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 산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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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시리즈 (27)
작가정보

시인 이종만(57세)은 벌을 친다. 29세 때 벌통 4개를 들고 꽃을 찾아다니기 시작해 그 길을 30년 가까이 걸어왔다. 그는 이제 벌의 언어를 깨쳤다. 5월 내내 벌통 300개와 함께 꽃을 따라 전국을 다니며 매일 채밀採蜜하고, 6∼8월 강원 원주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로열젤리를 거둔다. 이어 9, 10월 벌의 월동준비를 하고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진 벌을 동면冬眠시킨다. 2∼4월 잠들었던 벌을 깨우고, 벌통에 벌을 계속 보충해 준다.
벌은 야반도주하듯이 옮겨야 한다
남의 것 떼어먹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그러나 나는 꽃 속에 사는 사람
꽃 속으로 떠나야 하는 사람이다
벌통을 옮기는 날은 정해진 날이 없다
점심 먹다가도 꽃피었다는 소식이 오면
첫 별 머리에 이고 스미듯 달려간다
―「야반도주하듯이」 부분
그는 벌들이 잠자는 겨울 동안에만 시를 쓴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머리와 가슴 속에 차곡차곡 쟁여 놓은 것들을 겨울에 시로 풀어내는 것이다. 경남 통영시 사량도가 고향인 시인이 삼천포 등 고향 인근을 떠돌다 진주시에 자리잡은 게 올해로 18년째가 된다. 벌들은 따뜻한 통영에서 겨울을 난다.
시인은 어린 시절, 가난과 외로움을 지독하게 겪어야 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홀어머니는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사량도에서 삼천포까지 두 시간 뱃길을 오가며 중학교를 마친 17세 소년이 동네에서 소소한 일거리를 거들어주고 받은 돈을 모아 처음으로 산 책은 ??안네의 일기??였다고 한다. 서점에서 세 시간 넘게 고르고 또 고른 그 책을 이씨는 지금도 애지중지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잠겨 있던 어느 날, 시인은 동네 어른이 벌을 키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인에게 그 일은 ‘낭만적’으로 보였고, 무작정 벌통 4개를 사서 그 어른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사량도를 떠난 시인은 벌 치는 일을 배우면서 하나 둘 벌통을 늘려 갔고, 꽃을 따라 객지를 떠도는 생활이 이어지게 되었다. 아주 작은 곤충을 갓난아기처럼 돌볼 수밖에 없었던 시인에게 사소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 그리고 아카시아 꿀을 채밀하는 동안 적막한 곳에서 4∼7일간 머물며 한뎃잠을 자다 보니 자연의 움직임이 보이고 자연의 말소리가 들렸다. 책보다 자연을 읽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홀로 습작을 거듭하다 40대가 넘어서야 문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인은 허영자, 정진규 시인의 추천으로 1992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문단에 발을 들인 지 15년 만에 출간된 그의 첫시집은 이렇게 시작된다.
생각하기보다 기도하기로 한다
기도하기보다 미소짓기로 한다
미소짓기보다 손을 잡아주기로 한다
―「별」 전문
목차
- 1
별
꽃밭에서
나의소원
화개장터
천국
죽은형님
음삼월
가을 산
아프리카
숲
산속
붉은 강
버스는나를
방문을 열다
못 하나
먼 마을
어둠
도적 비
달
김씨의 저녁
까치
그는 그녀는
귀뚜라미
고향이 어려온다
2
옛집
풀밭
태양의 학교
초경
꽃이름
풀꽃
오래된 마을
그는 그림을 완성했다
우리는 뒤돌아서서 걸었다
새길
빗소리
섬
아침
새벽
여름산길
땡초 따먹은 잉어
3
하나님이 있다_ 양봉일지1
꽃의 비명_ 양봉일지2
풀뱀_ 양봉일지3
수우도 동백_ 양봉일지4
벌 쫓지 마라_ 양봉일지5
불법 침입_ 양봉일지6
야반도주하듯이_ 양봉일지7
꿀은 하늘이다_ 양봉일지8
꽃은 지지 않는다_ 양봉일지9
벌통을 옮겨놓으면_ 양봉일지10
꽃우물_ 양봉일지11
꿈속에 피는 꽃_ 양봉일지12
강원도_ 양봉일지13
꽃의 말을 알아듣는가_ 양봉일지14
육십령 백령_ 양봉일지15
벌 한 통 빌려주다_ 양봉일지16
4
논둑 건너 배밭_ 매호리 시편1
대현사고_ 매호리 시편2
아침_ 매호리 시편3
흐린불- 매호리 시편4
단벌 옷- 매호리 시편5
한 오백년- 매호리 시편6
ㆍ해설/이문재
꽃의 맨 뒤에서 시를 따다
출판사 서평
1. 자연에서 채밀하듯 건져 올린 순도 높은 벌의 언어
이종만 시인에게 꽃과 벌, 즉 양봉은 시 못지않은 생업이다. 아니 그의 시는 꽃과 벌 사이에서 나온다. 화신花信을 따라 남녘 바닷가에서 휴전선 부근까지 올라간다. 꽃은 치열한 생명이고, 벌 또한 자기 생을 단 한치도 낭비하지 않는 치열한 생명이다. 꽃과 벌에게서 생명의 신비를 배우는 것이다. 그는 꽃의 맨 앞에서 벌과 함께 꿀을 따고, 꽃의 맨 뒤에서 시를 쓴다.
꿀 한 되에는
지구를 몇 바퀴 돈 길이만큼
길고 긴 벌의 길이 들어 있다
길고 긴 비행시간이 담겨 있다
한 숟가락 꿀을 머금으면
입안 가득 하늘의 향기가 고인다
아무리 꽃이 피어도
하늘이 내려주지 않으면
꿀 한 방울 딸 수 없다
꿀은 하늘이다
―「꿀은 하늘이다 -양봉일지 8」 부분
이종만 시인이 없었다면 꽃과 벌은 한국시의 미래로 남아 있을 뻔했다. 그의 양봉일지 연작이 그의 다른 시들에 견주어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에게서 직접 벌의 생태나 꿀의 효용, 꽃을 따라다니는 야생의 삶을 들은 사람은 그의 양봉일지 연작이 싱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그는 시로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꿀을 만났다. 시인인 그는 시로 독자의 마음을 다독이면서, 꿀로 몸의 병을 고치러 다닌다.
이종만 시인의 시는 자연에서 추출한 순도 높은 ‘고요의 시’이다. 나무와 숲, 꽃과 풀, 별과 벌의 말을 알아듣는 자연, 아니 야생의 시이다. 그는 인간이 닦은 길이 아니라 꽃이 내는 길을 따라 봄에서 가을까지 꽃과 벌과 별과 더불어 생명의 한복판에서 살아 있다. 그의 시와 삶은 우리가 두고 온 문명의 오지가 아니다. 그의 꽃과 꿀은 우리가 기필코 가야 할 ‘오래된 미래’다. 그는 갯바위에 들러붙는 굴처럼 치열하게 생명에 달라붙어 있다. 그가 우리보다 먼저 가 있는 것이다.
2. 자연 속에서 찾아낸 야생의 시
귀뚜라미 울음에 방문을 열다
휘영청 달빛에 방문을 열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에 방문을 열다
소리 없는 봄비에 방문을 열다
―「방문을 열다」 전문
방문은 인간을 위한 구조물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방문은 인간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귀뚜라미 울음, 달빛, 눈 내리는 소리, 봄비를 맞이하기 위해 방문을 연다. 시의 화자는 왁자지껄한 세속으로부터 멀어져, 자연과 더불어 깨어 있다. 그의 시는, 숲과 풀밭에서, 숲과 풀밭을 위하여 씌어진다.
개망초꽃에게 우리 장미야, 하고 불러본다
나비가 날아와 앉는다
장미꽃에게 개망초, 이 개망초야, 하고 불러본다
나비가 날아와 앉는다
―「꽃이름」 전문
이종만의 시는 언어의 한계, 나아가 인간 중심주의의 급소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 개망초꽃과 장미꽃을 구별하는 것, 개망초와 장미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다. 개망초와 실제 개망초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망초는 개망초가 아닌 것과 구별짓기 위한 하나의 음성, 발음, 기호일 뿐이다. 꿀을 구하는 나비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비에게는 개망초꽃과 장미꽃은 ‘맛의 차이’일 뿐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나비에게 장미가 더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꽃이름?은 언어의 감옥, 더 정확하게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결코 호명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통렬하게 꾸짖고 있다. 이종만 시인은 인간 중심주의를 내려놓고, 숲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시인은 나무나 소리 같은 자연의 구성물과 동등해진다. 다음과 같은 시에서, 시인은 아예 관찰자의 자리로 멀찍이 물러나 있을 뿐, 풍경이나 상황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제 발자국 소리에 놀라
십 리쯤 달아난 노루
망개나무 오얏나무
스치는 바람 소리뿐
길 잃지나 않을까
꼬리 문 물소리뿐
제가 고요한 만큼
산은 억새꽃을 피워놓고
―「가을산」 전문
노루, 망개나무, 오얏나무, 계곡물 모두 소리와 연관되어 있다. 여름산이 초록이라는 빛깔의 네트워크라면, 초록을 내려놓은 가을산은 뼈로 돌아가 바람의 결을 벼려놓는다. 소리로 가득 차는 것이다. 그런데 저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산은 ‘제가 고요한 만큼’ 억새의 꽃을 피워올린다. 소리의 끝에서 고요하게 피어오르는 무채색의 꽃, 억새꽃의 무리가 능선을 치고 오르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소리가 고요를 낳고, 고요가 다시 소리를 낳는, 자연의 정교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시인의 눈은 얼마나 맑고 고요하고 그윽한가.
기본정보
ISBN | 9788970753683 |
---|---|
발행(출시)일자 | 2006년 08월 25일 |
쪽수 | 103쪽 |
크기 |
124 * 208
mm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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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신 산 속 물결
피라미 떼가 푸른 하늘을 헤엄치고 있다
처음 뭍으로 오른 개구리 한 마리
훌쩍 저승처럼 먼 버들가지를 건너뛸 때
눈부신 물줄기가 빼앗듯 껴안는다
산 속이 산 속 물 속이
모두 웃는다
아직 인적이 뜸한 계곡이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 계곡 풍경이 수채화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시에서 눈길이 오래 머문 곳은 ‘아직’이라는 부사어입니다. 처음에는 이른 시각을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이른 시각이 지나면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계곡으로 들어오겠지요.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인적이 없는 깊디깊은 곳, 사람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는 원시의 계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의미가 더 확연해지거니와 시인이 하는 일이 명료해집니다. 시인은 ‘벌 치는 사람’(「꿈 속에 피는 꽃」)입니다. ‘점심 먹다가도 꽃 피었다는 소식이 오면 / 첫 별 머리에 이고 / 어둠 속으로 스미듯 달려’가 ‘벌통을 옮’깁니다. 시인은 ‘꽃 속에 사는 사람 / 꽃 속으로 떠나야 하는 사람’(「야반도주하듯이」)인 것입니다. 꽃과 함께 지내다 보니 ‘동이 트기가 무섭게 / 낯선 숲으로 들로 나가는 / 벌들을 보면 왕이 부럽지 않’(「벌통을 옮겨놓으면」)습니다. 벌들은 달콤한 꿀을 모아올 것이니 말입니다.
꿀은 시인에게 밥이 되고 목숨이 되지만 그에 머물지 않습니다. ‘꿀 한 되에는 / 지구를 몇 바퀴 돈 길이만큼 / 길고 긴 벌의 길이 들어 있’음을 알기에, 그리고 ‘아무리 꽃이 피어도 / 하늘이 내려주지 않으면 / 꿀 한 방울 딸 수 없’음을 알기에 시인에게 ‘꿀은 하늘’입니다. 그리하여 ‘꿀 한 모금’을 삼키면 ‘종소리처럼 꿀이 / 몸 속으로 퍼’지며 ‘하늘이 몸 속으로 들어’(「꿀은 하늘이다」)오는 것을 온몸으로 겪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시인을 산 속 꽃과 벌과 꿀의 시인으로만 한정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생각하기보다 기도하기로 한다 / 기도하기보다 미소짓기로 한다 / 미소짓기보다 손을 잡아주기로 한다’(「별」 전문)를 보면 적극적인 현실 의지도 엿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역시 시인의 자리는 꽃과 벌과 꿀의 자리입니다. ‘벌과 함께 꽃을 좇’는 그 자리에는 ‘하나님이 있’(「하나님이 있다」)고, 시인은 그리하여 천진한 어린이가 되어 세상을 바라봅니다.
섬
바다가 내놓은
엄지발가락
하나
누가 밤새
발톱에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나
통통배 타고
가까이 가보니
동백섬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