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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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시인은 아프고 진지한 눈으로 세상을 탐색한다. 무언가를 정한 목표 없이 탐색하는 자세는 뜻밖의 발견, 혹은 기대 이상의 진실과 마주쳐 새로운 차원을 전개하거나 현재 자신이 마주한 상황에 대한 사유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는 물리적 자연인으로서의 관계와 일상을 구태여 시에 잘 끌어들이지 않는다. 「이사」, 「그림자 붉은」 등에서 생활 형태의 중대한 변화를 소재로 삼았고, 「굴욕」, 「비뇨기과 오전」 등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소소한 문제를 꺼내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또한 종적 변화를 포함한 횡적 변화의 징후라 볼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새’가 제목에 등장하는 작품은 「새의 눈에 마지막으로 어린 황홀 같은」, 「새는」, 「새를 부르는 법」 등으로 빈도가 높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새’의 이미지나 상징이 사용된 경우, 혹은 나무나 돌처럼 정지된 사물과는 다른 이동과 초월의 이미지로 소환되는 경우 등을 고려하면 ‘새’는 ‘울음과 비행’이라는 두 가지 변별성으로 시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완호 시인은 어느 선배의 인상 깊은 시집을 본 소회를 통해, “내가 겪어온 아픔은 나만의 아픔,/ 슬픔 또한 나만의 것이었음을/ 거듭거듭 깨닫는 것이다”(「너무 아프게 살아왔다, 는」)라고 고백한다. 이어 “한 공간에서도 좀처럼 겹치지 않던 우리의/ 크기 다른 발자국들, 나의 속 좁은 가난과/ 천둥 같은 그의 그리움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박자를 짚어가며 나는/ 내 조그만 그릇을 깨뜨리지 않으려 애쓴다”라고 자신의 속내를 밝힌다. 미뤄 짐작할 사정이야 많지만, ‘아프게 살아왔다는 말’은 이제 좀 넣어두고 “그 말을 함부로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또 다짐하며, 다시/ 한 편의 시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다”라는 자기 확신을 통해 박완호 시인은 어쩌면 통증을 견디며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도 닿게 된다.
사실 ‘앓이’를 곧바로 고통과 연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앓이가 통증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대상이 분명한 감정의 상태를 통과해 존속할 수 있는가는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는 특별한 이유 없이 제가 애써 온 길을 문득 끊어 재귀한다는 점에서 통증을 고통으로 승화하는 나름의 놀라운 비법들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에서 압도적인 빈도와 질적 수월성을 보이는 작품들은 박완호 시인의 시관(詩觀), 시적 태도, 지향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의 시는 ‘버티기’보다는 ‘견디기’라는 특성으로 더 잘 드러나는 데 있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시인은 언제나 같은 방식을 다시 시도하기 때문이다. “어제 쓴 시는 진작 망했고/ 방금 내 손을 떠나간 말들은/ 철 지난 연애처럼 서둘러 시들었다.” 웬만하면 ‘그만’을 외칠 순간에 시인은 “몰입해야 한다. 그저 쓰는 게 아니라/ 제대로 쓰기 위해서”라고 또 자기 자신을 다그친다. “너와 나를/ 더 힘껏 서로에게 밀어”냈을 때 그 사이, 틈, 간격으로 보편적 감응의 시가 무진장 들어서리라 힘껏 기대한다.
이 책의 총서 (138)
작가정보

시인
1965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내 안의 흔들림』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아내의 문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너무 많은 당신』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6人 동시집 『달에게 편지를 써볼까』 등을 펴낸 바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시와시학 팔로우시인상〉을 수상했다. 〈서쪽〉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풍생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차
- 1부
간절기 · 13
시는, 시를 견디라며 · 14
우는 돌들 · 15
엇박자 · 16
숫자 바퀴 · 18
어둠의 맛 · 20
꾸역꾸역 · 21
11월 · 22
아무도 없는 · 23
우체국에 안 가려면 어디로 가야지요 · 24
가파른 서쪽 · 26
저수지 · 27
당신을 부르면 · 28
굽이돌다 · 30
2부
가인(歌人) · 35
새의 눈에 마지막으로 어린 황홀 같은 · 36
사모 · 37
클레멘타인 · 38
꿈길 · 40
느티나무는 나를 · 41
룰루 · 42
그림자 붉은, · 43
슬픈 간증 · 44
블랙아이스 · 45
흘려 쓰다 · 46
익명으로 기울다 · 47
비문 · 48
빛의 문장론 · 49
급훈 뒤집기 · 50
3부
풀피리 · 53
이사 · 54
한쪽 · 55
늦은 비가(悲歌) · 56
월식 · 58
고라니 · 59
새들 · 60
피 · 61
뚝방 전설 · 62
노랑종이나비 · 63
풍경의 유행 2 · 64
몽당빗자루 · 65
햇살론 · 66
짝짝이 · 67
초승달 · 68
리셋 · 69
4부
굴욕 · 73
나무가 나무를 · 74
끈을 조이며 · 76
데자뷰, 1980년대 · 77
시인 · 78
비뇨기과, 오전 · 79
너무 아프게 살아왔다, 는 · 80
詩 · 82
단꿈 · 83
구름의 위증 · 84
새를 부르는 법 · 85
손가락은 도마 위에서 지워진다 · 86
시인학교 · 87
악공 · 88
꽃 얼룩 · 89
궁사 · 90
해설 시라는, ‘앓이’와 ‘놀이’ 사이에서 견디기 / 백인덕 · 91
책 속으로
[표제시]
아무도 없는
--
아무도 없는 시간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가요. 녹슬지 않는 칼을 꿈꾸며 숫돌에 제 몸을 갈아대는 쇳덩이처럼. 담금질하는 칼 속으로 스며든 대장장이의 넋처럼. 제 안의 소리가 다 지워질 때까지 노래를 멈추지 않는 소리꾼처럼. 아무것도 아니다가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당신은 지금 사랑인가요? 순간순간 저를 다그쳐가며 그 속사정을 궁금해해요. 아무도 없는 나라엔 누가 살고 있지요? 아무도 없는 시간은 어디로 흘러가지요?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는 누구인가요? 빈 칼집에서 나는 시퍼런 쇳소리. 무너진 담장 너머 들리는 핏줄 댕기는 음악 같은.
--
[대표시]
우는 돌들
--
뾰족한 돌 하나를 떨어뜨리자 마음속
돌무더기가 또 꿈틀거린다. 손 닿으면
상처난 마디마다 시뻘건 핏방울 맺혀
어디가 아픈 건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모르는 아픔. 송곳 박힌 가슴팍에서 솟구치는
맥락 없는 글자들 문장으로 꽃 피기도 전
돌무더기에 흩어져 내린다. 불발탄 같은
절망의, 날카로워진 돌조각들을 끌어안고
맨몸으로 어둠 속을 헤치며 가는 사람의
흐릿한 그림자. 날이 갈수록 뾰족해지는
마음의 돌기들. 가시 돋친 혀끼리 주고받는
키스 같은, 독기 서린 날을 숨긴 채 다가서는
자객의 발소리처럼 은밀해지는 어둠 속
나는 어디선가 주저앉고 있을 한 사람을 위해
또 길을 나선다. 모난 몸을 서로 비벼가며
울어대는 돌멩이들처럼 나도
상처투성이인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아플수록 찬란해지는
고통의 노래를 부르려는 것이다.
--
가인(歌人)
--
이 순간 나는 휑해진 넋까지 죄다 게워낸
허무의 맨바닥이어야 하리. 이럴 때
죽음을 떠올리는 건 사치. 나는 또
어떻게든 오늘을 버텨낸 후에
내일 또 하나의 절망을 낳으리.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과 그 아들의 아들이 마주치고 갈라서는
그물망 같은 나날 속 제자리를 맴도는 나는
허무가 낳은, 허무를 낳는, 허무의
투명한 그림자. 더는 아무것도 아닐
세상의 길들을 떠돌며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노래의 지문을 찾아다니는 나는
허무의 맨바닥을 딛고 서서
기꺼이 새로운 허무를 맞이하려는
날개 없이도
만 리 밖을 꿈꾸는
한 마리 새.
기본정보
ISBN | 9791165121389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2월 20일 | ||
쪽수 | 104쪽 | ||
크기 |
128 * 210
* 13
mm
/ 17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현대시세계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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