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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황제릉

은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30년 여정 | 양장본 Hardcover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총서 45
장경희 저자(글)
솔과학 · 2023년 0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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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 석당학술총서 45로 선정되다!

저자는,
한중 수교 30주년!
중국 황제릉을 처음 방문한 지 30년이 지난,
30여 년간 은허로부터 청 푸이황제까지의 족적을 이 책에서 마무리한다!

이 책자를 통하여 광대무비한 중국 문화의 이해와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느껴보기 바란다!

2022년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어서, 나름대로 그것을 기념하여 지난 30여 년간 은허로부터 청 푸이황제까지의 족적을 여기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책은 은나라(BC 1550- BC 1050)부터 청나라(1636-1912)까지 황제릉을 다루었다.

중국의 황제릉은 그 시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동원되어 최고의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여 완성한 당대의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상징적 표상물이다. 때문에 황제릉은 그 시대의 문화적 총량이 압축되어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황제릉은 원시시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랜 기간동안 숫자도 많고 규모도 커서 세계에서 비교할 바 없지만, 황제릉을 조성하기 위하여 벌인 일 또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상(商)나라에서 왕릉 한 곳에 무려 천여 명을 순장하거나, 진시황릉에는 엄청난 숫자의 병마를 만들어 넣거나, 한(漢)나라 때 국고 세입의 3분의 1을 황제릉 건설에 쏟아붓거나, 이후 황제릉을 짓느라 7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거나, 황제릉을 관리하고자 부근에 능읍(陵邑)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거나, 능이 건설된 지 얼마 안 되어 무자비한 도굴과 훼손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져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중국 황제릉은 때론 경이롭고 때론 엽기적이지만, 오늘날 그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역설적으로 살아 생전의 황제는 나라를 다스려 인민을 먹여 살렸다면, 죽은 황제는 자신의 황제릉으로 관광수입을 올려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 같다.

이 책의 총서 (23)

작가정보

저자(글) 장경희

장경희

張慶姬
저자는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나오고,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1999년 「조선왕조 왕실공예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왕릉과 조선왕릉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고려왕릉』, 『조선왕릉』, 『국장과 왕릉』, 『조선왕실의 궁릉의물』 등을 썼다. 고려·조선왕릉과 중국 북송·금·명·청 황제릉과 비교 연구하여 이와 관련하여 「금 태조 아골타의 예릉 조성실태 연구」,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북도팔릉 연구」, 「고종황제의 금곡 홍릉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현재,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이자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소장이다. 국사편찬위원, 문화관광부의 영정초상위원, 문화재청의 수리기술위원이자 무형문화재전문위원이며, 충청남도·대전직할시·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위원이다.

목차

  • |들어가면서| _5

    제1장 능(陵)의 기원
    1. 능(陵)은 크고 높아야 한다 _17
    2. 중국에서 능(陵)의 출현 _26

    제2장 하(夏)·상(商)·주(周)의 왕릉
    1. 삼황오제와 하(夏)나라-중국 역사의 여명기 _33
    2. 상(商)나라 왕릉-신화에서 역사의 무대로 _36
    3. 주(周)나라 왕릉-그리고 춘추전국시대로 _47

    제3장 진(秦)·한(漢)·남북조(南北朝)의 황제릉
    1. 진시황릉(秦始皇陵)-최초, 최고, 최대의 황제릉 _65
    2. 한(漢)나라 황제릉-시안의 대 피라미드군(群) _93
    3. 남북조(南北朝)의 황제릉 _130
    1) 북조의 황제릉-이민족, 황제릉을 본받다 _132
    2) 남조의 황제릉-혼란 속의 위대한 석각예술 _140

    제4장 수(隋)·당(唐)·송(宋)의 황제릉
    1. 수(隋)나라 황제릉-가장 인기 없는 황제릉 _163
    2. 당(唐)나라 황제릉-산으로 올라간 황제릉 _172
    3. 송(宋)나라 황제릉-북송(北宋)과 남송(南宋) _228

    제5장 요(遼)·금(金)·원(元)의 황제릉
    1. 요(遼)나라 황제릉-찾기도 어려운 황제릉 _275
    2. 금(金)나라 황제릉-가장 처참한 황제릉 _297
    3. 원(元)나라 황제릉-과연 황제릉이 있는가? _318

    제6장 명(明)나라의 황제릉
    1. 주원장(朱元璋)의 시조릉(始祖陵)-조상의 무덤에 황제릉을 세우다 _327
    2. 명태조의 명효릉(明孝陵)-명황제릉의 시작 _339
    3. 명십삼릉(明十三陵)-장대한 명황제릉군의 위용 _348

    제7장 청(淸)나라의 황제릉
    1. 후금과 성경삼릉(盛京三陵)-만주의 초기 청황제릉 _385
    2. 청동릉(淸東陵)-중원에 세운 청황제릉 _410
    4. 청서릉(淸西陵)-또 하나의 청 황제릉군 _444

    |마치면서| _466

    |參考文獻 | _469

    |색인| _479

책 속으로

서문
조선 왕릉(王陵)은 나에겐 어릴 적 즐거운 추억이 많은 곳이다. - (중략) -
어릴 적부터 나는 우리 역사나 세계사를 좋아했고 잘했고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부터 조선왕릉은 소풍으로 친숙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천마총이 발굴된 직후라서 경주의 신라왕릉에 가서 그 규모와 찬란한 금빛 유물에 감동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들어가서 공예에 몰입하면서 왕릉은 잠시 잊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왕릉은 다시 내 관심 안으로 들어왔다. 우연인지 대학원의 첫 수업은 김리나 교수님의 한국조각사였는데, 같은 수업을 듣던 조각과 대학원생들이 조선왕릉의 석인상을 발표할 때 어릴 적 조선왕릉을 기억해내며 그들의 발표에 공감하였다.
석사학위를 마친 1989년 8월, 수교 전 중국의 초청을 받아 장춘과 백두산 그리고 베이징을 갈 기회가 있었으며 이때 명나라 황제릉에 해당되는 명13릉을 가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중국 황제릉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1992년 수교 이후 1994년 입학하여 1995년 박사과정을 다니던 중 김리나 교수님의 수업을 ‘고려시대’로 정하였고 같이 수업을 듣던 정은우선배(현 동아대 명예교수)는 고려시대 불교조각을, 이종민후배(현 충북대 교수)는 고려시대 청자와 상감청자를, 나는 고려시대 왕릉을 조사하여 발표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고려왕릉을 주제로 삼았지만 실제 그곳을 가볼 기회가 없었기에 심도 있게 접근하기 어려워 내심 아쉬웠다. 박사논문의 주제로 조선왕실의 오례 중 하나로 조성한 조선왕릉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이었기에 그것의 원형에 해당되는 고려왕릉은 미완의 연구주제로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박사과정 내내 국혼과 국장을 함께 조사하였지만 최종적으로 박사학위논문은 〈조선왕실의 가례용 공예품 연구〉로 국혼에 집중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국장 때 조성한 조선왕릉에 미련이 남아 오래 묵은 숙제처럼 계속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미완의 과제였던 고려왕릉에 대해 계속 관심을 표방하였는데, 예맥출판사를 운영하던 유성웅선배가 여러 경로로 북한과 교섭하여 2004년부터 몇 차례 북한을 함께 방문할 기회를 성사시켰고, 그들과 남북교류를 통해 수천 장의 사진과 도면 및 야장 등을 확보하여 2008년 『고려왕릉』(예맥)이란 책을 펴낼 수 있었다. 아직도 그때 수집하고 모은 고려왕릉 전체의 도면과 사진 자료 등을 10년 넘게 묵히면서 종합적인 보고서로 풀어낼 기회만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에 조선왕릉과 관련된 논문이 여러 편 쌓였고, 기존 논문을 다시 풀어쓰고 자료를 보완하여 2019년 『조선 왕릉』(솔과학), 2022년 『국장과 왕릉』(현암사)을 계속 펴냈다.
이와 같이 박사과정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고려왕릉이나 조선왕릉을 연구하였지만, 그와 함께 우리의 왕릉에 영향을 주었던 중국의 황제릉 또한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중국 황제릉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제법 연륜이 있다. 1989년 당시 국교도 없던 때에 중국에 들어가 베이징의 명13릉을 보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그 당시 한국인 중 그곳에 갔던 이가 누가 있을까 싶다. 이후 1994년에는 홍익대학교의 학부를 다닐 때 한국미술사를 강의해 주셨던 안귀숙선생님(문화재감정관)과 공예과의 동기동창인 안명선박사와 함께 2주일간 시안(西安)이나 공현(鞏縣) 등 중국의 여러 곳을 답사했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비롯하여 당 소릉(昭陵)이나 건릉(乾陵)을 보았는데, 그때 그 느낌은 감동을 넘어 하나의 전율이다. 당시에는 안선생님이 관심을 가진 불교조각이나 불교공예가 많은 사찰이나 석굴 등이 주요 답사지였지만, 내 스스로는 가끔씩 들른 황제릉이 훨씬 흥미로웠다. 이에 서점 등을 뒤져도 당시 중국인들은 황제릉을 연구하거나 관심도 많지 않아 불교 분야보다 자료가 충분치 못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2000년 문화재청에 근무할 때 조선왕릉을 본격적으로 정리하면서 중국황제릉을 정리해보자는 꿈도 함께 꾸었다. 곧 이어 2003년 한서대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방학 때마다 중국의 황제릉이 있는 곳을 다 찾아가 현지 답사를 먼저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 내공을 쌓으면서 『중국황제릉』이란 책을 써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금방 밝혀졌다. 지금부터 2-30여 년 전 중국은 참 다니기 어려운 곳이었다. 베이징이나 난징, 시안 등 대도시 이외에 지방이나 시골은 포장되지 않은 도로로 인해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비가 오면 진창길에 도로가 쿨렁쿨렁하고 물이 고여 바퀴가 빠져 나오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외진 곳에 위치한 황제릉은 택시를 대절해서 가더라도 물어 물어 찾아 헤매는 일이 다반사이고 이정표도 없어 여행이 아니라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부터 한서대학교에서의 20년간 나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거의 언제나 중국 황제릉과 함께였다고 자부한다.
미술사 전공자인 나는 글을 쓰기 전에 반드시 실물을 실제로 직접 보아야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문헌 연구와 발굴보고서 등의 학술적 연구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국 황제릉을 모두 가 본 후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실전에 부딪혀 보니 망망대해에 홀로 표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 역사는 너무 방대하다. 상나라 이래 61개 왕조가 있었고 황제만도 341명이나 되며 여기에 황후나 비빈, 왕자까지 합치면 수 천명의 황족이 살았다. 그래서 범위를 좁혀 중요한 황제의 황제릉을 고르고 그 중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황제릉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기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황폐하여 볼 것이 없더라도 우리와 관계가 깊고 유명했던 한무제, 수양제, 야율아보기, 아구타 등의 능도 대상에 넣었다.
또한 중국 역사상 문헌이 확실한 상나라부터 시작하여 청나라까지 무려 3500여 년의 역사를 꿰뚫어 봐야하고 수많은 문헌과 서적을 읽어야 하는 학문적 바탕도 닦아야 했다. 실제로 30년간 중국 여행에서 방방곡곡의 박물관과 서점을 다니며 300여 권 이상의 서적을 구입했으나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그 서적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현지에 위치한 황제릉의 실물을 보고 느낀 내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 사이 중국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오늘날 중국 황제릉을 답사하기는 옛날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베이징의 명13릉이나 선양의 소릉, 복릉 그리고 난징의 명효릉 정도는 단체관광객이 몰릴 정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30년 전 중국 황제릉을 답사를 시작할 때에는 어느 곳의 황제릉 하나에도 이정표나 표지판이 없었다. 영하 30도가 되는 한 겨울에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펑펑 내리던 북만주에서 금황제릉을 찾아 헤맬 때에 어렵사리 그 위치는 파악했으나 눈에 덮여 도로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그 마을에 사는 촌로를 함께 택시에 태우고 현장까지 가서 쌓인 눈을 털어내며 실측하고 사진을 찍었다. 대부분의 황제릉은 대중교통으로 가기 쉽지 않다. 어떤 때는 동리에 택시도 없어 산골을 온종일 걸어 헤매기도 했다. 요나라의 태조 아구타 황제릉을 찾아갈 때에는 내몽고의 길도 없는 산야를 헤매다가 그곳을 안다는 시골 아주머니를 납치하다시피 모시고 가서 확인하기도 했다. 육조시대 황제릉을 찾으려고 난징시 일대와 단양 등지의 허허벌판에서는 기껏 빌린 택시가 어제 내린 비에 도로가 진창길로 바뀌어 진흙에 바퀴가 빠져 오도 가도 못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친숙한 송나라 황제릉은 다 찾아가 보았는데 드넓은 밭 가운데에 뻘쭘하게 서 있는 송황제릉의 석물은 부지런한 농부들 때문에 흙이 패여 위태롭게 보였다. 요나라나 금나라처럼 이민족의 황제릉은 관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가 봐도 남아 있는 것은 파헤쳐진 구덩이뿐이어서 한없이 심란했다. 그야말로 중국 황제릉을 답사하는 일은 모험과 고난과 회한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충실한 왕릉관리와 찾아가기 쉽게 배려한 이정표와 표지판 설치에 새삼 감사하게 되었다. 지금은 중국도 표지판이 하나씩 생겨 훨씬 나아졌지만 20년 전만 해도 국보급 유적이 있는데도 어떠한 표식조차 없었다. 멀쩡한 큰 길에서 삼거리가 나오면 이정표가 없어 어디로 가야할 지 멘붕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왔던 길을 몇 번이나 왕복을 했으나 물어볼 사람이나 인가도 없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지난 5,6년 사이 중국도 많이 변하여 지도에 표시도 하고 관광시설을 갖추어 답사하기가 훨씬 나아졌다. 심지어 2010년대부터는 내비게이션에도 일부 황제릉이 표시되어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다시금 중국 황제릉을 답사하던 30대를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20여 년 전에 중국에서 기차표를 사는 것은 살인적인 상황으로서 역에 가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 있고 암표와의 전쟁도 치러야 했다. 만원버스를 타면 사람들 사이에 끼여 숨 막혀 죽을 듯한 공포도 체험하였다. 그나마 튼튼한 다리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꼈던 여정에 하룻밤 10위안 내지 30위안 하는 초대소에서 자기도 하고, 거리에서 1위안 짜리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중국의 현지인보다 훨씬 많은 곳을 여행하고 답사하며 용케도 잘 견디었다. 그렇게 생고생을 하며 찾아 다녔던 그때 그 시절에 찾아간 그 황제릉들이 더욱 기억에 남고 또 다시 가고 싶다. 갔던 곳을 무엇하러 또 가느냐고 하겠지만 사실 같은 곳이라도 그 때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 어떤 곳은 많게는 다섯 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베이징, 시안, 뤄양, 선양, 난징 등지는 몇 번이나 가고 또 갔다. 어떤 때는 기껏 황제릉을 갔는데 수리 중인 경우도 있어 다시 가야 한 것이다. 2010년 난징의 명효릉에 갔을 때 제사를 지내는 향전(享殿)이 공사 중이어서 또 가야 했다. 2011년 베이징 인근 황제릉의 설경을 보느라, 근래 드물게 춥고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를 보고 2012년 12월에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에 실은 사진은 같은 곳이지만 몇 년 간의 시차도 있고 계절이 다른 도판을 싣게 되었다. - (중략) -
황제릉을 답사하면서 능의 주인공인 황제의 자세한 행적을 살펴보면 황제는 좋던 나쁘던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그가 누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인민을 잘 먹이고 잘 살게 하기 위하여 밤을 새워 국사를 돌보던 모범생 황제가 있는가 하면, 백성의 고난을 직접 돌보고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인 황제도 있으며, 부왕의 후궁을 넘보고 백성을 전란에 몰아넣은 황제뿐 아니라, 사람이 저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망나니 같은 황제, 89세까지 장수한 황제와 불과 2살 때 요절한 황제도 있고, 61년간 재위했던 황제가 있는가 하면 즉위한지 불과 반나절 만에 나라가 망하여 가장 짧은 기록적인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도 있었다. 어떤 망나니 황제릉에 갔을 때는 발로 무덤을 밟아주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이고 인간사이며, 황제릉의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갖지 않기로 했다.
나의 황제릉 답사와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아마도 평생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2000년 경부터 중국에서 황제릉 연구의 붐이 일어 연구자들도 많아지고 관계 서적도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인 학자로 양관(楊寬), 유의(劉毅), 송대천(宋大川), 황렴(黃濂), 악남(岳南), 호한생(胡漢生) 등 여러 연구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저서는 나에게 황제릉에 대한 시야를 넓혀 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서적은 베이징 같은 대도시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하여 그 지역에서만 판매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나라 황제릉 관련 서적을 사려면 일부러 하얼빈과 아청까지 가야 했다. 그 사이 하남성, 섬서성 문물고고연구소 등지에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 수준 높은 보고서들을 발간하여 황제릉 관련 지식을 바로 잡아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릉 답사를 비교적 무난하게 또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금의 이 책을 펴낼 수 있게 된 것은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30대에는 젊은 혈기로 무서움도 없이 드넓은 대륙을 혼자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만용이었다. 그러나 40대 이후 50대에는 팀을 이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황제릉답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중국 문물연구소의 潘선생이 있다. 그는 평생 해왔던 고고학 발굴조사의 경험으로 황제릉에 관한 여러 정보를 알려주었고, 동행을 하거나 함께 하지 못할 경우에는 전화로 원격 조종하여 길을 찾아 주곤 하였다. 다음 조선족 출신의 중국인 全正煥소장이다. 그는 중국에서 문화 관련 공무원으로 근무하였고 현재도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원하는 자료를 수집하고 정보를 제공해주며 황제릉 연구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한편 홍익대학교 조각사 전공의 兪聖雄선배는 여러 모로 보물 같은 존재이다. 중국 황제릉이나 북한의 고려왕릉을 연구할 때마다 많은 것을 해결해 주었다. 해박한 역사 지식과 탁월한 지리 감각으로 쉽게 가보기 어려운 대륙의 여기저기를 답사할 때 내 집처럼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이렇게 팀을 이루지 않았다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그 많은 황제릉을 답사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89년 8월에 명 13릉을 처음 답사했기에, 2019년 8월에 이 책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하고 쓰고 고치다가 코로나 19에 마무리 짓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새 3년의 세월이 또 훌쩍 지나버렸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하지만 2022년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어서, 나름대로 그것을 기념하여 지난 30여 년간 은허로부터 청 푸이황제까지의 족적을 여기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책이 중국 역사나 중국 황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참고가 되고, 미지의 곳에 숨어 있는 역사에 관심을 갖고 답사하길 좋아하는 이들에게 작은 경험담을 들려주었으면 한다. 워낙 광대한 시기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묻힌 황제릉이라는 분야를 작은 책자에 담았는데, 모쪼록 부족한 이 책자를 통하여 광대무비한 중국 문화의 이해와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느껴보기 바란다.

본문 중에서
거대지향의 왕릉
한국 사람이라면 평생을 통하여 왕릉을 몇 번쯤은 가 보곤 한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부터 교수로서 학생들을 데리고 경주에 가서 보는 신라왕릉, 충남에 위치하고 있어 가끔씩 자문하러 가게 되는 공주나 부여에 위치한 백제왕릉 그리고 서울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가봤을 조선왕릉이 주 대상이다. 특히 신라의 황남대총을 본 사람들은 생각밖에 거대한 규모에 놀라고, 거기에 비해 조선시대 왕릉은 비교적 작으며 아담하게 느끼곤 한다. 또 나처럼 열성적인 사람은 북한에 소재한 고려왕릉이나 고구려왕릉까지도 섭렵하여 상당한 지식과 안목을 쌓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황제릉을 처음 본 사람은 그 크기와 규모에서 압도당하게 마련이다. 유명한 진시황릉은 그 분묘만 해도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350m에 높이는 76m인데 원래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동서 485m, 남북은 515m이며 높이는 115m에 이르렀다. 크기로는 진시황릉이 단연 세계 최대이지만 높이는 이집트 쿠프 왕(B.C. 2580년 경)의 피라미드에 필적할 것이 없다. 이는 한 변이 230m이며 높이는 축조 당시 146.6m에 이르렀다. 이들 숫자는 단지 분묘만의 크기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집트나 중국의 경우 분묘 주변으로 장제전이나 부속건물들이 일개의 궁성만큼 넓고 건물이 많이 서 있었으며, 그 일대에는 능을 가꾸고 관리하기 위한 능읍(陵邑) 즉, 작은 도시가 하나 생겨났다.
(pp.17~18 중에서)

장대한 무릉(茂陵)
무릉은 한나라의 제릉(帝陵) 중에서 오늘날 가장 정비가 잘되어 있다. 전한시대의 대표적인 황제릉의 하나로 섬서성 흥평시 남위진에 있다. 무릉을 처음 찾았던 것은 2003년이다. 이 때만 해도 ‘무릉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표지도 없고 황량한 민둥산 모양의 분구 상태였다. 이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곽거병(霍去病)의 석조각을 보기 위해 원경으로 사진만 찍고 지나쳤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2015년에 재방문했을 때는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이제는 번듯하게 담장과 출입구는 물론 경내에 수목도 많이 심고 가꾸어 황제릉다운 모양새를 갖추었으며 입장료도 받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일대는 한나라 황제와 황후, 배장 신하들의 묘가 산재되어 있는 곳이다. 그 모양이 피라미드의 정상부를 도려낸 형태를

출판사 서평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총서 45로 선정되다!

저자는,
한중 수교 30주년!
중국 황제릉을 처음 방문한 지 30년이 지난,
30여 년간 은허로부터 청 푸이황제까지의 족적을 이 책에서 마무리한다!

이 책자를 통하여 광대무비한 중국 문화의 이해와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느껴보기 바란다!

2022년 올해는 한중 수교 30주년이어서, 나름대로 그것을 기념하여 지난 30여 년간 은허로부터 청 푸이황제까지의 족적을 여기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 책은 은나라(BC 1550- BC 1050)부터 청나라(1636-1912)까지 황제릉을 다루었다.

중국의 황제릉은 그 시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동원되어 최고의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여 완성한 당대의 건축, 조각, 회화, 공예의 상징적 표상물이다. 때문에 황제릉은 그 시대의 문화적 총량이 압축되어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황제릉은 원시시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랜 기간동안 숫자도 많고 규모도 커서 세계에서 비교할 바 없지만, 황제릉을 조성하기 위하여 벌인 일 또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상(商)나라에서 왕릉 한 곳에 무려 천여 명을 순장하거나, 진시황릉에는 엄청난 숫자의 병마를 만들어 넣거나, 한(漢)나라 때 국고 세입의 3분의 1을 황제릉 건설에 쏟아붓거나, 이후 황제릉을 짓느라 7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거나, 황제릉을 관리하고자 부근에 능읍(陵邑)이란 신도시를 건설하거나, 능이 건설된 지 얼마 안 되어 무자비한 도굴과 훼손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져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중국 황제릉은 때론 경이롭고 때론 엽기적이지만, 오늘날 그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역설적으로 살아 생전의 황제는 나라를 다스려 인민을 먹여 살렸다면, 죽은 황제는 자신의 황제릉으로 관광수입을 올려 인민을 먹여 살리는 것 같다.

1장. 능의 기원 : 다르지만 비슷한
원시시대부터 인류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였다. 전세계의 고대 국가에서는 신분이 높은 지배자가 죽으면 보다 특별한 방식으로 무덤이나 피라밋을 만들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고대 문명의 발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중국에서 왕이나 황제의 무덤을 언제 어디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았다.

2장. 하(夏) · 상(商) · 주(周)의 왕릉 : 비밀스럽되 잔인한
중국의 고대 국가는 하, 상, 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대 문명의 시작인 상나라 은허(殷墟)의 유적에서 출토된 갑골문자(甲骨文字)와 청동기 유물을 통하여 고대 왕릉을 모습이 확인된다. 잘 알려지지 않아 신비스럽고, 순장된 사람과 동물의 모습에서 고대 무덤의 잔혹함을 엿볼 수 있다.

3장. 진(秦)· 한(漢)· 남북조의 황제릉 : 최초로, 그리고 불가사의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최초로 황제로 칭하였고, 최초의 황제릉을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토기로 구운 실물대의 군인과 말을 대량으로 발견되어 불가사의하다. 이를 계승한 한나라 황제릉의 규모는 조금 작아졌으며, 이후 여러 왕조들에게 황제릉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4장. 수(隋) · 당(唐) · 송(宋)의 황제릉 : 장엄하고 조화로운
당송시대는 중국 문화의 황금시기이다. 당나라는 산 위에 황제릉을 조성하고 장대한 석인과 석수 조각을 통해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였다. 송나라는 능읍 평지에 능원 건물과 석조각의 구조적인 체제가 완성되었다. 황제릉은 장엄한 규모와 예술적 조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5장. 요(遼) · 금(金) · 원(元)의 황제릉 : 고유하고 절충적인
거란과 여진 및 몽골은 요, 금, 원 왕조를 세워 300여 년간 중국을 지배하였다. 이들 이민족의 황제릉은 민족 고유의 토착적인 무덤 형식에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절충적인 양식이 결합되었다. 원나라는 비밀리에 매장하여 황제릉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거란과 여진 및 몽골은 遼·金·元 왕조를 세워 300여 년간 중국을 지배하였다. 이들 이민족의 황제릉은 민족 고유의 토착적인 무덤 형식에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절충적인 양식이 결합되었다. 원나라는 비밀리에 매장하여 황제릉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6장. 명나라 황제릉 : 숭고하고 완벽한
명나라는 유교적 이념으로 황제의 조상을 숭배하여 무덤을 황제릉처럼 만들었다. 난징에 태조의 명효릉과 베이징에 명13릉을 영건하여 중국 황제릉의 전형을 완성하였다. 능에서 제향의식을 거행할 숭고한 건물과 황제의 위엄을 보일 완벽한 석물조각으로 중국 황제릉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7장. 청나라 황제릉 : 광대하고 독특한
청나라 황제릉에는 만주족의 고유 양식과 한족의 민족 양식이 절충되어 있다. 선양에 있는 조상의 무덤은 무속적인 경향의 황제릉으로 조성되었다. 베이징 근교의 동쪽과 서쪽에는 광대한 규모로 전형적인 중국 황제릉으로 조성하였다. 도굴로 일부가 파괴되었지만 거대한 건물과 독특한 석조각은 여전히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기본정보

상품정보 테이블로 ISBN, 발행(출시)일자 , 쪽수, 크기, 총권수, 시리즈명을(를) 나타낸 표입니다.
ISBN 9791192404318
발행(출시)일자 2023년 01월 26일
쪽수 484쪽
크기
188 * 265 * 28 mm / 1270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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