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칼 마이던스가 본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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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목차
- 발간사 | 김병호(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5
칼 마이던스와 여순사건 8
| 진압군 이동과 전투 18
| 미군과 제14연대 80
| 시민들의 피난 98
| 협력자 색출과 학살 110
| 여수 대화재 203
책 속으로
3. 여순사건과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만에 발발한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부와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동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는 제주도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여 하루 만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다. 14연대 봉기는 빠르게 전남 동부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분단 정권수립과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은 14연대 일반 병사들과 지역민들이 봉기에 참여하는 주요한 이유였다.
정부는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동원하여 신속한 진압에 나섰다. 진압군은 1주일 만에 순천과 여수를 진압하는데 성공했지만, 산악지대에서 소규모 전투는 다음 해까지도 계속되었다. 여수·순천 진압과 지리산 토벌 작전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잇달았다.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 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 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를 색출했다. 변명과 이유를 따지지 않은 채 협력자 색출이 실시되었고, 우익 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기만 하면 혐의자들은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자세한 조사도 없었고, 제대로 된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71년이 지났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뒤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이 변하였다. 여순사건은 한국 사회가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이 만들어지고, 반정부적인 교사가 축출 되었다. 군대에서는 숙군이 일어나 장교의 10%가 처벌받고 만주군 출신들이 지도부를 장악했다. 헌법보다 더 큰 위력을 행사한 국가보안법이 통과된 것도 여순사건 직후였다. 여순사건 뒤, 한국 사회는 반공 사회로 줄달음쳤다.
4. 칼 마이던스의 사진과 여순사건
① 여순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당시 여순사건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사진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미국의 라이프지 기자였던 칼 마이던스가 여순사건을 촬영했다는 점은 그동안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마이던스가 찍은 여순사건 사진들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고 전 모를 알기 어려웠다.
이번에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칼 마이던스의 여순사건 사진을 전량 입수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칼 마이던스가 촬영한 사진은 중복을 제외하면, 310여 장에 달한다. 국내 신문에 게재된 사진 모두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굴된 여순사건 관련 사진 양과 비교할 때, 4배 이상이다. 수량으로 보더라도 마이던스의 사진은 압도적으로 많거니와, 여순사건의 실상을 알려주는 측면에서도 마이던스 사진의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진압군의 작전부터 민간인 협력자 적발, 여수 중심가 화재까지 이전에는 알기 어려웠던 사실들이 마이던스 사진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이던스 사진들은 신문 기사와 공문서가 제공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세세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여순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② 칼 마이던스는 어떻게 여수와 순천까지 와서 취재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유명한 사진 작가 칼 마이던스(1907~2004)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가 라이프(Life)지에 입사한 것은 1936년이었는데, 그와 같이 활동한 아내 셸리 마이던스(Shelley Mydans)는 소설가이자 사진 작가였다. 부부는 일본군이 진주만을 폭격했을 때,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필리핀에 머물고 있었다. 마이던스는 일본군의 침공으로 필리핀이 함락되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전쟁포로가 되었다. 1년 동안 포로로 잡혀있었던 그는 포로교환으로 석방된 후, 이탈리아, 프랑스 전장에서 활동했다. 유럽에서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을 탈환한 시기였다.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 중에 매우 유명한 사진 중의 하나는 맥아더가 필리핀 해안에 상륙하는 장면이다. 이 사진은 맥아더의 귀환과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을 알리는 유명한 사진이 되었고, 맥아더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사진뿐만 아니라, 마이던스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많은 사진을 촬영했다. 1945년 9월 미주리호 함상에서 벌어진 일본군 항복 조인식, 독일군에 협력한 프랑스 여성의 머리를 깎는 사진, 김구의 암살(경교장) 등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사진들 중에는 마이던스의 손을 거친 것이 많다. 당시 미국 타임-라이프지 지사는 도쿄에 있었다. 도쿄국장으로 근무한 마이던스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시기에 한국에 입국하여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③ 한국에 입국하여 기차로 순천에 도착한 마이던스는 진압군이 점령한 순천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마이던스는 사진 작가였지만, 기사를 작성하는 리포터이기도 했다. 순천농림학교에서 벌어졌던 협력자 색출과정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4일 후 내가 다른 3명의 특파원과 함께 시내에 들어갔을 때, 전 시민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앉혀 있었다. 이곳에서 반란을 진압했던 정부군이 반란자들의 잔학 행위와 똑같은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보복을 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흩어진 작은 집단 속에서 군인과 경찰들은 총대와 곤봉으로, 무릎 꿇려진 사람들에게 자백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경찰관 중의 한 사람은 어깨에 총을 늘어뜨리고 일본군 헬멧을 쓴 채 희생자들의 주위를 돌며 환상적으로 왔다갔다 춤추며, 그 사내가 기진맥진하여 드디어 ‘자백’을 받아낼 때까지 그 사내의 얼굴을 개머리판으로 때렸다가, 또 동물과 같은 짓으로 헬멧 쓴 머리를 얼굴에 부딪치게 했다. 그러고 나자 그는 자백을 한 다른 사람 전부와 똑같이 운동장 저쪽에 있는 호 속에 쳐 넣어지고 그곳에서 총살되었다. 이름도 죄명도, 누가 심문하고 누가 사형을 집행했는가도 기록되지 않고 그렇게 소멸되었다.”
마이던스가 서술한 심문 진행 상황은 글뿐만 아니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러한 상황은 여수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진압군은 순천과 여수 시내를 탈환한 다음, 반군과 협력자를 색출하기 위해 전 시민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10월 26일, 여수에서 진압군은 시민들에게 확성기로 국민학교에 모이라고 방송했다. 시민들은 나오지 않으면 봉기군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듣고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모든 시민이 모였다.
끌려온 시민들은 학교운동장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학교 정문에는 담을 높이 쌓아올려 중기관총을 높이 걸어놓고 병사들이 시내 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여수여자중학교 운동장에는 멸치를 뿌려 놓은 것처럼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운동장을 덮고 있었다. 운동장 울타리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체도 확인하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통곡만 했다.
마이던스는 순천농림학교 운동장과 여수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던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운동장을 지키는 군인들의 기관총구, 집합한 수많은 인파와 좌우로 구별되는 사람들, 가족을 염려하며 멀리서 지켜보는 아낙네들, 군인과 경찰이 가혹하게 협력자를 심문하는 장면들, 학교운동장 구석에서 사살된 시신들의 사진들은 얼마나 많은 목숨을 잃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보따리 짐을 챙겨 황급하게 집을 떠나 운동장으로 가는 피난민들, 불타는 여수 시가지를 바라보는 시민들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미군과 국군의 진압작전과 이동 사진 등은 문서로는 알기 어려운 당시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렇게, 마이던스가 촬영한 이 사진들은 그동안 증언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을 눈앞에서 보여준다.
여순사건 현장에 외국인 사진기자로 참가했던 칼 마이던스는 진압군의 이동과 함께 움직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압군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 꽤 많다. 작전회의와 군부대 이동, 직접 전투장면 등을 담은 사진들과 함께 장갑차 등의 기계화된 국군의 위용을 과시하는 사진도 있다. 주목되는 것은 마이던스가 시내의 폐허가 된 건물과 국군의 용맹스러운 모습보다는 일반 시민들의 움직임과 감정을 중요시 했다는 점이다.
칼 마이던스는 협력자 색출 현장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괴로운 체험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방관자들의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꿇어앉은 사람들의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모습-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마디의 항변조차 없었고, 동정을 바라는 울부짖음도 없었고 신의 구원을 바라는 어떤 중얼거림도 없었다. 또다시 이런 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면, 어찌해야 좋을 것인가?”
마이던스는 진압군의 폭력에 질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엄청난 폭력의 힘을 절감했다. 마이던스가 보건대, 진압 직후 순천 시민들은 ‘공포’와 끝없이 보이는 ‘무기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순천 시민들은 자기 가족의 시체를 조심스레 찾아내고는 ‘통곡 속의 광란’에 빠지는가 하면, 군대와 경찰의 협력자 색출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이 손가락 하나에 정해져 있는 그 순간에서조차 ‘한마디의 항변도’ 하지 못하고 ‘완전히 침묵’했다. 협력자 색출 과정의 무기력과 침묵, 복종은 가장 무서운 장면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 이루어진 협력자 색출은 가혹한 국가 폭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명령과 복종만이 있었고, 어떤 항변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마이던스가 목격하고 충격 받은 시민들의 깊은 절망과 무기력은 그 뒤 수십 년 간 순천과 여수지역을 붙잡았다. 마이던스가 혐의자들에 대해 느낀 인간적인 동정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수십 년 간 여순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어
출판사 서평
[출판의 의의]
여순사건은 오랫동안 묻혀온 대한민국의 진실이며, 70년의 강요된 고독과 통한의 침묵이다.
1948년 10월 19일에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라고 하며 항명하면서 여순사건이 시작되었다.
여순사건의 진압과정에서 지역민들은 대부분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 등에 관계없이 국가의 불법적인 공권력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무고한 희생을 당했다. 그리고 부당한 이념과 정치적 성향의 굴레가 씌워져 유가족들은 70년 세월을 강요된 고독과 통한의 침묵으로 참고 견뎌야 했다.
여순사건의 원인이었던 제주4·3사건은 지난 2000년에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4년부터는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어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져 특별법을 통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진행되고 있다.
반면에 여순사건은 지난 제16대 국회부터 18대, 19대 3차례 특별법이 발의되었으나 무산되었고, 현재 제20대 국회에도 5개의 특별법 안이 발의되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에 있다.
우리는 이 사진기록의 진실을 통하여 71년 전의 과거와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감들은 제20대 국회에 발의된 5개의 특별법이 왜 통과되어야 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비극적인 역사 앞에서 희생자와 유족 그리고 지역민의 오랫동안 응어리진 아픔과 상처가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의 특별법 통과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촉구하는 것이 이 사진집 출판의 의의다. 아울러 인쇄물로는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98매의 사진들을 통해서 연구자들과 시민들 모두가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기본정보
ISBN | 9788975551956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12월 06일 |
쪽수 | 216쪽 |
크기 |
240 * 250
* 24
mm
/ 1030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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