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이상한 가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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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남 소설집 『아주 이상한 가출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이미저리(imagery)는, 우선적으로 ‘나이듦에 따른 소외와 그것을 견뎌내는 일’의 비애라 할 수 있다. 그런 한편으로 소설의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노년이라는 존재론적 인식에 따라붙는 나이듦에 따른 소외감과 더불어, 나이듦을 통해 타자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은 포용력을 갖는 존재로 성숙해 갈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1) 이 글에서는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심리와 의식의 고유한 국면에 대한 작가의 천착이 형상화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노년 소설로서의 정수남 소설의 미학적 고유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 책의 총서 (4)
작가정보
198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접목’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집으로 『분실시대』『별은 한낮에 빛나지 않는다』『타성의 새』『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시계탑이 있는 풍경』『길에서, 길을 보다」『앉지 못하는 새』등이 있으며, 장편소설로『행복아파트 사람들」, 시집으로『병상일기』산문집으로『시 한 잔의 추억(1)(2)』과 어린이 글짓기 책으로『소설가 정수남 선생과 함께 떠나는 365일 글짓기 여행(1)(2)』이 있다. 자유문학상과 대한민국 장애인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문학저널 창작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일산문학학교와 파주문예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고, 한국작가회의,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한국소설가협회 감사와 창작21작가회 상임고문과 한솔문학 고문, 고양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정수남 소설가
작가의 말
지금 나는 서 있다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하면 나는 아파트 창밖의 애기단풍나무를 내려다보곤 한다.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지만 지난해 중심 가지가 부러지는 아픔을 당하고도, 또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 추위에도 그 조그만 나무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게 신통하다. 살아 있다는 걸 알리겠다는 듯 봄이 오자 다시 그 앙증스러운 빨간 이파리를 조심스럽게 펼치기 시작했다.
나무는 수직성을 지니고 서 있을 때 아름답다. 쓰러진 것, 뿌리가 뽑힌 것, 토막이 난 것들은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나무는 사람의 숙명과도 닮은 데가 많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벼랑에 몰린 고통이 아무리 참담하더라도 서서 버티고 있어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평의 자세가 되어 눕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굴복이다. 그런 까닭에 시련과 고통이 덮쳐와도 이 악물고 끝까지 서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나는 지금 서 있다.
쓰러지지 않고, 곧바로 서 있다.
내가 땅에 발붙이고, 이처럼 서 있다는 건 나를 나 되게 하는 내 자긍이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내 자존심이다.
소설이 실종된 시대라고 한다. 이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세상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 찼고, 그것보다 더 재미난 것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4년 만에 소설을 묶어 책을 펴낸다는 것이 어찌 보면 무모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두렵거나 후회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을 읽겠다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무모할지언정 용감해지고 싶은 마음이다. 그 사람을 위해 나무처럼 수직성을 유지한 채 언제까지라도 서 있을 작정이다.
어제는 비가 내렸고,
오늘은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다.
내일은 또 어떨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내일만큼은 햇빛이 눈 부시게 밝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벌써 40년이 지났다니, 시간의 무정과 공평을 절감한다.
책이 출간되기까지 곁에서 도운 소설가 김나영과 수필가 조수행, 그리고 도서출판 들꽃의 문창길 시인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이 아직도 뇌경색으로 몸이 자유롭지 않은 아내에게 큰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살아 있게, 이 나이들도록 꼿꼿하게 서서 숨 쉬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23년 6월 중순 파주 교하에서 저자 씀
목차
- 작가의 말
지금 나는 서 있다 _ 4
아주 이상한 가출기 _10
아무도 오지 않는 밤 _40
흉터 _62
이사 _90
길을 찾아서 _118
고수高手는 없다 _148
집 _182
후아유 _234
작품해설
심영의_ 존재에 대한 자기의식으로서의 소설 _ 286
책 속으로
아주 이상한 가출기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웬만하면 집구석에 눌러앉아 있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나이 칠십이 넘었으면 모르는 척 눈 딱, 감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동안은 꾹, 꾹, 누르며 참고 또 참았다. 맘엔 없어도 이따금 언죽번죽 비위도 맞춰주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꼴만큼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사십 년 동안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몸을 사르며 수고한 나보다 어떻게 그 조그만 강아지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지났으나 ㅎ는 여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벤치에 앉아 땀을 닦으며 ㅎ를 기다리던 나는 소리의 향방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 벤치였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의 무릎에 앉아 있던 이루보다 작은, 까만 털 복송이 강아지가 나를 발견하곤 짖어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강아지는 이빨까지 드러내고 더 앙칼지게 짖어댔다. 여자가 목줄을 놓아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통까지 곧추세우고 버둥거렸다. 그 바람에 나무 그늘을 따라 지나던 행인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힐끔거렸다.
땡볕에도 나무들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무수히 펼쳐진 이파리들 위로 빛발이 모든 것을 태울 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공원에서 건너다보이는 ‘청년 과일가게’와 ‘생생 정육점’, ‘SK 핸드폰’도 문은 열려 있었으나 드나드는 손님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 땡볕을 피해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ㅎ는 핸드폰도 받지 않았다. 하긴, 어찌할지 몰라 하는 나에게 한 수 가르쳐줄 친구인데, 조금 늦으면 어떤가. 한숨을 길게 토해낸 나는 그때까지도 나를 노려보며 짖고 있는 강아지에게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왜, 그래?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까짓 강아지 새끼가 뭐라고……. 세게 찬 것도 아니었다. 어디 찰 데가 있다고 힘껏 차겠는가. 그런데도 나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한 아내는 내 변명 따위는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죽을 것처럼 숨넘어가는 소리로 엄살을 부리는 이루를 안고 냅다 고래고래 소리부터 질러댔다. 사실 그런 악다구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귀가 따갑도록 듣곤 하여서 이젠 만성이 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날만큼은 나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이다. 내 존재가치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큰 소리를 질러 봐도 나보다 더 기를 쓰며 강파르게 달려드는 아내를 당해낼 재주는 없었다. 나는 결국 전병접시를 그대로 놔둔 채 아내를 피해 도망치듯 내 방으로 건너오고 말았다.
문을 걸어 잠그고 방안에 들어앉아 혼자 씩씩거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끼눈을 뜨고 있는 아내를 상대로 싸울 방법이란 그나마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궁리해낸 것이 가출이었다. 그래, 떠나자. 나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두렵고 싫었다. 결국은 힘겨운 싸움이 될 게 틀림없었다. 또 그런다고 아내가 항복하거나 타협하자고 하지 않을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혹 결과가 그렇더라도 추락할 대로 추락한 나 자신의 위상을 생각하면 더 이상 앞뒤를 재고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이참에 아내 못지않게 나만 보면 이빨을 드러내고 가르랑거리는 조그만 그 녀석에게도 단단히 경종을 울려줘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이 칠십에 가출이라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은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무작정 등산 배낭에 속옷 몇 개와 티셔츠 등을 쑤셔 넣고 아파트를 나왔다.
그렇다고 특별히 갈 곳을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쾌감에 온몸을 떨었다.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단지를 벗어나면서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음음한 날씨였다. 마른장마가 열흘 넘게 계속되고 있는 하늘은 여전히 잔뜩 흐려 있었다. 그러나 걸음은 이상스럽게도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처음엔 되도록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낯선 곳에서의 시간이 왠지 불안하고 두려운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결국은 지형지물에 익숙한 곳, 큰 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두어 마장쯤 벗어난 곳에 있는 백조 대중사우나의 지하 찜질방을 택했다. 그동안 아내 몰래 여축한 비상금이 좀 있긴 했으나 그것으로 몇 날을 버틸지 알 수 없는 까닭에 경비는 아무튼 아껴야 할 처지였다.
눈두덩이 유난히 튀어나온 찜질방 카운터 여자는 내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배낭을 맡기자 며칠이나 있을 거냐고 퉁명스레 물었다. 나는 어눌하게 하루, 하고는 정말 그 안에 모든 게 다 끝났으면, 하고 바랐다.
-생략-
출판사 서평
존재에 대한 자기의식으로서의 소설
‘나이듦과 그것을 견뎌내는 일’의 비애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된다. 다만 그것을 선선히 수락하려 하지 않을 뿐. ‘노인’이라고 짧게, 나지막하게 발음해 보라. 어떤 이미지와 감각이 떠오르고 느껴지는가. 박범신은 그의 소설 『은교』(2015)에서 늙은 소설가 이적요의 입을 빌려 “너의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고 항변하지만, 아무려나 노인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이제 노 키즈 존(No Kids Zone)에 이어 노 시니어 존(No Senior Zone)이 생기기도 했으니.
정수남 소설집 『아주 이상한 가출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이미저리(imagery)는, 우선적으로 ‘나이듦에 따른 소외와 그것을 견뎌내는 일’의 비애라 할 수 있다. 그런 한편으로 소설의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노년이라는 존재론적 인식에 따라붙는 나이듦에 따른 소외감과 더불어, 나이듦을 통해 타자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넓은 포용력을 갖는 존재로 성숙해 갈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1) 이 글에서는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심리와 의식의 고유한 국면에 대한 작가의 천착이 형상화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노년 소설로서의 정수남 소설의 미학적 고유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노년에 이른 작가들의 원숙함, 소설의 형식적 구성에서 보다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노년의 삶을 포함한 인간 존재의 문제를 작가의 연륜과 경험에서 배어나는 통찰을 통해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이란 무엇보다 이야기이며, 이야기를 통한 인간 존재의 재발견 혹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성찰일 것이므로, 정수남 소설은 그러한 몫을 충분하게 감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려나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된다.
- 생략-
기본정보
ISBN | 9788961432283 | ||
---|---|---|---|
발행(출시)일자 | 2023년 06월 30일 | ||
쪽수 | 304쪽 | ||
크기 |
151 * 221
* 18
mm
/ 54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들꽃소설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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