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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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겨레신문 > 2017년 6월 1주 선정
이 책의 총서 (230)
작가정보
목차
- 제1부
토성에서 오는 것 11
단테는 단테를 생각한다 12
눈사람의 춤 14
사이프러스와 밀밭 17
토비아의 시절 20
별별 무늬의 담요와 냄비 22
종(種)과 종 사이 24
카론의 배 28
천사들의 침묵 32
돌에 물을 준다 34
토리노의 말 36
2부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41
새와 공구와 스웨터 44
다정의 세계 46
누군가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인지
모른다 48
오래 들었다 52
어떤 책의 구조 55
해가 사라질 때까지 56
뒤에 올 일 58
더 블루 63
식탁의 주인 66
3부
남아있는 자들의 도시 71
하늘로부터 76
마녀에게 귀를 빌려준 맥베스 78
오래 앉아있는 것이 정답이었다 80
착란 82
지상의 나날 84
물속에 숨어있는 파도 88
years 90
반복 92
수레와 지붕 93
4부
백색의 얼굴 101
엘리펀트 송 102
다른 입장에 대해 나의 입장을 정리하다가 104
내 말과 너의 말 108
오십이 킬로그램의 허기 110
보이지 않을 때까지 112
기쁜 소식 115
보이지 않는 눈 118
밤의 체제 120
얼음들 122
누가 오고 있는가 124
해설 고봉준 129
시인의 말 143
책 속으로
[착란]
10월이다
잎이 무성한 목련나무에
계절의 차이를 잃은 꽃봉오리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있다
보다가 웃고 웃다가 근심하고 근심하다가
그 착란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때,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무료와 실의가 핸드폰 속에서 팡팡 터지고 있다
너는 게임도 사랑도 아닌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침묵을 길게 빨아들이는 너의 담배연기 속으로
내리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목련은 시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착란을 하지만
나는 형태도 없는 이 어둠을 읽으려 한다
나무 잎사귀들이 아토피를 앓고 있는 것처럼
가렵고 갈라지고 바스락거리는 동안
낮에 봤던 대다수의 건물들은
모서리와 모서리가 흐려져갔지만 오래된 네모다
마지막까지 작은 불빛을 들고 있는 건물들 때문에
거리의 스산함까지 따뜻해지려고 하지만
너와 내가 이 시절을 읽으려고
어깨를 움츠리며 생을 소비하고 있는
이 난독의 쓸쓸함까지는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한다
무분별한 하트가 팡팡 터지는 시월이고
착란을 잉태하고도 그것을 모르는
목련나무 밑이다
[식탁의 주인]
더 이상 그늘을 찾을 수 없는
밝고 환한 기념일에 기대어
어둠이 없는 것처럼
조금씩 웃다가
아파트로 돌아와
오래된 식탁의 체위 위에 동그랗게 엎드린다
유리병 속 바닥에 엎드린 오디처럼
흔하고 향기로운 빛의 층계, 나는 이전의 형질이 아니다
지금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너의 집에
없는 것처럼 앉아있다 나는
오디도 아니고
설탕도 아니다
[하늘로부터]
어떻게 여기까지 와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구름 한 조각이 떠오르는 것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흔하디흔한
형상으로
떠오르는
저 어두운 구름 한 조각이면
도시를 덮을 수 있겠다 우산을 준비해야겠다
지층을 두드려 마른 샘을 불러 모아야겠다
됐다, 저 손바닥만 한 구름 한 조각이면
도시를 다 덮을 수 있겠다
예감을 설명할 수 있겠다
한동안 옥상 위에 서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뒤에 올 일]
이유 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계절
나무들 풀피리 분다
가지 끝에 버들잎, 나는 순한 동물
환한 잠의 모퉁이에서 일어나
희미한 꿈을 털어버리고 젖은 머리를 가볍게 말린다
강을 건너온 바람은 소리 없이 벽에 부딪친다
절망으로 낄낄거렸던 골목의 시절은 떠났다
헤어져버린 어제와 다른 다짐이 필요하다
다른 제도가 필요하다 이미 오래된 고통들은
우리 곁에서 조용할 때가 있으며 시끄러울 때가 있다
살아있다는 증거품들 품속의 증거품들
아이들은 천사들을 보고 어른들은 미혹의 그림자를 본다
가만히 문을 열고 닫는 의심
마주 보다 일어나 떠나온 그때가 좋다
밝은 것 속에서도 어두운 것 속에서도
같은 법칙으로 끌려들어가는 이 공허, 이상하다
정말이지 알고 있는 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내가 놀랍다 전에도 그랬다
시끄러운 땅, 쓸쓸한 땅, 매일 조금씩
쓸모없는 것을 지우면 저녁이 온다
생일이 온다 운명이 온다 아이들은
일기를 쓰고 난 후 몰래 감추고 잠을 잔다
늘 감춰지는 건 어른들의 세계일 것이다
모든 것이 가지런한 날 왜 이럴까
벌써 아침이다 여름이다 백발이다 후쿠시마다
모두들 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아무 일도 없다 놀라운 반복이다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
점심을 먹다 말고 갑자기 피곤이 쏟아진다
까닭 없이 미래가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부른다
머리를 맞대며 점심을 먹는다
약속이니까 끝까지 먹는다
뚝배기 속에 둥둥 떠다니는 돼지의 귀를
기름과 함께 뜨겁게 삼키며 괜찮아괜찮아
우리는 순한 동물,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를 다시 택하여주는 우리의 운명
뒤에 올 일을 알게 하지 마라
[천사들의 침묵]
말 한마디 없이
아버지는 오래전에 죽었다
죽어라고 독재를 반대하던 사람도 죽었다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 우리엘의 눈동자여
그대들이 본 것을 말해주시오
이제 아무도 바람과 싸우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자신의 연애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장에도 맑은 오후에도
사람들이 말하기를 쉬운 일은 없다
하늘은 물론이고 우리의 꿈조차도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 순간도 자연도
무한한 침묵도 그들의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돌아도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또 다른
곡선과 부딪쳤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쭉쭉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두 손을 공처럼 둥그렇게 모으는 습관이 있다
공손한 두 손은 이 도시의 패자에게 남은 모든 것이다
진짜 큰 도적들은 밀실에서 돈을 세고
있는 자는 태연하게 감옥에
출판사 서평
[문학평론가 고봉준의 해설 요점]
“이재연의 시는 이 폐허의 비(非)세계에 바쳐진 비가(悲歌)이다.”
“이재연의 시는 특유의 종교적 지향과 도시의 불모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중첩에서 발생하는 도시-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장하고 있다. 내면에서 상연되는 심리적·감각적 드라마에 초점을 두는 최근의 시적 경향과 달리, 그녀의 시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모든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쓸쓸함을 강제하는 세계의 부조리를 향해 언어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이재연의 근작들, 특히 시집의 도처에 흩뿌려져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증명하듯이 그녀의 시는 자기 구원에서 시작하여 불현듯 ‘세계’를 향해 확장된 듯하다.”
“이재연의 시에서 지금-이곳, 즉 세계는 ‘천사’가 부재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신의 옥좌 앞에서 한순간 신을 찬송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천사도 이곳에서는 ‘부재(不在)’와 ‘침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녀의 시에서 천사는 이미-항상 ‘부재’와 ‘침묵’으로 등장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속도시가 실상 구원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폐허라는 쓰라린 진실을 고지(告知)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천사’를 종교적 기호나 알레고리로 읽어도 좋다. 하지만 이재연의 시가 지닌 강렬한 현실주의적 성격은 우리가 ‘천사’를 몰락을 향해 치닫고 있는 세속도시의 불모성을 환기시키는 폐허의 상징으로 읽도록 강요한다.”
“이재연의 시에서 천사의 ‘침묵’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 천사가 ‘침묵’하는 도시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너의 집에/없는 것처럼 앉아 있”(「식탁의 주인」)는 여성 화자,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쳤으나 “손을 씻고 각자 흩어져 가는 우리”(「별별 무늬의 담요와 냄비」), “계단의 모서리처럼 예민해진 얼굴을 감추고 가족사진을 찍으며 비로소 가족을 이해하려고”(「다정의 세계」) 생각하는 가족들 등은 모두 고독한 도시적 인간형들이다.”
“이재연의 시에서 도시적 삶의 비극성과 불모성은 모든 관계의 상실과 죽음, 특히 아이들의 죽음으로 구체화된다. 도시는 거대한 증발의 공간으로 경험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라진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오래 들었다」)처럼 생(生)의 방향이 사라진다. 10월에 “잎이 무성한 목련나무에/계절의 차이를 잃은 꽃봉오리”(「착란」)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자연의 질서가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가치가 사라진다. 그리고 아이들이 사라진다.“
“이재연의 시편들 가운데에는 직·간접적으로 ‘세월호’를 다룬 작품들이 여럿 있다. 이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세월호 사건을 직접적인 모티프로 삼고 있고, 나머지 작품들은 우울과 허무가 중첩된 집단적 심리상태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 비극성을 환기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 아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심리적 애착은 이재연의 시에서 도시적 삶의 우울함과 전망 부재의 부조리한 현실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압사한 추억 끝에 여름이 서 있다/모든 것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면 원소가 될까 구석이 될까”(「별별 무늬의 담요와 냄비」)와 “이사를 해도 살던 동네는 떠나지 못했다”(「새와 공구와 스웨터」) 같은 진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조정인 시인의 단평]
“이 시집은 “존재를 흔들어 깨우는 또 다른 존재의 부딪”혀 오는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제 아무도 바람과 싸우지 않는” 무감한 시절에 고요한 격정을 풀어놓는 시인이 있다.“
“거개의 첫 시집이 개인적 고백에 기우는 데 비해, 이재연의 경우는 나를 벗어나 타자에 합류하여 타자의 기원을 바라보는 거대 구조를 담았다. 묵시록적인 정조가 깔린, 쓸쓸한 듯 낯선 언어의 배 한 척이 물살을 가르고 미끄러져 들어온다. 타자들의 발현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39222519 | ||
---|---|---|---|
발행(출시)일자 | 2017년 10월 13일 (1쇄 2017년 03월 20일) | ||
쪽수 | 143쪽 | ||
크기 |
150 * 211
* 11
mm
/ 239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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