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의 위대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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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 중에서
지식과 문화에 관한 참신한 통찰
우리 시대 위대한 사상가 움베르토 에코의 강연
아들을 바치라는 신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던 아브라함, 히틀러가 그린 정물화의 추함, 거짓말에 관한 칸트의 어리석은 말, 비밀결사 장미십자회, 보잘것없는 음악에 대한 프루스트의 예찬, 성 마리아와 모니카 벨루치의 이미지 등 에코는 특유의 익살과 통찰력으로 읽어 낸다. 고대와 중세를 넘어 근대와 현대까지,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 그들의 작품을 유쾌한 에코와 함께 만나 보자.
단테,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칸트 등 흔히 〈대가〉라고 알려진 작가나 철학자, 혹은 그들의 작품을 우리는 대개 공부하듯 대한다. 그것이 고전을 대하는 방법의 전부일까? 에코는 빛을 사랑한 중세인을 이야기하며 단테의 『신곡』 「천국편」을 불러오고, 허구와 실제 세계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불러온다. 데카르트가 독일 여행 중 비밀결사 장미십자회와 접촉하려 했던 사실을 알려 주기도 하고, 암살자 앞이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를 두고 〈위대한 인물도 때때로 어리석은 말은 하는구나 싶다〉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마치 강연 무대에 선인들을 소파에 앉혀 놓고 청중 앞에서 대화하듯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친절하고 유쾌한 언어로,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에코를 따라가면서 에코의 해박한 지식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작가정보

Umberto Eco
우리 시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사상가 중 한 명. 중세학자, 철학자,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소설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서부터 현대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주제를 탐구하며 경이로운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75년 볼로냐 대학교 정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 <기호학 이론>을 출판해 학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그는 기호학, 언어학, 철학에 관한 이론적 작업을 바탕으로 1980년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발표하며 소설가로서도 널리 이름을 알렸다. 전 세계 40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하버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강의하는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다. 독선과 광신을 경계하고 언제나 명석함과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는 2016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자택에서 암으로 별세했다.
지은 책으로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프라하의 묘지』, 『제0호』 등 베스트셀러 소설과 『논문 잘 쓰는 방법』,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미의 역사』, 『추의 역사』, 『궁극의 리스트』, 『전설의 땅 이야기』, 『책의 우주』,『가재걸음』 등이 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노말리』, 『역사를 만든 음악가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목차
- 편집가의 말
00 거인의 어깨 위에서
01 미_아름다움은 인간이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다
신구 논쟁의 뿌리를 찾아서
겸손인가, 오만인가
어둠 속을 배회하는 거인들
아름다움을 위하여
아름다운 공포
미의 경험
02 추_예술에서의 추와 삶에서의 추
추의 다양성
적에 대한 관상학
당신의 흉측함을 사랑해요
현대 도시에서의 추함
03 절대와 상대_절대와 상대의 의미를 찾아서
〈절대〉가 있는 곳
진리에 대한 탐구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는가
04 불_불의 상징
신적 요소로서의 불
지옥의 불
연금술의 불
예술의 원인으로서의 불
공현 경험으로서의 불
재생의 불
현대의 에크피로시스
05 보이지 않는 것_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얘기하기
허구 속 인물과의 친밀감
허구와 실재 세계의 차이
문학을 읽는다는 것
06 역설과 아포리즘_논리학과 수사학에서의 사용법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포리즘의 힘
오스카 와일드의 역설과 아포리즘
뒤집기
07 거짓_윤리, 정치, 논리, 언어철학의 열띤 주제
거짓말의 윤리
바로크적 위장
서사적 허구
자기기만
반어
모조
무로부터의 모조
진짜라는 증거들
낙관적 전망
08 불완전성_예술적 불완전성의 몇 가지 형태에 대하여
완전성이란 무엇인가
예술적 불완전성
과잉의 미학
어설픔의 미학
09 비밀_비밀을 누설한 자는 해를 입을지니
조심성
신비한 비밀
장미십자회
드러난 비밀은 쓸모가 없다
10 음모_권력의 도구
『다빈치 코드』의 진실
음모론의 기법
오류투성이 음모
11 성스러움_성스러움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표상 불가능성 문제
신의 모습
성스러움과 문화
참고 문헌
그림 출처
찾아보기
책 속으로
*첫 문장: 나는 늘 난쟁이와 거인의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다.
오늘날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거의 항상 기술적으로만 이루어질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혁신은 나이든 사람들이 이끄는 국제적인 생산 중심지에서 나온다. 이 혁신이 유행을 만들어 내고 젊은이들은 그 유행을 따라간다. 휴대전화와 이메일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10년 전에 나온 글들을 보여 주고 싶다. 새로운 도구를 만든 장본인들과 그들을 연구한 나이 지긋한 사회학자, 기호학자들은 그때 이미 그런 도구가 새로운 언어와 표현을 낳고 실제로 널리 퍼뜨릴 것이라고 예견하는 글을 썼다. 빌 게이츠가 일을 벌이기 시작한 젊은 시절(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일러 주는 원숙한 사내가 되었다), 그는 세대 반란을 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로잡을 수 있는 방안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했다. - 36~37면
다양한 문화는 다양한 언어 및 신화뿐만 아니라 (그 환경 안에서는 합리적인) 도덕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수반한다. 유럽은 좀 더 비판적인 태도로 다른 문화들을 접했던 시기에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이어서 존 로크가 이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뉴기니 섬의 원주민은 지금도 식인(食人)이 정당하고 권장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영국인이라면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반박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나라는 여성의 간통을 우리보다 훨씬 가혹하게 처벌한다는 사실에 대한 관찰을 반박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어떤 행동이 다른 행동보다 보편적이라는 사실(자식에 대한 사랑, 기쁨이나 혐오를 표현하는 표정 등)까지 의심할 수는 없다. 또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도덕적 상대주의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도덕적 상대주의란 모든 문화에 통용되는 윤리적 가치관이 없으므로 우리의 욕망과 이해에 우리의 행동을 자유로이 맞춰 나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문화는 제각각 다르고 그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 147면
시대, 인종, 종교의 종류를 막론하고 종교 재판관들은 불을 인간의 죄뿐만이 아니라 책의 죄를 씻는 도구로도 여겼다. 책이 화형당한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부주의, 사고, 무지 때문에 책이 타버린 적도 있지만 나치처럼 퇴폐적인 예술의 증거들을 정화하고 파괴하려고 분서(焚書)를 행한 경우도 많다.
돈키호테를 염려하는 벗들은 정신건강과 도덕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서재에서 기사 문학을 비우고 불태워 버린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화형』(1935)에서 도서관이 불타는 장면은 엠페도클레스의 희생을 연상시킨다(〈마침내 불길이 그에게 닿았을 때 그는 평생 웃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1953)에서도 책들은 불에 타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장미의 이름』(1980)에서 수도원 도서관은 숙명적으로, 그리고 최초의 검열 때문에 불타 버린다. - 195~196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인물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보바리 부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보바리 부인은 자살했다〉라는 주장이 반박 불가능한 진리의 모델이라는 위안 어린 확신을 더 이상 갖지 못할 것이다. 소설의 가능한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영원히,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욕망이 닿지 않게, 일은 다 일어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좌절을 받아들이고 그로써 숙명에 전율해야 한다.
나는 이 〈운명fatum〉에 대한 교육이 문학의 주요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교육이 허구 속의 인물들, 속세의 성인들과 신자들의 성인들이 지닌 패러다임적인 가치다.
안나 카레니나는 죽었고 이를 돌이킬 수는 없다는 사실만이 그녀를 우리네 삶의 애수 어린 동반자로 ─ 감정을 건드리며, 절대적으로, 강박적으로 ─ 만들어 준다. 비록 안나 카레니나는 물리적으로 실존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236~237면
워튼 경은 재치 있게 표현하지만 당대 사회의 진부한 생각을 참을 수 없으리만치 줄줄이 늘어놓는다(이 때문에 와일드의 독자들은 그의 가짜 역설들로 기분 전환을 한다). 〈어떤 주교는 열여덟 살에 배운 것을 여든 살에도 되풀이한다.〉 〈더없이 진부한 일도 몰래 숨어서 하면 재미있다.〉 〈결혼의 유일한 매력은 두 사람 모두에게 거짓된 생활이 필수 불가결해진다는 데 있다.〉 〈요즘은 실연도 여러 판본으로 나온다.〉 〈젊은이는 정절을 지키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늙은이는 정절을 깨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돈이 필요 없다. 계산서를 지불하는 사람은 돈이 필요하지만 나는 절대 계산서를 지불하지 않으므로.〉 〈영국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 날씨만 빼고.〉 〈청춘을 되찾고 싶으면 미친 짓을 되풀이하면 된다.〉 〈남자는 권태 때문에 결혼하고, 여자는 호기심 때문에 결혼한다.〉…… - 267~268면
〈은폐는 정치 혹은 신중의 거짓 이미지에 불과하다. 정신과 성격이 동시에 강인해야만 언제 진실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고 용감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나쁜 정치가들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든, 가장 감추어진 자들이다.〉 발타사르 그라시안도 〈은폐는 통치의 주요한 수단이다〉라고 지적했다. 지금도 어떤 장군이 자신의 공격 계획을 ─ 질문을 받고서 ─ 적에게 폭로한다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카이사르 암호에서 트리테미우스 암호, 나아가 에니그마 암호에 이르기까지 군대는 다양한 형태의 암호를 써서 소통을 은폐했다. 외교에서도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하는 것은 위험하고 권장할 만하지 않다. 우리도 일상의 소소한 외교술에서 그런 외교적인 거짓말을 폭넓게 활용한다.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고는 반갑다고 인사를 한다든가, 어떤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그 집 주인의 요리 솜씨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몸이 안 좋아서 못 간다고 거짓 핑계를 댄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 287~289면
자기가 쫓는 사람을 숨겨 줬느냐고 묻는 암살자의 예를 두고 칸트의 논증을 생각해 보면 위대한 인물도 때때로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싶다(보기 싫은 그림은 눈만 돌리면 안 볼 수 있는데 듣기 싫은 음악은 피할 도리 없이 들어야만 한다는 이유로 음악을 열등한 예술이라고 했을 때도 그랬지만 말이다). 칸트는 말한다. 〈당신이 그 사람은 당신 집에 없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실은 그 사람이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집에서 빠져나가고 마침 암살자가 집에서 나가려는 그 사람을 발견해 살인을 저지른다면 그 사람의 죽음은 당신 책임이 맞다. 만약 당신이 아는 그대로 진실을 말했다면 암살자가 집 안을 뒤지는 동안에 이웃들이 도와주러 와서 그 암살자를 잡았을 것이요, 살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 집주인이 암살자를 잡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은 칸트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얌전한 교수님은 이웃이 달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 289~290면
희대의 위조 화가 한 안토니우스 반 메이헤런의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은 얀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알려져 (현재 화폐 가치로) 250만 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그 그림은 1937년에 그려진 것이었다. 메이헤런은 세계 대전 이후에 플랑드르 화파, 네덜란드 화파 작품들을 헤르만 괴링에게 팔아넘긴 죄로 고발당하자 그게 다 자기가 그린 위조품이라고 고백했다. 아무도 그 말을 믿어 주지 않아서 메이헤런은 감옥에서 자신의 위조 솜씨를 입증하기 위해 또 다른 위작을 그려야만 했다. - 130면
머리카락과 손톱도 부활할까? 땀, 소변, 그 외 배설물처럼 잉여 양분에 의해 생성되는 것은 부활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님께서 〈네 머리카락 한 올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머리카락과 손톱은 인간에게 장식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인체, 특히 선택받은 인간의 몸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해야 한다. 따라서 머리카락과 손톱도 부활할 것이다. - 162면
밀로의 비너스도 팔이 없으니 불완전하다. 그러나 군중은 이 작품을 감상하려고 루브르로 몰려든다.
모피로 만든 찻잔이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팔린다면 찻잔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므로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찻잔이 메레 오펜하임의 예술 작품으로서는 완벽하다.
우리는 때때로 약간 사팔뜨기이거나, 미인 점, 안토니오 카노바의 조각상 같은 코, 비대칭적인 얼굴을 지닌 인물에게 매력을 느낀다. - 235~236면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그간 나왔던 가장 흥미진진한 소설 중 한 권이자 온 시대와 문학을 통틀어 매우 〈못 쓴〉 작품 중 하나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모든 방향으로 나아간다. 뻔뻔하게도 똑같은 형용사를 한 줄 걸러 반복하는가 하면 그런 형용사들을 무절제하게 축적하면서 격언조의 여담을 늘어놓고 20행 주기로 헐떡대느라 문장 구조 수습도 안 한다. 소설은 기계적이고 감정 묘사가 서툴다. 인물들은 부들부들 떨고, 창백해지고, 이마에 흐르는 구슬 같은 땀을 닦고, 인간 같지 않은 음성으로 더듬거리고, 갑자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가 털썩 주저앉는다. 저자는 강박적으로 방금 인물이 주저앉은 의자가 조금 전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의자임을 거듭 부연한다.
우리는 뒤마가 왜 그런 식으로 나아가는지 잘 안다. 그가 글을 쓸 줄 몰라서가 아니다. 『삼총사』는 훨씬 더 건조하고, 속도감 있고, 심리적인 면을 희생하면서까지 놀랄 만큼 유동적이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그렇게 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작가는 한 줄 단위로 돈을 받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했다. - 343~344면
음모와 비밀에 대해서 경험(역사적 경험을 포함해서)이 가르쳐 주는 바는 (1) 비밀은 단 한 명만 알고 있어도 그 한 명이 조만간, 아마 잠자리에서 누설할 것이다(순진한 프리메이슨과 성전기사단의 가짜 의식을 신봉하는 이들만이 비밀의 불가침성을 믿는다). (2) 어떤 비밀이 있다면 그것을 누설하게 만드는 적정 금액이 있다(거액의 저작권은 영국군 장교가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의 불륜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책을 쓰기에 충분한 이유다. 만약 황태자비 시어머니와의 불륜이었으면 금액이 배로 뛰었을 것이요, 이런 부류의 젠틀맨은 기꺼이 그 사연도 낱낱이 털어놓았으리라). 그런데 쌍둥이 빌딩 테러를 꾸며 내려면(일에 착수하고, 공군 개입을 막고, 당혹스러운 증거들을 숨기고 등등) 적어도 수백 명이 이 음모에 협력했어야만 한다. 그러한 기획에 고용된 자들은 대개 점잖은 사람들이 아니니 거액을 준다고 하면 얼마든지 비밀을 누설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이야기에는 〈내부 고발자〉가 없다. - 403면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도 음모는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부담을 덜어 주기 때문에 우리를 열광하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세상에 음모론자들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에 우리는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미국이 달 착륙을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 사람 문제 아닌가. 2013년에 대니얼 졸리와 캐런 더글러스는 『음모론의 사회적 결과』에서 〈음모론을 지지하는 정보에 노출되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반박하는 연구를 믿는 사람들보다 정치 참여 의욕이 위축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신세계 질서를 수립하려는 비밀결사 ─ 그게 일루미나티든 빌더버그 회의이든 ─ 가 세계사를 이끈다고 믿는 사람이 도대체 뭘 해볼 수 있겠는가? 체념하고 속을 끓이는 게 전부다. 이렇게 모든 음모론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존재하지 않는 위험으로 끌고 가서 진짜 위협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 414~415면
출판사 서평
에코 인생 마지막 15년의 강연 모음집
『에코의 위대한 강연』은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적인 문화 축제 〈라 밀라네지아〉에 참여해 〈대가의 강연〉 형식으로 쓴 글을 엮은 책으로, 2001년부터 2015년까지의 글 열두 편이 담겨 있으며 원제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Sulle Spalle Dei Giganti〉이다. 2000년, 문학, 영화, 음악, 예술, 과학, 철학의 위대함을 알리고 각 분야에서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인사들을 불러 모아 문화 교류의 장을 마련한다는 〈실험〉의 성격으로 시작한 〈라 밀라네지아〉는, 현재 노벨 문학상, 노벨 과학상, 오스카 상, 각종 국제 음악상의 수상자들을 초청하는 것은 물론 이탈리아의 14개 도시에서 열릴 정도로 유명해진 축제다. 에코는 2016년 타계하기 전까지 이 축제에 거의 매 회 빠지지 않고 초청받았으며, 때로는 주제 선정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 축제에서 에코는 축제의 의미만큼이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에코의 담론에는 계속 되돌아오는 주제들이 있는데, 이는 에코가 그 주제들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는 글에 해당하는 첫 번째 글 「거인의 어깨 위에서」는 다른 열한 편의 글을 아우른다. 난쟁이와 거인의 아포리즘은 에코의 첫 소설이자 베스트셀러인 『장미의 이름』에서 언급된 바 있기에, 2001년 축제의 초창기에 이 주제를 선정해 포문을 연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난쟁이와 거인 아포리즘의 기원을 비롯해 미와 추의 본질, 절대와 상대, 비밀과 음모의 힘, 예술의 불완전성 등을 탐구하며 창의적인 지식과 문학, 예술 작품들이 선인들과의 소통에서 역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곧 에코는 우리가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거인들 덕분에 그들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보게 된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 책에는 에코가 강연과 글에 사용하고 이 책을 위해 추가 선정한 총 135개의 도판이 실려 있어 생생한 느낌으로 에코를 만나 볼 수 있다. 몇몇 글은 『가재걸음』, 『적을 만들다』에서 공개된 바 있어 다른 맥락에서 맛볼 수 있으며, 더불어 이 책을 통해 『미의 역사』, 『추의 역사』는 물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베스트셀러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에코에 대한 관심을 넓혀 볼 수 있다.
고전을 만나는 유쾌한 방법
단테,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칸트 등 흔히 〈대가〉라고 알려진 작가나 철학자, 혹은 그들의 작품을 우리는 대개 공부하듯 대한다. 그것이 고전을 대하는 방법의 전부일까? 에코는 빛을 사랑한 중세인을 이야기하며 단테의 『신곡』 「천국편」을 불러오고, 허구와 실제 세계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불러온다. 데카르트가 독일 여행 중 비밀결사 장미십자회와 접촉하려 했던 사실을 알려 주기도 하고, 암살자 앞이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를 두고 〈위대한 인물도 때때로 어리석은 말은 하는구나 싶다〉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마치 강연 무대에 선인들을 소파에 앉혀 놓고 청중 앞에서 대화하듯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친절하고 유쾌한 언어로,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에코를 따라가면서 에코의 해박한 지식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에코에 따르면, 거인과 난쟁이의 이야기는 오래된 부친 살해 은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다. 곧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자들과 혁신을 추구하는 자들 사이의 논쟁을 말한다. 유의할 점은 공격이 대칭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나 제 손으로 두 아들을 죽인 메데이아 같은 신화 속 이야기뿐 아니라, 새로운 라틴어의 등장과 기존 예술 양식에 대한 반발 등 그 역사는 유구하다. 에코는, 이미 고대와 중세에 논쟁과 수용의 과정을 거치며 지식과 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이러한 기반이 오늘날 창의성과 혁신의 바탕을 이루었음을 보여 준다. 고대인들은 비례의 아름다움을, 중세인들은 빛의 아름다움은 물론, 짜릿함을 주는 괴물 형상의 아름다움도 발견했다. 히틀러가 그린 정물화에서 우리는 예술적 가치와는 별개로 삶의 추를 떠올린다. 절대라는 개념에 대한 탐구는 인류를 진리 탐구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상대주의를 만나기도 했다. 그밖에 불의 다양한 이미지, 소설 속 인물과의 친밀감, 이마를 탁 치게 하는 명언의 수사법, 거짓말에 관한 고민, 불완전성의 가치, 비밀과 음모론의 의미, 성스러움의 인간적 모습 등 선대의 지식과 문화는 언제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에코와 함께 고전을 종횡무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현재와 만나게 된다. 개념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거짓말이나 비밀, 음모과 같이 단순해 보이는 주제에 철학과 윤리, 정치와 권력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나 컬트 영화처럼 사람들이 완벽하지 않은 것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전은 아이디어의 보물 창고이자, 도전해 볼 만한 산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보물 혹은 도전거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기본정보
ISBN | 9788932922874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10월 15일 | ||
쪽수 | 496쪽 | ||
크기 |
149 * 221
* 38
mm
/ 852 g
|
||
총권수 | 1권 | ||
원서(번역서)명/저자명 | Sulle spalle dei giganti/Umberto E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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