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및 일기(시와편견 기획시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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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총서 (6)
작가정보
1943년 3월 1일 경남 산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아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석·박사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 당선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수상(시부 수석, 전체 특상)
1976년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교육과 강사, 전임강사
1981년 동 인문대학 조교수
1981-1984 동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학과장
1985년 동 인문대학 부교수
1987년 동 인문대학장 직무대리
1988년 동 경남문화연구소장
1990년 경상국립대학교 교수회 부회장
1990년 경상국립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대통령)
1994년 동 인문대학장 피선(인문대 교수회)
1996년 경상국립대학교 교수회장 피선(대학평의원회
의장 겸임)
1996년 전국 국공립대학교수협의회 부회장
1999년 경상국립대학교 도서관장
2008년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정년퇴임(동 명예교수)
저서
1983년 ‘우리 시 짓는 법’ 등 수권
시집
1971년 ‘演技 및 日記’ 등 17권(선집 제외)
수상
2007년 김삿갓문학상 등 수 회
목차
- 제1부
수면하水面下의 피리
모래
고약
송아지
별
그림자
이마
수면하水面下의 피리
다인茶人
웅변 1
웅변 2
웅변 3
안개
무제
탱자나무 달밤
바이올린
굴뚝
제2부
사말四末, 그것이 오는 긴 순간
내 학동學童때의 야자수椰子樹 음미
사말四末, 그것이 오는 긴 순간
사제송司祭頌
한 달
아기송頌
기침, 눈과 바람과 비
상식적常識的인 것들
시린 부활
발언
한산도
나락奈落의 시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제3부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신시해설新市解說
여름 훈련
연잎의 물무늬
버스로 달리면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화선花扇에게
10월 19일, 의상대義湘臺
컷, YOON OO장
설악동雪岳洞 여사旅舍
기차汽車 및 바다
제4부
산에 가서
성벽城壁에 어리다
山에 가서
눈썹 소묘
꽃물
교외채전郊外菜田
무당집 앞에
해설
출판사 서평
[시집해설]
60년대 전위시집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51년 만에 쓰는 ‘자작시 해설’/무목적 시와 순 서정
강희근
1.
들머리
나는 1971년 등단 6년 차 되던 해에 발간했던 시집 『연기 및 일기』(현대시학 제작)를 도서출판 《실천》의 기획시선으로 재출간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첫 시집은 시인에게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기념시집인 것이 사실이다. 이 첫 시집 속에는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산에 가서〉와 1966년 제5회 공보부 신인예술상 특상 수상작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가 포함되어있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문학 인생의 주요 거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1965년과 1966년은 아직 대학 재학 중이었고, 그 두 작품의 간격은 1년이었지만 작품의 특질은 극에서 극이었다. 전자는 정통 서정시이고 후자는 슈르나 다다에 가까운 전위 시 성격이었다. 나로서는 1966년 신인예술상 응모작으로 쓸 때 반 서정, 반 전통에 기반한 실험 시 지향으로 하는 데다 초점을 잡고 작품을 썼는데 놀랍게도 두 개의 관문을 차례로 통과했다. 장르별 심사에서 수석 상을 받고 전 장르 통합 심사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특상〉이 된 것이다. 후일담인데 심사를 한 김현승 시인은 “「산에 가서」를 쓴 시인이 「연기 및 일기」를 썼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산에 가서」 자체도 여늬 서정시와는 다른 완결성이 있었는데 이 「연기 및 일기」의 자유자재한 이미지와 심층 심리의 표현적 진가는 절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부터 발표작들은 자동기슬이거나 잠재의식 길어올리기에 재미를 붙인 것들이었다.
「연기 및 일기」를 전후한 시편들을 두고 볼 때 동국대학교 학내 지근거리에 있던 시인은 송혁(동국대신문 주간), 문정희, 정의홍, 송유하, 선원빈 등이었고 작품으로 눈여겨 봐준 평론가와 시인은 서정주, 김상옥, 전봉건, 김춘수, 김장호, 김 현, 이동주, 강 민, 이승훈, 김영태, 이근배, 이성부, 조태일, 강태열, 이상범, 박이도, 장윤우, 문효치(군 입대), 홍신선, 호영송, 박제천 홍희표, 하덕조, 양왕용, 손진은, 정해문, 배달순, 강동주, 조정남 등이었고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은 눈치를 보인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들은 비교적 사조에 어둡고 시적 시야가 열리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언 첫 시집을 낸지 51년이 지났다. 그 사이 대학원에서 시문학사의 60년대 강의를 할 때 더러는 학생들이 「연기 및 일기」를 가지고 분석한 자료를 내놓기도 했고, 더러는 세미나 때 한국시 6.70년대에 이르면 이 시집을 가려내는 순발력 있는 제자들도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첫 시집이 시 일생의 거점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젖게 되었지만 정작 그 시집에 실린 시편들을 정색으로 읽어보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경남문학관 특별전시에 〈내가 읽은 시 한 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박우담 시인이 시집에 실린 「모래」(현대문학 게재)를 적어 내었다.
긴 강이 내의를 들고
간다 이 행동.
내 나라의 여름이 들끓고
기다리고 사라져 가고
조금씩 빠지는 살이 단단하게
여문다 기러기의 배 뒤집으며
철근의 긴 건축의
도보, 오 도보는 허탈하게
시작된다 너와 나와 너와 나와
경제의 풀잎에 이슬을
따며 나의 머슴,
저 들끓는 힘을 켜는 불아
_ 「모래」 부분
이 시를 전시한 뒤의 후일담이 들리지 않는다. 모래를 씹는 것 같다거나 어째 이런 시가 전시 대상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거나 하는 코멘트가 없는, 메아리 없는 시 지나가기일 뿐이었다. 이후 주변에는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를 재발간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분위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1971년 간행했던 시집을 반세기를 지나 ‘다시 읽기’ 자리에 놓아보자는 것이다. 계간 《시와편견》 발행인 이어산 시인이 그 중심에 서서 내게 첫 시집 작품들을 컴퓨터에 올리는 일부터 시작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생각해 보니 시사적 측면에서도 그렇고 50년 이쪽저쪽의 시편들을 비교 독해하는 텍스트로도 유용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 1단계 작업이 이루어졌고 다시 시집의 체재를 검토하게 되었다. 1970년 전후 편집이 세로 판 짜기인데 이를 가로 판 짜기로 바꾸고 한자도 많이 들어가 있어서 당시의 감성을 살리기 위해 그때의 한문을 병기倂記하였다. 이만큼 50여 년의 세월에서 시집 체재가 사뭇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어산 시인의 발간 기획에 감사하다는 표현도 생략한 채로 나는 첫 시집에서 들어있지 않은 비평을 ‘자작시 해설’로 써서 독자와의 거리감을 좁혀볼까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기다리는 첫 시집 속으로 들어가 20대의 청춘시에 몰입했다. 아직 답사하지 못한 미개지를 개척하는 심정으로 감성, 리듬, 감각어 등과 이미지군에 빠져들었다.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드리워졌다. 알겠다, 그런 상황이었지 하며 안 풀리는 수학 문제를 풀어내듯이 희희낙락하였다. 시 전체 44편 중에서 6편이 서정시이고, 38편이 나로서는 새롭게 시도한 것인데 이 38편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한다.
2.
나의 시는 ‘무목적시無目的詩’다.
목적이 없는 시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기존 시의 형식이나 관념을 깬다는 것, 해제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해진 ‘룰’을 거부하는 시를 말하는 것이므로 ‘비대상’이나 ‘무의미’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면 된다. 목적에 반한다는 개념에서 보면 순수시 의미와도 같이 간다. 기존의 ‘룰’에는 어떤 비정형의 형식이나 주제도 포함하지만, 리듬이나 불연속적 이미지는 살려 놓고 있다.
정든 님아
질근 질근한 님아 이빨에
고약이 붙는다
웃지 마라 귀머거리 뒤에
장님이 거듭 지난다 대패는
도보로 꼿꼿이 지나며
웃지 않아 님아
수풀이 꼿꼿이 서게
껍데기를 지난다 시무룩히
시무룩히 님아
입술에 고약이 지나 한빔
고약을 빨아 송충이도 한
켠에서 고약을 빨아
정든 님아 너의 머리
위에 소리가 지난다
고웁게 저 대패의 자리
자리마다 소리가 지나며
보라 님아
움퍽한 눈을 파버린다 파버린다
_ 「고약」 전문
따옴시의 제목 ‘고약’은 무목적의 제목이다. 어떤 뜻이 담겨 있지 않다. 시에서 드러나는 의미의 맥이 잡히지 않는다. “정든 님아, 님아”라고 부르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르는지 애매하고 불확실하다. “이빨에 고약이 붙는다”나 갑자기 대패가 나온다거나 수풀이 나온다거나 송충이가 나오는 것이 각기 필연성이 없다. 다만 고약이 붙어야 한다는 것, 대패가 지날 때 소리가 난다는 것은 실제 상황의 어떤 근거가 되지만 맥으로 이어지는 데는 역부족이다. 그럼 이 시는 무엇인가? 정든 님 앞에서 님을 부르고 있지만, 상황은 안개와 같이 오리무중이다. 엉뚱한 것끼리의 결합에서 오는 당돌함 같은 이미지, 불연속의 이미지가 스치고 있을 뿐이다.
깊은 오뇌가 뽑은
대롱
한 번 죽었다가 떠 오는 대롱
나도 피리
멈춘 손마디에 있다 잠수부에게
물 먹은 잠수부에게 들어낸 피리
구멍은 갈기 갈기 물
먹히고 갈대 꼿꼿이 송장이다
꽃이다 닮아 있는 물밑
살이 뽑은 고래
오 뛰어가 대밭에서 논다
대밭에서 죽은 나도 고래일 뿐
물밑은 기침이다 자라나는
대밭이다 오 구멍이 난
대롱이 떠오는
_ 「수면하의 피리」 전문
이 시의 ‘수면하’는 물밑이다. 수면水面 아래下는 무의식이다. 수면 위는 의식의 세계이다. 이 시는 화자의 무의식에 떠도는 피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첫 연에서 ‘깊은 오뇌’ ‘한 번 죽었다가’는 무의식이다. 거기 대롱이 떠오르는데 대롱은 피리이다. 어느새 “나도 피리”라 하고 나 또한 ‘잠수부’가 된다. 그 속에는 고래가 있는데 ‘살이 뽑은 고래’이다. ‘살’은 물살로 읽힌다. 그 속도로 대밭으로 가서 논다는 것이다. ‘피리 - 대롱 - 대밭‘은 같은 계열 이미지이다. 또한 그 속에서는 나도 고래가 된다는 것이다. 물밑은 하찮은 기침이고 대밭이고 구멍이 난 대롱이다. 인간은 무의식에서 피리로 소리를 내는 구멍이다. 고래이다. 이미지는 이리 저리 산만하게 놓이고 물밑은 혼돈이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무의식 세계에 대한 시적 접근을 보인 것이다. 어쩌면 시론적 시로 읽을 수 있겠다.
3.
시는 리듬과 비유적 이미지가 뼈대이다.
시 「굴뚝」을 자세히 읽어보기로 한다. 시가 갖는 최소한의 무장은 리듬과 비유적 이미지 인자이다.
은은히 내 손톱들
거느리고 피는
모락 모락 마른다 저 어둠의
장고를 메고 도깨비 두서너
마리
비틀대며 우쭐대며 내
살 안으로 들어선다 저 어둠의
눈살에 독오르는 마을의
옹기 종기 앞뒷집의
굴뚝이 부쩍 늘어나고 부쩍
용감히 긴 시간을 찌른다 저 어둠의
뱃집에 사는 긴 요충의
연설
은은히 또 요란히 구멍마다
부딪친다 저 꿈틀한 어둠의
모음이여
내 손톱의 깡마른 힘을
끓인다 피를 끓인다 삼천리
구멍 안에서
_ 「굴뚝」 전문
이 시가 가지는 창조적 리듬은 매 행이 3음보이거나 4음보 기본이다. 거기다 문장이 끝나지 않았으면서 행갈이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것이 전에 보이지 않는 문장 조이기 기법이다. 이 시를 천천히 읽어내리면 어느 자리에서든 머뭇거려지거나 쓸데없이 리듬을 헝클리는 낱말이 없다. 매끈하게 흐르는 남자 바지의 주름을 볼 수 있다. 끝나지 않은 자리에서 연의 다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이 시기법의 특장이다. 앞 연 끝과 다음 연 시작 부분을 발췌해 본다.
어둠의
장고를 메고
어둠의//
눈살에
어둠의//
모음이여
연과 연 사이의 끊어서 이어지는 것은 시적 긴장의 한 측면이다. 그리고 비유적 이미지의 개별 단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둠의 장고를 메고” “어둠의 뱃집에 사는” “꿈틀한 어둠의 모음이여” “손톱의 깡마른 힘을 끓인다.” “삼천리 구멍” 등이 그것으로 이들은 하나의 맥락에서 작용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무목적시’다.
4.
띄어쓰기 무시와 지동기술
무목적시로서 기존 관념과 일정 형식의 파괴를 보이는 시는 〈그림자〉이다.
나는오갈피주(酒)의꿇는물에접(接)붙인
다리를뽑아서두개
나는반평(半坪)뜰에탐해보라탐해보라
하며길어난나비나래에서삐져낸침침한
두 개의눈
다리와눈다리와눈따라보따리
이고간다오오넌출이되고넘치어흐르는
모란꽃만한분열의물에빠져
끝을따라끝을끌고유영(遊泳)의밤이되는
나는아득하다그리고분명하다한없는불이되어
분명하다반사(反射)의방울벙그는반평
기력대로담아이끌고빙그르르돌아온다
나는선대(先代)나는광명(光明)의오래비가되어
접(接)붙인다리삐져낸눈으로살아있다아느냐
이모란꽃만한온몸을
-〈그림자〉 전문
따옴시는 시상이 자동기술로 나아간다. 스스로의 시를 정신분석적인 접근을 시도한다는 것은 부끄럽다. 마침 온양의 김대규 시인이 ‘강희근 시선 산에 가서’(신라출판사) 해설에서 시도해 보인 바 있어서 이를 요약해 본다.
“그림자는 존재가 확인이 되면서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무의식이다. 따라서 이 시는 자의식의 심층에서 돌출하고 있는 컴프렉스의 군무(群舞)다.
〈나〉는 〈술- 물- 다리- 뜰- 나비- 나래- 눈- 보따리- 넌출- 모란꽃- 물- 불- 오래비- 다리- 눈- 모란꽃- 온몸〉의 변신을 거친다. 이 변신의 기제(機制)는 확실히 초현실의 메카니즘에 의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물〉과 〈불〉, 〈나비나래〉와 〈모란꽃〉, 〈다리〉와 〈눈〉, 〈나〉와 〈오래비〉의 상대적 관계를 점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신화비평의 원형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물〉은 ‘죽음, 재생, 출산’의 모성(母性)을, 〈불〉은 ‘욕망, 충동, 성(性)’의 부성(父性을 상징하고 있으며 〈다리를 뽑아서〉나 〈삐져낸 눈〉과 같이 육신의 일부분을 상해하거나 절단해내는 행위를 성적 죄책감에서 오는 자기 처벌의 상징이다.”
김시인은 이로써 시를 오이디프스 콤플렉스, 욕정의 포화상태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쨌거나 나는 그것이 무의식에 흐르는 것이라 하니 더 보탤 수 있는 말이 없다. 나는 그저 그림자로 비춰지는 내면의 풍경을 무목적으로 이행하고 있다.
5. 화제를 뿌린, 서울 하숙에서 쓴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나는 1965년 서울신문에 당선된 이후 어느 시점부터 기회가 오면 세상을 놀라게 할 시를 한 번 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때가 왔는데 1966년 4월 30일경 동아일보에 실린 〈제5회 신인예술상 작품 공모〉를 본 순간이었다. 하숙에 돌아와 제목을 먼저 달았다. 세상 사는 사람들은 항용 적당한 가면이나 연기로 살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고 나는 그 일상을 일기에 옮기듯이 기술하는, 그런 받아적기를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목이 「연기 및 일기」가 된 것이다.
1.
부드런 내의內衣 속에, 꿰맨 내의의
벌름한 구멍 속에
갖다 놓을 기쁨의, 내 힘대로의 기쁨의
내음새.
풀어놓은 물감에 떠밀린 발치의 소리
소리의 서너겹 언저리
‘스콜’이라도 남국의
일년수一年樹 겨드랑이에 부딪는 ‘스콜’의
촉수觸手
2.
살아내는 나날의 자미滋味
수초水草 잠긴 바다의
물유리琉璃에 비치인 내 헤푼
시력視力 안,
엉뎅인 굽이로 들앉아 아물댄다
찔리는 눈까풀의 자미, 질근질근한
자미여.
가수나의 배꼽 잘 만진 손톱의
기럭지,
들이민 온갖 먼지의 표피表皮 안
붉힌 핏발의 살이여.
3.
헝클어진 머리에 쏟히는,
섬칫 내리앉는 내 일상의 사랑.
들밭 가으로 도는 나무의 풀이
아침의,
흥건히 빨아내는 이슬의 성욕性慾 속에서
무참히 학대해 가는 아침의
풀이여, 또 연기演技여.
4.
징검다리인 채 별은, 서러움인 채 별은
은하의 물굽이에 자물리고
또박 또박 허공의,
내 뜨거운 볼의 깊이로 자물리고,
별은 떠내려간다
내 손 밖에서 때론
둥실거릴 뿐이다.
참 찰지기는, 가수나 또래의 별이
밤을 넘어 내 시정市井의
또 전문電文을 전해 주는 일이다.
5.
돌 밑의 깔리인
물에, 마알간 물에 접힌 얼굴이여.
내 건져내는 얼굴 반생半生의,
사둔 부인으로 치면 살아낸 반생의
정조貞操 한아름.
6.
요일曜日의 한나절, 굼뱅이 기듯
한나절,
냉수 기침의 할아범의
나이 짧은 할아범.
슬하엔 나타나라.
손자의, 꿰입을 내의(內衣)의 손자여.
그러나 얻다 놓을 기쁨의 내의인가?
손자여.
_ 「연기演技 및 일기日記」 전문
이 수상작은 공보부 주최로 딱히 게재될 지면이 없었다. 나는 이 작품을 들고 출신지 서울신문에 가서 박성룡, 김후란 기자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했으나 원고를 거기 두고 가라는 무대책 같은 반응이 나와 그 길로 종로에 있던 월간 현대문학사로 가 언제나 다정하셨던 조연현 스승께 드렸더니 소설 심사를 하신 연고로 전후 사정을 알고 있다 하고 가부 없이 원고를 받아주셨다. 바로 그 원고는 1966년 7월호 현대문학에 실렸다. 그런데 공보부에서 수상자 발표를 각 영역별로 발표하자 서울 5대 신문 문화부는 일제히 문학부 기사를 실었다. 〈제5회 공보부 신인예술상 특상 강희근 시인〉 제하에 수상작은 강희근의 「연기 및 일기」라고 제목을 정상으로 표기한 신문사는 다섯 신문사 중 한 신문사밖에 없었다. 다른 네 군데 신문 문화면 기사는 제목을 다들 〈연기와 일기〉라 썼다. 나는 독특한 제목을 애초에 시도한 것이었으므로 기사 오류를 보면서 내내 웃고 있었다. 그 무렵 서정주 시인은 “technic and diary”라 하시면서 유쾌한 웃음을 지으셨다.
이 무렵 시인들의 제목에 ‘0 및 0’류 들이 많이 등장했다. ‘ 및’은 내가 생각해도 일상에서는 어색한 연결어이다. 내 시의 〈무목적시〉에 첫 번째 선보인 낯선 표현이다. 이 시는 일단 내가 쓰던 여유로운 서술이나 읊조리듯이 흐르는 유장함을 추방해버렸다. 정제된 서정의 언어들이 뒤로 물러나고 직정적인 어감과 낱말을 과감히 채용하고 짤막짤막 흐르는 짧은 호흡에 비교적 거친 시어, 곧 내의, 스콜, 일년수, 촉수, 유리, 시력, 자미, 표피, 성욕, 허공, 전문, 정조, 요일, 할아범 등이 등장한다. 전체 6절로 되어 있는데 각 절은 감각이나 관능적 이미지를 수반하고 절 내부에서도 통일이 되지 않는 풍경이거나 장면의 돌출이 급박히 이어진다. 이 시도 정신분석적 접근으로 다가가면 매우 흥미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작품이 현대문학에 발표되자 60년대 사화집 동인 강태열 시인은 “이제 우리는 짐을 싸야 하겠어”라 했고, 이성부 시인은 “광주 보병학교 그 암울한 공간에서 느껴지는 체감은 날로 더 좁은 곳으로 밀리는 듯했었다.”라고 피력했다.
6.
나의 서정시 6편 중 대표작은 「산에 가서」이다.
나의 대학 시절, 수강 시간과 써클 활동의 총화라고 할까, 내 작품의 거점은 서정시다. 순우리말과 전통 어감과 정서에 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1965년 서울신문 당선작 「산에 가서」가 그 텃밭에서 뽑아낸 무 뿌리나 토종배추에 비길 수 있다.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어느 해 여름이던가,
소고삐 쥔 손의 땀만큼 씹어낸 망개열매
신물이
이 길가 산풀에 취한 내 어린 미소의
보조개에 괴어서,
해 기운 오후에 이미 하늘 구름에 가
영 안오는
맘의 한 술잔에 가득 가득히 넘친 때 있었나니
내려다보아, 매가 도는 허공의 길 멀리에
때 알아, 배 먹은 새댁의 앞치마 두르듯
연기가 산빛 응달 가장자리에 초가를 덮을 때
또 내려가곤 했던 그 산길은
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
_ 「산에 가서」 전문
이 시를 읽으면 내 고향 유년 시절의 소녀가 부는 꽈리 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듯하다. 그런 정서라는 이야기이다. 이 시의 유식한 독자들은 “순국어의 능숙한 구사력”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평생에 시 강의를 할 때마다 이 시를 낭송해 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상황적 언어, 상황적 비유에 대해 언급한다. 시에서 3연 4연, 그리고 4연의 전반부는 느슨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비유는 그 장합에 맞는 언어와 비유이다. 비유는 아래와 같다.
*소고삔 쥔 손의 땀만큼 씹어낸 망개 열매 신물
*신물이 미소의 보조개에 괴어서
*신물이 맘의 한 술잔에 넘친 때
*배먹은 새댁의 앞치마 두르듯/ 연기가 초가를 덮을 때
이런 비유들을 곱씹어 보면 그 장소에서만 유효한 비유들이다. 이 점에 무릎을 치시면 시의 순국어 맛에 당도한 것이 될 터이다. 이 시를 읽다가 질문해 오는 사람들은 시어 ‘배 먹은’에 집중되었다. 그 말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말은 서정주 시에 3,4회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호남에서 통용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조사해 보니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인의 ‘잉태함’을 두고 쓴 것인데 서정주 단독으로 관능적 어감으로 창출한 것인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어원과 관계없이도 ‘배 먹은’을 회임한 ‘여인의 배’로 읽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시가 신춘에 당선된 뒤 유엔군사령부방송(VUNC)에서 ‘석세스 프로그램’이라 하면서 나를 인터뷰 하자고 불렀다. 이태원에 있는 영내 방송국까지 가서 나는 인터뷰에 응했다. 그 무렵 나는 동국대 학생방송국장으로 매주 한 번씩 VUNC에 나가 ‘대학빙송 코너’에 출연하고 있어서 손쉽게 나를 부른 것이었다. “저는 이 시를 2학년 겨울방학 때 산청에 내려가 있으면서 예의 그 산에 갔다가 내려와 큰방 아랫목에서 배 깔고 누워 30분 만에 썼어요.”하고 대답했더니 인터뷰하는 PD가 놀라면서 어찌 시를 30분 만에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쓰기를 30분 만에 쓴 것이지 체험 시간은 20여 년이지요. 성장 과정이 녹아 있으니까요. 그냥 쑤욱 내리닫이로 체험의 덩이를 끌어낸 것이지요”
이 시와 관련한 김춘수 시인의 코멘트를 끝에다 첨가해 둔다. 손진은 교수가 내게 전해 준 내용은 경북대학교 학부 시론 시간 이야기였다. 손 교수가 재학중 설레는 마음으로 김춘수 시인 강의를 들었는데 말없이 김 교수는 강희근의 「산에 가서」를 흑판 가득 판서했다는 것이다. 그런 뒤 “학생 여러분, 이 시를 읽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언급해 보시길 바랍니다.”하고는 조용히 창을 내다보며 한 10분여 기다리더라는 것이다. 학생들의 감상이 다 끝이 나자 김 교수는 “내가 볼 때 이 시의 장점은 시로써 무잇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라는 총평을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새겨 보면 순수 서정시도 때론 ‘무목적시’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한 주요 코멘트가 아니었나 싶다.
7.
해설의 끝
.나의 첫 시집은 38편의 ‘무목적시’와 6편의 서정시, 도합 44편이었다. 세로 판 짜기 체제에서는 44편 정도가 기본이었던 것 같다. 해설 순서는 38편이 먼저이고 6편이 다음 순이다. 나의 ‘목적시’ 초기에 약간의 연대감을 가진 시인은 이승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무렵 이승훈의 산문을 좋아했다. 이승훈 시인은 처가가 진주에 있었으므로 1968년 이후 진주에 오면 어울렸고 우정은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였다. 내가 대학에 적을 두면서 내 갈 길이 바빠 그와 문학세계에 관한 구체적인 대화는 신기하게도 없었다. 그의 처가 사랑이 각별했으므로 우정은 문학에 선행하는 것이었다.
내가 첫 시집을 낸 이후 시적 전신의 물목을 지나가게 되면서 내 첫 시집은 왕따 당한 소년처럼 섬이 되어 있었다. 강희근은 국립대 교수(학장)이고 지방문학의 대부이고 지방신문 논설위원으로서 거기 역할이 주어졌지만, 초기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그 신발의 문수를 재고 그 신발을 제 신발장에 앉히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 나의 주변이 그 일을 알아차리고 〈첫 시집 재발간〉이라는 범선에 돛을 달고 있다.
그 앞장에 이어산 시인(시와편견 발행인, 한국디카시학 발행인, 도서출판 실천 대표)이 섰다. 그 뜻을 낸 것만으로도 나는 꽃밭에 앉아 꽈리를 부는 소녀가 된다. 소녀여, 시 네게 있거라!
기본정보
ISBN | 9791197648960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1월 25일 | ||
쪽수 | 124쪽 | ||
크기 |
126 * 206
* 11
mm
/ 188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와편견 기획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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