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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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시원始元의 공간에서 끈질긴 생태적 사유로 이루어낸 시의 경지
이번 시집은 시인 박남준이 그간 꾸준히 그려 왔던 풀, 나무, 꽃, 새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을 넘어 “눈 내리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 “그늘 깊은 사구” “별들이 기다리는 바오밥나무” 같은 머나먼 미지의 공간으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박남준 시인은 섬세한 눈길로 “동백의 여백”을 “동박새가 찾아와 쉴 자리”(「동백의 여백」)로 포착해내고, 딱새가 “사과나무에 앉아 망을 보다 푸릉 떠난 가지”를 보고 “산다는 것 서로의 다리가 되어 건너는 것”(「아름다운 이치」)이라며 자연 속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또한 시집을 넘기다 보면 “녹두전을 시켜 놓고 술 따르”(「삼팔 구례 장날」)며 잰걸음으로 장터를 돌아다니는 푸근한 시인의 모습과, 애지중지 키워 놓은 상추와 쑥갓을 훔쳐 가는 도둑에게 “상추 뽀바간연 처먹고 디저라”(「상추 도둑」)라고 일갈하는 동네 할머니의 익살스러운 모습도 한데 그려져 시인이 겪은 다양한 일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시인은 “간절한 기원이 있을 것이다/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길을 묻는 시작과 무시무종의 화두를 생각하며/깊은 고요에 안길 것이다”(「기원정사」)라고 진술하며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자신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사유한다. 이러한 선언은 시인이 그간 이루었던 무아의 경지를 더욱 초월하고 싶은 간절한 기원일 것이다. “갠지스강물은 흐르고/내가 지금 보고 있는 강물은 보이는 강물이 아니리라/나를 스친 인연도 다만 어제의 인연이 아니리니”(「갠지스강가에서」)라며 갠지스에서 서로 물줄기처럼 스쳐 간 인연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변방으로 내몰린 몽골에서는 “초원의 바다” 같은 장관을 목격하고는 “세상의 사진기로는 담을 수 없었으므로/두 눈에 써 넣었다”(「초원에서 문신을 새기다」)라고 고백하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문신을 새기듯 ‘몸’과 ‘세계’가 하나 되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외에도 다람살라, 둔황, 산티아고 등 본인의 순례길로 삼은 여행지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추천사를 쓴 금강 스님은 “박남준 시인은 삶이 시다. 산승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묵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할 때에도 화두를 참구하듯 항상 시를 쓰고 노래한다”며 “사물을 볼 때 분별을 뛰어넘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밝은 빛을 볼 줄 아는 경지”를 품은 그의 시집에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의 총서 (123)
작가정보
작가의 말
돌아보는 영혼에 화끈거리던 열기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이 기억하리라
낯 뜨거운 시의 문을 언제 닫을까
그러나 또한 고쳐 생각한다
저만큼 재촉하는 바람의 시간이
탄식으로 눈 내리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으로
그늘 깊은 사막의 사구 너머
별들이 기다리는 바오밥나무 아래로
나를 이끌고 갈 것이므로
신파처럼 낡은 창을 열어 놓고 있네
지리산 자락 심원재에서
박남준
목차
- 1부 동박새의 쉴 자리가 동백의 여백이다
절
내 안에 봉인된 삶이 있다
동백의 여백
젖은 시간이 마를 때까지
말뚝과 반란
아름다운 이치
입승과 먹줄 승
무지개와 나
저녁 강이 숲에 들어
맹꽁이가 밤새
너를 그리고 싶었네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2부 손목이 지워진 시
국수
삼팔 구례 장날
영혼을 꿰어 안주를
하소연하다
상추 도둑
수국
사투
순자강 사연
총명불여둔필
친절한 경고
인정했다
소원
차꽃 앞에 놓는다
3부 어쩌자고 저렇게 대책 없는 별들을
은단풍나무 소리
보드카를 마실 시간
인도를 가네
별 떼들이 질주하네
사막의 은유
기원정사
갠지스강가에서
다람살라에 있다
초원에서 문신을 새기다
둔황
향 사르는 고요
가섭의 누더기
12사도의 섬
미륵사지탑이 말했다
정선
4부 아랫목이 슬프도록 따뜻했다
인사말
작은 나무
흰 무명옷이나 잿빛 삼베옷
옷의 이력
안부
그녀가 준 이불
슬프도록 따뜻했다
시작의 내력
잔인한 비문
지리산이 당신에게
팔만대장경이 물들이네
고요 한 점
화사별서
굴비 익는 법성포길
지리산은 지리산의 자리에서 노래하네
내 안의 당신께
5부 파문과 파문과 고요와 고요와
산에 드는 시간
해설
그리울 때 나는 시를 읽는다
-정철성(문학평론가)
책 속으로
동박새가 찾아와 쉴 자리가
동백의 여백이다
그늘을 견딜 수 없는 숙명도 있지만
다른 나무의 그늘에 들어야
잎과 꽃의 여백을 만드는 나무가 있다
동백의 여백을 생각한다
혼자 남은 동백은
지독하도록 촘촘하게
모든 여백을 다 지워서
가지를 뻗고 잎을 매달아
그 아래 올 어린 동백의 그늘을 만든다
─「동백의 여백」 부분
곧 하늘이 모자라게 별들이 뜰 것이므로
나는 보드카와 방랑의 담요를 두르고
사막의 밤으로 누울 것이다
밤하늘에는 불시착을 한 채
이 별에서 살아온 시간이 상영될 것이다
오 새드 무비♬~
서툰 배역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고통스러웠다
잔기침쟁이 장미와 사막여우처럼
길고양이 룰랄라도 충분히 길들여진 채
이 별의 적응기를 끝냈으므로 나를 떠나갔다 하여
염려하지 않기로 한다
돌아갈 시간이 머지않다는 것을 안다
엔딩 자막이 올라오면 점멸하는 활주로에
꽃을 피우지 못해 울던 사구아로 선인장의 곡성이
화면을 채울 것이다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부분
술에 취한 오줌보 달랠 길 없어 와다닥 골목으로 뛰어들었는데 뉘집 담장 아래 터진 둑처럼 일 보고 있는데 맹렬하고도 그악스럽게 개가 짖어 댄다 그래 미안하다 인정하마 개처럼 살아왔다고 잘못 살아왔다고 오줌을 누다가 짐승처럼 꺽꺽거렸다 시인 유용주의 이야기다 나 또한 인정하마
어금니 두 개 빼고 20년 다 되도록 바람 새던 자리 치과 하는 친구 덕에 임플란트 끼우고 전주한옥마을 지나 간이정거장 가는 길 자꾸 침이 흘러 손수건 사려는데 아가씨가 묻는다 “아버님이 쓰시게요?”
순간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대답하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고 그러니까 저 말이 나를 가리킨 것이지 나 원 참~ 손수건 사지 않고 잰걸음으로 멀어지다가 그래 인정하자 여태 장가 한번 가지 못해 아버지 되지는 못했으나 이미 그 나이 차고 넘친다는 것, 손수건 다시 샀다 나도 인정했다
─「인정했다」 전문
누군가 저 별들 주머니에 잔뜩 넣어
지리산 자락 섬진강가 뿌려 달란다
그 별들 밤마다
게르의 문을 두드리던 사막의 바람을 부르며
시리고 푸른 몸을 씻으리라
강물은 그리하여 반짝일 것이다
밀려온다 쏟아진다 난무한다
은하 건너 별들의 저 어딘 가에도
아이들은 풀밭에 누워
밤하늘을 우러를 것이다
폭죽을 쏘아 올릴 것이다
과녁이 되어 버렸다
가슴마다 화살이 되어 달려오는 별들은
왜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탄사와
학습되지 않은 욕들을 자아내는가
드디어 칭기스 보드카 병이 쓰러진다
흔들린다 비틀거리며 춤춘다
초원의 바다 그 수평선으로부터
그늘 깊은 사구 너머 지평선까지
길을 잃은 별 떼들이 온밤을 마구 질주한다
─「별 떼들이 질주하네」 부분
나는 평등한가
보리수나무에서 일어나 평생을 걸어간 청년이 내민
위아래 없는 자비를 만져 본다
뒹구는 잎새 하나에도 생로병사의 인연이 닿아 있다니
안개의 이쪽과 저쪽
생각 밖의 생각과 지금껏 일어난 기원정사에서
살아서 만나야 할 기원과 그 무엇도 아닌 기원과
모든 전부이기도 한 기원을
보리수 나뭇잎에서 읽는다
흔들림 없는 사자의 걸음으로 나아가라
길은 다만 안개에 가렸을 것이다
안개 너머 길을 따라나선다
─「기원정사」 부분
꽃잎을 여는가 향 내음
사위에 어리며 빛을 뿌리네
향불 올리는 고요
한 자루 제 몸을 살라 스스로를 낮추고
엎드린 적념을 일으켜 세우네
허공중에 길을 닦아 향기로 물들이네
내미는 한 줄기 연기는
그대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없고
연기緣起의 세상을 일깨우네
한 촉 향에 나투는 지극한 공덕이여
향 사르는 손길이여
─「향 사르는 고요」 전문
그녀가 준 이불 펼친다
첫날 이불 아니더라도
새 이불 뻔히 아는데 자꾸 냄새를 맡아 본다
이 이불 덮고 잘 혼자 사는 아들 생각하다
요양원 침대 머리맡 꼼지락 부스럭거리다
귀가 단단히도 먹었나 보다 혼잣말을 하시다
말마디 영 듣지 않는 팔다리 엉거주춤 짚으며
이부자락 한 귀퉁이
검버섯의 얼굴 비벼 댔을 모습 그려진다
아랫목이 슬프도록 따뜻했다
─「슬프도록 따뜻했다」 전문
기본정보
ISBN | 9791191262247 |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4월 26일 | ||
쪽수 | 148쪽 | ||
크기 |
126 * 201
* 13
mm
/ 16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걷는 사람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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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당신께
저문 강에 내린 마음으로 편지의 시작을 썼을 것이다
가슴을 뛰게 하는 연분홍을 숨기지 않겠다고도 했을까
빛나는 풍경의 가장 중심에 당신이 있었으면
그런 꿈을 꾸었지
당신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은 내 고백이었을 것이다
잠든 당신의 얼굴에 미소를 짓고
당신보다 먼저 눈을 떠 향기로운 찻물
올려놓고 싶은 욕심쯤은 부려 보고 싶었던 것
내 어리석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삶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비로소 눈먼 날들이 나를 여기 이끌었는지
살아 있으니 절합니다
내 안의 당신께 절합니다
박남준 시인을 생각하면 모악산이 먼저 떠오른다. 모악산 자락 시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없지만 시집과 산문집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시인은 전업 작가로 살아가겠다며 모악산으로 들어갔다. 가난했지만 텃밭을 일구며 시를 쓰고, 원고료 30만 원으로 생활했다. 그나마도 15만 원만 쓰고 나머지는 기부했다. 그의 통장에는 ‘관 값’이라고 불리는 200만 원이 들어 있으며, 혹여 그 이상이 되면 나머지 돈은 역시 찾아서 또 기부했다. 모악산에서 혼자 밥하고 혼자 밥 먹으며 쓸쓸함을 느끼고, 그러면 누가 올지도 몰라 처마 끝에 불 걸어 밝혀둔 채 다시 눈을 뜨는 또 하루의 아침을 맞았다. 길 떠났다가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것보다 낫다 싶어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기계음을 들었다. 시인의 삶을 보며 수도자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공교롭게도 이번 시집의 서시 제목은 「절」이다. “낮고 겸손한 바닥을 몸에 새기는 것만이 / 절은 아닐 것이다 / 절은 할수록 절로 늘어 / 뼈마디마다 불꽃을 피우고 / 육탈 같은 다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 꽃잎의 주소를 따라가면 환해지고는 했다 / 강가에 나가 꽃배를 띄웠다 / 일상이 간절해야지 / 점점 작고 가벼워져 /꽃배를 타고 건너가야지” 마음먹는 시인을 어찌 수도자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내 안의 당신께” 드리는 절은 또 얼마나 지극한지. “내 어리석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수 있으나 / 절하겠습니다 /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 절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은 이마가 바닥에 닿은 한, 그리고 무릎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는 한, 그러니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제까지라도 내 안의 당신께 절하겠다는 다짐과 다르지 않다.
나는 뉘엿뉘엿 해 지는 시간, 오래된 브라운관 앞에 앉아 쉬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으로.
어제는 오늘로, 오늘은 또 내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굳이 구원을 읽지 않아도 좋아
여기 내몰린 섬의 기도에 앉아 하루 종일
하루 종일 햇살을 영접할까
(12사도의 섬 中)
시집은 서둘지 않고 흘러가는 개울물 같은 안정감을 갖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방이 햇살에 푹 잠겨 따뜻하다. 그동안 시 하나하나의 의미를 오롯이 살필 수 있어 좋았다.
작품에 담긴 풍경들은 일상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낯설다. 하지만 평소에 들여다본 적 없는 것들과 마주하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당연스런 이야기를 오래 듣고 있으면 그게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책을 덮은 후에 남는 감각은 다름아닌 고마움이다.
이 시집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지나고 있는 주변을 돌아볼 기회를 주고 있는 셈이다. 시가 보여주는 자연 풍경에 녹아 있는 종교적 요소들은 대상에 한정되지 않는 일상의 깨달음이다.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도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미 겪었으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리워하며, 우리는 슬퍼하는 동시에 앞으로의 삶을 더 잘 꾸려나가 보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게 된다.
시집을 읽는 도중에 특히 눈에 띄었던 작품이 있다면 다른 것보다도 2부의 「상추 도둑」과 「친절한 경고」를 우선으로 말할 수 있겠다. 오래된 인터넷 밈meme들을 시 본문에 네모박스로 삽입한 것부터가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리하여 ‘시는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넘겨받아 오래 생각할 수 있었다. 외에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물결 기호나 「소원」 마지막 행에 사용된 이모티콘 역시도 새로운 느낌이었다.
수록된 시편들의 흐름은 삶의 연속처럼 자연스럽다. 시집 한 권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느긋하게 펼쳐진다. 그 영화가 하필 ‘새드 무비’인 탓은 아마도 우리가 그 일상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금방 지나쳐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어린 왕자의 고향별처럼, 우리에게도 각자 그리워하는 곳이 있을 텐데. 사는 데 바빠 그곳을 쉽게 잊어버리지는 않았나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