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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배 애도 적대

자살과 한국의 죽음정치에 대한 7편의 하드보일드 에세이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천정환 저자(글)
서해문집 · 2021년 12월 20일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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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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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한국 사회의 ‘죽음의 스펙터클’
자살이 이 사회의 비참을 증거한다는 점을 당연히, 여전히 생각한다
죽음의 정치학-일곱 편의 긴 애도문 혹은 에세이
죽음의 정치학-일곱 편의 긴 애도문 혹은 에세이

종교나 문화뿐 아니라 정치 역시 죽음을 매개물로 한다. 또는 정치란,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죽음을 처리하고 죽음과 싸우고 다스리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늘 죽음에 개입하고 사람들의 애도와 죄책감을 사용해왔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된 숱한 죽음들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국 사회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나 아픈, 때로는 무책임한, 죽음(자살)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듯 비통하고 때 이른 죽음을 야기한 것은 바로 이 나라의 정치며 사회이고, 한국 사회는 그런 죽음들이 초래한 어둡고 비통한 ‘마음’을 또 에너지로 삼아 전후좌우로 비틀대며 나아간다. 이 책은 그러한 집합적 감정의 에너지, 즉 정치적 ‘정동(情動)’의 발생과 효과를 분석함으로써, 자살이 이 사회의 비참 또는 관계의 한계를 증거한다는 점을 다시금 깊이 성찰케 한다.

1991년 봄 이른바 ‘분신 정국’에서 산화한 꽃다운 젊은 ‘그들’을 비롯해 1980-90년대 ‘열사’들의 죽음, 그리고 2000년대로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죽음과 노무현ㆍ노회찬ㆍ박원순 등 정치인들의 죽음, 그리고 대한민국 공직자들의 잇단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죽음의 정치학 또는 한국 정치의 감정구조의 메커니즘을 살펴본다. 나아가 최진실ㆍ설리ㆍ샤이니 종현 등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혹한 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보며, 한국 사회의 자살 현상과 자살 문제의 전망을 고찰해본다.

“자살은 자신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죽음의 형식이다. 거의 모든 자살의 밑바탕에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죽음의 정치학이 탄생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핵심적 탐구 주제로서, 철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전체 사회를 비추는 사회학적 거울이기도 하다. 특히 소용돌이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 그러한 죽음이 미친 사회적 영향력은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와 그것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지적 공백을 메우려고 부단히 노력해온 연구자다. 문학적 기반 위에서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그의 작업들은 한국 사회의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만나 더욱 더 빛나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우리 사회가 민주화를 거치는 동안 생사의 경계를 넘어간 수많은 희생자들과 정치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책을 완성했다. 그의 지적 고투에 따뜻한 격려를 보내며, 이 책이 한국 사회의 죽음의 정치학에 관한 풍부한 이론적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_ 정근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이 책의 총서 (9)

작가정보

저자(글)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 현대문학사 및 문화사 연구자. 작가. 지성사와 현실의 문화정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구 성과와 문화비평을 발표해왔다. 새롭고 융합적인 인문학과, 아래로부터의 앎의 흐름에서 자극받고 그에 호흡을 맞추려 나름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근대의 책 읽기》 《대중지성의 시대》 《자살론》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1960년을 묻다-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공저) 《대한민국 독서사-우리가 사랑한 책들, 知의 현대사와 읽기의 풍경》(공저) 등이 있다.

목차

  • 머리말

    서설: 끝나지 않은 5월, 1991년
    어둠이 빛을 이긴다 | 패배의 기억, 어둠의 심연 | 젊은 삶/죽음 | 패배의 효과, 아포리아 | 열사 그리고 애도 | 끝나지 않은 5월

    1부 - 열사

    01. 열사의 정치학, 기원에 대하여

    ‘민주화’와 열사
    ‘열사들’과 시대 | 젊은 죽음, 살아남은 자의 슬픔 | ‘열사의 시대’ 이후, 추방된 죽음들

    죽음의 정치, 열사의 정치학
    누가 ‘열사’인가, ‘열사’의 사회언어학 | 죽음의 형식들, 기억되거나 기억되지 못하거나 | 노동운동과 열사

    노동열사 정치: 전태일에서 1990년대까지
    분신: 숭고의 스펙터클, 최후의 ‘도덕적’ 무기 | ‘민주화’ 이후의 노동자의 죽음: 1990년대의 ‘노동열사’ | ‘강성 노조’ 혹은 ‘노조의 전투성’에 대하여

    02. 오월 혹은 요절: 죄의식의 계승과 젊은 죽음에 관한 두 개의 고찰

    5월 광주, ‘1980년대적 죽음’의 사회적ㆍ도덕적 연원
    ‘1980년대적’인 죽음 | ‘애도되지 못한 죽음’의 죄의식 | 1986년 5월, 스물세 살 박혜정

    이념과 ‘삶’ 사이에 있는 것: 1991년 5월, 열아홉 살 박승희
    ‘나’와 ‘너’, 죽음과 상호작용하는 정동 | 이념의 정치적 맥락 | 두 개의 결론: 죽음의 개별성과 역사성

    03. 고독한 죽음들: 2000년대 이후의 노동열사

    신자유주의와 2000년대 이후 노동자의 죽음
    세계화의 덫, 또 다른 제단에 바쳐진 목숨들 | 1991년과 2003년 사이: 이현중ㆍ이해남 씨의 죽음 | 죽음 앞의 고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 | 21세기형 ‘합법적’ 노동탄압: 손해배상소송과 노동억압의 신자유주의화

    전태일 유서가 여전히 쓰이는 나라
    노동의 분할, 여전히 ‘해고’는 살인이다 | “열사의 칭호를 던지지 마세요”: ‘열’에서 ‘울’로 | 결론을 대신하여: 두 개의 불가능함 사이에서

    2부 - 애도의 정치, 증오의 정치

    04. 노무현 애도사事/史: 한국 정치의 감정구조에 대하여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09년 5월 23일, 새로운 정치사의 시작 | “정치하지 마라” |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가부장-국가’의 ‘가족-로망스’ | 7일간의 장례식, ‘미안함’이라는 정동 | 복수심: 증오와 죽음의 정치 |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애도의 정치, 증오의 정치
    엘리트 특권동맹의 공포·조롱·혐오 | 죄의식과 우상화, 그리고 애도를 정치에 이용하기 | 촛불혁명 이후, 끝나지 않은 원한의 정치 | ‘노무현 정신’은 무엇인가: 횡령된 애도, 박제된 애도

    05. 죽음, 책임, 명예: 대한민국 공직자들의 자살

    다양한 사건들의 공통점
    세속의 ‘승리자’들의 자살 | 자살 유발자, 검찰 | 죽음을 통해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와 문화정치

    노회찬의 죽음, 애도와 반(反)애도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 애도와 반애도 사이의 심연 | 추모와 과제, 연민과 공동체의 윤리

    ‘회사원’ 최 씨의 죽음: 어느 경찰공무원의 선택이 말해준 것들
    국정원 비위와 직원들의 연쇄 자살 | ‘정윤회 문건’ 사건이 쏘아올린 공 | 누가 범인이 될 것인가, ‘몰아가기’의 공포 | 유서에 담긴 회사(경찰), 언론, 동료 | 언론은 책임이 없는가 | ‘진상 규명’이란 결국 화해와 회복적 정의 | ‘명예자살’은 명예로운가 | 정치가 야기하는 자살: 정치의 잔혹함과 회피로서의 자살

    소결: 극단의 진영정치와 ‘진보’에 대하여
    ‘진보’의 윤리: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더 깨끗하고 도덕적인 ‘정치’를 원한다

    3부 - 잔혹한 사회, 취약한 인간

    06. 연예인의 자살과 한국 사회: 2000년대 이후의 ‘잔인성 체제’

    ‘블랙 카펫’ 위의 연예인들: 최진실, 설리, 샤이니 종현의 죽음을 중심으로
    대중의 갈취, 존재론적 불안 | 최진실, 연예인-여자의 일생 | 설리, ‘아이돌’과 착취 그리고 죽음 보도 경쟁 | 연예인-베르테르 효과 | 샤이니 종현, 내면의 우울과 과로하는 삶

    관종의 시대, 연예인화되는 삶과 죽음정치
    연예인으로 살아가기, 연예인을 ‘소비’하기 | 주목경쟁, 만인의 연예인화 | ‘화려한 인생’이 지불하는 것

    07. 보이는 심연, 고착된 구조: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자살과 자살예방정책

    자살예방법과 자살예방정책
    자살에 대한 사회의 의무, ‘자살예방법’ | 자살예방정책의 영향 | 유가족이 자살 사건에 대해 말하기, ‘심리부검’의 의의와 한계 |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애도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경로들
    한국인의 82개 자살 위험요인 | 생애주기ㆍ연령대별 자살 요인 | 10대 청소년: 따돌림, 학교폭력 | 20-30대: 청년 여성 자살률의 증가 | 30대 직장인: 고용문제와 ‘직장 내 갑질’ | 40-50대 중년 남성: 자살자도 가장 많은 세대 | 40-60대 중장년 여성: 돌봄, 가족, 갱년기 우울의 문제 | 최고의 노인 자살률, 고통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자살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 자살 문제의 전망
    노동과 자살: ‘과로’와 직장인 자살의 경로 | ‘잔인성의 체계’의 최전선 | 자살예방사업 업그레이드? ‘사회적 정신건강’을 향한 길 | ‘자기책임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덫 | ‘죽음의 스펙터클’

책 속으로

분신이라는 자살 방법은 문제적이다. 분신은 일반적인 자살과 달리 공개된 장소에서의 공개 자살이자, ‘현장’의 다중을 의식하는 자살이기 때문이다. 또한 분신은 치사율이나 죽음의 참혹성 면에서도 ‘사회적인 효과’가 크고, 그것이 일종의 스펙터클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 지배권력이 압도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모든 언로마저 장악하고 있을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로서 분신자살이라는 저항의 수단이 다수의 노동자들에 의해 선택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특히 1986년 박종만(민경교통), 김태웅(대화운수), 변형진(삼환택시), 박영진(신흥정밀) 등의 잇따른 죽음 이후, 한국 노동운동에서 분신자살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열사’라는 용어도 새롭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으며 확산되었다. [본문 62쪽]

어쩌면 1980년대의 그 많은 싸움 자체가 광주의 5월과 그 정신을 향한 애도와 계승의 제의(祭儀)였다고도 볼 수 있다. 죽음마저 억압하는 억압에 대해, 또한 애도 자체를 불온시하는 억압에 대해 저항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것, 그것이 1980년대의 죽음들과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이다. // 그러나 광주의 경험과 죽음은 억압됨으로써 오히려 1980년대 내내 대학생과 운동가들에 의해 더 강하게 추체험되었다. 광주의 죽음은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기준이 되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1980년대의 대학 캠퍼스 안에는 ‘광주의 벽’이 마련되었고,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광주 순례단’도 생겨났다. 그들은 윤상원을 비롯해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며 결국 목숨을 잃었던 시민군의 ‘혁명성’에 자기를 동일시했고, 이 같은 정서는 당시 널리 회자되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구로 요약할 수 있다. [본문 84쪽]

그런데 1990년대 초의 대한민국과 같은 물질만능 세속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희생적 죽음에 대한 매혹과 숱한 정치적 순교가 가능했는가 하는 점도 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당대 한국 사회 전반의 문화정치 구조와 학생운동의 위상과 관련된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대학생의 상당수는 속물적인 중산층 가정의 아들이고 딸이었다. 그리고 이런 대학생 희생의 역사는 1960년에 시작하고 1970년대 이후 재개되어 1990년대 중반에 막을 내린, 역사적 시간의 것이었다. // 그렇게 죽음이 ‘만연했던’ 1991년의 봄은 한국의 사회운동사에서 거대한 변곡점이기도 했다. (…) 대학생 및 학생운동의 정치문화와 ‘사회’ 사이의 괴리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대학은 청년의 성소(聖所)이거나 해방의 상상력이 꽃 피는 공간이 아니라, 가장 속화된, 대기업이나 공무원 입시 준비기관이 되기 시작했다. ‘각자도생’과 ‘무한경쟁’ 외의 다른 가치를 추구할 여지를 주지 않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 108쪽]

손해배상소송은 최악의 탄압 수단이다. 홍익대학교는 2011년 1월에 파업했던 청소노동자 등 6명을 상대로 2억 8천여 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민사소송을 냈다. 여기에는 홍익대 이사장의 명예를 훼손한 데 대한 위자료 1억 원까지 포함돼 있었다. 노동자 한 사람당 4천여 만 원이다. 한 푼도 쓰지 않고 40개월은 벌어야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또 2011년 3월 대법원은 ‘불법파업’으로 한국철도공사에 여객ㆍ화물 운송 수입 등의 손해를 입혔다며 전국철도노조에 100억 원여의 손해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 철도노조의 파업이 직권중재 기간 동안 이뤄졌기 때문에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고작 4일이었다. 그리고 KEC 노조는 301억, 금호타이어는 179억, 현대자동차는 200억, 재능교육은 20억…. [본문 127쪽]

노무현의 죽음 이전과 이후는 다른 세상이었다.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대표는 그날, “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를 뒤돌아보게 한다”고 했다.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은 특별한 존재-대타자였고, 대통령중심제 하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 죽음과 그것이 끼친 효과에 얽히게 되었다. (…) 정치는 실로 감정과 정동의 영역이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에 형성된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s)와 그에 따른 증상은 2000년대 한국인의 정치감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정치사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거대한 추모의 물결로 시작되었다. 죽음은 대중의 마음에 일대 반전을 가져왔다. [본문 153쪽]

이른바 ‘촛불혁명’은 원한을 기조로 한 감정정치와 양극화된 진영정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갈 결정적인 돌파구가 될 수 있었다. ‘촛불’을 새 기준으로 삼아 헌정체제와 사회개혁의 길을 열어내고, 노무현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 타인에게도 죄의식이나 우상화를 강요하지 않으며, 기억은 제대로 하되 객관적 평가를 통해 과거는 역사 속으로 보내고 새로운 현실을 살아갈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사람들은 그럴만한 능력은 없었다. 약속했던 개혁의 실패와 함께 오히려 다시 스스로 증오의 정치와 진영 논리(감정)의 악순환의 굴로 들어갔다. // 이 감정의 ‘악무한(惡無限)’은 한편으론 극렬 지지자들을 방패로 삼고, 다른 한편으론 ‘민주 대 반민주’라든가 ‘친일 대 극일’이라는 포장에 기댄다. 착각과 달리 진영정치는 ‘진보’나 ‘보수’의 이념에 제대로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장으로 한 감정정치이며 비뚤어진 도덕정치다. 그것은 다른 진영에 속한 자들과 그들의 당파가 가진 합리성과 공동체에 대한 진정성을 인식 자체에서 배제하려 한다. ‘나’ 아닌 다른 진영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며 악의 화신이기에 타협과 대화의 대상이 아닌, 절멸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본문 195쪽]

한국 사회에서 고위 공직자ㆍ정치인ㆍ기업인 등 이른바 ‘사회 고위층’, 즉 지배계급에 속하는 중장년 남성이 자살하는 일이 잦아진 것은 2000년대 들어서부터다. 여러 가지 이유와 맥락이 있다. 그들 한때 인생의 ‘승리자’들은 독직(瀆職)ㆍ부패ㆍ비리ㆍ성범죄 등에 연루되거나 ‘의혹’을 받는 수사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거나 누군가들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혹은 스스로의 고통과 죄의식, 수치, 모욕감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 // 그래서 이 자살 사건들은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와 그 여러 표현 양태, 즉 권력투쟁, 관료 조직과 대기업의 이해관계, 부패문제, 남성중심주의 등을 다각도에서 보여준다. 자살의 ‘이유’나 ‘문제상황’, 그리고 죽음이 남기는 영향 양면에서 다 그렇다. 자살은 그런 다양한 외적 문제상황과 책임감ㆍ분함ㆍ수치심 등의 심리상태가 상호작용한 결과다. 공통적으로 그런 자살에 작용하는 것은 자살자의 ‘명예’와 ‘조직’에 관련된 어떤 것들이다. [본문 201쪽]

너무나 새삼스러운 분노와 슬픔을 야기한 설리 씨의 경우도 최진실ㆍ장자연 씨 등의 죽음과 교집합을 갖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그녀들의 죽음을 야기한 사회적 요인인지 대체로 안다. 표면적으로는 여성혐오나 성차별, 그리고 잔인하고 상업적인 인터넷 미디어 문화와 ‘댓글’이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심층에는 타자를 향한 분노와 ‘사회적 잔인성’이 있다. // 반성컨대, 우리는 조롱과 조리돌림에 너나 할 것 없고, 또 너무 둔감해져 있다. ‘악플’을 다는 일이나 받는 일도 거의 일상화돼 있으며, 이에 대한 성찰도 둔화돼 있다.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문화는 없다. 상대를 절멸시켜야 끝날 것처럼 대결과 잔인함을 조장하는 정치,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명백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이 극단적인 ‘진영정치’와 또 거기 기생하는 미디어산업, 그리고 극심한 ‘불평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존중과 배려의 문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본문 279쪽]

그 잔인성의 체제는 다음과 같은 피라미드식 구조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째, 성과와 이윤을 짜내(야 하)는 기업과 그 상황. 둘째, 그것을 ‘경영’의 구체적인 논리와 ‘노동’의 방침으로 만드는 경영 시스템. 셋째, 이에 복속하며 성과를 만들어내는 중간적 관리체계와 상황. 넷째, ‘노동’ 현장의 노동과정과 작업장 정치. 경영자나 중간관리자가 아닌 사람들조차도 성과가 떨어지는 동료를 괄시하거나 배제하게 되는 문화는 이들의 합력일 것이다. 그중 어떤 중하급 관리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잔인하게 노동을 관리하며 인권을 침해하고, ‘저(底)성과자’와 ‘일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배제한다. ‘현장’에서 직접 자살을 유발하는 것은 이 마지막과 넷째 요인이다. 그러나 그런 가해 또한 강요된 것인 경우가 많다. [본문 350쪽]

현실에서 자살 문제에 관한 가장 큰 이데올로기적 장애는 ‘자기책임주의’다. 자살이라는 사건은 개인의 몸에서 개인의 행동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자기’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측면은 자살이라는 복잡한 현상의 한 면에 불과하다.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생각은 기실 한 사람에게 작용하는 사회적 관계와 그 압력과 고통을 무시한다. 자살생각과 자살행동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으로 간주되는 우울이나 조울 같은 정신질환도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적 우울증’ 같은 개념은 우울증이 역사적으로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음을 보여준다. [본문 356쪽]

출판사 서평

‘열사의 시대’부터 신자유주의 ‘잔인성의 체제’까지
-뜨거운 ‘열(烈)’에서 고독한 ‘울(鬱)’로

이 책은 1991년 5월, 그 스산하고 어지러웠던 그해 봄 ‘분신 정국’의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거의 두 달간 전국 각지에서 이어진 수천 번의 집회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백만의 사람들, 그리고 강경대ㆍ박승희ㆍ김귀정 등 너무나 빈발했던 젊은 ‘열사’들의 죽음…. 이른바 ‘1991년 5월 투쟁’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계기로 갑작스레 종결을 맞았다. 당시 ‘거리의 학생’ 중 하나였던 저자는 이 느닷없고 재앙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처참한 ‘패배’ 이후 아주 오랫동안 그것의 정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감히 ‘우리’도 20여 년 동안 그 마음의 감옥에 함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1980년대는 1980년 5월에 시작되어 1991년 5월에 끝났다’라고 할 정도로, 그해 5월은 너무나 상처 깊은 ‘패배의 기억’이자 ‘어둠의 심연’이었던 것이다. 그해 봄 ‘우리’ 젊은 영혼들을 뒤흔들었던 그 ‘죽음의 정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제1부는 ‘열사의 정치학’의 기원부터 소멸까지, ‘열사’를 둘러싼 죽음의 정치학을 다룬다. 전태일 이래 1980-90년대까지 이어진 ‘노동열사 정치’의 계보, 그리고 ‘5월 광주항쟁’으로부터 물려진 ‘1980년대적 죽음’의 사회적ㆍ도덕적 연원들을 살펴본다. ‘애도되지 못한 (광주의) 죽음’의 죄의식은 어떻게 ‘열사정치’로 계승되었을까? 약자들의 최후의 도덕적 무기로서 왜 ‘분신’이라는 죽음의 형식(‘숭고의 스펙터클’)이 선택된 것일까?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왜 노동자들의 죽음은 멈추지 않았으며, 오늘날과 같은 ‘강성 노조’ 혹은 ‘노조의 전투성’은 어떠한 맥락을 거쳐 형성돼온 것일까? 그리고 1986년 스물세 살 박혜정의 죽음과 1991년 열아홉 살 박승희의 죽음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열사의 시대’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동자들의 죽음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본다. 여전히 ‘노동열사’라는 이름의 죽음이되, 뜨거운 ‘열(烈)’에서 고독한 ‘울(鬱)’로, 이들의 죽음은 점점 추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21세기형 ‘합법적’ 노동탄압인 ‘손해배상소송’을 비롯해 노동의 분할과 억압이 더욱 교묘해지고 악랄해지는 가운데, 여전히 ‘해고는 살인’이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더욱 고독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50년 전 전태일의 유서가 여전히 쓰이고 있는 나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상이다.

제2부는 노무현ㆍ노회찬ㆍ박원순 등의 정치인을 비롯해 대한민국 공직자들(이를테면 국정원 직원들)의 죽음을 둘러싼 ‘애도의 정치, 증오의 정치’를 다룬다. 2009년 노무현의 죽음은 한국 사회를 크게 요동치게 만든 새로운 정치사의 시작이었다. 7일간의 장례식 기간 동안 거대한 집합적 에너지로 분출된 강렬한 감정들의 충돌. 한편에서는 미안함과 복수심과 증오가, 다른 한편에서는 공포와 조롱과 혐오가 횡행했다. 정작 노무현은 유서에서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남겼지만, 한국의 정치는 정확히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에 대한 대중의 극도의 죄의식(또는 우상화)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또 그 반대편에서 엘리트 ‘특권동맹’은 어떤 정동을 갖고 있었나? 이후 노회찬과 박원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애도’ 또는 ‘반(反)애도’는 어떻게 정치에 소환되고 이용되었나? 촛불혁명 이후에도 이 원한의 정치는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극단적이고 무자비한 진영정치를 멈추기 위해 이 공동체에 필요한 윤리는 무엇일까?

한편으로 대한민국 공직자들의 자살도 끊이지 않고 있다. 2014년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난 국정원 직원들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 시기 국정원의 불법적 정보활동이 오랫동안 자행되면서 민간인 사찰,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댓글 공작 사건 등으로 검찰에서 조사받던 국정원 직원들이 잇달아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중 청와대에 파견된 정보경찰관 최 경위의 죽음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와 문화정치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정윤회 문건’ 사건이 쏘아올린 공이 어떻게 한 공직자의 삶을 파탄으로 내몰았나? ‘누가 범인이 될 것인가’ 하는 ‘몰아가기’의 공포는 어떻게 자행되었고, 여기에 검찰과 언론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명예자살’은 과연 명예로운가, 왜 죽음이 책임과 명예를 지키는 수단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었나? 정치의 잔혹함이 어떻게 ‘회피로서의 자살’을 야기하는가?

제3부는 2000년대 이후 부쩍 빈번해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을 통해 한국 사회의 ‘잔인성의 체제’를 들여다보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자살 현상을 되짚어본다. 또한 자살 예방을 위한 법과 제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왔는지, 그럼에도 왜 이 사회와 개개인의 삶에 드리운 어둡고 무서운 심연을 잘 고치지 못하고 여전히 ‘자살공화국’을 유지하고 있는지, 한국인들은 생애주기ㆍ연령대별 어떤 요인들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되는지를 살펴본다.

무엇보다 ‘사회적 잔인성의 체제’의 최전선에 있는 직장과 노동을 둘러싸고, 이 많은 비극을 야기하는 거시적 배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바로 자본과 효율의 논리, 경쟁의 압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합친 자본주의의 현 단계, 즉 ‘신자유주의’다. 한국은 분명 경제력, 군사력, 소프트파워, (형식적)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러 있지만, 그 화려한 외관을 한 꺼풀만 벗기면 피가 강처럼 흐르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절망이 창궐한다. 소외와 고독도, 경쟁과 잔인함도 더 심해졌으며, 엄청나게 커지고 복잡해진 불평등의 구조 때문에 혐오와 차별이 횡행하는 현실도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의 ‘K-번영’은 여전히 지속불가능성 위에 구축돼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가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지적했듯이, 한국 사회는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상황을 멈추거나 늦추어야만 자살과 이를 부추기는 광증과 폭력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어두운 힘은 바로 우리가 사는 학교, 가족, 이웃이 근거하는 세계에 있기에, 그 힘들을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힘 또한 ‘정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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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2085067
발행(출시)일자 2021년 12월 20일
쪽수 400쪽
크기
142 * 210 * 30 mm / 516 g
총권수 1권
시리즈명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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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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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음들은 사회적이다.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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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죽음은 순수한 애도만 동반하지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개입되고 다양한 정치사회적 해석이 이어지면서 숭배와 적대라는 극단의 입장으로 나눠지곤 합니다. 개인적 죽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슬픔 못지않게 경외와 증오의 과잉이 존재합니다. 책은 사회적 죽음의 요인과 배경에 주목하고, 그 요인이 왜곡되면서 드러나는 생명 윤리의 훼손, 도그마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객관적 사유를 통한 생명 정치의 옳바름과 진정성을 모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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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웠어요
자살에는 분명히 사회적 책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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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유서가 여전히 쓰이는 나라
숭배 애도 적대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숭배 애도 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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