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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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로서 70대 중반을 넘긴 지금도 어린아이와 같은 상상력을 잃지 않으며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오탁번의 신작 산문집. “남루한 일상을 해학적으로 일탈하여 초월에 이르게 하는 마력의 울림”을 들려준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35년간 현대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학교 현장에서 퇴임한 후 고향 제천으로 돌아와 ‘원서문학관’을 꾸려가고 있다. 이 산문집에서 그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맞닥뜨리는 감동, 작가 오탁번을 있게 해준 인연과 경험, 지난날의 치열했던 창작 여정, 그리고 문학에 대한 몇 가지 상념을 다채로운 양식의 산문들을 통해 두루마리처럼 가뿐하게 펼쳐 보인다.
작가정보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영문과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육사(1971~1974)와 수도여사대(1974~1978)를 거쳐 1978년부터 2008년까지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문학을 강의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창작집으로 『처형의 땅』(일지사, 1974), 『내가 만난 여신』(물결, 1977), 『새와 십자가』(고려원, 1978), 『절망과 기교』(예성, 1981), 『저녁연기』(정음사, 1985), 『혼례』(고려원, 1987),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문학사상사, 1988) 등이 있으며, 50년간 써온 소설들을 묶어 『오탁번 소설』(전 6권, 태학사, 2018)을 냈다.
시집으로 『아침의 예언』(조광, 1973),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청하, 1985), 『생각나지 않는 꿈』(미학사, 1991), 『겨울강』(세계사, 1994), 『1미터의 사랑』(시와시학사, 1999),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2002), 『손님』(황금알, 2006), 『우리 동네』(시안, 2010), 『시집보내다』(문학수첩, 2014), 『알요강』(현대시학사, 2019)이 있다. 문학선 『순은의 아침』(나남, 1992)과 시선집으로 『사랑하고 싶은 날』(시월, 2009), 『밥 냄새』(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눈 내리는 마을』(시인생각, 2013)이 있다.
산문집으로 『현대문학산고』(고려대 출판부, 1976),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고려대 민연, 1988), 『현대시의 이해』(청하, 1990), 『시인과 개똥참외』(작가정신, 1991), 『개정/현대시의 이해』(나남, 1998), 『오탁번 시화』(나남, 1998), 『헛똑똑이의 시 읽기』(고려대 출판부, 2008), 『병아리 시인』(다산북스, 2015)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7), 동서문학상(1994), 정지용문학상(1997), 한국시인협회상(2003), 김삿갓문학상(2010), 은관문화훈장(2010), 고산문학상(2011), 목월문학상(2019) 등을 받았다.
목차
- 머리말
제1부 양피지 사본
그와 나
미래의 서울
몸의 오솔길
원서헌
제2부 두루마리
시인의 말
시 「안항」의 터무니
작가의 말
소설 「굴뚝과 천장」의 터무니
제3부 그리운 얼굴
시인의 만장
큰 가슴과 작은 손
봄나들이
현대시 동인
제4부 시, 스토리텔링
소를 타고 어디를 가시나?
꽃을 심는 시인
노마드는 꿈속에서도 꿈을 꾼다
눈부신 돋을볕의 상상력
* 소묘와 대화
서정과 서사, 그 느리고 빠른 결합 -이숭원
저녁연기처럼 퍼지는 노래 -김정임
시적 프리즘 -신효순
낙타와 사자를 지나 어린아이로 -정진희
은근슬쩍 염염한 골계미 -박원식
작가 연보
책 속으로
그해 여름부터 수련이 피기 시작하였다. 수련의 절묘한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황금비의 극치여서 필설로 다 그려낼 수 없을 정도다. 수련은 이름 그대로 아침에 피었다가는 오후 서너 시가 되면 꽃잎을 오므리고 잠을 잔다.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출발하려다가도 수련이 아직 피어 있으면 일부러 연못가를 거닐면서 그놈들이 잠들 때를 기다리기도 했다. 비 내리는 날이면 수련에 빗물 듣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마냥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졌다. 무념무상의 생각이니까 더는 생각이랄 것도 없는 그런 경지에 푹 빠졌다. 개구리가 알을 까고 잠자리가 날아오고 백로가 연못가에 내려앉아 쉬고 가기도 했다.
_「원서헌」 중에서, 52쪽
그동안 1973년부터 2019년까지 펴낸 열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시선집 머리말을 불러내어 한 자리에 앉힌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없지 않지만 그래도 시집을 하나하나 낼 때마다 시에 대한 내 나름의 전망이나 소회가 있었을 것 아닌가. 녹음테이프를 되감아 들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진첩에서 빛바랜 옛 사진을 꺼내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잘 안 들리는 소리도 있고 구겨진 사진도 있다. 녹음하고 사진 찍을 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도 없지 않지만 그 전체가 나의 생애의 면면이라고 하겠다.
등단한 지 7년이 지난 1973년에 낸 첫 시집 『아침의 예언』의 것을 다시 읽어본다. 이건 머리말이 아니고 후기인데, 꼭 무슨 ‘시인 취임사’라도 되는 것 같아 정말 웃긴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뭐? ‘나와 이웃의 시와 산문과 학문에 큰 보람 있기를’ 바란다고? 예끼, 이 사람아.
_「시인의 말」 중에서, 75쪽
「처형의 땅」의 등장인물인 ‘우리들 중의 하나’가 나의 다면적 자화상이라면 「굴뚝과 천장」의 ‘그’ 또한 지울 수 없는 나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 의식 속에는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패러다임이 있다. 악마와 천사가 가위바위보하고 소년과 노인이 숨바꼭질하는 곳, 이것이 나의 문학적 영토의 암사지도다. 나의 영혼 속에는 시와 소설이 회전하며 존재한다. 시와 소설은 대립 개념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시에는 앙증맞은 서사가 들어가기도 하고 또 소설의 어느 부분을 따로 떼어내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_「소설 「굴뚝과 천장」의 터무니」 중에서, 124쪽
처음 고백하는 말인데, 아마도 나는 대학 시절에 김종길 선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영문과를 중퇴해버렸을 것이다. 엘리엇이나 예이츠나 딜런 토머스의 시 작품도 사실은 선생을 통하여 이해하였기 때문에 그나마 그들 작품이 지닌 야릇한 맛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이가 번역하고 해설해놓은 것을 볼 때면 시와는 동떨어진 토막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나는 선생을 만나면서 현대시에 대한 안목을 바르게 할 수 있었다. 강의실에서뿐만이 아니라 선생과 개인적인 만남을 자주 가지면서 진짜 시의 정수를 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 작품의 비의를 정확무비하게 꿰뚫어 보는 비평가를 꼽으라면 언제나 주저 없이 선생을 든다. 옆 사람이 주눅들 정도로 언제나 시 작품이 숨기고 있는 오묘한 비밀, 그 작품을 쓴 시인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시적 의미를 정확한 유추와 직감으로 밝혀내곤 하였다. 내가 선생의 글을 통하여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비단 현대시뿐만이 아니었다. 영시, 한시, 시조에 대하여 선생이 하시는 말씀은 그대로 문학의 위의가 되고 품격이 되는 것이었다.
_「봄나들이」 중에서, 159~161쪽
어깨에 힘만 주어서는 가능할 수 없는 장르가 시다. 자기 부끄러움에 관한 고백! 내겐 시의 의미가 그렇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악마적인 걸 다 까발리는 행위가 시이고 문학이다. 외롭고 어두운 길을 나 혼자 걸으면서 좋은 시의 참모습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찾아온 지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나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는 시를 멀리해왔다. 언어를 송두리째 허물면서 그럴듯하게 그냥 쓰는 시는 사실 겉모습은 시 같지만 진짜 시는 아니거든. 아는 말도 사전을 몇 번이나 되찾아 보고 무심하게 지나쳤던 자연의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인다. 어린아이의 천진한 몸짓을 배우려고 애쓰고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전의 아직 발화되지 않은 언어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한다.
_「은근슬쩍 염염한 골계미」(박원식) 중에서, 302쪽
출판사 서평
가뿐한 두루마리 같은 산문에 담아낸 문학적 삶과 꿈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70대 중반을 넘긴 지금도 어린아이와 같은 상상력을 잃지 않으며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오탁번의 신작 산문집. “남루한 일상을 해학적으로 일탈하여 초월에 이르게 하는 마력의 울림”을 들려준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35년간 현대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학교 현장에서 퇴임한 후 고향 제천으로 돌아와 ‘원서문학관’을 꾸려가고 있다. 이 산문집에서 그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맞닥뜨리는 감동, 작가 오탁번을 있게 해준 인연과 경험, 지난날의 치열했던 창작 여정, 그리고 문학에 대한 몇 가지 상념을 다채로운 양식의 산문들을 통해 두루마리처럼 가뿐하게 펼쳐 보인다.
고향에 세운 소박한 문학관이 선사하는 작은 감동
그는 “젖배 곯은 아기에서 어엿한 청년으로, 밤송이머리 소년에서 검버섯 늙정이로” 변해온 자신의 모습이 바람에 날리는 티끌 같다면서 시간의 위력을 절감한다. 그러면서도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초등학교 동창들과 푸근하게 어울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시절 “구구단 못 외워서 벌 서는 어린 학생이 되고 참외 서리하는 개구쟁이”로 돌아가 세월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를 깜박 잊기도 한다.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의 분교였던 폐교를 사들여 세운 문학관에서 지내는 작가는 이곳의 사계(四季)를 마주할 때 솟아나는 갖가지 감정을 특유의 천진함과 감수성으로 맛깔나게 풀어낸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밖을 내다봤을 때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내린 흰 눈은 그야말로 세상일로 숯검댕이가 된 나의 가슴을 정화시켜주는 것 같다”며 ‘숫눈’이 펼치는 절세의 산수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비 내리는 날이면 수련에 빗물 듣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마냥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소설가 박원식은 원서문학관 지킴이 오탁번을 이렇게 묘사한다. “날마다 소주 한 병을 눕힌다고 했지만, 이곳에서 그가 하는 일은 아마도 주로 창작일 게다. 여차하면 흥겨워 한잔 마시듯이, 여차하면 설레어 작품에 손을 대는 사람. 그게 오탁번이다.”
작가는 산문집 머리말에서 “시와 소설에 대한 나의 자취를 손어림으로 모은 산문집을 하나 낸다. 두루마리 휴지 같은 씀씀이나 되는 산문집이 되면 좋으련만”이라며 소박한 글임을 강조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생에 걸쳐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 다니며 풍요로운 문학세계를 일군 작가 오탁번의 삶과 꿈이 오롯이 응축된 또 하나의 역작이기도 하다.
“늙은 손이 여전히 글을 쓰네. 망각을 위해!”
그의 문학 여정은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모티브를 근원으로 한다. 일찍이 20대에 동화, 시, 소설 세 부문에 걸쳐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3관왕’이라는 명예를 얻었지만, 이는 한편으로 “시인-소설가의 이율배반적인 고뇌의 그네타기를 감수해야 하는 팔자”라는 멍에가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문학 이력을 돌아보다가 패기와 치기 사이를 오가던 젊은 오탁번을 만나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다. “등단한 지 7년이 지난 1973년에 낸 첫 시집 『아침의 예언』의 것을 다시 읽어본다. 이건 머리말이 아니고 후기인데, 꼭 무슨 ‘시인 취임사’라도 되는 것 같아 정말 웃긴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뭐? ‘나와 이웃의 시와 산문과 학문에 큰 보람 있기를’ 바란다고? 예끼, 이 사람아.”
그런가 하면 여전히 치열한 창작 현장에 몸담고 있는 현역 작가로서 가슴속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상상의 날개를 쫙 펼쳐서 힘차게 펄럭여도 보고, 작품 활동을 오랫동안 전개하면서 구축한 문학론과 창작론을 죽비를 치듯 명징하게 설파하기도 한다. “무슨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사기 치는 시는 정말 역겨워요. 재미가 있는 시, 언어의 결이 살아 숨 쉬는 시, 쉬우면서도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한숨 같고 보리밥 먹고 뀌는 풋방귀 같은 시, 아! 나도 그랬어, 하면서 저절로 무릎을 치게 하는 조용조용한 시가 진정 좋은 시라고 생각해요.”
작가로 존재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창작의 고통은 그에게도 어김없이 닥친다. “나는 소설을 굉장히 꼼꼼히 써요. 코피 흘려가며… 토씨 하나도 신경 써 고치고 또 고쳤지요. 아마 지금까지 소설을 붙잡고 있었더라면 나는 벌써 죽었을지 몰라요. 소설은 형무소의 중노동과 같아요.” “시인에게는 나이가 없어요. 시는 늘 새로 쓰는 거지요. 암탉이 달걀을 낳다가 죽는 일은 없지만 사람은 열 번째 아기를 낳다가도 죽을 수 있어요. 시는 달걀 낳듯이 낳는 것이 아니라 첫애를 낳듯이 목숨 걸고 써야 해요. 언제나 처녀작을 쓰는 기분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써야만 돼요. 절실한 생각 없이 시를 쓰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지요.”
시와 소설을 넘나들면서 허구와 현실을 착각하는 환각과 왜곡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친 보르헤스는 말년에 지은 마지막 하이쿠에서 “늙은 손이/ 여전히 시를 쓰네/ 망각을 위해”라며 창작의 변을 토해냈다. 이에 빗대어 작가 오탁번은 중얼거린다. “늙은 손이 여전히 글을 쓰네. 망각을 위해!”
기본정보
ISBN | 9791190727099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4월 20일 |
쪽수 | 312쪽 |
크기 |
136 * 195
* 27
mm
/ 349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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