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모자를 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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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시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이 책의 총서 (82)
작가정보
목차
- 생각의 모자를 쓴 영혼/ 차례
시인의 말 · 12
제1부 봄
삶
너와 나 1
사랑
서른아홉 해를 넘어 마흔의 한 해를
가슴앓이
그대 꿈속으로
못질하기 1
못질하기 2
우물 속의 얼굴
영혼의 날개를 펴고
햇빛 고운 날
민들레
봄이고 싶다
부활의 아침
햇볕이 좋은 날
매화 1
숲
어머니 2
우수
봄날
해 뜨는 곳으로
나무의 울음
매화 2
봄
봄맞이
너와 나 2
제2부 여름
도시의 고요
은하수
해변 산책
그리움을 벗으며
향나무
대숲에 바람 불면
소나기
서어나무 숲으로
물결 같은 그리움
풀
흔적
꿈꾸는 우도
소나무
연꽃
도라지
여행
바다
별똥별이 흐르는 밤
능소화
여름 1
여름 2
여름 3
흔적
꿈
너는 내게 무엇인가?
새벽
하늘 한 조각
유월 보름달
달밤
연밥
제3부 가을
가을 1
늘 꽃처럼
토란
거미
길목
가을 꽃밭
가을 들판
나무
갈대
운주사
가을 2
가을 3
고요를 먹은 작은 새
어머니 5
그리움
카페에서
불면
낙엽속의 잠
세월
소슬바람
흔적 3
가을비
제4부 겨울
겨울 1
겨울 숲
빈터
상처는 무엇이 되는가
이미 와 버린 길
강물에 손 담그며
씨앗
담쟁이
빈 들
어느 아침에
눈 내리면
록크라이밍
어머니 1
동백 1
동백 2
동백 3
어머니 3
눈 속에 갇힌 순결
겨울비
입동
어머니 4
이별
하루
십자가
옹기
관절염
들판에서
애증
눈꽃 속의 봄
긴 이별
삭제 그 다음
Seeds
You and I
Way of living
Always like a flower
작품론
춘하추동, 또는 기승전결의 미학 / 강경호
책 속으로
숲
흙 내음 상긋한 부드러운 숲길
잎, 꽃 달린 나무마다 피어나는 새 꿈 줍고,
오월 초록 바람 무디어진 꿈 깨워낸다.
꽃 찾아 오르는 흥겨운 좁다란 숲길 곁
갑자기 지난여름 벼락 맞아 검게 탄 소나무를 만나
속내 억울한 사연 몰래 걸어 두고 돌아선다.
철쭉 보라 안개 숲 가득 채워주면
송홧가루 산을 넘어 구름 되어 날아가고
멀리 바닷바람 산으로 기어올라
갈라진 가슴들을 어뤄주는 숲길로 걸어간다.
가시덤불 찔레꽃 달콤한 향으로 다가오고
찔레 순 분질러 잘근잘근 씹어 물면
짐짐한 풋내 속에 오월은 깊어 간다.
흙먼지 발등 덮고 졸참나무 잎 피우는
숲속의 소리들은 바람 속에 묻어지고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길어지는 하얀 숲길.
나무의 울음
봄빛이 터진 살껍질을
문질러 깨운다.
나무는 보들보들한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생명으로 기쁨으로 물올림을 한다.
작고 여린 가지 끝을 허공에 받들고서
긴 고독의 밤들을 풀어 낼
누군가에게 손짓 대신 바람에 기대어 윙윙 운다.
연밥
칠월의 태양을 사랑하는 영혼이
캄캄한 뻘 속의 줄기로 말아 올리며
신새벽 이슬 받으려고 둥실 펴낸 잎방석
또르르 굴러 모아 안은 이슬 구슬 한 꾸러미
캄캄한 물 밑 세상 어두움도 가려주고
뜨거운 태양 볕을 온몸으로 쬐고 마신다
그리던 물 밖 세상 빛으로 끌어 올린 꽃대궁
환한 아침 빛에 부끄러운 홍조로 답하고
지나는 바람이 샘을 내어 핥고
철없는 손장난질 물살 당겨 희롱한다.
한낮 열정이 활짝 가슴 젖혀 보여 주는 웃음
살포시 짓는 미소로 뜻을 캐낸 영글음은
고운 옷 살포시 내려 떨구고 물 위에 내어 주니
동실한 보름달이 숨바꼭질 구멍마다
정갈스런 마음을 연밥으로 여물어 간다.
대숲에 바람 불면
푸른 물줄기 뿜어내
하늘을 물들이고
댓잎 끝 달린 이슬
향기 품은 찻잎에 떨어지면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대숲 가득 퍼진다.
얇은 몸 부비면서
가만히 이름 부르면
아득한 얼굴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고
댓잎은 물고기 떼 지어
바람 속을 헤엄친다.
출판사 서평
춘하추동, 또는 기승전결의 미학
-권현영 시집 『생각의 모자를 쓴 영혼』
강 경 호
(시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첫말
권현영 시인의 첫 시집 『생각의 모자를 쓴 영혼』은 시인의 의도가 반영되어 봄·여름·가을·겨울 등 사계四季로 나누어졌다. 내용적으로 각 계절에 맞는 정취와 시인의 시적 정서가 투사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사계마다 삶의 정서가 주는 느낌도 다르다. 문학적 상징이 의미하듯 봄은 생명의 환희를, 여름은 청년처럼 왕성한 생명력을, 가을은 결실과 더불어 조락을, 그리고 겨울은 소멸과 더불어 다가올 봄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를 꿈꾼다. 권현영 시인의 이번 시집은 대체로 이러한 의미를 형상화하였다. 보다 내밀하게 말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계절의 변화에서 시인은 삶의 이치이면서 자연의 순리인 기·승·전·결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모든 생명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듯이 인간의 삶의 흐름도, 자연의 이치도 기·승·전·결로 귀결되며 완성된다. 삶에서 만나는 희로애락의 과정이 권현영 시인의 작품 속에 녹아나 있다.
권현영 시인의 시집에서 가장 쉽게 만나는 것은 ‘자연’이다. 자연을 통해 인간의 삶을 비추고, 또 수많은 정서를 배태한다. 그리움, 기쁨, 절망이거나 희망을 마치 거울을 보듯 발견해내는 것이다. 더불어 자연의 모습에 시적자아를 투사시키기보다는 동화된다. 끊임없이 자연을 관조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권현영 시인의 시집이다.
이렇듯 권현영 시인이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자연에서 인간의 총체성을 찾는 것은 생래적으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며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고자하는 동양적 세계관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러한 시인의 세계관은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있다는 만물유생萬物有生과 맞닿아 있다.
2. 봄 - 생명성 앙양과 환희
사물은 모두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서 그것의 본질을 영성靈性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며 그 영성으로 하여금 감정을 드러내게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은 슬퍼하기도 할 것이며 기뻐하기도 할 것이다. 수수만년 해마다 봄이 오면 겨우내 인고의 아픔을 견디다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환희에 찰 것이다. 이러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도 마음속으로 생명의 몸짓에 감정의 결이 떨리기도 한다.
권현영 시인의 봄을 소재로 한 시편들에서 봄이 되어 햇빛 가득한 대지의 아름다움을 보며 온갖 감정이 교차함을 느낀다. 때로는 생명의 환희를, 때로는 지난 시절 봄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이 울컥 하기도 하는 감정을 시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다음은 「숲」이라는 생명이 말하는 언어를 시인이 받아적은 것이다.
흙 내음 상긋한 부드러운 숲길
잎, 꽃 달린 나무마다 피어나는 새 꿈 줍고,
오월 초록 바람 무디어진 꿈 깨워낸다.
꽃 찾아 오르는 흥겨운 좁다란 숲길 곁
갑자기 지난여름 벼락 맞아 검게 탄 소나무를 만나
속내 억울한 사연 몰래 걸어 두고 돌아선다.
철쭉 보라 안개 숲 가득 채워주면
송홧가루 산을 넘어 구름 되어 날아가고
멀리 바닷바람 산으로 기어올라
갈라진 가슴들을 어뤄주는 숲길로 걸어간다.
가시덤불 찔레꽃 달콤한 향으로 다가오고
찔레 순 분질러 잘근잘근 씹어 물면
짐짐한 풋내 속에 오월은 깊어 간다.
흙먼지 발등 덮고 졸참나무 잎 피우는
숲속의 소리들은 바람 속에 묻어지고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길어지는 하얀 숲길.
- 「숲」 전문
서정시는 시인의 내적감정을 형상화시킨 언어예술이다. 사물(여기에서는 ‘숲’)은 말을 한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소리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말하지만 자연의 언어는 소리가 없다. 대신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심상으로 들을 수 있으므로 다양하게 읽히고 해석된다. 시적화자는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하는 오월의 숲길을 걸으며 ‘흙내음’ ‘초록바람’ ‘송홧가루’ ‘찔레꽃향’ ‘눈부신 햇살’을 감각을 통해 느낀다. 그것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을 사물들이 하는 말을 받아적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화자는 숲길에서 “새 꿈 줍고” “무디어진 꿈 깨워낸다” 숲길을 가다가 “벼락맞아 검게 탄 소나무를 만나” “억울한 사연”도 듣는다. 화자의 발길은 “철쭉 보라 안개 숲”을 지나 “송홧가루 산을 넘어 구름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계속 숲길을 간다. 숲길에서 “가시덤불 찔레꽃 달콤한 향”기도 전해듣고 “흙먼지 발등 덮고 졸참나무 잎 피우는” 소리도 듣는다. 봄을 맞아 그야말로 생명의 기운이 도는 “하얀 숲길”에 이르른다. 여기에서 “하얀 숲길”은 시인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느끼는 숲길이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숲길에서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 만나는 생명체들이 들려주는 소리를 받아적은 이 작품은 시인의 상상력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듣는 소리로 환호작약하는 생명성을 느끼게 한다.
다음 작품 「나무의 울음」은 말 그대로 ‘나무의 울음’이 아니라 생명이 움트는 생명의 소리이다.
봄빛이 터진 살껍질을
문질러 깨운다.
나무는 보들보들한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생명으로 기쁨으로 물올림을 한다.
작고 여린 가지 끝을 허공에 받들고서
긴 고독의 밤들을 풀어 낼
누군가에게 손짓 대신 바람에 기대어 윙윙 운다.
- 「나무의 울음」 전문
흔히 ‘울음’은 슬픔의 감정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기쁨을 드러낼 때도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나무가 운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나무는 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여서 마법을 부릴 수 있다. 나무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내적 울림인 감정을 언어로 기호화할 수 있다. 세상에는 소리가 아닌, 오감을 통해 언어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봄이 되어 나무의 껍질을 뚫고 새싹이 나오는 것은 수수만년 이어온 생명활동이다. 자연의 순리이며 섭리여서 단 한 번도 이를 어긴 봄날은 없을 것이다. 화자는 나무가 ‘물올림’하는 것이 원초적 생명 활동이지만 “긴 고독의 밤”으로 은유화된 ‘겨울’이라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행위임을 간파한다. 그럼으로써 “작고 여린 가지 끝을 허공에 받들”며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무의 실존을 본질적으로 묘파하고 있는 이 작품은 나무가 “누군가에게 손짓 대신 바람에 기대어 윙윙 운다.”고 노래함으로써 나무의 언어를 해석하는 독법을 깨우침을 통해 생명의 경이와 존재의 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시인은 사물(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특유의 상상력을 낳는다. 「햇빛 고운 날」에서 생명의 환희를, 「민들레」에서는 온갖 풍상을 견뎌낸 끝에 봄볕에 노랗게 꽃을 피운 결실임을 노래하고 있다. 「햇볕이 좋은 날」에서는 ‘빨래를 하고 싶다’는 진술처럼 봄을 정화기제로 인식하기도 하고, 「우수」에서도 ‘동백꽃’이라는 표지를 통해 “볼 붉힌 첫사랑 얼굴”로 형상화시킨다.
3. 여름 - 고통과 아름다운 성숙
사계 중 ‘여름’은 생명활동이 가장 왕성하고 무더운 절기이다. 인간의 일생으로 비유하면 청년시절과 같다. 그렇지만 내면에 들어가 살펴보면 견디기 힘들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명체들은 고난이랄 수 있는 무더운 날들을 극복하여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다. 모든 생명체들은 시련을 통해 보다 성숙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름이라는 계절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고통과 상처를 말하지만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과 상처에서 빛나는 희망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권현영 시인의 여름 시편은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생로병사, 또는 기승전결의 과정에서 왕성한 생명력과 더불어 미래를 위한 녹색불꽃의 힘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병들고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에너지를 분출하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시인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바라보고 있다.
칠월의 태양을 사랑하는 영혼이
캄캄한 뻘 속의 줄기로 말아 올리며
신새벽 이슬 받으려고 둥실 펴낸 잎방석
또르르 굴러 모아 안은 이슬 구슬 한 꾸러미
캄캄한 물 밑 세상 어두움도 가려주고
뜨거운 태양 볕을 온몸으로 쬐고 마신다
그리던 물 밖 세상 빛으로 끌어 올린 꽃대궁
환한 아침 빛에 부끄러운 홍조로 답하고
지나는 바람이 샘을 내어 핥고
철없는 손장난질 물살 당겨 희롱한다.
한낮 열정이 활짝 가슴 젖혀 보여 주는 웃음
살포시 짓는 미소로 뜻을 캐낸 영글음은
고운 옷 살포시 내려 떨구고 물 위에 내어 주니
동실한 보름달이 숨바꼭질 구멍마다
정갈스런 마음을 연밥으로 여물어 간다.
- 「연밥」 전문
권현영 시인의 언어는 수사를 구사함에 요란하지 않다. 적절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보다 적확한 언어를 찾아내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실존주의자들의 명제처럼 시어 선택을 통해 사물이 지닌 진실을 밝혀내는데 진력을 다하고 있다. ‘잎방석’ ‘신새벽’ ‘이슬’ ‘꽃대궁’ ‘미소’ ‘보름달’ ‘연밥’의 시어들만을 추슬러 나열해 놓고 보면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언어들이 지닌 의미들이 서로 작용하여 보다 구체적인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연꽃은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한여름에 핀다. 우리는 흔히 세한에 꽃피우는 매화나 동백, 난을 군자로 쳤지만, 무더운 날 꽃을 피우는 것들 역시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여름은 견디기 힘든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적으로 발화된 이 작품은 연잎을 “칠월 태양” 속에서 “신새벽 이슬 받으려고 둥실 펴낸 잎방석”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신새벽 이슬’이 함의하는 순결과 정화의 의미를 강조한다. 더불어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꽃대롱을 끌어올려 마침내 꽃을 피워내는 연이 지닌 본질을 발견해내고 있다. 그리고 연꽃이 지고 남은 그 자리에서 생긴 연밥에 “보름달이” “구멍마다” “정갈스런 마음”으로 여문다고 노래한다. ‘연蓮’이라는 시적 상관물이 지닌 의미를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는 것이 권현영 시인의 시적 전략인 것이다.
「대숲에 바람 불면」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군자의 하나로 대접했던 대나무가 지닌 심상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권현영 풍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푸른 물줄기 뿜어내
하늘을 물들이고
댓잎 끝 달린 이슬
향기 품은 찻잎에 떨어지면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대숲 가득 퍼진다.
얇은 몸 부비면서
가만히 이름 부르면
아득한 얼굴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고
댓잎은 물고기 떼 지어
바람 속을 헤엄친다.
- 「대숲에 바람 불면」 전문
옛사람들이 가까이 하며 완상하던 대나무[竹]와 대숲의 정경을 빼어나게 형상화시켰다. “푸른 물줄기 뿜어내/하늘을 물들이”는 대나무의 기상을 ‘푸른 물줄기’라고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바람부는 날 대숲의 기운이 서기어리게 느껴진다. 더불어 대나무가 지닌 정신성도 함께 발현되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어서 “댓잎 끝 달린 이슬/향기 품은 찻잎에 떨어지면//하늘이 쏟아져 내린다./대숲 가득 퍼진다.”에 이르러서는 고고한 대나무의 성격을 분명하게 한다. 특히 댓잎 끝의 이슬이 찻잎에 떨어지면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노래하는 대목은 절창이다. 언어가 지닌 멋을 한껏 부리면서도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대숲은 향기로 가득차오름을 느끼게 한다. 고졸미古拙美와 더불어 꽤 세련된 모던함을 함께 드러내는 효과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감상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대숲에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에 대숲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얇은 몸 부비면서/가만히 이름 부르면 //아득한 얼굴들이/하나 둘씩 일어서”는 모습도 흔들리는 대숲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위를 살펴보면 바람에 문풍지처럼 떠는 댓잎들이 마치 물고기처럼 떼를 지어 헤엄치듯 하는 것이다. 의인법과 시각적 이미지를 잘 구사하여 시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이 작품은 이번 권현영 시집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주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될 듯 싶다.
이밖에 여름을 형상화시킨 작품에서 「능소화」는 능소화라는 시적 상관물을 통해 유년의 기억을 회상하고, 「유월 보름달」은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유월 보름달에 대한 다양한 정서를 담아낸다. 「소나기」에서는 ‘소나기’를 하나의 정화기제로 인식하고, 「흔적」은 사흘 동안 쏟아지는 비로 인한 자연의 힘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해변 산책」에서는 자연의 질서, 바다의 생명력을 그려내고, 「향나무」에서는 정형시의 형식으로 ‘햇살로 세수하고’ ‘기도하는 손’의 이미지를 빌어 향나무가 지닌 본질을 절제된 언어로 묘파하고 있다.
4. 가을 - 풍요와 결실
주지하다시피 ‘서정’은 정화된 ‘감정’을 의미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말이 말하듯 마음 속의 느낌을 표출하며 자신의 내면을 표현한다. 이때 사람에 따라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다. 격한 감정을, 또는 순화된 감정을 드러내거나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서정시에서는 순화된 감정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을비」에서는 격한 감정보다는 시적정황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방식으로 감정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시제가 말하듯 “새벽부터 잔잔히 나뭇잎 스치며”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뜨거웠던 여름날 하늘을 식히고 들떠 외쳤던/아우성의 소란함을 가라앉히는 가을비가 내린다.”고 하며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자의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가을비’의 의미와 정서를 이끌어가고 있다. 가령 “온몸으로 젖는 가을 내림이 순정으로 깊어진다.”거나 들뜬 마음과 아우성, 그리고 소란을 갈앉힌다는 것 등에서 보듯 화자가 시적정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밝혔듯이 순화된 감정으로 시의 정서를 이끌어가고 있다. 특히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을 “까닭 없는 눈물을 씻어 내”리는 정화기제로 인식하여 시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런 까닭에 “가을비에 젖으면/들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되고 싶어진다.”고 진술하기에 이른다. 단독자 인간을 ‘나무’로 비유하여 순결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늘 꽃처럼」은 인고의 여름을 겪은 존재의 고독과 ‘한 송이 꽃’으로 의미화시킨 인간을 시련을 겪은 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존재의 실존을 노래한 작품이다.
찌든 삶 이랑에도
흥건히 고이는 정.
엉킨 인연 갈피마다
번득이는 눈물자국
지워도 다시 찾아드는
고독이여 눈물이여.
꽃피는 이랑에는
나비도 많건마는
사랑이란 이름 앞에
여름꽃이 쓰러지니
이제는 한 송이 꽃으로
가을 앞에 서 보라.
- 「늘 꽃처럼」 전문
정형시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절제된 형식미를 통해 ‘고독’과 ‘사랑’이라는 관념을 ‘눈물’과 ‘꽃’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찌든 삶 이랑에도/흥건히 고이는 정.”에서 보듯 고단한 삶이지만 ‘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한다. 그러면서도 “엉킨 인연 갈피마다/번득이는 눈물자국”에서 보듯 사람의 관계가 쉽지만은 않지만, “지워도 다시 찾아드는/고독이여 눈물이여.”이라고 노래함으로써 실존 자체가 고독한 일임을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
앞에서 “찌든 삶 이랑”에서의 고독은 ‘눈물’을 동반한 것이지만, “꽃피는 이랑”에서는 “나비도 많건마는//사랑이란 이름 앞에/여름꽃이 쓰러지니//이제는 한 송이 꽃으로/가을 앞에 서 보라.”며 인고의 시간을 견딘 끝에 ‘사랑’의 기표基表로 선 ‘한 송이 꽃’이 되어 존재를 드러내라는 의지를 보여준다. 무더위와 태풍을 맞고 피어있는 한 송이 꽃이 마치 풍상을 견딘 참으로 위대한 존재로 바라보이는 것은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여서 이 작품의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는 온갖 시련을 견딘 노년의 모습처럼 가을꽃 한 송이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이 외에도 가을을 시적 배경으로 한 작품들 중 「가을 꽃밭」은 사루비아꽃을 통해 “젊은 날 참지 못한/열정을” 담아내고 있으며, 「가을 들판」에서는 가을 들판에 부는 바람에 시적자아를 투영시키고 있다. 「나무」에서는 시적 화자가 아직도 이별에 서투른 것은 욕망을 버리지 못한 탓이라고 하고, 「고요를 먹은 작은 새」에서는 ‘고요’를 ‘생명의 멈춤’, 즉 ‘죽음’의 의미로 읽고 있다. 새의 죽음, 친구의 죽음에서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세월」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해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형상화시켰고, 「소슬바람」 역시 잊혀진 이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5. 겨울 - 삶의 완성
문학적 상징으로서 ‘겨울’은 완성과 소멸, 그리고 죽음을 의미한다. 서양의 시간관은 시간을 수직적으로 파악하여 지나가버린 시간은 퇴적될 뿐 절대 되돌아오거나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동양적 시간관은 순환적 구조로 이해한다. 즉 지나간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 지나간 시간조차 또다시 되돌아온다고 믿는다. 12간지도 그렇지만. 60년 만에 되돌아오는 60갑자 또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봄·여름·가을·겨울로 봄은 태어남, 여름은 청년시절, 가을은 노년, 겨울은 죽음으로 의미화하여 시간흐름의 질서를 부여해 왔다. 이러한 질서는 기·승·전·결의 질서와 맞닿아 있어 사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왔다. 그러므로 겨울은 ‘죽음’과 ‘소멸’ 또는 ‘완성’의 기표로 여긴다.
살아온 날들이 얼마큼일까?
오늘 서러움에 깊은 울음을 울고
사람 냄새에 찌들어 꺼이꺼이 울어재끼며
애써 돌아가는 걸음을 청하지만
이미 와 버린 길 위에서
끊겨진 시간들만 본다.
진저리를 내며 잊자고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어제들처럼
그리 살아보자고 하지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미 와 버린 길 위에 서서
흐느적거리며 흔들리는 마음만 있다.
이미 와 버린 길
휘어진 등 뒤 어디에서
상처 입은 한 맺힌 여인의 불면처럼
붉은 글씨들로 살아서 밟아 오르고
기어이 죽음처럼 창백한 날이
절망으로 문턱을 넘어선다.
이미 와 버린 길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서
찢기어져 낡아 해진 가슴팍 조각들
가만히 내려놓아 본다
따뜻함이 사라진 무심한 생각들 품어 다시
살려 올리는 바람 불어
아픔이 고통이 두려움이 먼지처럼 날아가고
이미 와 버린 겨울 닮은 길 위에서
내 너를 쉬게 하리라는 음성에 달려
빛으로 오신 이의 걸음 따라 지워져가는
이미 와 버린 길 아득하다.
- 「이미 와 버린 길」 전문
동양적 세계관에서 ‘겨울’은 앞에서 살핀 것처럼 일년 중 마지막 계절, 또는 기·승·전·결 중에서 ‘결結’로 인식해 왔다. 인간의 삶에서는 노년을 지나 삶을 완성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설사 그것이 죽음이나 소멸일지언정 완성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미 지나와 버린 길’로 나타난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귀결시키는 시적 화자는 “이미 와 버린 겨울 닮은 길 위에서/내 너를 쉬게 하리라”는 신적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신 이의 걸음 따라 지워져가는/이미 와 버린 길 아득하다.”고 화자가 소회를 털어놓는다. 이렇듯 삶이 이슥해지는 연륜을 맞으며 권현영 시인은 “살아온 날들이 얼마큼일까?”라고 문득 자신에게 묻는다.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온 발자국을 바라보며 “사람 냄새에 찌들어 꺼이꺼이 울어재끼며/애써 돌아가는 걸음을 청하지만/이미 와 버린 길 위에서/끊겨진 시간들만 본다.” 삶은 시간의 연속성에 있는 것이어서 ‘끊겨진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는 화자가 상처입었거나 아픈 정서적 사건들을 ‘끊겨진 시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되돌아봄으로서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화자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어제들처럼/그리 살아보자고” 한다. 그러나 “이미 와 버린 길 위에 서서/흐느적거리며 흔들리는 마음만 있다.”고 고백한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휘어진 등 뒤 어디에서/상처 입은 한 맺힌 여인의 불면” 같은 “붉은 글씨들로 살아서 밟아 오르”는 “죽음처럼 창백한 날이/절망으로 문턱을 넘어선다.” 그러나 살펴보면 “찢기어져 낡아 해진 가슴팍 조각들”이 보인다. 그러므로 화자는 “무심한 생각들 품어 다시/살려 올리는 바람 불어/아픔이 고통이 두려움이 먼지처럼 날아”간다. 상처와 고통과 화자의 구원자인 신적 존재가 “내 너를 쉬게 하리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다.
죽음처럼 두렵고 아픈, 이른바 ‘겨울’ 심상을 지나온 길 위에서 떠올리는 화자가 이미 와버린 길 위에서 결코 절망하지 않고 끊어진 시간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겨울의 심상을 잘 형상화시킨 「강물에 손 담그면」은 얼음처럼 견고한 겨울의 이미지를 구축한 작품이다.
살얼음
얼어붙는
강물에 손 담그며
억지웃음 뒤로 하면
울음빛이 가득한데
참아도
터져 오르는
가슴 아래 흐르는
시리도록 차가운 한.
- 「강물에 손 담그며」 전문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 “살얼음//얼어붙는//강물에 손 담”글 때 정신 세포들이 깨어날 것이다. 차디찬 강물의 기운이 손으로 전해오지만, 화자는 “억지웃음 뒤로 하면//울음빛이 가득”하다고 한다. 손이 시려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억지 웃음짓는 행위의 이면에는 강한 정신성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실은 화자의 말처럼 “울음빛이 가득”할 수 없다. 무척 손이 시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아도//터져 오르는//가슴 아래 흐르는//시리도록 차가운 한”이라고 화자 내면의 감정을 명징하게 표출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살얼음이 언 강물에 왜 손을 담그고, 손이 시렵지만 참아내고 있는가. 그리고 시리도록 차가운 한을 느끼는가.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일게다. 언 강물 속에 손을 담근 것처럼 시린 것이 인생이고, 손이 시려도 참아내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면서도 가슴 아래 흐르는 차가운 한恨을 느껴보는 것, 현실에서 만나는 삶이 늘 따스하지는 않다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겨울’의 심상은 늘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처는 무엇이 되는가」에서 무르팍이 깨져 피가 흐르고, 부러진 생나무가지처럼 신음을 참는 겨울밤은 마침내 비둘기가 되고 나비가 될 봄이 가까워졌음을 노래하고 있으며, 「씨앗」에서도 “숫눈길 밟아 오는 이 그 품안에 잠”들면 “골 깊은 생각속에 잃은 봄이 찾아”온다. 이처럼 겨울은 봄과 이웃하고 있어 마침내 희망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빈 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겨울의 빈 들판이지만 그 속에서 “여물어가는 씨앗들”이 “푸른 들판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권현영 시인의 겨울심상은 ‘순결’과 ‘정화’의 의미로 변주되기도 한다. 「눈속에 갇힌 순결」에서 가지에 눈이 쌓인 매화나무이지만 생명의 노래를 꿈꾸고 있다. 그러므로 ‘눈속에 갇힌 순결’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눈을 탈탈 털고 꽃망울을 터트릴 순결한 매화나무의 정신을 함의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끝말
권현영 시인의 시는 주된 소재가 자연이다. 그만큼 시인이 자연 친화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사계四季의 변화에 민감한 자연을 시적 제재로 삼아 자연을 통해 인간의 희노애락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삶에 비유하여 기·승·전·결로 완성되는 생명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더불어 동양적 시간관인 순환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삶의 완성을 나타내는 ‘겨울’을 소멸·죽음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또다시 생명의 계절인 봄을 꿈꾸고 그리워하는 인식태도가 본질적으로 그의 시 기저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연속성을 희망하고 바라보는 세계관이 이번 시집을 견인하는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 태어나서, 무성하게 푸르다가, 풍요와 결실을 구가한 후 소멸함이 삶의 완성이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생명의 연줄이 이어지고 있다는 인식은 권현영 시인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번 시집은 자유시와 정형시가 혼재된 형식을 갖춘 시집이지만, 서정시 본질을 묘파하려는 시 정신은 형식을 초월한다.
첫 시집 『생각의 모자를 쓴 영혼』의 성공을 바탕으로 보다 정제되고 명징한 다음의 시집을 기대한다.
기본정보
ISBN | 9788956656731 | ||
---|---|---|---|
발행(출시)일자 | 2023년 05월 30일 (1쇄 2023년 05월 20일) | ||
쪽수 | 160쪽 | ||
크기 |
128 * 201
* 11
mm
/ 33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오늘의 시와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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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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