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국의 석농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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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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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김광국
번역 유홍준
역자 유홍준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예술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인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영남대학교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학교 교수 및 문화예술 대학원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후 석좌교수로 있으며, 제주추사관 명예관장과 가재울미술사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평론집으로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답사기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전11권), 미술사 저술로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전2권), 『완당평전』(전3권), 『유홍준의 국보순례』, 『명작순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전3권) 등이 있다. 간행물윤리위 출판저작상(1998),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했다.
역자 김채식은 1966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연수를 하고, 2005년부터 2006년 일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학예사로 활동하였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거점번역팀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화론을 강의하였고,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한문교육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사학위논문으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연구」가 있고, 공역서로 『조선시대 간찰첩 모음』, 『청관재 소장 서화가들의 간찰』, 『완역 이옥전집』, 『무명자집』 등이 있다.
목차
- 일러두기
책을 펴내며
석농화원의 해제와 회화사적 의의
1 석농화원 (원첩 권1)
2 석농화원 (원첩 권2)
3 석농화원 (원첩 권3)
4 석농화원 (원첩 권4)
5 석농화원 속
6 석농화원 습유
7 석농화원 보유 (권1)
8 석농화원 보유 (권2)
9 석농화원 별집
10 석농화원 부록
유한준의 발문
〈습유〉편 뒤에 쓴 김광국의 화제
인명록
『석농화원』 육필본 영인
출판사 서평
이 책은? /
조선시대 회화사를 새로 쓸 타임캡슐이 지금 열린다!
조선 후기 최고의 서화수장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석농화원(石農畵苑)》이란 이름으로 묶은 그의 컬렉션은 공민왕과 안견에서부터 김홍도와 심사정까지, 조선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방대한 것이었으나 김광국이 사후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져버려 전모를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화첩에 실려 있던 그림의 목록과 화가들의 이름은 물론, 당대의 명사들이 그림에 덧댄 화평과 화제까지 꼼꼼히 기록된 책이 발견되었다. 김광국이 직접 편집까지 마쳤으나 무슨 이유인지 발간되지 못한 이 책을 한국 미술사의 대중화를 이끈 명지대학교 유홍준 석좌교수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의 김채식 책임연구원과 함께 우리말로 옮겼다.
원서의 형식과 내용에 충실하게 옮긴 번역을 원문과 함께 실어서, 화첩에 실려 있던 그림들의 제목과 그린 이의 이름은 물론 그림에 붙어 있던 화제와 화평 등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를 토대로 간송미술관, 선문대학교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은 물론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까지, 《석농화원》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작품 130여 폭을 찾아 원래 화첩의 체제에 맞춰 실었다.
책의 앞머리에는 유홍준 교수가 《석농화원》에 대해 쓴 상세한 해설이 있어 화첩의 가치와 회화사적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책의 뒤에는 육필본의 영인을 실어 실제 책의 내용을 생생하게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 /
당대 제일의 서화수장가이자 회화비평가, 석농 김광국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교수가 답사기의 첫 번째 권에 인용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화유산을 보는 마음가짐을 달리 하게 한 문장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이렇게 낭만적으로 표현한 문장이 또 있을까. 다만 이 문장이 조선 후기의 문인 유한준이 《석농화원》에 쓴 글의 첫머리를 유홍준 교수가 더 쉽게 풀어 쓴 것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래의 문장은 이렇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이때 모으는 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좋은 글은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이런 글을 부친 화첩은 물론, 그 주인 또한 범상한 사람일리 없다. 김광국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뒤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조선 후기 최고의 회화 컬렉션, 《석농화원》
문화가 융성하여 조선의 르네상스시대라고도 불리는 영조·정조 시대. 김광국은 대대로 의관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록 중인 신분이지만 김홍도, 심사정, 정선과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들과 어울리고, 박지원, 박제가 등 명사들과 교유하며 수많은 그림을 수집하였다.
김광국은 노년에 들어서는 평생 모은 작품들을 정리해 화첩으로 꾸미기 시작하였다. 《석농화원》은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그러나 《석농화원》은 김광국이 죽은 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져버렸다. 간송미술관에 ‘해동명화집’이란 이름의 화첩으로 묶인 20여 폭, 선문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30여 폭에 김광국의 소장인과 화평이 붙어 있어 《석농화원》의 일부가 아닐까 추측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화첩 《화원별집》을 여러 권으로 구성되었을 《석농화원》의 한 권으로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었다.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자들은 《석농화원》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면서도, 실제 화첩의 내용을 알 길이 없어 그저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었다.
홀연히 나타난 고서 한 권, 한국미술사학계를 뒤흔들다
그러던 2013년, 서울의 인사동 화봉갤러리에서 열린 고서경매에 ‘석농화원’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 출품되었다. 곳곳에 먹으로 지운 흔적도 있고, 붉은 글씨로 교정 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낡은 책 한 권을 두고 한국의 미술사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조선 후기 최고의 회화 컬렉션, 《석농화원》의 실체가 고스란히 밝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국이 직접 편집하였지만 무슨 이유인지 발간되지 못한 이 육필본에는, 화첩에 실려 있던 작품의 목록과 화가의 이름은 물론 화제와 화평 전문과 이를 짓고 쓴 이들까지 화첩 《석농화원》의 모든 것이 상세히 밝혀져 있었다. 언론은 이 그림이 “조선미술사를 완전히 고쳐 쓸 타임캡슐이 나타났다”고 열광했다.
이에 유홍준 교수는 육필본의 내용을 회화사적 의의와 함께 발표하여 학계에 널리 알리는 한편, 그 내용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거점번역팀의 김채식 책임연구원과 함께 완역하여 ‘김광국의 석농화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로 하였다. 근 200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화첩의 전모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까다롭고 신중한 작업으로 원서를 온전히 옮기다
200년 전에 쓰인 책을 옮기는 작업이니만큼, 『김광국의 석농화원』의 번역과 편집 과정에는 고민이 많았다. 우선 차례가 28쪽에 달하는 분량인데, 그림의 제목과 화가의 이름은 물론 화제와 화평을 지은 이와 글씨를 쓴 이의 이름, 현전하는 작품들의 목록과 소장처까지 적어 어떤 이들이 《석농화원》에 이름을 올렸는지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차례의 뒤에는 공역자인 유홍준 교수가 석농화원의 회화사적 의의와 가치에 대해 쓴 23,000자 분량의 해제가 있다. 연구자들에게는 육필본의 분석 과정에서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김광국과 《석농화원》이 생경하게 느껴질 일반 독자들에게는 전체 책에 대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본문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못한 화가, 문장가들의 인적사항은 인명록을 작성하여 본문의 끝에 부록으로 싣고, 아울러 육필본을 영인하여 책의 마지막에 실어 사료로서의 가치를 살렸다.
고집스런 번역에 읽는 이들의 편의까지 고민하다
번역은 원서의 내용과 형식을 가능한 그대로 살려 원문에 충실하게 옮겼다. 원서에는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주석, 곳곳에 빨간 색으로 교정을 보거나 아예 먹으로 까맣게 지운 부분도 있는데, 이런 부분들도 최대한 정확하게 판독하여 책에 실었다.
원서를 그대로 옮기는 데만 그치지 않고,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단어나 고사에 대한 설명은 주석으로 처리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우리말로 옮긴 그림 제목을 한자 독음과 함께 표기한 점이다. 이경윤의 〈거석분향도(據石焚香圖)〉는 ‘바위에 앉아 향을 피우다’로, 조영석의 〈의금청류도(倚琴聽流圖)〉는 ‘거문고에 기대 물소리를 듣다’로, 이광사의 〈임송왕제한감화도(臨宋王齊翰勘畵圖)〉는 ‘송나라 왕제한의 감화도를 임모하다’ 등으로 옮겨 그림의 내용과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 최고 수준의 화론과 회화비평의 향연
-회화비평집으로서의 『김광국의 석농화원』
『김광국의 석농화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제와 화평들은 당대의 회화비평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박지원, 이광사, 강세황, 김광수와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글을 지었고, 이를 글씨로 쓴 이들도 박제가, 유한지, 이한진 등 그에 뒤지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너도나도 글과 글씨를 남겼던 셈이다. 그리고 그 글들 중에는 그림을 평가하는 데 충실한 것이 있는가 하면, 당대 회화의 경향을 논하고 자신의 그림 보는 기준을 피력하는 화론에 가까운 것들도 있어, 『김광국의 석농화원』은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회화비평서라고 할 수 있다.
김광국 본인도 역대 화가들에 대한 비평을 많이 남겼다. 그 점에서 그는 미술비평가 내지는 미술사가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보다 앞선 시기의 이들의 그림이나 화평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론을 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고, 간혹은 가차 없이 혹평을 가하고 있어 그의 예리한 안목과 자신감을 엿보게 된다.
공재 윤두서가 퇴촌 김식의 그림을 평하기를 “넉넉하고 광활하며 강건하고 섬세하여 우리나라의 대가이며 태평세상에 독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 그의 그림을 보건대, 창건(蒼健)하기는 연담 김명국에 미치지 못하고, 정세(精細)하기는 허주 이징보다 한참 뒤떨어지니, 공재가 대가로 평가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대체로 화원화가 중에 약간 원숙한 자라 하겠다.
김식의 〈한림이우도〉에 쓴 김광국의 화제 중
실제 작품으로 보는 조선시대 회화사
-회화 도록으로서의 『김광국의 석농화원』
물론 화첩에 대한 책이니, 그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원래 화첩에 실려 있던 것으로 전하는 그림은 모두 합쳐 267폭에 이르고, 화가는 이름이 밝혀진 이만도 129명에 달한다. 특히 우리나라 화가들의 면면을 보면, 고려의 공민왕과 조선 초기의 안견, 석경 등을 시작으로 김광국과 동시대인인 김홍도, 심사정 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김광국의 석농화원』에는 지금까지 화첩 《석농화원》에 실려 있던 것으로 알려진 그림을 모두 찾아 원래 화첩의 체제에 따라 실어서, 마치 김광국의 화첩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기존에 이미 김광국의 수장품임이 알려져 있던 간송미술관, 선문대학교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들은 물론, 지금까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개인 소장자들의 그림도 여럿 실었다. 안타깝게도 옛 책에서 흑백 사진으로는 확인할 수 있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고, 그림이 없이 화평만 남은 경우도 있다. 모두 합치면 130여 폭에 이른다. 아직 빈 자리가 많은 것은 아쉽지만, 이것만으로도 실 작품으로 보는 조선시대 회화사 도록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 미술사를 풍요롭게 할 스토리텔링의 보고
-산문집으로서의 『김광국의 석농화원』
『김광국의 석농화원』에 실린 화제들 중에는 인생의 여러 감상이 서려 있어 문학적 감동을 주는 것들도 있다. 특히 원명유가 그린 〈고촌어주도〉에 쓴 글에선 요절한 화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그림에는 사람 때문에 전해지는 것이 있고, 사람도 그림으로 인해 전해지는 이가 있다. 사람으로 인해 그림이 전해지는 것은 그림에겐 행복인데, 그림으로 인해 사람이 전해지는 것은 사람에겐 불행이다. 원명유(元命維) 중사(仲四)는 사람 때문에 전해졌는가, 그림 때문에 전해졌는가. 중사는 사람됨이 옥과 같았고 박학다재하였으니, 그림을 잘 그린 것은 여사(餘事)에 불과했다. 사람 때문에 전해졌어야 마땅한데, 세상에 재능을 아끼는 자가 없어서 아무런 명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오직 이 한 폭의 작은 그림이 인간세상에 남아서 후세에 전해지길 기다리고 있으니, 이 어찌 중사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후세에 이 그림을 보는 자는 이 그림을 통해 그의 재주를 상상할 것이니, 이것이 오히려 썰렁하게 아무 명성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해야 할까? 중사는 일찍 죽었고 또 자식도 두지 못했으니, 더욱 슬프다.
원명유의 〈고촌어주도〉에 쓴 김광국의 화제 중
심사정이 그린 〈와룡암소집도〉의 화제에서는 그림을 그린 심사정은 물론 김광국의 멘토 격이었던 선배 수장가 상고당 김광수와의 인연을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갑자년(1744) 여름에 나는 와룡암으로 김광수를 찾아갔다.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서화를 품평하는데, 이윽고 하늘이 바둑돌처럼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퍼부었다.
심사정이 밖에서 허둥지둥 뛰어와서 옷이 다 젖었으므로 서로 바라보면서 아연실색하였다. 잠시 후에 비가 그치자 온 뜨락의 풍경이 마치 미불 집안의 수묵도와 흡사하였다. 심사정이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멋지다고 소리치며 급히 종이를 찾더니, 〈와룡암소집도〉를 그렸다. (중략) 신해년(1791) 가을 우연히 이민식을 만나 그의 집에 소장된 화권들을 열람하였는데, 이른바 〈와룡암소집도〉가 그 속에 있었다. 어루만지며 추억하니 황홀하기가 옛날과 같았는데, 두 사람의 무덤에 나무가 이미 굵어졌고 나도 늙어 흰머리가 되었다. 지금과 옛날을 생각해보니 감회가 자못 깊어 이에 이민식에게 애걸하여 그림을 가져다 다시 나의 《석농화원》 속에 넣었다. 매양 펼쳐 완상하노라면 한참 동안 서글픈 마음에 잠기곤 한다.
심사정의 〈와룡암소집도〉에 쓴 김광국의 화제 중
이 외에도 우리 미술사를 풍요롭게 할 스토리텔링의 소재들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다.
당대의 문화와 대외교류를 짐작케 하는 생생한 자료
-사료로서의 『김광국의 석농화원』
박지원이 써준 석농화원의 서문에는 김광국이 자신보다 일찍 북경에 들러서 서양의 그림을 접했음을 말하는 대목이 있다. 김광국의 관심은 조선에만 머무르지 않았던 것이다.
석농 김광국은 나보다 일찍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일찍이 천주당의 여러 그림을 두루 살펴보았다.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아마도 그가 옛날에 모았던 우리나라 그림을 모두 불태울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도리어 갈수록 수집에 열을 올려, 그림 하나라도 놓칠까, 한 사람이라도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날을 아껴가며 수집에 급급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박지원이 쓴 「석농화원서」 중
화첩 《석농화원》에는 중국 그림 37폭, 일본 그림 2폭, 유구 그림 1폭, 러시아 그림 1폭, 서양 그림 3폭이 실려 있었다. 서양의 동판화, 일본 우키요에 등이 화첩에 실려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의 대외교류가 생각보다도 훨씬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현전하고 있어 『김광국의 석농화원』에도 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그림들의 경우 명나라 때의 그림은 나라를 ‘황명(皇明)’이라고 적고 있는 반면, 청나라 때의 그림은 ‘만주(滿洲)’라고 적었다가 이후 ‘중국(中國)’이라고 고친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당대인들의 대외교류와 세계 인식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김광국의 석농화원』은 그 자체로 18세기 조선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90620750 |
---|---|
발행(출시)일자 | 2015년 08월 14일 |
쪽수 | 632쪽 |
크기 |
174 * 247
* 45
mm
/ 1566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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