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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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다 크고 나니 집안엔 언제나 혼자였다.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지만 한창 육아와 살림에 매달리다 보면 그 사실을 잊게 된다.
그러다 문득 시간의 터널을 빠져 나오면 사무치도록 시린 외로움이 다가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온 것인가. 나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 나의 자리는 어디 있을까? 나에게 미래는 있는 걸까?
20년 가까이 그림책과 함께했던 제님 역시 그 무겁고 이상한 감정, 아프고 허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정경제를 돕기 위해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후로 그 감정은 시도때도 없이 마음을 무너뜨렸다.
다행스러운 건 책이 주는 위로를 알고 있었고, 바로 옆에 식물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혼자인 시간을 견뎌야 한다면 마음이 도망쳐 가닿을 어딘가가 필요하다.
인생의 의미, 사회적 욕구, 개인의 자존감 등은 원한다고 해서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더욱 그렇다.
내 마음이 가닿을 수 있는 곳. 아무리 하잘것없고 사소하더라도 시든 마음을 한 순간 쉬게 해줄 곳이 필요하다.
제님에게 그곳은 책이었고 식물이었다.
책과 식물은 요란하지 않게 우울함이 스며든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무엇보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존재였다.
슬프건 아프건 그냥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운이 좋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끼리의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그곳에서 쉼을 얻고 치유 받은 마음들이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렀다.
겨우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지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흔하디흔해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들, 마음을 기울여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
한번 마음을 주었더니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며 가슴에 서정이 깃들게 했다.
오십이라는 나이는 마음을 받아서라기보다 고인 마음이 흘러야 힘을 얻는 나이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너라고 부르자 나라는 존재가 더욱 선명해졌다.
작가정보
한적한 오솔길이나 과꽃 피어 있는 주택가 골목을 사부작사부작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소하고 겨우 존재하는 것에 마음이 가고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저절로 피고 지는 모든 풀꽃과 나무들, 햇살과 바람과 가을 풀벌레 소리를 좋아하고,
말라비틀어진 들꽃대와 가을 열매들, 그리고 그림책과 도서관을 사랑합니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고 이화여대에서 불어교육과 영어교육을 공부했습니다.
그림책 모임과 강의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며, 책과 식물에 기대어 지금을 살고 있습니다.
『그림책이 좋아서』(2013), 『포근하게 그림책처럼』(2016), 『그림책 탱고』(2017), 『그림책의 책』(2020).
블로그 blog.naver.com/noirej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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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instagram.com/noirejn
목차
- 프롤로그
머리말
1부 반백 년의 고독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지금
창 이야기를 하자
창이 있는 부엌으로의 여행
엄마라는 말은 도대체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
속 깊은 친구, 나만의 오솔길
자신만의 계절을 걷는 나무들_느티나무와 소사나무
내 삶의 마무리도 저러했으면_미국쑥부쟁이
죽은 화분에 3년 동안 물을 주다_오죽
뒷모습을 보는 일
아침을 여는 방식
동네 빵집의 사려 깊은 북큐레이션
고요를 시청하다_맥문동
빨래처럼 시래기를 널었다_시래기
2부 식물의 위안
초록에 물드는 우연한 마음
20년 친구 나의 작은 숲_옻나무
나의 친애하는 나무에게 전하는 말_자작나무와 감나무
비 오는 일요일에 행복해지는 법_유칼립투스 폴리안
비켜나 있음의 쓸모_찔레꽃
애도의 선물로 찾아온 인연_마오리 소포라
향기로운 빛깔 모과책방을 꿈꾸다_모과나무
쓸모없고 아름다운 채집황홀_매실
올해 수확한 첫 나뭇잎 한 장_아기벚나무
행복의 이모작_담쟁이덩굴
마루에 고옵게 피었다_매화
빈 벽의 실세를 모셨다_실새풀
나의 비밀 나무_백합나무
양화소록 따라 하기_황금조팝나무
시든 마음 기댈 곳은_백화등
지금은 진분홍 시간이에요_접시꽃
오늘 참 예쁜 것을 보았네_사광이아재비
믹스 커피식 인연_아그배나무
3부 비정규의 시간
뜨겁고 고요한 어떤 것의 중력
어찌나 극적인지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사람 사는 거 다 같다고?
사실은 나도 도망가고 싶었다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이야기가 필요한 이런 날
연근 반찬 어떻게 만들어요?
어쩌다 우린 이곳에서 만나게 됐을까
한세상 멋지게 살거라
4부 독서의 여백
아무도 모르는 오후의 문장
내 울음을 기억하는 나무를 가졌는가?_벚나무
서리가 내리면 그 나무를 찾아간다_고욤나무
꽃을 묻는 쓸쓸한 어떤 놀이
마당의 정서를 거닐다
시(詩)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모항은 가보았니?
가을 햇볕과 바람이 만든 맛
위로와 축하의 말의 허전함을 채우려면
상추쌈을 아삭아삭 먹으며
오소리네 집 꽃밭에 다녀왔다_층층잔대
5부 인연의 무게
외로움이 나란한 우리의 시간
아궁이 앞에서는 모든 게 괜찮았다
이 그림책 제목이 뭐야?_벚꽃
우리집 남자들이 탐내는 식물_몬스테라
레오라면 아끼고 아끼는 식물도 기꺼이_꽃방동사니
고양이에게 찾아온 다정한 꽃_민들레
마음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은빛의 선물_마오리 코로키아
어수선한 마음 다스리는 꽃씨 여행_꽃씨 프로젝트
단풍잎 줍는 할머니의 마음
종소리가 듣고 싶은 날
에필로그
책 속으로
아이와 그림책으로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즈음부터 나는 내내 불행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생각 속에서 온통 불행했다. 육아를 핑계로 잠깐 미뤄두었던 나의 꿈은 어찌해볼 도리 없이 멀리 달아나 있었고, 동시에 엄습하듯 찾아온 공허와 불안은 얄팍한 자존감마저 추락시켰다.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지나온 시간만큼 가정 경제도 나아져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인생이라는 게 수학 공식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것도 하필 그즈음이었다. 게다가 중년의 나이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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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 일에 불행하던 시절이었다. 별것도 아닌 무수한 일이 왕따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불행의 이유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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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습관처럼 몸에 붙은 읽고 쓰는 삶과 느린 산책, 식물 돌봄이 시든 마음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남들 보기에는 한들한들 여유로운 삶으로 보였으리라. 이런 한들한들한 삶 사이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최하위 비정규직 단기 아르바이트도 했다. 인생이라는 게 수학 공식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건만, 도리없이 또 부지런히 성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막연히 장밋빛 행복을 기대했던 성실함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지고 올라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삶에 대한 단단한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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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는 마흔의 터널을 지나 나이 오십에 이르러 삶을 가꾸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마음의 손바닥을 불행에서 행복 쪽으로 뒤집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나이 오십에 삶을 가꾼다는 것은 쓸모없이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에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다. 도무지 말이 되지 못하는 침묵의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일이다. 다정한 관찰자가 되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포개는 일이다. 깊고 따뜻하고 가능한 한 작은 이야기를 기어이 글로 남기는 일이며,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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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재미라곤 없을 것 같은 오십이라는 나이에도 이토록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마흔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서 맞이한 한 줄기 햇살 같은 맛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 살아남는 것을 가장 큰 성공으로 충실한 매일을 살다 보면 환한 오십에 기어이 당도하게 되리라는 한 조각 진실이 흔들리는 마흔들 마음에 가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사적인 이야기가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므로.
- 〈머리말〉 중에서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와 함께 걸었는데 낮에도 걷고 밤에도 걸었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줄곧 혼자 걸었다. 속절없이 내가 작아지는 날이나 우울의 그림자가 저만치서 기척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오솔길로 숨어들었다. 어떤 일이든, 누구에게든 아무도 모르게 저 혼자 마음이 베이거나 마음이 심하게 부서지는 날에도, 고백하기 창피할 만큼 작은 일에 화가 나는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그 오솔길 위에 있었다. 대부분은 걷는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었는데, 그때는 나가기 전에 시 한 편이나 글 한 줄, 또는 그림책 한 권을 읽고 나갔다. 방금 전에 읽은 문학은 오솔길의 다정하고도 너른 품 안에서 좀 더 선명한 이미지로 펼쳐지거나 사유가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그 시를, 그 문장을, 그 그림책을 흡족하게 느끼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어쩌다 한 번 해보고는 좋아서 습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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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지고 작아지고 또 작아지던 무참한 시간들, 스스로 독방에 갇혀 홀로 지낸 고독의 시간들, 글을 쓰는 것도 힘들지만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들, 온통 모호함투성이에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들. 그 모든 시간들을 따뜻하게 품어준 오솔길 덕분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 사십 대를 무사히 통과해온 것 같다.
- 〈속 깊은 친구, 나만의 오솔길〉 중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감사의 마음이 쌓인다. 자연이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서, 시간을 내어 눈길을 주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자연이라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연에 대해 각별히 놀라워할 줄 아는 눈을 가진 나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오늘도 자연에 깃든 하늘, 바람, 나무, 풀, 새들, 고양이와 눈 맞춤 하느라 느릿느릿 걷는다. 느린 걷기는 내가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얼마든지 잃어버려도 좋다.
- 〈시간을 가장 우아하게 잃어버리는 방법〉 중에서
10여 년의 세월 동안 정을 나눈 오죽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흙 속의 뿌리는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물을 주면 언젠가는 새로운 죽순이 나올 거라 믿었다. 그러고는 예전과 변함없이 아침저녁으로 살피며 물을 주었다. 이미 삭정이가 된 대나무는 쓰러지지 않도록 잘 세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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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죽은 화분에 3년이 꽉 차도록 물을 주던 어느 봄날 아침, 나는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다 쓰러져가는 대나무 삭정이를 뽑았다. 3년 전의 그날의 마음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오죽의 죽음을 그제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순간 애도(哀悼)란 단어가 떠올랐다. 3년이란 시간은 애도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3년이란 시간 동안 마음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떠나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풍장하듯 애끓는 슬픔이 시나브로 시간에 흩날려진 것이다. 내 마음이 흡족하게 충분히 슬퍼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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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를 끝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란 건 없다는 걸. 상실의 슬픔을 앓는 자가 마음껏 충분히 슬퍼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걸. 함부로 그만 울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더군다나 그쯤이면 됐지 않느냐는 말은 더더욱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충분히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옆에 가만히 있어 줘야 한다는 걸. 울던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으며 스스로 일어서서 걸어 나올 때까지 가만히 지켜봐 줘야 한다는 걸.우아하고 기품 있는 나의 까만 대나무가 알려주고 떠났다.
- 〈죽은 화분에 3년 동안 물을 주다〉 중에서
다시 신문으로 돌아와 칼럼을 읽기 시작한다. 쓴 커피를 홀짝이며 한 문장 한 문장 맛있게 읽는다. 달콤한 시간이다. 너무 아름답거나 머리가 명징해지거나 가슴을 후비는 문장이나 단어를 만나면 스크랩했다가 나중에 메모하고, 머리와 가슴에 담아 하루종일 틈틈이 생각한다.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청소기를 돌리면서, 산책을 하면서. 마음이 이제 됐다며 놓아줄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가슴에 담은 오늘의 문장과 단어가 되는 것이다.
- 〈아침을 여는 방식〉 중에서
그날 이후 ‘사려 깊은’이란 단어가 마음속에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아 나가질 않았다.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읊조려 보곤 했는데, 이런 단어가 내 마음속에 살고 있다는 게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사려 깊은’이란 말을 마음속에 기르고 있었고, 그러다 보면 그 말처럼 조금은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동네 빵집의 사려 깊은 북큐레이션〉 중에서
그러니까 이 찔레꽃은 친정아버지의 잔잔한 정이 가득한 마음 씀씀이로 우리 집에 오게 된 거다. 새소리만이 가득한 산기슭에서 도시의 열악한 베란다로. 그날부터 나는 베란다에서 찔레꽃 한 송이 피우는 행복을 꿈꾸었다. 한 송이만으로도 베란다에 찔레꽃 향기 가득하겠지. 그런데 십 년이 넘어가지만 아직까지 꽃 한 송이 보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죽지 않고 잘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고, 여전히 나는 찔레꽃 한 송이 피우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무성한 초록 이파리들 사이에 하얀 찔레꽃 한 송이를 상상으로 즐기는 것도 꽤 괜찮다.
- 〈비켜나 있음의 쓸모〉 중에서
언니의 사려 깊은 위로와 애도의 선물, 따뜻한 이야기를 품은 작은 나무, 마오리 소포라. 이제 막 돋아난 새싹처럼 자그마한 이파리가 무척이나 귀엽다. 특이하게 지그재그로 오밀조밀 자라나는 줄기는 소포라가 선(線)을 즐기는 나무라는 걸 확실하게 각인하는데, 그 지점이 바로 소포라에 유혹되는 결정적인 이유다. 소포라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버지가 과실나무 외에 유일하게 좋아하셨던 배롱나무를 닮은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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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두 달쯤 지났을까. 노랑을 품은 연둣빛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히야! 이제 됐어. 드디어 생기를 찾았구나. 내 몸에 싱싱한 세포 하나가 생긴 것만 같았다. 내 간절한 마음에 반응해준 소포라, 그저 고마웠다. 아니지. 오히려 소포라가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을까? 적절한 때를 넘겨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지 않도록 예민하게 알아차린 내 마음결에 대해서 말이야. 식물이나 사람이나 회복하기 적절한 때를 예민하게 알아차려야 하는 법이니까. 이 엄동설한에 연둣빛 새순을 바라보는 일에 하염없이 시간을 쓰고 있다. 더불어 내 마음도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다.
- 〈애도의 선물로 찾아온 인연〉 중에서
백합나무 때문에 그렇게 가슴앓이하는 사이 참으로 우습게도 아주 가까이에서 발견했다. 발견한 것이 아니라 10년 동안 스쳐 지나간 나무를 그제야 알아본 것이다. 도서관 가는 익숙한 길목에 한옥마을의 중앙고등학교 교정에서 보았던 그 특이한 열매를 매달고 멋스럽게 서 있었다. 바람에 떨어진 가지 하나 주워 집에 들이니 겨우내, 그리고 봄을 지나 여름까지 마루를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 〈나의 비밀 나무〉 중에서
실내로 들여온 백화등은 온도와 습도가 적절한 화장실에 있다가 가끔은 안방 창가에 있다가 햇볕이 좋은 날에는 베란다에 잠깐 두기도 한다. 화장실에 있을 때는 시시때때로 보슬보슬 봄비처럼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주곤 한다. 하릴없이 백화등
출판사 서평
1부 반백년의 고독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지금”
마음의 손바닥을 행복 쪽으로 뒤집어 뒤늦게 알아차린 인생의 뒤뜰을 걷고 있다. 뒤뜰 안에는 온통 쓸모없는 작은 것들이 수런거리고 있다. 아늑한 그곳을 걷다 나오면 나는 다정한 얼굴빛으로 물들어 있곤 한다. 유일한 지금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비밀을 알아버렸다.
2부 식물의 위안 “초록에 물드는 우연한 마음”
재능이라곤 없는 나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자연에 대해 놀라워할 줄 아는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는 것.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기적 같은 선물이 가끔 찾아온다. 뜻하지 않는 곳에서 만나는 함박꽃나무처럼. 그것이 특별한 재능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조금 더 많이 행복해졌다.
3부 비정규의 시간 “뜨겁고 고요한 어떤 것의 중력”
마흔이 넘어 겨우 찾아낸 내가 좋아하는 일, 읽고 쓰는 삶을 지켜내기 위해 사이사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생애 최초의 살인적인 육체노동 속에서 투명 인간으로 살아본 그 시간은 삶을 옥죄는 헛것을 지우고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속에 겸손이란 단어를 소중히 기르게 해 주었다.
4부 독서의 여백 “아무도 모르는 오후의 문장”
여러 겹의 포장을 걷어낸 담백한 오십이 되어 읽는 삶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다. 시인 놀이를 하고 그림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문장의 사치를 마음껏 즐기다 보면 책을 살게 되지 않을까. 그리하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를 품은 읽는 삶 말이다.
5부 인연의 무게 “외로움이 나란한 우리의 시간”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며 외로움을 공기처럼 먹고살지만, 사실은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외롭거나 슬픔을 감춘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재주가 있고, 그런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소리 없이 아궁이처럼 따뜻함을 전하는 사람으로 곁에 나란히 앉아 있고 싶다.
기본정보
ISBN | 9791186963494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12월 05일 |
쪽수 | 304쪽 |
크기 |
128 * 188
mm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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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ϻ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제님 작가의 식물 에세이다.
그동안은 그림책이 주 소재였다면 이번에는 식물이다. 작가의 집에서 키우는 식물부터 길이나 남의 집 마당에서 만난 식물, 고향집이나 과거의 기억 속 그것까지 작가의 관심 안에 있는 식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거기에 당연히 책이 연결되고, 작가의 일과 일상, 내밀한 감정까지 드러냈다.
이번 책에는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행복 씨앗을 발견해 내는 이야기를 담았다. 식물과 책과 사람들에 기대어 더 생기있게 짙어진 초록 이야기가 될 것이다. 경제적인 불안이 기본값인 일상에서 읽고 쓰는 삶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이며, 삶의 재미라곤 없을 것 같은 오십이라는 나이에도 이토록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마흔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서 맞이한 한 줄기 햇살 같은 맛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 살아남는 것을 가장 큰 성공으로 충실한 매일을 살다보면 환한 오십에 기어이 당도하게 되리라는 한 조각 진실이 흔들리는 마흔들 마음에 가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의 사적인 이야기가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므로.
위 머리말의 마지막 문단이 이 책 전체 요약 소개에 해당된다 하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의 이야기에서 유사한 경험과 감정을 만날 때 독자들은 반갑고 위로를 받는다. 내가 서평단에 신청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지 3년째이지만 식물엔 심드렁했다. 그러다가 올 여름 플로리스트 교육을 받으면서 꽃에 관심을 가졌고 집안의 화분들 개수도 늘어났다. 그림책과 고양이와 식물! 모두 내 일상이니 당연히 그것을 소재로 쓴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먼저 놀란 것 하나! 작가가 좋아한다는, 집에서 키우는 식물 이름 중에 처음 듣는 것이 많았다. 마오리 소포라, 마오리 코로키아, 사광이아재비, 꽃방동사니. 이 이름들을 듣고 바로 어떻게 생긴 건지 아는 사람이라면 나처럼 식물초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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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들은 책에 실린 것이다. 두 번째로 놀란 건 작가의 사진 솜씨다. 분명 아파트에 산다고 했는데 위 사진을 보면 아파트처럼 보이지 않는다. 집 안을 식물원처럼 꾸민 것인지 사진 실력이 출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거의 사진작가 수준이다.
아래 인용은 여러 가지로 놀란 것이 들어있는 문단이다.
“이야기가 필요한 이런 날 中” p.190
다음날, 월요일에 김서령의 가자미 이야기와 백석의 시 두 편을 가슴에 품고 물류창고로 향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의 백석처럼 삽상한 기분으로, 하루 종일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을 하면서도, 투명 인간으로 살면서도, 손놀림이 느리다고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기분이 삽상하기만 했다. 집에 가면 나도 오늘 가자미를 꼬깃꼬깃 진간장에 지져 먹을 생각에, 나도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이니까. 다음에는 김서령 작가의 <참외는 외롭다>를 읽을 거니까.
내게 백석의 시는 늘 발견된다. 다른 책을 읽다가 (나에게만)새로운 시를 알게 되는데 이번처럼 전문이 실리지 않는 경우 가지고 있는 <정본 백석시집>을 꺼내 찾아본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이번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는 어찌나 침이 고이던지...ㅎㅎ
그리고 그동안 김서령이란 작가를 몰랐다는 사실! 책 제목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보는 순간, 작가가 안동 출신인가 했다. 이 꼭지를 다 읽고 바로 찾아보니 안동 출신이 맞고, 2018년에 타계했으며 그의 필력은 유명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몰랐던 식물 이름을 아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시와 작가를 알게 되어 더 좋았다. 위 밑줄 친 ‘삽상한’이란 단어처럼 처음 듣는 단어들도 꽤 있었다. 맨 ‘상쾌하다’밖에 쓸 줄 몰랐는데 앞으로 이 단어도 써봐야겠다.다
새롭게 알게 된 의태어도 있다.
ϻ"작년 봄에 툭 꽂아두었던 담쟁이덩굴도 마디마디 도틈도틈 싹을 틔웠다."
"빌라 울타리에 발맘발맘 기어오르던 청보라색 나팔꽃."
ϻ
참으로 귀여운 말이 아닌가. 식물에세이라서 만날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어 좋기도 하지만 단점도 없지 않다. 작가가 소개해주는 책과 식물을 검색하다보면 어느새 그것들을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담고 있다. 불과 며칠 전에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글을 썼는데 말이다. 그래도 ‘마오리 소포라’ 보다는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먼저 결제할 것 같다. 동향 작가가 쓴 글을 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고, 제님 작가와 비슷한 감정 포인트를 느끼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와 관심사가 비슷한 작가의 글들을 읽으며 직접 만난다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작가의 마당파티에 초대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p.219
마당의 정서를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마당 파티를 열고 싶은 바람이 있다. 삶터에서 문학의 여백으로 승화된 마당에 대한 글을 낭독하기도 하면서. 각자의 마당에 대한 서사를 풀어놓는 자리에 얼마나 많은 결들의 감정이 포개지고 또 엇갈릴 것인가? 그 감정의 결들 사이에는 따뜻한 그리움과 마법같은 편안함이 소복소복 쌓일 것이다.
<오늘 참 예쁜 것을 보았네>를 읽고 우리 집 마당 봄밤 이야기를, <간절하게 참 철없이>에 나오는 안동식혜를 먹어봤냐며 수다 떨 거리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그리고 제님 작가에게, 이젠 좀 어떻냐고 물어보고 싶다.
ϻ**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