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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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진 수사는 의인화를 잘 구사하여 시의 주제를 선명하게 하고 시에 활력을 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의인화법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자연과 사물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번 시집이 거둔 큰 성과임이 분명하다.
- 강나루(시인)
이 책의 총서 (83)
작가정보

ㆍ호 : 範官 (범관)
ㆍ1966년 경북 고령군 개실마을 출생
ㆍ시집 『개실마을에 눈이 오면』(2005년)으로 작품 활동, 『차 한 잔 하실래요』, 『생의 무게를 저울로 달까』, 『무화과나무가 있는 여관』, 『바람과 달과 고분들』, 『귀를 씻다』
ㆍ2014년 《시와사람》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ㆍ고령문인협회장 역임
ㆍ달성문인협회수석부회장
ㆍ계간《시와 늪》 심사위원
ㆍ계간《詩 하늘》 운영위원
ㆍ대구시인협회 이사
ㆍ대구문인협회 이사
ㆍ달성문인협회, 〈시와사람〉시학회, 〈함시〉 동인
ㆍ창작과의식문학상 수상
ㆍ고령문학상, 대구의 작가상 수상
ㆍ전국계간문예지 우수작품상 수상
ㆍ경북작품상 수상
목차
- 시인의 말
1 귀를 씻다
귀를 씻다
동자승
부처 아닌 게 없더라
무덤
절반쯤은 극락이다
법기암의 약사여래불
불두화佛頭花
초록경草綠經
바람의 전언
몽돌
때론 풍경이 슬플 때도 있다
용연사 두꺼비
황등을 밝히고
선운사 동백꽃
소쩍경經
거룩한 탄생
어탁魚拓
별빛경전
어사화 개론
섬에서 부치는 편지
안부 도시락에 관한 이야기
금호강
황포의 강
부처
2 이팝 솥
이팝 솥
호텔에서의 무단취식
그놈을 놓치고 말았다
해인사
사문寺門에 들다
유등연지
처서處暑
밥상
봄비
차마 물을 수 없는 안부
11월
방房
강가에서
저녁 강가에 핀 활짝 꽃
이중섭
별빛 역
솔거미술관
양귀비 꽃
호박
쉬바 수트라
곡지혈
아픈 청춘에게
3 만월
대견사에서
보름달
몽유夢遊 같은 안부
따뜻한 꿈
먼지 쌓인 상자를 열었는데
만월
탑
천도재薦度齋
백중
첫눈
청개구리
맨드라미
거미
시의 탯줄
봄날의 시
백발과 청바지
詩를 쓰라고
일장하몽
4 저물어 피는 몸꽃
저물어 피는 몸꽃
신 춘곤기
헌화
낙타
그녀의 립스틱 총알은 어디로 날아갔는가?
작별의 귀의처 1
작별의 귀의처 2
찰나刹那의 삼월처럼
봄날은 간다
말응디산 봉수지
깨어난 토제방울
대가야왕릉 헌다례
정견모주여! 대가야 역에 내려라
송해 선생
바람의 손을 잡고
꼭두의 전설
|작품론|
불교적 사유를 통한 세계와의 소통 / 강나루
책 속으로
귀를 씻다
팔공산 어느 암자에서 붉은 녹을 덮어쓰고
가슴에 멍이 든 채 앉아있는
철제 여래좌상을 오래 바라본 적 있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인생길에
웃음을 간직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나를 다독이며 살아간다는 건
날마다 바람에 귀를 씻고
강물에 귀를 씻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를 닮은 부처가 강물에 오래 귀를 씻는다
동자승
매화꽃 동안거 하다
올망졸망 동자승
가부좌로 앉았다
오늘 아침
연화대蓮花臺에 앉은 전생을 본다
부처 아닌 게 없더라
천년 고목에 보름 달빛이 촛불처럼 걸렸습니다
山門에 들어 묵언하며 지낸지도 달포가 지나가고
그렇게 겨울의 끝자락에서 다시 새 봄을 만났습니다
산새 노랫소리에 새벽 아침을 열고 솔숲에 들면
세상에 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삼십 년 세월의 가슴속 보따리를 풀어 계곡물에 철철 흘려 보냈습니다
산길에서 만나는 모든 풀잎과 돌잎들이 부처 아닌 게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무덤
공양간에서
밥을 고봉으로 담아 내 놓았다
지나가던 노스님 말씀
야야! 그 무덤 같다
절반쯤은 극락이다
홍류동 물속에는
붉게 풀린
여자가 있다
천 년을 한결같이
저 산에 미쳐
예까지 왔구나
해인사 선방 앞에
알몸으로 좌선하는
홍단풍 한 잎
법기암의 약사여래불
신라 천년의 꿈속에서
누가 정을 쪼아 생生을 불어 넣어
석불石佛로 태어났다지요
잠시, 길을 잃어 한양에 머물렀다가
한양에서 신라로 다시
가야산의 산새 울음 호젓한 800고지 능선에
대자대비의 석불石佛은 가부좌를 하고
소원 하나 꼭 들어준다는 일념으로
당신 앞에 눈 감은 합장으로 줄지어 서는 중생들을
측은지심으로 굽어살핀다지요
당신의 용안容顔에 점안식 하는
고요와 적막을 깨우며 깊은 영감을 안겨 주었던
형용할 수 없는 환희의 그날
하늘 구름 사이로 만다라, 만다라 꽃, 붉게 피었다지요
오늘은 산을 넘어온 아침 해가
당신 이마에서 한층 눈부십니다
불두화佛頭花
마당 한 귀퉁이
한 여인이 울고 있어
누구냐고
묻고 싶었으나
조심스러웠다
초록 치마,
비바람에 휩쓸리며
오체투지로 버티고 있었다
허연 머리 풀어 헤치고
고개 숙인 채,
어느 전생의 곡비哭婢소리는
길을 잃어,
길을 찾고 있었다
초록경草綠經
나무의 몸 안에서
부끄럼 없는
당당함의 물소리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산에 올랐지만
아! 이 허허로움이란
초록은 속살을 밀어내며
경전을 펼쳐 놓고
바람은 자꾸 내 등을 떠민다
쉰다섯 그런 허망의 봄날에는
좌선하듯,
초록경草綠經을 읽는다
바람의 전언
미팔군 후문 골목길을 걷다
골동가게 진열장에 비스듬히 턱을 괸
반가사유 좌상에 발길 오래 머문 적 있다
전깃줄 앉은 까마귀 북쪽으로 날아간
허공의 길, 바람의 혀는 차가웠다
깊어가는 그날 밤
문지방 넘나드는 예언처럼 보내는
적막의 검은 그림자에 등을 기댄 채
시공을 넘나드는 바람의 전언 속으로
내 영혼을 깨우는
전생의 부처가 가부좌로 앉아 있었다
몽돌
보름달 밤
보리수나무 아래
둥글게 몸을 말고
좌선한 채,
전생의 업보를 닦고 있는
몽돌을 본 적 있다
내 가슴에도
인忍으로 새긴 사리가
몽돌처럼, 모질게 자리 잡아
가끔,
몽돌이 달빛 아래서
흐느껴 울 때 있었다
출판사 서평
▣ 작품론
불교적 사유를 통한 세계와의 소통
- 김청수 시집 『귀를 씻다』
강 나 루
(시인)
1.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다움’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본능보다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행동함으로써 한 인간으로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려 한다. 이러한 삶을 지향하는 원동력은 특히 예술가들에게는 분명한 지각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살아온 총체성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예술가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이를 근간으로 한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
그동안 김청수 시인이 보여준 시세계는 불교적 관념을, 자신의 체험을 구체화함으로써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왔다. 시집 『귀를 씻다』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다 심화된 불교적 상상력을 구현하고자 한다. 물론 불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생명성에 관한 탐구,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연민과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시켰다.
『귀를 씻다』 기저에 흐르는 불교적 상상력의 원천은 시를 통해 짐작해 보건데, 그의 삶이 불교적 관념을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모든 사물을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사유하는 신념이 충만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서정시는 시인의 삶이 지향하는 세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김청수 시인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를 잘 조탁되고 절제된 언어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세계에 매몰되어 그의 시가 보편성을 비켜나가기 보다는 독자들에게 수긍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설득력을 가졌다.
2.
우리민족의 핏톨에는 유교와 불교적 관념이 흐르고 있다. 유교, 혹은 불교라는 특정 신앙에 몰두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오랜 역사를 통해 삶의 근간에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관념이 곳곳에 박혀있다. 설사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하여도 우리민족 개개인의 의식 속에 어떤 형태로든 내재해 있어 삶을 움직이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뿌리 깊은 관념은 민족의식 형태로 존재하여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김청수 시인 또한 마찬가지일터이지만, 특히 불교적 관념이 그를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그의 삶을 움직이는데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은 비움의 세계, 혹은 무無에 이르는 것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부처를 닮기 위한 수행의 한 과정을 드러낸 것이다.
팔공산 어느 암자에서 붉은 녹을 덮어쓰고
가슴에 멍이 든 채 앉아있는
철제 여래좌상을 오래 바라본 적 있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인생길에
웃음을 간직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나를 다독이며 살아간다는 건
날마다 바람에 귀를 씻고
강물에 귀를 씻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를 닮은 부처가 강물에 오래 귀를 씻는다
- 「귀를 씻다」 전문
앞에서 밝힌 것처럼 김청수 시인의 시세계의 기저에는 불교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그러므로 매 시집마다 그것들이 시적 경향의 주류를 이룬다. 일상과 사물을 불교적으로 사유하고 해석해 온 것이 여태까지 그가 보여준 시세계였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러한 시편들이 많지만, 이전보다 보다 깊은 사유를 한다. 그리고 사유의 깊이와 함께 실천적인 시쓰기를 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팔공산 어느 암자에서” “철제 여래좌상”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불상에 주목하는 것은 “가슴에 멍이” 들었지만 미소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붉은 녹을 덮어 쓰고” 있는 불상의 시각적인 모습에서 화자는 가슴에 멍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부처(불상)가 마치 ‘살아가는 일이 힘들지만 미소를 잃지 마라’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실타래처럼 뒤엉킨 인생길에/웃음을 간직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나를 다독이며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팔공산 어느 암자의 가슴에 멍이 든 부처가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라고 하는 것 같아 화자는 “날마다 바람에 귀를 씻고/강물에 귀를 씻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화자는 세상에 난무하는 온갖 말들에 상처를 입고, 상처를 준다는 인식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를 닮은 부처가 강물에 오래 귀를 씻는다”고 하는 것이다.
‘불두화佛頭花’는 꽃의 생김새가 부처의 머리를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불두화를 여인으로 의인화시킨 「불두화佛頭花」를 읽는다.
마당 한 귀퉁이
한 여인이 울고 있어
누구냐고
묻고 싶었으나
조심스러웠다
초록 치마,
비바람에 휩쓸리며
오체투지로 버티고 있었다
허연 머리 풀어 헤치고
고개 숙인 채,
어느 전생의 곡비哭婢소리는
길을 잃어,
길을 찾고 있었다
- 「불두화佛頭花」 전문
김청수 시인은 그동안 의인법을 가끔 시에 적용해 왔다. 이번 시집에서는 의인법은 물론 활유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시에 활력을 넣고 있다. 잘 알다시피 의인법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생명사상이 근본이다. 활유법 또한 무생물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이 작품에서는 의인화법을 구사함으로써 불두화를 한 여인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마당 한 귀퉁이”에 피어있는 불두화를 “한 여인이 울고 있”다고 한다. 꽃이 사람이 되는 순간이다. 그 여인은 “초록 치마,/비바람에 휩쓸리며/오체투지로 버티고 있었다”라고 묘사하는데, 실은 비바람에 꽃을 피운 불두화일 뿐이다. 그런데 의인화를 통해 ‘울고 있는 여인’이 되고, ‘온갖 시련을 겪은 여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허연 머리 풀어 헤치고/고개 숙인 채,” 있는 모습이 마치 여인이 전생에 ‘양반집 장례 때 주인을 대신하여 울어주던 계집종’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른다. 그러므로 오늘은 불두화가 되어 비바람을 겪으면서 오체투지로 “길을 찾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길’은 ‘불두화’가 암시하듯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시인은 마당가에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면서 부처의 길을 생각하여, 이를 통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용연사 두꺼비」에서도 두꺼비를 의인화시켜 화엄의 세계에 들고자 하는 수행자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신록이 짙은 6월
적멸보궁 돌계단 올라가다보면
두꺼비 한 마리
법문 듣고 있다
전생의 업으로는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앉아,
목탁 소리 듣고 있다
묵시의 저녁을 내려놓은 순례자처럼
용연사 깊은 그늘,
화엄 속으로 걸어 들고 있다
- 「용연사 두꺼비」 전문
이 작품에서 ‘두꺼비’를 의인화시켰는지, 안 시켰는지는 별 의미가 없다. 의인화시킨 것으로 바라보면 두꺼비를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일 뿐이지만, 의인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두꺼비’라는 미물조차 ‘순례자’로 인식하는 시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고, 그 두꺼비가 화엄에 들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생각의 깊이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록이 짙은 6월/적멸보궁 돌계단 올라가다보면/두꺼비 한 마리/법문 듣고 있다” 이 작품에서 두꺼비가 실제의 두꺼비인지, 아니면 석물로 된 두꺼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두꺼비가 법문을 듣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부처의 전신사리를 봉안한 당우인 적멸보궁에 이르는 돌계단으로서 법문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부처의 말씀처럼 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두꺼비는 “전생의 업으로는/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지만 목탁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자체가 시적 화자에게는 ‘순례자’처럼 보여지고, 그럼으로 하여 “용연사 깊은 그늘,/화엄 속으로 걸어 들고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살펴본 것처럼 김청수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의인법은 시의 활력은 물론 생명성을 고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초록경草綠經」에서는 푸른 나무를 하나의 경전으로 바라봄으로써 나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엄숙해지고 경건해진다. 「소쩍새」에서도 밤중에 우는 소쩍새 울음조차 경소리로 인식하여 “일억 오천만 년 전,/전생에 가장 즐겨/읽었던/소쩍경”이었다고 한다. 소쩍새 우는 소리를 통해 “내 업이 소멸을” 꿈꾸는 화자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별빛 경전」 역시 새벽녘 쏟아지는 별빛조차 바라보면 화염바다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눈에 보이는, 혹은 귀에 들리는 사물과 사물들의 소리를 하나의 경전으로 인식하는 태도가 그의 삶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3.
불교에서 생명성은 매우 중요한 화두이며 가치이다. 살생을 금하고 있는 계율인 생명사상은 모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그래서였을까. 김청수 시인 시세계에서 생명성 탐구는 오래 천착하고 모색해 온 그의 시적경향이다. 오늘날 소비가 미덕인 산업사회에서 파생되는 생태환경에 대한 위기를 노래한 수많은 시인들의 시편들과는 다르게 생명의 본질은 탐구하고 있다.
햇살 맑은 오후
붉은 고추잠자리
날개의 포쇄를 시작하는데
숫 잠자리 날아와
암놈의 목을 낚아챈다
사랑이란 저렇게,
몸과 꼬리를 붉게 달구어
뜨겁게 불타는 것
사랑은 또 저렇게,
배꼽에서 일체가 되는 것
- 「처서處暑」 전문
이 작품은 원초적 생명성에 대한 탐구를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붉은 고추잠자리가 여름장마에 눅눅해진 날개를 햇볕에 말리고 있을 때 숫 잠자리가 날아와 “암놈의 목을 낚아챈다” 매우 폭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격한 사랑의 행위를 강조하고자 일부러 거칠게 묘사하고 있다. 숫 고추잠자리의 본능과 번식을 위한 행위를 통해 생명성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숫 잠자리의 행위를 화자는 “사랑이란 저렇게,/몸과 꼬리를 붉게 달구어/뜨겁게 불타는 것”이라고 한다. 고추잠자리는 본래 붉은 고추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붉다’라는 시각적 이미지가 작용하고 있는데, 그러나 화자는 “몸과 꼬리를 붉게 달”군다 라고 색채이미지와 사랑의 행위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붉다’의 색채이미지와 ‘뜨겁다’의 감각적 이미지가 서로 만나며 사랑의 격렬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때가 ‘처서’인데, 처서란 24절기 중에서 여름을 벗어나기 직전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자신들의 유전자를 닮은 새끼들을 번식시키기 위해 본능에 충실한 고추잠자리들의 사랑이 “배꼽에서 일체가 되는 것”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은 고추잠자리 암 수 두 마리의 하나됨, 즉 동일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봄비」는 자신이 낳은 목숨을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질타와 함께 버려진 목숨을 거둬들이는 품 넓은 시인의 품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늦은 밤,
축복처럼 봄비가 내리는데
비에 흠뻑 젖은 아이가
현관문 앞에 앉아 울고 있다
자식도 내질러 놓고
버리는 세상에
죽이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인간 구실 못하는
개 같은 사람들이
버리고 간
강아지 한 마리
축복처럼 우리집에 와
‘봄비’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 「봄비」 전문
‘봄비’는 생명을 재촉하는 시적 상징을 함의한다. 더불어 버려진 목숨에게 화자가 새로 지어준 이름이기도 하다. 봄비가 내리는데, 그것도 늦은 밤 “비에 흠뻑 젖은 아이가/현관문 앞에 앉아 울고 있다”. 어미에게 버림을 받았는지, 아니면 어떻게 어미와 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화자의 현관문 앞에 울고 있는 강아지의 소리를 화자가 들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낳은 자식조차 버리는 비정한 모정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가끔 들어왔다. 강아지가 버려졌을 것이라고 여긴 화자는 “죽이지 않은 것만도/천만다행이”라는 생각한다. “인간 구실 못하는/개 같은 사람들이/버리고 간/강아지”라고 단정한 화자는 강아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봄비’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강아지의 이름을 지어준 것만으로도 화자가 강아지를 입양하여 키우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것도 생명을 의미하는 ‘봄비’가 “축복처럼 우리집에” 왔다고 한다. 생명경시풍조의 세태에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시인의 생명사상이 오롯하게 녹아나 있는 매우 의미있는 작품이다.
생명을 귀하게 인식하는 시인의 태도가 다음 작품에서는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의 고단함을 묘파하고 있다.
어둠이 내린 강가
백로 한 마리 낮게 날고 있다
둘레 길을 따라 만보를 걷는 동안
홀로 오늘 밤 잠자리를 찾고 있는 듯
백로가 여기저기 기웃 거리며
갈대밭의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노숙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이윽고 저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쉴 수 있는
낡은 여인숙에 드는 걸 보았다
순간, 쓸쓸한 가을날 청춘의 스크린이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오늘도 고단한 하루가 지나간다
- 「강가에서」 전문
누군가는 생명을 지켜나가는 일을 ‘슬픔’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살아가기 힘든 비극성이 깃들어 있다고 인식한 까닭이다. 저녁이 되면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휴식을 위해 자신의 안식처로 깃든다. 사람도 저녁이 되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어두운 강가에서 백로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때마침 화자는 강가의 길을 따라 걸으면서 백로를 발견한다. “홀로 오늘 밤 잠자리를 찾고 있는 듯/백로가 여기저기 기웃 거리며/갈대밭” 어디께에 있을지도 모르는 휴식처를 찾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모습을 “노숙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고단한 하루의 노동을 쉴 수 있는/낡은 여인숙에 드는 걸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갈대밭 위를 날며 노숙할 거처를 찾는 백로의 모습에서 화자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쓸쓸한 가을날 청춘의 스크린이/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노숙해 본 적이 있는 자신이 노숙, 즉 생의 슬픔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생명성을 지키고 보전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오늘도 고단한 하루가 지나간다”며 생명의 본질과 지난한 삶을 깊이있게 사색하는 것이다.
생명성을 탐구하는 김청수 시인의 작품에서 의인화법이 시의 이미지를 보다 명징하게 하고 더불어 생명성을 강조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놈을 놓치고 말았다」에서 ‘그놈’은 ‘달팽이’ ‘송충이’로 한편으로는 ‘조폭들’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달팽이’와 ‘송충이’를 조폭이라고 함으로써 ‘그놈들’은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해 ‘나무’ ‘텃밭’에서 자라는 것들을 먹고 살아가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유등연지」에서도 유등연지에 피어있는 연꽃들을 ‘분홍의 낭자들’이라고 하여 불교의 상징인 연꽃의 생명성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4.
다음은 김청수 시인의 가족사 시편이다. 그동안 펴낸 그의 시집에 자주 나타나는 시적경향이다. 뷔폰이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고 하였듯이 필자는 “시는 그 시를 쓴 시인을 닮았다”는 말을 믿는다. 이는 시인이 겪은 삶과 현실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김청수 시인의 시편들 중에서 유독 가족사의 슬픔과 연민이 깃든 작품들이 매 시집마다 등장하는데, 이는 시인의 의식 속에 까마득한 날 저 세상으로 간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각이 그의 의식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아있음’은 육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함께 있다는 뜻이다. 죽었어도 죽지 않은 것은 자신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몽유夢遊 같은 안부」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물고기가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붉은 태양이 세수할 때
그리움을 물고 새 한 마리 날아간다
어머니는 밤을 새운 고통 속에서
얼굴도 모르는 동생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놓고
풍선의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멈출 수 없는
붉은 혈血을 방바닥에 쏟을 때
할매는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아침도 굶고 학교 간 형은
온종일 책상에 앉아
붉은 노을만 책상위에 그렸다
나는 울다가
할매의 마른 젖을 물고 잠들고
오늘도
붉게 반짝이는 강물에
엄마는 얼굴을 씻고 간다
- 「몽유夢遊 같은 안부」 전문
시의 제목처럼 화자는 마치 꿈속에서 보는 듯한 까마득한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린다. “어머니는 밤을 새운 고통 속에서/얼굴도 모르는 동생을/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동생을 산통 끝에 낳는다. 화자가 너무 어렸으므로. 더불어 동생이 일찍 죽었으므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풍선의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멈출 수 없는/붉은 혈血을 방바닥에 쏟을 때/할매는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산고 끝에 동생을 낳은 후 피범벅이 된 어머니와 산실을 할머니가 닦던 모습이 역력하다. 어머니가 죽고 동생마저 죽은 후 집안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 우울하고 슬프다. 그러므로 “아침도 굶고 학교 간 형은/온종일 책상에 앉아/붉은 노을만 책상위에 그렸다”. 이렇듯 시적 화자, 즉 김청수 시인은 오래된 슬픈 가족사이지만 왜 일생동안 그때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생각나는 걸까. 사람은 특히 가족사의 우울하고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정서적인 충격이 크기 때문에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어떤 형태로든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린 김청수 시인은 울다가 할머니의 마른 젖을 물고 잠들곤 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아침을 굶고 학교 간 형이 책상에 ‘붉은 노을’만 책상에 그리고, “오늘도/붉게 반짝이는 강물에/엄마는 얼굴을 씻고 간다”에서 보듯 ‘붉은 노을’ ‘붉게 반짝이는 강물’ 등 ‘붉은’ 색채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가. 어머니가 동생을 낳을 때 붉은 피를 흘렸던 것을 본 화자의 의식 속에서 ‘붉은 색’은 ‘슬픔’의 이미지로 깊게 각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의 서두에서도 “붉은 태양이 세수할 때”의 붉은 색채이미지가 시인의 의식 속에서 매우 예민하게 작용하는 것 같은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김청수 시인의 가족사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죽음으로 덧칠된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비극성이 시인의 삶 속에서 여전히 시인의 의식 속에서 살아있다. 시인은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혈육의 죽음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그의 시는 말해준다.
코로나19로 닫혔던,
해인사海印寺 산문山門이 열리던 날
동생과 엄마를 위하여 천도재를 올렸다
동생이 세상에 태어날 때
엄마는 하혈이 멈추지 않아
통증에 흔들리며 병원 침대에서
마지막까지 검붉은 꽃 뭉텅뭉텅 피워놓고
빈 가죽부대처럼 누워 있었다
그 비릿한 향기가
천상의 향기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
얼굴도 모르는 동생은 젖배 곯다 엄마 따라갔고
나는 울지 않았지만 봄날은 눈물 대신 꽃비를 뿌렸다
배고파 할머니 빈 젖통을 빨 때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젖은 눈빛
신묘장구대다라니와 금강경을 독송하며
위패에 눈길이 머무르는 순간,
묘한 기운의 바람이 앞을 지나갔다
하늘위로 반야용선 같은 구름이 둥둥 떠 있고
언젠가는 우리가 함께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이 또한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 「천도재薦度齋」 전문
천도재는 불교의 한 의식으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고, 영가靈駕로 하여금 악도를 놓고 선도로 지급하도록 기원하는 의식으로 7일만에 초재, 그리고 2재에서 6재를 거쳐 마지막 7재를 종재로 지낸다. 그러나 죽은 지 오래된 경우도 지내기도 한다. 김청수 시인에게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은 늘 그의 의식과 함께 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코로나19의 역질로 문이 닫혔던 해인사가 마침내 산문이 열리던 날 화자는 어머니와 동생을 위하여 천도재를 올렸다.
김청수 시인이 이처럼 천도재를 자꾸 지내는 것은 어머니와 동생의 업장이 두텁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이 김청수 시인의 삶 속에 죽은 어머니와 동생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동생을 낳기 위해 어머니는 하혈을 하고 산고로 병원 침대에서 검붉은 꽃 뭉텅뭉텅 피어놓고 마치 빈 가죽부대처럼 누워있는 모습이 시인의 의식 속에 여전히 살아서 시인의 삶의 일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그 비릿한 향기”는 피의 냄새였으며, 시인은 “천상의 향기”라고 하지만 ‘죽음의 냄새’이다. 그리고 동생은 배를 곯다가 어머니를 따라갔다. 어린 화자는 울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서 “봄날은 눈물 대신 꽃비를 뿌렸다”라고 하지만, 슬픔은 어린 김청수 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대신 할머니 빈 젖을 물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어떤 것이었을까. 김청수 시인은 시인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을 잊지 못하고 그들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신묘장구대다리니와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가 “언젠가는 우리가 함께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때문에, 비극적인 가족사의 상처를 헤짚으며 오래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와 동생에 대한 위로는 그의 시편 여기저기에서 자꾸 나타난다. 이들의 죽음, 가족사의 비극을 하나의 업으로 인식하며 이를 소멸시킴으로서 시인 자신의 마음 속에도 평화와 안식이 깃들 것이라는 염원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백중」에서도 시인은 해인사 법기암을 다녀온다. 절간 우물가에 핀 부용화에서 어머니의 신혼이 현현하고 정원에 핀 분꽃에서 동생을 만나기도 한다. 불교적 관념과 상상력을 통해 이들을 다시 만나는 일은 이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보름달」에서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윈 시인은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한 어머니를 보름달로 만나 가야산에서 무량법문하는 어머니의 가슴에 안기고 싶은 소망을 드러낸다.
「만월」에서도 보름달이 되어 무정설법無情說法 하시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대견사에서」도 비슬산 산봉우리에 “하늘길 따라 우리 엄니,/분홍치맛자락 휘날리며 다녀가시”는 것을 본다. 이처럼 시인의 일상에서 쉬임없이 어머니를 만나는 것은 불교적 세계관을 통한 시인의 상상력에서 연유한다. 끊임없이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면서도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내는 표정이기도 하다.
5.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김청수 시인의 시세계는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펼친 상상력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생태학적 생명관이 형상화,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시인의 정서적 충격을 드러낸 가족사를 이번 작품집에서도 천착하고 있다. 이러한 시의 기저에는 불교라는 특정 종교가 배면에 깔려 있다. 모든 사유와 상상력의 힘이 되는 토대가 ‘불교’임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우리 민족 사상의, 또는 상상력의 시원이며 원천이다. 무의식 속에서도 작동하는 것이 불교적 관념인 것이다. 그런데 김청수 시인은 신실한 불자로서의 삶의 태도를 견지하며 이를 자신의 시문학에도 적용하고 있다. 오히려 이번 시집을 통해 자신이 불교적 상상력으로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시세계 또한 불교적 관념을 확장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시의 위의를 엄격하게 하여 시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시의 위상을 세워가고 있다.
한편으로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진 수사는 의인화를 잘 구사하여 시의 주제를 선명하게 하고 시에 활력을 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의인화법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자연과 사물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번 시집이 거둔 큰 성과임이 분명하다.
기본정보
ISBN | 9788956656793 | ||
---|---|---|---|
발행(출시)일자 | 2023년 07월 15일 (1쇄 2023년 07월 10일) | ||
쪽수 | 128쪽 | ||
크기 |
127 * 202
* 10
mm
/ 265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와사람 서정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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