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단순해지는 선화
수상내역/미디어추천
- 전문기관 추천도서 > 세종도서 우수교양도서 > 2006년 선정
작가정보
<b>김홍근</b>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중남미 문학을 전공했으며,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옥타비오 파스의 시 사상>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유학 시절, 가톨릭 신비주의의 정상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연구했다. 귀국 후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한 다석 유명모의 사상연구모임인 '다섯사상연구회'에서 10여 년간 총무를 맡아보며 종교간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5년동안 성천문화재단의 동서인문고전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수강생들이 단순히 배움에 그치지 않고 사진과 글을 통해 자신과 대화하고 표현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시범적으로 포토 텍스트를 쓰고 있다. 2004년부터 참선 실참에 몰두한 끝에 『참선일기』를 펴내고, 조계종 포교사 대학원에서 간화선 강의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보르헤스 문학 전기』를 펴냈고, 옮긴 책으로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활과 리라』, 『현재를 찾아서』, 『흙의 자식들』 등이 있다.
목차
- 느낀 만큼 보인다
연잎에 앉아
서성거리다
뜬구름집
그 새 날아갔을까?
나무 애인
Zen Painting
살아 있는 그림
구슬 닦고 달을 씻고
하염없이
시간과 기차
난생 처음
나 하나
아홉 축대를 올라가면
소나무의 선
앉은 자리가 꽃자리
나(我)무(無)
바람소리를 타고
송석정(松石亭)의 뒷모습
거지탑 앞에 피다
자연 탱화
물살의 흐름
물다리
허허실실 담다리
작은 방에 눕다
까치집 뒷간
무릎보다 낮은 담장
바위길을 뒤돌아보니
경(敬) 바위
폐사지에서
벽 그림
그림자도 쉬는 곳
산을 닮는다
꽃바위 절
춤추는 나무
아니온 듯
주인자리
할머니와 곡선길
호랑이 산
고추 돌
덤벙주초
겁외(劫外)의 소식
수백 년 묵은 침묵
물의 뼈
눈을 위한 음악
단아한 방
편안한 벽
어느 눈 밝은 이가
문 없는 문
종묘에서
심상(心象) 마음의 코끼리
마음 읽어주는 사람
알바위
산수정원
비었지만 꼿꼿하고
곡선을 살리는
벚꽃을 보면
마음찍기
허공에 매달려
시절 인연
Let it be
아미타의 집
소박한 일주문
출판사 서평
옛 사람 마음을 읽는다, 선화禪畵
“있기는 있는데 속 시원히 잡히지 않는 목마름,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과연 이게 뭘까?”
『선화』의 저자 김홍근은 이러한 간절한 물음을 품고, 길 위에서 길을 찾는 끈질긴 ‘구도자’다. 이러한 물음은 그를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도록 동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두루 아우르게 하고, 국내외 여행길로 이끌고 있다.
김홍근은 옥타비오 파스와 보르헤스를 연구한 문학박사이자 유불선과 기독교를 회통한 다석 유영모의 사상연구모임인 ‘다석사상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종교간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또한 15년 동안 성천문화재단의 동서인문강좌를 운영하는 가운데 문화유적답사 또한 부지런히 해오고 있다. 2004년부터는 참선 실참에 몰두한 끝에 『참선일기』를 펴냈고, 현재 조계종 포교사 대학원에서 간화선 강의도 하고 있다.
이번에 펴낸 『선화』는 여러 구도의 길 가운데서, 특히 문화유적답사 여행에서 길어낸 ‘소박한 마음의 행로’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박물관 연구원이 소개하는 역사적 사실이나 미술학자의 학술적 설명은 들어 있지 않다. 대신 그곳에 스며 있는 ‘마음’을 읽으려는 저자의 지극한 시선에 따라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동참하게 된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무슨 용도인지, 왜 여기다 배치했는지, 전체와는 어떻게 조화가 되는지,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여기 사는 사람에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18p) 저자는 이렇게 들여다보면 만든 사람의 마음이 비치면서 시공을 넘어 서로 ‘통하는’ 느낌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화』는 ‘아는 만큼 보인다’ 보다는 ‘느낀 만큼 보인다’는 명제에 가까운 책이다. 『선화』는 세상이라는 텍스트에서 사물을 읽어내는 안목을 높이고 사물과의 대화, 더 나아가 풍경과의 짜릿한 교감에 이르기까지 미처 체감하지 못했던 문화유적답사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무심코 마주치는 풍경에서 ‘선화 발견하기’
일반적으로 선화禪畵란 불교에서 ‘스님들이 수행을 목적으로 그리는 그림’ 또는 ‘마음 속의 수행의 경지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뜻한다. 하지만 선화의 개념을 일상으로 가깝게 끌어오면, 그 외연은 단순하고도 편안하게 넓어진다.
『선화』의 저자 김홍근은 대학시절 선화 강습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림을 가르친 선생님은 ‘어줍지 않은 테크닉을 버리고 무심으로 돌아가서,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심상을 표현해보는 것’으로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선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때부터 저자에게는 하나의 버릇이 생겼다. 일상 중 무심코 마주치는 ‘무심한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낡은 책 겉장의 손때 묻는 얼룩의 모습, 대리석 벽면이나 바닥에 드러나는 돌의 결, 비 오는 날 창밖으로 보이는 우산의 행렬, 푸른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흰 구름들, 단청 하지 않은 사원의 기둥에 드러나는 나뭇결, 오래된 집 벽에 얼룩진 세월의 때 자국, 연못가에 점점이 떨어진 꽃잎, 오래된 석탑의 푸른 이끼와 그 위에 떨어진 마른 나뭇잎…….” (33~34p)
마음이 열리면 이전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자연 속에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이미지들이 고이 숨어 있다. 그것을 즐길 수만 있다면, 발길 닿는 모든 곳이 미술관으로 변한다"며 ‘선화 발견하기’의 매력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자연 미학의 극치가 담겨 있는 우리 자연, 우리 유적!
김홍근은 국보나 문화재로 지정된 유명 사적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곳, 작지만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저자는 단아하고 질박한 우리 한옥에 미니멀리즘적 정신과 아르 누보 운동, 칸딘스키의 컴퍼지션을 대입하기도 하지만, 굳이 예술 사조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 자연과 건축물에는 ‘자연 미학’의 극치가 담겨 있다며 감탄을 거듭한다.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정원인 ‘송석정’은 특이하게도 큰 소나무가 지붕 위를 뚫고 나와 서 있다. 소나무를 살리면서도 정자를 짓기 위한 묘책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서산 개심사 범종각은 무거운 지붕과 종을 받치는 기둥으로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했다. 굵은 직선을 마다하고 가는 곡선을 살린 지혜를 실감하기 위해 서양의 이름난 건축가들이 찾아올 정도라고 한다.
‘그림’ 같은 일본식 정원과 ‘연극 무대’ 같은 중국식 정원과 달리, 살아 있는 생활 공간이며 자연의 연장인 한국식 정원 또한 자연미학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본다. 우리 정원은 마당은 텅 비워두고, 누대의 기둥과 기둥 사이엔 벽을 세우지 않는 대신 차경借景(경치를 빌려오기)이나 인경 引景(경치를 끌어오기)과 같은 기법으로 공간을 풍성하게 채운다. 사람이 아무리 인공적으로 꾸며도 자연 그대로의 경치를 따라갈 수 없다는 자각이 ‘꽃피는 시냇가에 덜렁 정자 한 칸 세워둔’ 한국식 정원의 원형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무기교의 장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을 극대화하는 장치면서 하나의 ‘살아 있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연경당 툇마루에서 활짝 열어젖힌 방문은 하나의 액자가 되고 바깥의 단풍 든 나무와 야트막한 담장은 한 폭의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백담사 만해마을의 새로 지은 법당에는 단아한 화강암 불상만 있고, 탱화가 없다. 하지만 격자무늬로 창살만 꾸며놓은 유리 문짝에 뒷산의 숲이 비치면 그대로 자연 탱화가 펼쳐진다. “그 어떤 명화가 ‘이 살아 있는 그림’을 따라올 수 있을지?”라는 저자의 감탄을 따라 옛 사람들의 미학적 심성을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우리의 자연관과 미적 감각도 훌쩍 키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옛을 잘 갈무리해 내일과도 통해야 사는 것
김홍근의 말처럼 서로 마음 맞는 일이 쉽지 않은 이 인간사 세상사에서 서로 마음 통하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겠다. 그러하니 누군가와, 무언가와 마음이 통할 때 우리는 유한한 인생을 넘어서는 어떤 기쁨으로 가슴이 젖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통해야 산다. 그렇지 않겠는가. 너와 통하고 그와 통하고, 옛과 통하고 그 옛을 잘 갈무리해 내일과도 통해야 사는 것. 이 『선화』에는 그런 통함이 있다.
유정 무정의 자연과 옛 사람들이 이룬 지고의 인공 조형물 등을 만나 그들의 시간과 그것들이 전해주고 싶어 했던 이야기와 뜻을 아름답게 되살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옛 흔적과 발자국만을 현재에 그저 미화해 살려내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까지도 새롭게 살려내고자 하는 어떤 빈 마음의 간절함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점은 각별하다.
돌길, 연못, 문살, 문고리, 쇠종, 깜장 고무신, 담장의 문양, 후원의 장독 이런 것들과 당신이 통했다면 당신이라는 나는 “그 순간 누구‘나’이고 어디‘나’이고 언제‘나’가 된 것이다.” 앉은자리가 꽃자리라는 말처럼 바로 꽃자리가 된 것이다. ‘光明’이 된 것이다.
이렇듯 『선화』에서는 마음을 닫지 말고 열기만 하면 “나도 모르는 내가 자꾸 살며시 깨어나” 기쁨의 샘을 짓도록 하는 마음 여행길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순정한 우리 마음의 본바탕과 쉴 수 있는 무심의 마음을 환하게 일으킬 수 있다. 『선화』는 무심의 마음을 환하게 일으키게 했던 흐르는 만상萬象과의 순간순간 빛나는 대화록이다.
- 이진명(시인)
기본정보
ISBN | 9788989351924 |
---|---|
발행(출시)일자 | 2006년 06월 25일 |
쪽수 | 181쪽 |
크기 |
148 * 210
mm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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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미, 눈과 비가 외진 이곳 대구에 눈이 함박하게 내렸다. 눈 내림을 볼 때면 늘 하는 생각이지만 눈은 참 ‘기적’처럼 내린다. 예컨대, 비는 내리기 전에 꼭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느낄 수 있게끔 예보한다. 우리는 습기가 평소보다 많고 짙음에 따라서, 날이 화창하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몰려드는 그 찰나에 소낙비가 오겠구나하고 비를 예감한다. 또한 막연하지만 비교적 정확하게 비가 올 때가 되었는데 하는 식의 나름의 감으로 비를 예측할 수 있다. 하나 눈은 비와 달라서 쉽사리 예감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물론 내가 눈이 많지 않은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감이 떨어지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상대적으로 눈은 늘 우리의 예상을 깨버린다. 무튼 비와 달리 눈은 직감하기 쉽지 않아서 내게는 늘 기적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글쎄…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
『마음이 단순해지는 선화』에는 단출한 여행의 자취가 진하게 배어있다. 그 속에는 사진이 있고 글이 있다. 자연이 있고 사람이 있다. 소소한 풍경이 있고 의미가 깊은 이야기가 있다. 위로가 있고 평안이 있다. 장소마다 시간마다 각기 다른 물음이 있고 그에 따른 나름의 깨달음이 있다.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성찰이 있고 그로 인해 더욱 튼실해져가는 ‘나’와의 만남이 있다. 생에 대한 지침들은 있으되 강요함은 없고, 언젠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 우리네 생을 노래하되 딱하다 불쌍히 여김은 없다. 더불어『마음이 단순해지는 선화』는 누구나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 법한 ‘나’라는 꽃 한 송이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보며 안부를 묻게 되는 그런 책이다.
보광전 기둥에 낡은 목탁은 그대로 걸렸지만, 소문에 듣던 목탁새는 보이지 않는다. 친구가 말한다. “그 새 날아갔을까, 그새?” 이 말이 내 가슴을 쳤다.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돌아본다.
덩치가 더 커져서 작은 목탁 구멍으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지기 전에, 얼른 이 몸 목탁에서 나가야 될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이만큼 클 때까지 집이 되어주어 고맙지만, 영원한 감옥이 되면 곤란하다.
목탁새는 새끼를 키워서 데리고 나갔나 보다. 덕분에 나도 그만 이 몸 목탁에서 나가야겠다고 자각하게 된다. 목탁새가 내 선생님인 줄 미처 몰랐다.(p29)
한날 어떤 프로그램에서 목탁새에 관해 방송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목탁 안에 갓 태어난 새끼가 네다섯쯤 있었고 어미는 보이지 않았다. 기둥에 새끼가 든 목탁을 걸어둔 채로 하루쯤 지나서야 어미는 새끼들에게로 돌아와 먹이를 물려주던 걸 아직 기억한다. 망연하게 그 방송을 보면서 새끼들은 언젠가 목탁을 떠날 것이라고, 몸집이 너무 커지기 전에 목탁에서 나와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어린 걱정도 했었던 것 같다. 앞서 인용한 글을 보면서 정작 나는 목탁 속에서 너무 커버려 빠져나오지 못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새끼들 걱정은 했어도 나 하나 돌볼 줄 몰랐던 것이다. 아직도 10대 혹은 20대, 청춘, 젊음이라는 목탁 안에서 잔뜩 웅크린 채 안주한 꼴이었고, 그 속에서만 드넓은 세상인양 활개 치며 지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내 처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내 주변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발악하며 지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기차를 탔을 땐, 실제로는 기차가 가지만 눈에는 풍경이 지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내리니 가는 건 풍경이 아니라 기차다.
인생이란 기차를 타고 가니, 창밖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정 지나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시간이 따로 있어 흐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흘러가는 게 아닐까?
삶이라는 이 기차에서 내리는 날은 언제일까?
그 관성에서 벗어나는 날은 언제일까?
그때 이렇게 물끄러미 물러서서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는 심정은 어떨까?
흐르는 건 누구인가?(p46)
한번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내가 앉은 이 차창 안과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분명 내가 그 풍경을 스쳐 지나고 흐르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창밖의 풍경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처럼 낯설게 느꼈던 것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은 못한 채 나를 중심으로 이편과 저편으로 시간은 양분된다고만 생각했다.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고 그 이외의 풍경은 나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기기 일쑤였던 것이다. 어쩌면 삶에 있어서도 나는 늘 이기적인 사람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주어진 인생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내 멋대로 내 방식대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작된 것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단순하면서도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하지 않았던 것. 언젠가 나도 종착역에 내려서겠지. 그때 이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홀로 단단하게 못이 박힌 것처럼 멀뚱하게 선 채로 나는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내 여정을 도와준 그 인생이라는 기차를 보게 될까. 삶이라는 여정을 무탈하게 마치게 해준 이 거대한 흐름에 대해 생각하게 될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나는 그저 내려선 그곳 풍경을 말없이 바라볼는지도 모른다. 여태껏 이기적이기만 한 나를 군소리 없이 늘 지켜봐주고 따라와 준 그 풍경에 감사할는지도.
우리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이 순간, 아니 우주의 일생에서도 오직 한 번뿐인 지금 찰나가 살아 움직인다. 시간은 한 번도 헌 시간이 되어본 적이 없다. 오고 또 오고, 가고 또 가지만, 언제나 새 시간이다. 항상 난생 처음이다.(p47)
우리는 왜 시간을 익숙하게만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서 늘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일까. 늘 왜 공간 혹은 장소에 있어서는 낯설고 새롭고 난생 처음이라는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그 가시적인 손쉬움 때문에 시간에 대해 망각하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에 따른 시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린 눈으로 본 것으로 모든 감각을 대신한다. 사람에게는 흔히 두 개의 눈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가 익히 보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눈. 어쩌면 살아 움직이고 늘 새로운 시간 그 난생 처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풍경이란 인간이 어떤 장소와 만나는 정신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오면 풍경은 움찔 깨어나, 말을 건네온다. 그 체험은 특히 그곳에 있는 특정한 사물과 대화를 나누면서, 깊은 교감으로 승화된다.(p62)
아름다운 인생은 사물을 읽어내는 안목과 함께 커가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인공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다가, 성숙해갈수록 가급적 자연 그대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p106)
누군가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강인한 사람은 세상만물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예컨대 많은 시인들이 풍경과 어떤 사물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고 우리는 그걸 보며 감동한다. 그런 감동을 통해 우리는 말을 걸어오는 모든 것들과 교감하고 그런 체험을 직접적으로 한 것처럼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착각이다. 우리는 그만한 시간과 공을 들여 사물과 풍경과 교감할 만큼 여유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 비약일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단 몇 분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마주하며 진심으로 교감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이런 착각에 빠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심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아무 말 않더라고 자연히 상대에게 혹은 다른 사물에게 전해지는 것. 내가 아무 생각 않더라도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것. 내가 아무 행동 않더라도 나를 이끌어주는 것.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 그렇게 교감이 깊어지는 것. 그로써 성숙해지는 것. 그대로 아름다운 것.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진심으로 살아간다면, 아마도 우리는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끼게 되지 않을까. 우리네 생은 더 다채롭고 아름다우며 깊은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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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할 수 없이 그리움이 스며 나온다. 그래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본다. 그냥 있으면 너무나 갈증 나기 때문에. 우리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나보다. 정말 궁금하다. 우리들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책머리에 中..)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을 안다. 그리움을 닮은 어떤 서러움도 안다. 서러움을 닮은 어떤 서글픔도 안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어질 때 흘리는 눈물도 안다. 그냥 그대로 두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것도 안다. 이런 게 나쁘다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음을 안다. 그래서 적당히 빠져 허우적거릴 줄도 안다. 그러다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그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그리움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안다. 내 속에 누가 살고 있고 그게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저자처럼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다. 단지, 저자처럼 외면할 수 없음을 알 뿐이다. 뭔가 하지 않으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그 느낌을 알 뿐이다. 이미 너무나도 잘 알 뿐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음을.
그저 막연하게 아직 제목도 정해지지 않은 ‘무심’의 불경을 엿본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어쩌면 뜬소문처럼 속세를 떠도는 비경을 나는 보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느낌일 테지만. 어느 시인의 말을 자꾸 염불처럼 되뇌게 된다. 착하게… 착하게… 착하게 낡아가는 것들과 함께 착하게 나이 들어가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란다고.
그런 느낌 하나, 그런 염불 하나, 그런 바람 하나가 툭하고 떨어지는 밤이다.
∥오솔길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책과도 인연이라는 게 있나보다. 서점에서 무심결 펼쳐본 유인걸 사진, 김홍근 글 ‘차를 반쯤 마셔도 향은 처음 그대로’란 사진 에세이를 감동적으로 읽고, 뒷 책날개 책소개에 김홍근이 쓴 책으로 이어졌다. 제목 속 ‘선화’ 때문에 불교 미술책이라 생각되 망설여 왔다 얼마 전에 샀다. 그리고 그 책에 몇날 며칠 푹 빠져있었다.
선화를 다루는 책이 아닌, 그의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담은 풍경과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내면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담양 식양정 마루엣 바라본 아름다운 정경이 있는 표지 사진이 감동적이다. 시선이 마치 공간 내부와 외부에 함께 있는 느껴진다. 자연과 하나 된 듯 한 느낌. 문득 예전에 창덕궁 연경당에 느꼈던 그 느낌이었다.
저자 김홍근은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스페인에 유학해 중남미 문학을 전공했고, 가톨릭 신비주의를 연구했고, 귀국 후 유, 불, 선, 기독교 종교간 대화에 관심을 가져왔고, ‘사진과 글’을 통해 자신과 대화하고 표현하는 '포토텍스트‘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사진 찍는 행위는 단순히 대상을 찍는 행위가 아니라, 그 대상을 찍는 순간 그 대상을 직관하고 있는 사람의 정신도 찍는 행위다.(본문중)”라고 말한다.
잘 알려진 곳이라기보다는 그는 작지만 많은 상상을 일으키는 곳, 그의 마음을 이끈, 그의 마음이 흐르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의 마음으로 담은 사진과 글이다.
“나를 찾아 이리저리 여행을 다녔다. 일상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면 나도 모르는 내가 살며시 깨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그 만남은 나의 경우 다행히 유적답사를 통해 이루어질 때가 많았다. 나는 그 순간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유적을 향해 무심히 렌즈를 들여다볼 때, 그 안에 뽀얗게 떠오르는 선화(禪畵), 그 심플 마인드! 그 순간 나는 누구 ‘나’이고, 어디 ‘나’이고, 언제 ‘나’가 된다. ‘그리움이 짙어지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응축되면 ’글‘이 되며, 글이 간절해지면 ’그‘가 된다. 나는 오늘도 ’그를 찾아 길을 나선다.(책머리)”
그는 그곳에서 서서 고요히 바라보며 그곳에 스며있는 ‘마음’을 읽고, 또 마음을 읽으려 했다.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 감격적인 장면을 고요히 쳐다보았다. 그 때, 서서히 기쁨에 젖어가는 내 마음처럼, 이 광경에도 어떤 마음이 거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번져 나오는 어떤 고요하고 정밀하며 맑디맑은 파장이 전해져왔다. 누군가와 한참 동안 무언의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본문중)”
그는 고졸한 성혈사 나한전의 창살 속 동자의 자리에 앉아 세상의 만화경을 꿈꾸기도 하고, 갑사 옛길에 서서 그 길을 바라보며 아름답고 고마운 광경을 하염없이 쳐다보기도 하고, 청량사 응진전 절벽에 서있는 떡갈나무 한그루의 존재를 견디고 있는 외로움을 느껴보기도 하고, 백담계곡 햇살이 수면속 돌마다 피어나는 모습, 부석사에 석등 아래에 보살의 모습에 감격하기도 하고, 운주사 거지탑의 친근한 모습에서 만든 이의 마음을 느껴보기도 하고, 보원사지 폐사지에 서서 정지한 시간, 무상한 세월을 느껴보기도 하고, 법흥사 적멸보궁 부도 속 새겨진 문을 ‘마음’이란 열쇠로 열어보기도 했다. 읽는 내내 그의 이런 모습들이 그저 부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보는 순간 눈을 황홀케 하지만 마음에 어떠한 움직임도 일으키지 못하는 사진이 있는 반면, 얼핏 보기에 시선을 끌지 못하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움직임이 일고, 그 움직임이 커다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사진들이 있다. 사진에 텍스트가 흐르고 우리는 의식 또는 무의식 중 그 텍스트가 마음으로 읽혀져 메시지로 강하게 남는다. 예전의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일러스트레이션은 표현방식에 있어서 순수회화와 같다. … 다만 순수회화와 다른 점이라면 화가는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만 일러스트레이터는 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실이다.(고정희의 ‘일러스트레이션 미술탐사’)
그의 사진은 감동적인 메시지가 담긴 멋진 그림처럼 멋진 일러스트레이션이다.
그리 많지 않지만 나 역시 눈앞에 펼쳐진 모습들에 감동받고, 그 마음을 사진으로, 글로 담아보려고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의 풍경으로 몰입과 감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의 사진들에서, 그의 사진과 글에서 읽는 내내 벅찬 감동을 가늘 수 없었다.
2008.5.22
사진: 창덕궁 연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