동산의 연못 안에서만 지냈을 “사람들”의 모습은 세상의 압축판이다. 또 한편으로 누군가는 이곳의 생존에 쫓겨 어디에도 마음 놓고 머물러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단 한 번도 한곳에” 머물도록 허락되지 않기에 “정상”은 그저 신기루와 같은 “소망”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꿈을 잡아당기는 자석”에 의해 단단히 고정된 채로 저마다 고립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온당한 삶일까. 동산에 조성된 인위적인 연못처럼 일목요연하게 배치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불안”하다는 느낌마저도 말끔히 지워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무언가를 꿈꾼다는 것은 생존의 논리를 비롯한 관습이라는 강력한 자력(磁力) 내에서만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보편화될수록 생존에 최적화된 이론은 마치 절대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힘을 얻게 된다. “정상”에 올라간 순간 그것은 ‘마침표’처럼 최종 완결을 선언하면서 바닥의 어둠을 지운다. 모든 것이 불안하면서도 완벽한 “빛의 도시”가 그렇게 세워진다. 그곳에서 모든 권리는 파기되며, 이미지를 비롯한 사랑까지도 소멸되는 것이다.

내 몸 가로세로 중앙엔 우주발사대가 있다
내 고향 우주로 돌아가기 위한 전진기지이다
어릴 적 동네 우물 속이 궁금해 거꾸로 뛰어들었다가
우물귀신이 내게 준 특별한 장치다
우주인과 교신할 때는
배를 내밀어 모세의 기적을 만들고
소통의 모르스를 친다
돈스 돈스 돈 돈 돈…
아버지는 내가 보낸 신호를 받고 별똥별을 내린다
먹이를 찾는 까마귀 떼
하늘에서 웅성거리면 얼른 위장막을 친다
저녁에 내려온 반딧불이가
어둠을 타고 내려와 숲 속에 숨어버리면
하늘은 서서히 문이 열리고
내가 살던 별로 가기위해
우주발사대에 인공위성을 세운다
현재시간 00시 00분, 발사 준비 끝
미래로 날아가기 위해 시동을 건다

- 「배꼽」 전문

“마침표를 거두고 바다로 가야 한다는 말”(「고래의 여행」)이 어쩌면 위 시에서 말하는 “미래로 날아가기 위한 시동을” 거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자석에 고정된 채로 살았던 바닥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바다를 유영하는 누군가의 몸짓이 떠오른다. 생존의 논리와 이곳의 관습에 의해 찍힌 마침표의 중력에서 벗어나 우주와도 같은 광활한 바다로 향한다. 바닥에 묶여 살 때는 모르고 있었던 몸의 낯선 감각들이 서서히 눈을 떴을 것이다. 하늘에 서서히 문이 열리고 생경한 별빛들이 펼쳐진다. 위 시의 화자는 바닥에 위태로이 발을 딛고 섰던 몸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 또 다른 중심을 찾아내 “우주발사대”를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에 의한 정교한 이론이나 정확한 예측과는 거리가 멀다.
바닥에 세워진 우주발사대와 “인공위성”에 관한 기술의 출처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것은 화자가 어릴 적 보았던 “우물귀신”에게서 건네받은 “특별한 장치”로부터 나왔다. 밤에 감춰진 웅덩이가 시간이 지나 더 깊어져 ‘우물’이 되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꿈은 세월이 지나 이제 광활한 우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게 될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우물을 닮은 ‘배꼽’을 가리켜 흔히 세상의 중심으로 비유하지만, 이것은 어느 한 곳만을 특정하여 가리키는 게 아니다. 누구든 저마다 제 어미 배 속에 잉태되어 탯줄로 연결되었고 그것이 끊어짐과 동시에 단독자로서 이 세상에 나와 생을 이어오고 있기에 그렇다.
김성진의 시집 내 곳곳에 세워진 우주발사대는 더 많은 인공위성들을 우주로 쏘아 올릴 준비를 할 것이다. 우주로 향하고자 하는 시적 상상에 의해 세워진 우주발사대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배꼽과 같은 중심은 어디든 있으며, 그만큼 각자의 꿈과 사랑이 지금도 저마다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내가 살던 별로 가기위해”서는 어둠 속에서 그 좌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어둠은 그곳에 별이 있음을 증명한다. 한낮에는 보이지 않았던 별이 어둠에 의해 마침내 증명된다. 시인에게 어둠은 특별한 권리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과 꿈, 그리고 언젠가 시로써 노래하게 될 이미지의 소멸을 막기 위한 권리이자 막중한 의무가 시인에게 주어져 있다. 중력을 이겨내며 발사체를 하늘 높이 밀어 올리듯 어둠이 곧 우리를 밀고 들어올 것이다.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사랑과 꿈, 이미지는 지금도 무궁무진하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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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2374321
발행(출시)일자 2023년 11월 06일
쪽수 136쪽
크기
126 * 205 * 12 mm / 306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시와편견 기획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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