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빛의 일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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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시리즈 (3)
작가정보
원작자 박은령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 학사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영화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장학퀴즈> 방송작가로 활동했지만 결혼 후 10년 동안 일을 접고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그러나 글쓰기에 대한 열망만은 놓지 않고 1999년부터 방송작가교육원에서 작가 교육을 받았으며, 후에 미니 시리즈 <앞집 여자>의 바탕이 된 극본 <남편들의 오월>로 방송작가협회 신인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2001년 베스트극장 공모에 당선되어 드라마 작가로 정식 데뷔했다. 2003년 처음으로 극본을 맡은 미니시리즈 <앞집 여자>로 단숨에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드라마 <두 번째 프러포즈> <인생이여 고마워요>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에서 여성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 시청자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목차
- 인물소개
第四部 비밀
第五部 추락
第六部 빛의 일기
終章
작가의 말
책 속으로
“종이를 만드는 일입니다. 종이는 아이들 공부에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구이고요. 그것을 만드는 일이 어찌 부끄럽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좔좔 외우라 독려해대는 《사서삼경》도, 종이가 없다면 어찌 읽을 수 있겠는지요?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 대나무에 글씨를 새긴 죽간(竹簡)이라도 들고 다니라는 겁니까?”
“양반 상놈 구분 안 되는 행색으로 유민들과 뒤섞여 막일 따위를 하면서, 중부학당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무엇이 그리 당당하단 말입니까?”
“행색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지난 시화전엔 무명옷 차림이었고, 오늘은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하나, 저라는 사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요! 박꽃은 그 행색은 초라하나 한 덩이의 박으로 많은 식구들을 먹이기에 충분하고, 연꽃은 비록 화려하나, 그 열매는 대추나 밤만 못한 법입니다!”
_61~62페이지
그림이 완성될수록 휘음당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았다. 시화전을 통해, 사임당이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을 알고 방심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사임당의 화재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휘음당은 불안과 초조로 잔뜩 긴장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사임당을 지켜본다.
드디어 묵포도도(墨葡萄圖)가 완성됐다. 사임당은 호흡을 고르며 붓을 놓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치마의 주인을 바라본다.
“흉함과 아름다움 사이엔 경계가 없다 생각합니다. 이 치마를 가져가시면 곤경을 모면하실 겁니다.”
_68페이지
“운평사 고려지를 꼭 재현하시오. 그리하여 이 종이에 그대의 그림을 그리시오! 나는 조정에서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이오.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열심히 일한 백성이 수고를 인정받고, 굶주리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바른 세상을 만들 것이오. 그러자면 그대가 꼭 성공해야 하오. 제대로 된 고려지를 만들어, 내가 그려갈 그림의 토대를 만들어주시오!”
바위처럼 단단하고, 횃불처럼 뜨거운 말에 사임당의 가슴이 일렁인다. 얼마나 아름다운 사내인가. 가질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연인,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끝끝내 외면해야 했던 님이지만, 괜찮다. 가질 수 없어도, 만질 수 없어도, 끝끝내 그리워하며 산다 한들, 괜찮다. 사임당은 결코 뱉어낼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삭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_86페이지
편지를 읽던 사임당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뜨거운 것이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이토록 눈물이 나는 이유가 뭘까. 그림을 되찾았는데, 좋아서 방방 뛰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듯 심장이 찢어지게 서러운 이유는 뭘까. 그녀는 휘건에 눈물을 적시며 편지를 읽어나간다.
感恩懷舊 其心則同
物得所歸 妙矣天機
은혜를 생각하고 옛일을 추억하니 그 마음이 한가지라.
그림이 돌아갈 자리를 얻는 것이 오묘하도다, 하늘의 뜻이여.
_241페이지
“폭풍 속에 들어앉은, 고요함이로구나.”
“송구하옵니다.”
“두렵지 않으냐?”
중종이 삐딱한 눈으로 본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며, 소나기도 온종일 내리지는 못한다 하였습니다.”
사임당은 침착하다. 살다 보니 얻어지는 게 있다. 모든 순간은 지나간다는 것. 당장 죽을 것처럼 힘든 순간도 지나가고, 기쁨에 겨워하던 순간도 지나간다.
_272페이지
“큰 바다로 나가면 다른 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임인년 5월까지 천축국 고아라는 곳에 당도해서 방제각이라는 색목인을 만나세요. 먼 이국으로 보내줄 겁니다.”
“날더러 이대로 떠나라는 것이오? 그럴 수 없소. 죽는 한이 있어도 그대 곁에 머무를 것이오.”
“사셔야 합니다. 절 위해, 그리해주십시오.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을 선택해주십시오.”
“사임당…….”
“우리가 떨어져 있다 한들 그것은 이별이 아닙니다! 육신이 어디에 있든, 우리의 영혼은 함께할 것입니다! 두들겨 얇게 편 금박처럼요! 마음의 길이 끊기는 일은 결코 없단 말입니다.
_361페이지
출판사 서평
책소개
“운명은 끝났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이영애·송승헌 주연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원작소설 드디어 완결
드라마에 미처 다 담지 못한 긴 이야기와 또 다른 결말!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가 종영했다. 사전제작 드라마답게 영상에는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이 고루 담겼고, 캐릭터에 오롯이 몰입한 배우들의 집중력 있는 연기가 주목받았다.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지우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 신사임당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야기’가 있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 上》가 소녀 사임당과 소년 이겸 앞에 나타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그렸다면,《사임당 빛의 일기 下》에서 인물들은 한결 성숙하고 단단해져 운명 앞에 굳건히 선다. 드라마와는 다른 버전의 가슴 저미는 결말이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한편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은 순간부터 집필, 종영까지를 실감나게 기록한 ‘작가의 말’은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원작자인 박은령 작가와 정식 계약한 유일한 소설이며 대만 ‘인류지고’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일본 ‘신쇼칸’에서 일본어판 출간을 앞두고 있다.
출판사 책 소개
우리 가는 길이 영원히 만나지지 않는 평행선이라 해도…
당신보다 앞서 달려가 자갈돌 치워주고 파인 곳 메워주며 그렇게 평생 나란히 가겠소.
소설 《사임당 빛의 일기 上》에는 서지윤이 이탈리아에서 사임당 신씨의 일기와 미인도를 발견해 복원하는 과정과 사임당의 일기 속 신사임당과 이겸의 첫 만남과 첫사랑, 참혹한 헤어짐이 생생하게 담겼다. 어른이 된 이겸이 그날의 비밀을 드디어 밝혀내면서 하권이 시작된다. 사임당은 고려지를 만드는 데에 사활을 걸고, 정치와는 담을 쌓은 듯 보이던 이겸은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을 견제하는 무리도 움직임을 개시하지만 거듭되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온 두 사람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중종의 명으로 사임당과 이겸은 임금의 어진(御眞)을 그리게 되는데….
《사임당 빛의 일기 下》의 인물들은 당당하다. 사임당은 자신이 처한 위기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역사를 바꾸려다 죽음 앞에 선 이겸은 이것이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흔들림 없이 할 뿐이다. 깊은 한(恨)과 슬픔이 《사임당 빛의 일기 上》의 정서를 이루었다면, 《사임당 빛의 일기 下》에 담긴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님을 보내는 그리움, 그 마음을 받아들여 죽음보다 힘든 삶을 선택한 자의 그리움…. 현대의 서지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신사임당의 마음을 오롯이 알고 이해하게 된 것도, 그리하여 이겸을 구할 방도를 알릴 수 있었던 원동력도 그리움에 있었다.
‘우리를 만나게 한 것도, 나를 죽게 하는 것도 운명이라면….’
드라마의 현장감, 소설의 서사를 동시에 맛보는 원작소설!
《사임당 빛의 일기 下》 권말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박은령 작가가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은 순간부터 집필, 종영까지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담겼다. 작가에 따르면 <사임당 빛의 일기>는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인 2014년 6월,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사극화하기 어려운 위인’에 대한 기획기사에서 극화하기 어려운 위인 1위로 뽑힌 인물이 바로 신사임당이었던 것이다. 박은령 작가는 ‘이 기사가 묘하게도 저를 자극했습니다. 사임당이라는 여인이 제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지요’라고 고백한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곱 아이를 키워냈으며 수백 년을 지나 지금까지도 명성을 떨치는 예술가인 그녀가 과연 고요한 현모양처이기만 했을까?’ 작가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취재로,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로 이어졌다. 이렇게 완성된 이야기는 드라마로, 웹소설로, 두 권의 원작소설로 확장되었고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었다. “여기 굉장한 이야기의 광산이 있구나!” 하고 외쳤다는 작가 특유의 ‘촉’이 빛을 발한 것이다.
영상과 글의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의 결말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드라마에서처럼 소설 속 인물들도 제자리를 찾았다. 죄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았고 억울하게 내쫓긴 이들도 누명을 벗었다. 그러나 인물들의 동선은 조금씩 다르고, 그 마음 풍경 또한 세밀하고 깊이 있게 묘사되었다. 이에 박은령 작가는 채널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작가가 쓴 것과는 달리 방송되는 부분들도 많고, 때로는 그로 인한 비난도 뒤집어써야 하는데, 원래는 그렇게 쓰지 않았었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원작 소설에는 감정선이 잘 살아 있고, 제가 원했던 오리지널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책에 보낸 찬사
그림에 몰입해 순수한 예술혼을 드러내는 사임당(이영애)과 질투로 불타오르는 휘음당(오윤아)의 대비가 긴장감을 자아낸다.
<조선일보>
자신만의 예술을 치열하게 구현한 신사임당과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으로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바치는 ‘조선판 개츠비’ 이겸의 만남!
<경향신문>
완성도 높은 작품성으로 국내 드라마 시장에 한 획을 그을 드라마의 탄생!
<동아일보>
이탈리아와 한국, 과거 그리고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방대한 이야기! 그 중심에서 이영애의 존재감은 빛났고, 비밀을 품은 캐릭터인 송승헌은 지금껏 본 적 없는 강렬한 변신을 기대하게 한다.
<아시아투데이>
기본정보
ISBN | 9788934977568 |
---|---|
발행(출시)일자 | 2017년 05월 11일 |
쪽수 | 400쪽 |
크기 |
138 * 197
* 30
mm
/ 416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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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나뭇잎이라도 봄의 연녹색과 여름의 진녹색, 가을의 단풍이 다 다릅니다. 햇살에 따라 바람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빛을 품는 것이지요. 그 모든 걸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저만의 느낌으로 그려내고 싶습니다! 왜 여인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이리도 많단 말입니까!"
삶이 참 어렵다. 매 순간이 풀어야 할 문제 같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막막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기에 버틴다. 답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딸이기에, 어머니이기에,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안정을 되찾는다. 눈물을 그치고 기와집 담장에 피어 있는 분홍빛 패랭이를 보며 웃어본다. 북평촌에서 보던 꽃을 낯선 땅에서 보니 더욱 반가운 것이다.
이 모든 참담한 현실이 광화문 거리를 걷는 지윤의 발목을 붙들었다. 지윤은 사임당 일기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어쨌든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므로.
"부끄럽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제가 선택한 삶을 온전히 책임지며 살고 있으니까요! 비가 새는 누옥에, 계집종 하나 겨우 거느리고, 물기 마를 새 없이 온갖 집안일을 직접 하고 살아도,비겁하지는 않으니까요! 제가 선택한 삶을 당당하게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최소한 공처럼 삶을 낭비하며 허송세월하고 있진 않습니다!"
은수가 천진하게 웃으며 지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윤은 사랑스런 아들을 품에 꼭 껴안았다. 문득 이겸이 보았다는 그 따스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식들을 품에 안고 재우는 사임당의 모습과 새끼 강아지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개의 모습.그것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모견도의 탄생 비화였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날개가 합쳐져야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 비익조 말입니다. 이는, 재주는 있으나 형편이 어려워 그 뜻을 펼칠 길이 없는 예인에게 눈과 날개를 달아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재주 있는 예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반상의 차별, 성별의 차별 없이 비익당을 개방할 것입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아라. 여기 이 풀벌레조차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몫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벌레도 꽃도 풀도 바람도 그리고 시냇물조차도.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듯하나, 그렇지 않아. 이제부터 너희가 채워갈 세상을 생각하면, 이 어미는 벌써부터 가슴이 뛴단다."사임당은 사랑스런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본다. 삶이 아름다워지고 추해지는 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임당은 부디 자신의 아이들이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길 원한다.
먹물을 끼얹은 듯 까맣기만 하던 세상에 실낱같은 빛이 드리운다. 동이 터오고 있는 것이다. 겨울잠을 자느라 앙상해진 숲이 시나브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염료로도 표현될 수 없는 신비한 빛이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 위로 넘실거린다. 사임당은 무연한 눈길로 절벽 너머 한양을 바라본다. 저곳에 삶이 있다. 고비마다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살아내는 그런 삶, 울고 웃으며 주어진 한 생을 꾸역꾸역 버티어내는 삶,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아등바등 살아내는 그런 삶이 저곳에 있다. 그리고 지금, 한 줄기 빛이 삶을 깨우고 있다. 사임당을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일어나 빛이 드리운 삶 속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달과 별만이 빛을 발하던 겨울 숲길 양옆으로 환한 지등이 꽃처럼 피어 있다. 뿐만 아니라, 지등이 밝혀진 길고 긴 길에는 매끈하고 하얀 조약돌이 고르게 깔려 있다. 꿈을 꾸는 것인가.
"관직이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합니까? 전국시대 사상가이며 병법가인 묵자墨子도 평생 관직에 오르지 않았으나 약자에 대한 한없는 동정으로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었고, 대시인 도연명陶淵明 또한 평생을 주유周遊하여 훌륭한 시와 글로써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종이를 만드는 일입니다. 종이는 아이들 공부에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문구이고요. 그것을 만드는 일이 어찌 부끄럽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좔좔 외우라 독려해대는 ≪사서삼경≫도, 종이가 없다면 어찌 읽을 수 있겠는지요?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 대나무에 글씨를 새긴 죽간竹簡이라도 들고 다니라는 겁니까?"
"행색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지난 시화전엔 무명옷 차림이었고 오늘은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하나, 저라는 사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요! 박꽃은 그 행색은 초라하나 한 덩이의 박으로 많은 식구들을 먹이기에 충분하고, 연꽃은 비록 화려하나, 그 열매는 대추나 밤만 못한 법입니다!"
"운평사 고려지를 꼭 재현하시오. 그리하여 이 종이에 그대의 그림을 그리시오! 나는 조정에서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이오. 썩은 환부를 도려내고, 열심히 일한 백성이 수고를 인정받고, 굶주리지 않으며 살 수 있는, 바른 세상을 만들 것이오. 그러자면 그대가 꼭 성공해야 하오. 제대로 된 고려지를 만들어, 내가 그려갈 그림의 토대를 만들어주시오!"
"어찌 그런 말을 해……. 대장간 일이 얼마나 중한데. 대장장이가 없다면 농사에 필요한 괭이며 호미를 누가 만들어줄 것이냐? 이 세상에는 선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농민도 어부도 대장장이도 다 필요하다. 그들 모두가 어우러져야 제대로 세상이 굴러가는 것이다.""그렇군요."아들의 얼굴이 환해진다."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이 어미도, 아비도, 상감마마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제 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그 작은 점들은 선이 되어 미래의 너와 이어질 거다. 그러니 매 순간, 네 앞에 놓인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지치지 말고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 알겠느냐?""어머니……."
매창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그 모습에 사임당의 가슴이 무너진다. 맑은 눈을 가지라 가르쳤다. 눈이 탁해지면 세상을 맑게 볼 수 없다 일렀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되, 정체되지 않도록, 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 말했다. 해서 어떠한 편견도 없이 세상을 바라보라 했다. 그렇게 가르쳐왔다. 하지만 세상이 탁하고, 세상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은 알려주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흔히 현모양처로만 알려져 온 신사임당의 생애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더구나 그녀가 남긴 작품들이 궁금해졌으니 그렇다면 작가의 의도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저그런 사극이야기겠지, 라는 생각에 책을 술렁거리며 읽은 것은 사실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현재의 지윤과 과거의 사임당이 만나는 초현실적인 장면 역시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런 지엽적인 것이 이 소설의 이야기를 재미없다 할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초현실적인 연결고리 없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른 매개체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라는 생각은 해 보지만 말이다.
얼마전 티비 프로그램에서 신사임당 이야기를 하며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이이의 어머니로만 설명되어 있다고, 심지어 사임당이 기거하던 방 앞에 있는 설명조차 이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며 흥분하는 모습을 봤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저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알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임당, 빛의 일기를 통해 나는 사임당이 어머니로서만의 모습을 강조하며 현모양처라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살아갔으며 또한 예술가로서의 모습도 알게 되었다. 타인을 배려하고 가진것없이 내쫓겨 떠도는 유민들을 위해 그들과 같이 고려지를 복원해 만드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이 소설의 거대한 줄기는 이겸과 신사임당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보다는 강직하게 삶을 이끌어나가는 사임당의 모습이 더 좋다.
역사속의 사임당을 그대로 재현해낸 것은 아니지만 과거 조선 시대를 살아갔던 한 여인의 존재가 수동적이고 운명에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당당하게 살아온 주체임을 느끼게 하고 있어 좋았다.
"<금강산도>를 보겠다며 담을 넘어 들어왔던 당찬 소녀.....당신이 그려내는 그림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나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이겸은 까무룩 잠이 든다. 사임당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가슴이 저릿하다. 자신의 전부를 내걸고 달려오는 이 남자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갚을 길 없고, 마주 볼 수 없는 마음이 아닌가. 하늘이 제아무리 높고, 땅이 제아무리 넓다 한들, 목숨을 내건 사랑만큼 높고 넓을 것인가.
<사임당 빛의 일기> 그 두 번째 이야기는 이겸이 사임당을 위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희생했는지, 그 전모를 알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는 왜 갑작스레 사임당이 자신과의 혼인을 파기하고 다른 남자와의 삶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웠는데, 비로소 전모를 알게 된다. 그 모든 일들의 배후에 전하께서 내린 시가 있었다는 것. 그 시를 본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바로 사임당이라는 것도. 예정대로 두 사람이 혼인을 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는 것도 말이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당신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왔소! 이제부턴 내가 당신을 위해 살 차례요. 조선에서 제일 힘 센 사내가 될 것이오. 당신을 위해..... 아무 걱정 없이 오롯이 화가 사임당으로만 살아갈 수 있도록!
한편, 사임당은 종이공방에서 아주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유민들을 위한 제사를 이십 년째 지내고 있다. 그 동안 겪어온 양반들과는 전혀 다른 사임당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종이 공방의 대장은 그들을 귀한 사람들이라 지칭하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다. 그러다 팔봉의 고백에 의해 운평사 유민들이 몰살당한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그림과는 상관없이 애초에 놈들은 고려지 비법만 챙기면 죄다 쓸어버릴 심산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죄책감과 울분이 숨통을 조이던 이십 년 세월 앞에 사임당은 무릎에 힘이 풀리고 만다. 그 와중에 종이공방의 유민들이 포교에 의해 줄줄이 잡혀 들어간다. 그 동안 어마어마하게 밀린 조세 때문에 구속이 되고 만 것이다.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그들을 구하기 위해 땅문서와 집문서를 담보로 속전을 구해야겠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나머지 금액을 구해오겠으니 사람들을 풀어달라고. 부서질 듯 여리고 작은 모습 어디에 대장부보다 더 큰 배포가 숨어 있는지, 유민들은 감격한다.
"그 소녀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공 앞에 있는 저는 보잘것없는 아낙일 뿐입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 지나간 인연을 위해 공의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현명한 사랑이란 게 있소? 사랑은......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것이오."
"............"
"그저.......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사임당과 유민들은 나머지 돈을 구하기 위해 운평사 고려지를 만들어내기로 하지만 수월치 않다. 그 과정에서 민치형과 휘음당은 더욱 악독한 방법들로 그것을 방해하고, 이겸은 묵묵히 뒤에 서서 그녀를 보호하고 도와주기 위해 애쓴다. 휘음당의 계책에 의해 결국 사임당의 아들 현룡은 자진 출재하는 걸로 중부학당을 나오게 된다. 그 와중에도 '아이보단 그 아비의 권세와 재물을 더 중시하고, 나라의 근간이 되는 백성들마저 우습게 여기면서까지, 오로지 과거공부만을 강요하는 이곳에선 더는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부학당 자모회 수장 자리가 다른 이를 짓밟으면서까지 그토록 지켜내야 하는 것이라면, 댁은 계속 그리 사시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온몸이 타 들어갈 것만 같은 휘음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듯 선과 악의 대비, 쫓기는 자와 괴롭히는 자, 음모를 꾸미는 자와 그것을 빠져 나오는 자의 대비로 이야기는 시종일관 흘러간다. 어찌 보면 우리 나라 사극의 거의 모든 드라마가 이런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지루하거나 뻔하지 않다. 아마도 사임당과 이겸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 때문이 아닐 까 싶다. 그들이 실존 인물이고 우리 역사 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독자들에게도 전달이 되어서 일 것이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횃불처럼 뜨거운 남자 이겸, 그리고 삶이 어떤 고통과 역경을 주더라도 넘어질지언정 무너지지는 않는 여자 사임당. 다만 아쉬운 점은 타임슬립이라는 장치가 아닐까 싶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는 강사 지윤이 미술사학계의 실세인 민정학 교수에 의해 위기를 겪고,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고서를 복원해서 과거 사임당의 일상을 담은 일기로 교차 진행되는 스토리는 상권보다 하권에서 더 몰입을 방해한다. 사임당과 이겸의 스토리에 푹 빠져들려고 하면 갑작스레 등장한 현재의 이야기가 그 흐름을 끊어낸다고 할까.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를 빼고 그냥 정통 사극으로 풀어냈다면 드라마도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이라는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무너지고야 말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와도 삶에 휘둘리지 않고, 넘어질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던 사임당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모습이 아마도 당신에게도 다시 일어설 힘을 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팩션사극이라지만 설정 자체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소소한 오류도 적지 않다. “한강(→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수포교(→수표교) 아래에는 한양 거지들이 모여 사는 움막이 있다.”(1-228쪽) 물론 현모양처라는 신사임당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도전의 결과는 무엇인가? 어머니로서 살기 위해 연정을 접어둔 화가? 재능은 언젠가 꽃피울 수 있지만 연정은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한다?
<사임당 빛의 일기> 책자에는 언급만 되고 본문이 등장하지 않는 시가 있다. 사임당의 아들 현룡은 “어머니께서 읽어주신 매월당 시 중에 ‘사청사우乍晴乍雨’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매월당은 저리 가만히 떠 있는 구름과도 같은 사람이라 여겨지옵니다.”라고 한다.(2-357쪽) <잠깐 갰다 잠깐 비 오고>라는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잠깐 갰다 잠깐 비 오고 비 오다 다시 개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천도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정이야.
譽我便應還毁我(예아편응환훼아) 나를 칭찬하는가 했더니 곧 다시 나를 비방하고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이름을 피하는가 하면 도리어 이름을 구하네.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꽃이 피고 꽃이 진들 봄이 무슨 상관이며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부쟁) 구름 가고 구름 옴을 산은 다투지 않도다.
寄語世上須記憶(기어세상수기억) 세상에 말하노니 모름지기 기억하라.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① 어디서나 즐겨함은 평생 득이 되느니라.(고전번역원)
② “한평생 즐거움을 누릴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느니.”
2013년 1월 초순 마지막 구절의 뜻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①)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디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뜻(①)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이 항상 즐거움만을 추구하면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②)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알고 있던 것이 정반대의 뜻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충격이었다.
작가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임당과는 완전히 다른 사임당을 그려냈을까? 세상 인심이 날씨보다 더 변덕스러운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가가 보여주는 사임당은 인심의 변덕일 뿐 별 가치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시대정신을 담은 새로운 의미값이 있는 걸까? 여러 가지 의문이 들지만 우선 궁금한 것은 무상한 세상에서 신사임당은 왜 그림을 그리 정성껏 그렸을까 하는 점이다.
€ 패랭이꽃의 살아 있는 추억
그래도 신사임당의 변신은 나름대로 이 시대의 생리와 병리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미술생태계에 관한 이중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은 16세기 상반기를 사는 신사임당의 일기와 2010년대를 사는 서지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사임당의 하루하루를 담은 듯한 일기 형식의 고서에는 안견의 <금강산도> 외에도 뜻밖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임당과 왕족 화가로 알려진 이겸의 사랑 이야기였다.>(1-81쪽)
<지윤은 베란다에 앉아 시들어버린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사임당의 《수진방 일기》와 함께 가져온 패랭이꽃 씨앗을 심은 화분이었다.>(2-198쪽)
이 이야기의 현대쪽 주인공은 지도교수인 민정학 교수에게 죽도록 충성을 다했지만 교수 임용에 실패한 한국미술사학자 서지윤이다. 16세기 상반기쪽 주인공은 왕족 화가 이겸과 깊은 사랑과 교감을 나눈 신사임당이다. 16세기 상반기의 신사임당과 2010년대의 서지윤의 공통점은 재능이 있어서 마음대로 펼치지 못하고 좌절을 거듭하지만 끝내 굽히지 않고 빛의 길로 가는 당찬 작가(문예활동가)이자 저항영웅이라는 점이다.
<수진방 일기>는 어둠의 길을 걸어간 ‘어둠의 일기’지만 어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빛의 길로 바꾼 새로운 신사임당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임당 빛의 일기>에는 신사임당의 처지를 은유하는 꽃들이 여럿 등장한다.
<지윤은 상현보다 두 학번 선배였다. 상현이 본 지윤은 악바리였고,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들꽃 같은 여자였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라도 싹을 내고, 자기만의 독특한 향기로 사람을 취하게 하는 민들레꽃이었다.>(1-23쪽)
<이겸은 자홍빛 꽃잎이 만발한 배롱나무 아래에서 사임당을 기다리고 있다.>(1-120쪽)
<박꽃은 그 행색이 초라하나 한 덩이의 박으로 많은 식구들을 먹이기에 충분하고, 연꽃은 비록 화려하나, 그 열매는 대추나 밤만 못한 법입니다!>(2-62쪽)
<완성된 그림을 내려다본다. 연꽃이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한 점 티 없이 맑고 청초한 꽃을 피워내는 연꽃. 간밤에 어지럽고 혼돈하던 그녀의 마음이 피워낸 꽃이다.>(2-207쪽)
<패랭이꽃 씨앗입니다. 공이 계실 이국 들판에 뿌려주세요! 패랭이꽃이 피어 들판을 뒤덮거든, 저도 그곳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2-361쪽)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입니다. 패랭이꽃이요.>(2-364쪽)
신사임당은 민들레꽃처럼 생활력도 강하고 이겸과의 입맞춤을 나눈 배롱나무꽃처럼 정열도 있고(하필 배롱나무 아래서 입맞춤을 하다니 열매가 없을 징조라고나 할까), 박꽃처럼 소박하면서도 실속이 있으며, 진흙 속에서도 고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반전의 역량을 소유한 능력자다. 자타공인 신사임당을 상징하는 꽃은 ‘패랭이꽃’이다. 패랭이꽃이 신사임당이고 신사임당이 패랭이꽃이다.
신사임당은 <초충도>에서 패랭이꽃을 큰 것 속에서도 아담하게 뚜렷한 존재감을 갖는 뚜렷한 존재감을 갖는 것으로 그렸다. 패랭이꽃은 한자로 석죽화(石竹花)라고 하여 돌처럼 변함없이 단단하고 푸른 대나무 같이 늘 꼿꼿한 청춘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것은 가족의 불로장생을 축원하는 그림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패랭이꽃의 일차적인 의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함을 한탄”하는 소품이다(1-73쪽).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오죽헌에 여서당을 열어 문중의 소녀들을 가르쳤다.”(1-71쪽) 신명화가 상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패랭이꽃이라는 시를 베껴쓰는 것이었다. “이날도 신명화는 ‘패랭이꽃(石竹花)’ 시 원본을 놓고 모본하고 있다.”(1-72쪽) 다음의 내용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정몽주의 선조인 정습명 선생의 ‘패랭이꽃’이다.
세상 사람들 붉은 모란을 사랑하여 뜰 안에 가득히 기르네 世愛牧丹紅 栽培滿院中
누가 알리오, 황량한 들에도 아름다운 꽃떨기 피어 있음을.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그 빛깔은 마을연못 달빛을 꿰고 향기는 나무 언덕에 풍겨 오는데 色透村塘月 香傳ɚ樹風
외진 땅을 찾는 귀공자 적어 고운 자태는 시골 늙은이 차지라네.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여기서 패랭이꽃은 황량한 초야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향기로운 꽃이다. 강릉에도 피어 있고 한양에도 피어 있고 수백 년이 지나 이겸이 이주한 먼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시골에도 피어 있는 꽃이다. 결국 패랭이꽃은 본향과 고향, 대도시나 이국의 특정 지방에도 피어 있는 꽃으로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꽃이다. 신사임당은 ‘한양체질’(1-255쪽)이 아닐지 몰라도 한양에서 패랭이꽃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 패랭이꽃은 낯선 땅에서도 거뜬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반가운 꽃인 셈이다.
<기와집 담장에 피어 있는 분홍빛 패랭이를 보며 웃어본다. 북평촌에서 보던 꽃을 낯선 땅에서 보니 더욱 반가운 것이다.>(1-189쪽)
패랭이꽃의 의미는 단순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넘어선다. <신사임당-빛의 일기>에서 패랭이꽃은 여자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재능을 제약받는 것을 거부하는 저항의 꽃이기도 하다. 사임당은 “여자라고 해서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다는 건 불공평합니다!”(1-73쪽)라고 매우 강하게 여권신장을 도모하고 있다. 안견의 <금강산도>를 보고 금강산을 직접 보고 싶어했고, 사임당이 산수화를 그렸다고 설정한 것은 <사임당 빛의 일기>의 주제의식을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일 것이다. 본래 여성들에게는 예술가적 자질이 있었지만 관습과 고정관념 때문에 재주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한다.
<얼마 전 인류 예술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수만 년 전 동굴 속 페인팅이 대부분 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와 주목을 끌었죠._ 미국의 한 고고학자가 동굴에 남아 있는 손자국의 크기를 측정한 결과, 당시 동굴 예술가들은 대부분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습니다.>(2-386쪽)
<조선시대 문인화, 산수화는 대부분 남자들의 전유물이었죠. 그러나 사임당은 관습과 고정 관념을 깨고 과감히 산수화를 그렸습니다.>(2-387쪽)
패랭이꽃에 이렇게 인내와 저항, 도전과 창의적 해결까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적인 의미와는 다르다.
패랭이꽃=나데스코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있은 꽃이다. 그것은 일본인들에게 말로 다 드러낼 수 없는 ‘가장 일본스러운 여성’을 뜻하였다. 현재 일본 여자축구대표님의 이름이 ‘나데스코 재팬’이기도 하였다. 나데스코에 비해 패랭이꽃은 훨씬 야성적이고 진취적이라고 생각된다. 아니면 이 드라마 작가의 해석이 그럴 것이다.
이 드라마작품에는 실제 패랭이꽃과 그림속의 패랭이꽃이 막상막하의 비중으로 등장한다. 사임당은 살아있는 패랭이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꽃피는 시절이 한철 뿐이라 패랭이꽃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패랭이꽃 그림’이 필요했을 것이다. 패랭이꽃그림은 애착인형처럼 무상한 세상을 사는 생활필수품인 셈이다. 그런데 패랭이꽃이 등장하는 그림을 보면 웅장한 연정이나 우정을 표현했다기보다 가족의 화목과 건강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드라마작품에서도 사임당이 패랭이꽃을 그린 다른 이유가 제시된 것같지는 않다. 드라마작품에서 <초충도>는 비중있게 언급되었으나 이른바 ‘산수화’는 도대체 언급된 바가 거의 없다. 신사임당이 초충도를 그린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답습하고 산수화에 대해선 별 다른 언급이 없다면 사임당의 작품세계에 대해 새롭게 뭔가를 제시한 게 없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 패랭이꽃 같은 서지윤과 신사임당의 인간적 성장과 탐색에는 수많은 도전과제와 문제적 인물이 앞을 막거나 진로를 방해한다. 또 “성격 탓도 있었지만, 예행연습 없이 사는 인생이라 순간순간 서투른 선택을 해왔던 것이다.”(2-373쪽) “‘빛의 길로 가라!’ 지윤의 메모”(2-388쪽)
€ 서지윤의 도전과제
탐색영웅 서지윤이 처음 만난 거대한 장애물은 “안견 연구의 권위자이신 한국대학교 인문대학장 민정학 교수”(1-25)의 “횡포”였다. “난공불락. 민교수의 등 뒤에 버티고 선 권력은 이미 대학교 담장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1-23쪽) 민교수는 재벌 ‘갤러리 선’ 관장의 인맥을 이용해 대학 총장을 넘어 문화부 장관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
서지윤은 “교수 임용을 앞두고 여러 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그림을 보는 안목보다 정치적 기술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1-14쪽) 민교수는 서지윤의 안목과 재능을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이용하고 심지어 안견의 <금강산도> 위작을 진본으로 조작하는 작업을 강요한다. 서지윤이 저항하자 민교수는 “싸움이란 건, 힘이 균등할 때나 가능한 거야. 너 따위 찌끄러기들, 밟아버리면 그만이야!”(1-328쪽)라고 협박한다. 사실 학술권력의 경우에도 권력인지라 저항이 쉽지 않았다.
서지윤에게 반격의 근거가 된 것은 그미가 토스카나에서 가져온 고서(수진방 일기)와 진본 금강산도, 그리고 미인도였다. ‘수진방 일기’와 ‘금강산도’를 얻는 과정은 비둘기똥을 맞은 행운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비둘기 똥을 맞으면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해, 하늘의 응답이라는 것이다.”(1-43쪽) 이 대목이 이 작품 전체에서 가장 설득력이 약한 부분일 것이다. 서지윤이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볼로냐에서 고서의 일부를 얻고 토스카나 주의 시골저택에서 고서(수진방 일기)의 나머지 일부와 미인도를 얻는 과정이 너무나 개연성이 약하다.
작가는 오스트리아 빈의 미술사 박물관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작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라는 대작 한가운데에서 성 프란치스코를 우러러보는 인물이 바로 ‘한복을 입은 남자’였다고 단정한다. “그가 사임당의 필생의 연인인 ‘이겸’”(2-397쪽)이라고 설정한 것이다. 의성군 이겸은 “비단길을 따라 아주 먼 이국, 이탈리아라는 곳에 가서 동방의 화가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어느 것에도 속박받지 않고 예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머나먼 이국”(2-350쪽)이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가 “예술가들의 해방구”(1-233쪽)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가 조선의 왕족화가 이겸이었다는 것은 작가의 설정이다. 그럴듯한 추정이지만 ‘한복을 입은 남자’ 자체부터 정말 한복을 입은 것인지 확정하기 힘들다.
아무튼 서지윤은 이렇게 우연히 이탈리아의 시골 저택에서 자신의 누명을 벗길 수 있는 열쇠를 찾아 한국에 돌아온다. 다행히 민교수가 약자의 처지를 이용하여 불법행위까지 하게 된 조교들 중에는 부조리한 권력에 조금씩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서지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조교들은 썩은 물에서 노는 썩은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던지 도둑질까지 하라는 말에 저항감이 들었다. 하지만 저항도 해본 놈이 하는 법이다. 그들은 무력하고 무능력했으며, 무엇보다도 무치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그들이 부조리한 권력에 굴복할 수 있는 이유였다.>(1-112쪽)
한편 서지윤에게는 국립박물관 학예사인 친구 고혜정(고미술 복원 전문가)과 2년 후배 한상현이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그들은 “묻지마 범죄는 알아도, 묻지마 연구는 처음 들어보네!”(1-262쪽)라면서도 <수진방 일기>라는 고서를 복원하고 해석하는 일 등 지윤의 문제를 발벗고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라드의 이전 활약도 도움이 되었다. “라드Rade는 예술작품 가운데 위작을 밝혀내는 거물이었다.”(1-323쪽)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라드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않았지만 실제 드라마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다. 서지윤에게 친구와 후배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은 매우 미묘한 존재였던 것 같다.
서지윤의 시어머니 김정희 여사는 아들을 억대 연봉의 펀드 매니저로 키워낸 보람을 느끼며 사는 ‘헬리콥터 맘’이다. 남편이 금융사기 사건에 휘말려 도피하면서 “고부간에 골이 깊어가는 밤, 옥인동 골목에도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1-165쪽) 김정희 여사는 아들과 며느리가 동시에 큰 시련을 만나자 정신적 타격을 크게 입었다. 이 드라마소설에서는 고부갈등이 주요한 갈등축이 되지는 않는다.
서지윤의 남편은 ‘돈이 최고’인 꽤 유능한 펀드 매니저다. 남편의 회사는 ‘갤러리 선’ 관장의 남편인 재벌 회장의 작전 때문에 파산하고 도피의 길을 떠나야 했다. 남편 정민석은 도피의 와중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가족의 전세 보증금을 마련하는 등 나름대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지윤은 남편의 수입이 좋았을 때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내고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몰락한 후에 민정학 교수는 서지윤에게 “애는 계속 사립학교에 다니더군. 등록금만 일 년에 이천만 원. 게다가 수학여행과 각종 과외활동까지 하면, 못 들어도 삼사천은 들 텐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1-327쪽)라고 비아냥거린다. 서지윤도 교육열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지윤의 처지는 현실의 배우자와 이상의 배우자 사이의 극심한 괴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한국의 교양있는 여자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자업자득의 측면도 있다. 서지윤은 남편과 이혼하여 갈라선다든지 감정적으로 파탄을 맞는지 않는다. 현대의 서지윤은 펀드 매니저인 남편과 결혼한 모습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낭만적 사랑을 추구하거나 과대한 목표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만큼 성취지향적인 인물이자 전문가의 연구윤리를 중시하는 학술 연구자다.
그런데 노력한 만큼 성공을 바라는 매우 합리적인 자아실현 추구가 서지윤을 저항영웅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사회의 존재방식이 그다지 합리적이거나 건강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직장인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지윤이 그렇고, 남편 정민석이 그러하며 서지윤을 돕던 친구 고혜정이 그러했다. 반면 민정학 교수나 선갤러리 관장이나 그 남편인 재벌회장은 승승장구하는 편이었다.
서지윤에게는 교수임용과정 자체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 교수사회의 적폐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직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부지런함, 실력과 인맥, 그리고 학문적 사기 기획력을 가진 민교수는 서지윤의 시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악역이다. 그런 민교수도 대학권력과 학계 영향력 그리고 정치경제적 지배 분파(재벌회장)의 지배력 등 적폐의 그물구조의 일부일 뿐이다. “뱀 굴에서 뱀을 꺼낼 땐, 남의 손을 빌려라 했다.”(2-293쪽)
€ 신사임당이 만난 도전과제와 과제 출제자들
서지윤의 시간과 그 세계엔 갈등구조가 단순하고 악역이라고 해봐야 민교수와 조교들, 그리고 갤러리선관장과 재벌회장, 그리고 부분적으로 남편 등이다. 그러나 신사임당이 만난 도전과제는 서지윤보다도 더 버거운 것들이었다.
신사임당에게 큰 시련을 안긴 것은 의외로 조선의 군주 중종이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신하들이 세운 중종은 정통성이 약했고 권신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다져야 했던 중종은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밤에 기묘사화를 단행했다. “1540년(중종 35년), 조선의 미래는 암담하다.”(2-201쪽)
<아직도 자신의 고독과 고통에만 골몰한 중종은 간신과 충신을 분별할 능력이 없다._ 중종은 그저 편승하듯 소신 없는 정치로 일관했다.>(1-184쪽)
<왕이 제 안위만을 걱정해 백성들을 보살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는 왕이 아니다. 이것은 역심이 아니다.>(2-44쪽)
<네놈의 경거망동이 또다시 그 아낙을 사지로 내몰 수 있음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 게야! 지난 일을 파헤치면 너도, 그 아낙도 위험해진다! 그러니 아무것도 알려 들지 마라!>(2-16쪽)
<군왕이 권력을 다지는 일은 성벽을 쌓는 일과 같다. 성벽을 쌓을 때 큰 돌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큰 돌과 작은 돌이 적재적소에 어우러질 때 비로소 튼튼한 성벽이 완성된다.>(2-150쪽)
중종은 ‘홍익’군주는커녕 민폐정치의 끝판왕이 아닐 수 없다. 중종은 이겸에게 마냥 우호적이다가 적대적으로 돌변하였다. 그는 소신 없은 정치로 일관했고, 자신의 안위와 고통에만 골몰하고 있었으며, 그러면서 ‘권력’의 ‘튼튼한 성벽’을 쌓고자 했다. 의도와 실제 효과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 이런 군주 밑엔 당연히 탐관오리가 발호할 수밖에 없다. 민치형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탐관오리다.
<지금 내 말에 토를 단 것, 그게 바로 실수일세.>(1-375쪽)
<최고급으로 손꼽히는 금산의 인삼과 금자를 준비하고>(1-370쪽)
<민치형은 좌의정에게 개성 홍삼과 명국 사신에게 얻은 도자기 등 값나가는 것들을 선물했다. 권력 맛을 오래 본 인간일수록 뇌물에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1-413쪽)
16세기 상반기에 ‘개성 홍삼’은 좀 어색하다. ‘숙삼’은 고려시대부터 언급되고 있지만 홍삼이라는 말 자체는 정조 때 처음 등장한다. 아무튼 민치형은 출세를 위해서는 학살극을 일으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고급 고려지 제조기술을 가진 강릉의 운평사 종이공방에는 민치형의 칼 아래 피바람이 불었다. “민치형은 중앙정계에 줄을 댈 속셈으로 영의정의 아들 윤필을 데리고 관동팔경 유람을 다니는 중”이었다.(1-140쪽)
얼결에 이 학살극을 목격하고 연루된 어린 신사임당은 이때부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생존과 생활의 방편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임당은 자신의 그림과 글씨 때문에 종이공방의 유민들이 학살된 것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세돌의 할아버지 팔봉이 밝힌 바에 의하면 놈들은 “운평사에서 이어오던 고려지 비법”만 애초부터 “죄다 쓸어버릴 심산이었”다.(2-22쪽) 이 사건으로 사임당은 졸지에 살아남기 위해 연인인 왕족 이겸과의 약혼을 해지하고 마을의 한량 이원수와 혼인을 해야 했다.
“하룻밤 사이 북평촌에서 한량으로 소문난 이원수라는 사내가 사임당의 정혼자로 낙점되었다. 실속 없이 신분만 양반인 이원수는 이십 대 초반으로 외모는 번듯하나 꿈도 욕심도 없는 사내다.”(1-157쪽)
한량인 이원수에게도 나름대로 잘난 부인의 인정과 애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가 보다. 이원수는 자신의 부인이 자신을 아이들의 아버지로 인정할 뿐 마음 속에 연인을 담아두고 있다고 느끼자, 엇나가기 시작한다. 주막집 여자와 살림을 차린다. 사임당은 단호히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다만 기별棄別은 불가합니다. 하나, 아이들에게만은 상처주지 마십시오.”(2-238쪽)라고 선언했다. “아무리 못난 아비라도 어린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모양”이었으니까.(1-232쪽) 일종의 ‘졸혼’이라고나 할까. 신사임당은 현모임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양처임을 포기한 셈이다. 사임당에게도 “모성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명분”(2-343쪽)이라고나 할까.
탐관오리 민치형의 아내 휘음당과 사임당도 ‘모성’을 존재 이유로 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석순은 스스로 당호를 휘음당이라고 하며, 자신의 아들을 ‘중부학당’이라는 명문학교에 넣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휘음당은 중부학당에서 “대통을 도맡아 하는 민지균의 어머니”이자 “초충도 화가”이기도 했다.(1-343쪽) 그러나 지균의 소박한 꿈은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었다. “제 꿈은! 식구들끼리 다정히 밥 한 끼 먹는 겁니다!”(2-290쪽) 주모의 딸이었던 휘음당은 화가로서 사임당에게 경쟁의식이 있고 신분으로는 콤플렉스가 있었으며 이겸에게는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해를 향하는 해바라기의 얼굴을 돌릴 수 없듯 누구도 이겸을 향한 석순의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석순조차도.>(1-136쪽)
<구양수의 ‘접연화蝶戀花’> <화려한 누각에 봄이 오길 기다리건만, 더디기만 하네. 제비 쌍쌍이 날아드니 버들이 흐느적거리고 복사꽃이 흩날린다. 가랑비 끝없이 내리고 정원에는 바람만 몰아치니, 눈가에 수심만 느는데 기다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네. 홀로 난간에 기대었어도 마음만 어지럽구나. 향기로운 풀이 무성해도 늘 강 남쪽 언덕을 떠올리네. 세월은 무정하여 사람은 간 곳이 없고 옛정은 꿈만 같은데 공연히 애간장만 태우네.>(1-137쪽) 畵閣歸來春又晩, 燕子雙飛, 柳軟桃花淺. 細雨滿天風滿院, 愁眉斂盡無人見. 獨倚蘭干心緖亂, 芳草Ȋ綿, 尙憶江南岸. 風月無情人暗換, 舊游如夢空腸斷. 김용의 <신조협려> 앞부분에 나오는 시도 <접연화> 여러 수 중 한 수.
휘음당은 해바라기이자 복사꽃이었다. 동시에 수완좋은 사업가였다. 물론 “조지서까지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뒷배가 있”었다.(1-369쪽) 남편인 탐관오리 민치형의 권세를 이용하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업 수완이 보통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휘음당은 “조지서 지장까지 지냈”지만 “술과 노름으로 인생을 탕진”한 제지기술자 만득(1-334쪽)을 이용하여 사임당의 종이공방을 공격하려 한다.
이 드라마 작품에도 예외없이 ‘경연’, “고려지 경연”(2-83쪽)이 등장한다. 역사드라마에서 <대장금>에 경합 장면이 등장하여 한 몫을 봤는데 경합 장면은 꽤 자주 등장하는 듯하다. 한국드라마에서는 어떤 작품부터 경합 장면이 등장한 것일까 궁금하다. 사극의 ‘경연’ 개념의 등장과 확산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아무튼 사임당은 ‘고려지 비법’으로 생존의 위기를 돌파했다. 탁월한 기술이 생존에 필요하다는 의미다. 정말 그럴까. 혹시 작은 경쟁에 매몰되어 큰 경쟁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제4차 산업혁명은 구글과 아마존과 같은 초일류기업만의 놀이터이며 한국 같은 나라에게 그것은 ‘일자리 퇴출’ 운동일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플랫폼 전쟁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그렇더라도 한국에서 어떤 기업이 막강한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겠나.
신사임당은 소신없는 군주와 탐학한 관료, 그리고 부정한 경쟁자들을 상대하며 수도하듯이 난관을 이겨나갔다. 그 와중에서 신사임당은 가슴 절절한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본래 사임당은 “이겸에게 선물할 인장”을 준비했다. “인장의 문양은 비익조다. 반드시 두 마리가 합쳐 날개를 나란히 해야만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전설을 가진 비익조는 남녀의 깊은 인연이나 사이좋은 부부를 상징한다.”(1-118쪽) 그런데 갑작스런 사임당의 약혼 파기로 “이겸의 눈가에는 보이지 않는 그늘이 졌고, 마음속에는 구멍이 뚫렸다.”(1-97쪽) 이겸의 항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이별에도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오! 혼서를 넣었고 평생을 함께하자 약조한 사이였소!”(1-181쪽) 이 이후 사임당은 예술가의 길을 20년 동안이나 포기해야 했다.
사임당의 약혼자였던 왕족화가 이겸은 출중한 외모에 뛰어난 그림솜씨를 자랑한다. 이겸은 “구성군의 손자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증손자”라고 한다.(1-64쪽) “완성된 모견도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하다.”(1-220쪽) 정중(靜仲) 이암(李巖, 1499~?)은 두성령(杜城令)을 제수 받았으며 의왕시 내손동에 묘가 있는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ǒ)의 증손이다. 이겸은 실존인물이 아니지만 모견도 이야기로 보아 부분적으로 이암의 존재를 참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더냐?>(1-338쪽)
<스승이 왜 꼭 가르쳐야만 한다 생각하지? _너희 마음 속에 답이 있다. 그걸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 그 또한 스승의 역할이다. 난 너희가 그 답을 깨우칠 때까진 아무 것도 가르칠 생각이 없다.>(1-339쪽)
<겉은 화려한 나비일지 모르나 속은 여전히 애벌레인 것이지요.>(2-70쪽)
<부족한 화원은 무엇을 더 넣을까 골몰하고, 품격 있는 화원은 무엇을 뺄까를 생각하기 마련이지요.>(2-172쪽)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또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뜻이 있을 수도 있음이야.>(2-209쪽)
<삶이 아름다워지고 추해지는 것은,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1-266쪽)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_ 모두 마찬가지이다. 제 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그 작은 점들은 선이 되어 미래의 너와 이어질 거다. 그러니 매 순간, 네 앞에 놓인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지치지 말고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2-209쪽)
이겸은 사임당을 도와 “이 종이에 그대의 그림을 그리시오! 나는 조정에서 더 큰 그림을 그릴 것이오.”(2-86쪽)라며 다시 그림을 그릴 것을 주문한다. 눈앞에 닥친 위기가 사라지자, 사임당은 이겸에게 “공의 인생을 살아가시면 됩니다. 저는 제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고요.” “더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공의 길을 가십시오!”라고 말한다.(2-50쪽)
사임당에게는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했다. “집 안에는 언제나 아름다움이 깃들어야 한다고요._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고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청결한 집으로 만들면 된다.”(2-210쪽) “폐가는 사임당 가족에 의해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으면서도 청결하고 따뜻한 집이 되어간다.”(2-211쪽)
이겸은 중종의 압박이 아니었더라도 조선땅에서는 살 수 없었다. 이겸은 “현명한 사랑이란 게 있소? 사랑은‹‹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것이오.”라고 한다.(2-179쪽) 그러면서도 이렇게 읊는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이니 내가 떠난들 이별이 아니오. 두들겨 얇게 편 금박처럼 그저 멀리 떨어지는 것일 뿐.”(<고별>. 존 던. 16세기 영국 시인)(1-238쪽) 이렇게 사임당이 부군 이원수보다
마음 속의 연인 이겸을 사랑한다면 비루한 이원수도 살갑고 다정한 주모를 사랑하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사임당에게 이겸은 현실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나눌 수는 없어도 영원한 연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분신인 패랭이꽃의 씨앗을 선사했다. 눈앞에 보이는 비루한 배우자는 준수하고 인격적으로도 탁월한 연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임당의 님은 아득한 타국에 있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루벤스의 그림에 나타난 ‘한복을 입은 남자’를 사임당의 연인 이겸으로 설정함으로써 이런 결론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겸은 ‘미인도’를 그려서 연인 사임당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했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여러 모로 허술한 이야기 구조의 한계를 안고 화가인 사임당과 마찬가지로 화가인 이겸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예술가들의 사랑이야기를 그려놓았다. 사임당은 탁월한 예술가였으나 서지윤은 예술품 감별사이자 생활인이다. 16세기 상반기에는 예술가로 살았던 사람이 201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면 미술평론가 정도를 할 수 있는 모양이다. “누가 그랬다는군.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라고.”(2-392쪽) (2017.6.14.수)
http://blog.naver.com/kindlyhj/220984266543 ☞ 사임당 : 빛의 일기 上
ϻ한달여만에 두번째 '사임당 : 빛의 일기'를 만났다. 사실 여행을 가기 전에 다 읽고 여행을 가려고 했었지만, 계획한대로 되지 않아 여행을 다녀와서 어느정도 여독이 풀린 다음에서야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사임당과 이겸. 두 사람의 다시 시작된 인연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은 끝까지 기구했다.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읽는내내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팠다. 결혼을 하고 네 아이를 두었지만 여전히 이겸에 대한 마음을 모두 떨쳐내지 못한 사임당이나, 사임당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단 한번도 버릴 수 없었던 이겸이나. 그저 애처롭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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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겸은 알아내고야 말았다. 사임당이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하고 떠나야했던 이유를 말이다. 자신과의 혼약을 깨야했던 바로 그 이유. 20여년의 세월을 사임당은 홀로 어찌 감당하며 살아냈단 말인가. 이겸은 고맙고 미안하고 안타깝고 슬펐다. 그래서 잃어버린 그 20년의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그녀를 위해 살아야겠다 결심한다. 다른 남자의 아내라 할지라도, 두 사람 앞에 놓인 길이 영원히 만나지지 않는 평행선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라 다짐한다. 하지만 사임당은 그런 그를 내치기만 한다. 각자의 길을 가자고 단호히 등을 돌린다. 사임당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한번 연이 끊어진 사이다. 게다가 현재 자신에겐 자신만을 바라보는 아이가 넷이나 있고, 지아비가 있으며 그녀가 살려내야 하는 유민들도 있다. 이 모든 것에서 등을 돌릴 수 없음이다. 때문에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그와 멀어지려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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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날카로운 두 쌍의 눈이 있었다. 한쌍은 중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이겸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참의 민치형이오, 또 한쌍은 사임당을 증오하는 민치형의 아내 휘음당이었다. 이겸은 그렇다해도 휘음당은 누구란 말인가. 사실 휘음당과 사임당의 인연은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인연은 이겸에게까지 닿아있었다. 한때 이겸을 짝사랑했던 휘음당. 하지만 이겸과 사임당의 사랑은 굳건했었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홀로 가슴앓이를 했던 휘음당은 끝내 그 탓을 사임당에게 돌리고 만다. 결국 그녀는 이겸과 사임당의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뿐이 아니라 두 사람의 목숨마저도 위험에 빠뜨린다. 그 위기는 사임당이 사랑을 포기하면서 가까스로 넘겨야했었다. 그랬던 악연이.. 20여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겸의 여전히 지독한 사임당에 대한 사랑을 단번에 눈치챈 휘음당은 다시 질투와 증오의 불길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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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실에서 지윤은 민 교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증거를 확보했고, 남편 민석의 혐의를 벗길 수 있는 방법 또한 찾아낸다. 하지만 민 교수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리 없었고, 지윤은 다시 한번 좌절감에 빠져야 했다. 그녀가 위기에 빠져있을 때, 똑같이 위기에 빠진 과거의 사임당. 두 여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지켜내고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전편에선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는 내용이 조금 두서없이 느껴졌었지만, 이번 이야기에선 자연스럽게 읽혔다. 전편보다 훨씬 흥미진진했고, 그만큼 재미나게 읽혔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 비교가 불가능하지만, 생각보다 좋은 평을 듣지 못한 드라마보다 책이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시청자들에겐 선물같은 책이 되지 않을까? 그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는 독특한 사임당을 만나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 책은 많이 읽지 않아도 위인전은 꽤 많이 읽었다. 내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 그려진 것과 달리 현모양처의 표본이었고,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현명하게 길러낸 여인으로 기억되었다. 신사임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이이의 어머니, 그가 태어난 오죽헌, 오천원, 오만원 지폐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현모양처라는 이미지에 각인되었던 인물이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는 그림을 보고자 하는 욕망과 그리고자 하는 예술혼이 합쳐져 어린 나이에도 당찬 사임당의 모습이 비춰진다. 사임당과 닮은 꼴인 의성군 이겸 역시 사회적인 위치만 달랐을 뿐 사임당과 같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고, 함께 세상을 나아가기를 바랬으나 중종이 적어 준 시를 옮겨 적어 한 아이에게 주는 순간 그녀의 꿈도, 사랑도 모두 날라가 버렸다.
훗날 그것이 사임당의 실수가 아니라 민정학이 쳐 놓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진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녀의 곁에 남아있었던 모든 것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책에서는 계속해서 민정학, 휘음당 최씨가 계속해서 이겸과 신사임당의 목을 조르고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의 악인은 '중종'이다. 민치형은 자신이 계속해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를 열망하는 인물로서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져 있고, 휘음당 최씨 또한 이겸의 사랑을 받고자 했으나 오로지 사임당을 보는 그가 미워 복수하고픈 마음에 독한 마음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그 모든 것을 쥐고 있지만, 일렁이는 바람처럼 줏대없는 결단에 이겸도 사임당도, 민치형도 모두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했다.
사임당 곁에는 오직 그녀만 바라보는 이겸이 지켜보고 있고, 사임당 역시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않지만 이겸과 같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남편인 이원수가 알게 되고, 그녀 곁을 떠나 주막집 아낙을 품는다. 아이들의 아버지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내, 사랑은 하지만 함께 삶을 살 수 없는 이겸의 존재는 늘 사임당을 외롭게 만든다. 이겸은 사임당이 하는 것들을 지지하며 그녀를 돕지만, 모든 권위를 갖고 있는 중종에게는 이겸이라는 인물이 한때 벗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세자와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못마땅해 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사내이기에 더욱더 권좌에 대한 열망이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불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리청정 역시 그의 결단이었지만 자신의 말을 뒤집으며 다시 권력의 고삐를 쥐어 나간다.
현대로 돌아와 서지윤의 상황 역시 사임당과 같이 민정학과의 싸움이 계속된다. 서로의 눈을 피하고 있지만 금강산도 진본을 움켜쥐려는 그의 마수 때문에 여러번 지윤은 곤란을 겪는다.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와 화가로서의 사임당을 돕다가 중종의 눈밖에 나 옥에 갖히게 되고, 사임당은 그를 옥에서 꺼내기 위해 동분서주 한다. 함께 할 수 없지만 오직 너와 나의 마음 속에는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사임당의 바램대로 이겸은 그녀의 곁은 떠난다. 지윤 역시 민정학의 마수에서 벗어나 그의 악행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민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책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이겸과 중종, 민치형이 함께 사냥을 하는 장이었다. 이겸이 민치형의 헛된 욕망을 꼬집으면서도 중종에게 '제대로'된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정을 운영하라는 힌트 아닌 힌트였으나, 이겸이 그림 매의 그림을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눈'을 중종에게 그리고자 했다. 붓을 든 중종이 그린 매의 눈은 흐리멍덩 했고, 이겸은 종이의 질이 나쁨을 인식시키는 순간이었다.
사임당은 차분하고도 단호한 자세로 천천히 붓을 집는다. 붓을 든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는 심기일전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작게 심호흡을 내쉰다. 이내 붓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 부인들의 눈동자가 붓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절대몰입의 순간, 사임당은 주위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몰아의 경지에 빠져든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포도송이가 생겨난다. 양옆으로 길게 퍼져 나간 얼룩은 포도 넝쿨로 변한다. 붓을 든 사임당의 손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치마 위를 나풀나풀 날아다닌다. 거침없는 붓질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성글게 열린 포도송이 하나하나가 먹음직스럽다. 포도송이가 완성될 때마다 사임당의 얼굴에 희열이 차오른다. - p.67
절대몰입의 순간의 표현한 사임당의 예술혼이 가장 잘 표현된 장면이다. 신사임당 하면 치마에 그려넣은 포도넝쿨이 떠오르지만 초충도는 물론이고 산수화에 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틀에서 사임당을 봤을 때보다 더 넓고 깊게 사임당을 표현해내어 훨씬 더 생동감있게 한 인물을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실제와 허구를 섞어 넣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임당 보다 더 큰 사임당을 알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늘 그녀를 향해 모진 바람이 불었지만 사임당과 이겸은 흔들림없이 서로를 아끼며, 그들이 사랑한 그림 마저도 없어서는 안 될 그들의 혼이자 꿈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 下>권에서는 사임당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이들이 가고자 했던 길이 조금씩 비춰진다. 그녀의 딸인 매창 역시 그녀의 재능을 닮아 수려하게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어 上권의 리뷰처럼 민화 작가인 오순경의 <민화, 색을 품다>(2017,나무를 심는 사람들)에 나오는 그림들을 함께 올려 놓는다. 소설에서의 사임당과 실제 사임당이 그린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신사임당이라는 인물과 더 가까이 조우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과 함께 오순경 민화 작가의 책을 곁들여 읽으니 폭넓게 그녀의 이야기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 들어왔다.
상권에 이은 후편의 이야기를 기다린 끝에 읽는다.
신사임당이란 이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머니 상으로 인식된 바, 이 책에서의 신사임당의 모습들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진 않지만 좀 더 당시의 시대에 살아갔던 여인들의 전형적인 삶을 벗어나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보임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면서도 그 능력을 펼칠 기회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뛰어난 능력들은 여전히 그녀의 작품을 통해 느껴지게 만든다.
부부로서 살아감에 있어 남편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던 여인, 남편에 대한 사랑도 애틋하지만 자식들 건사에 좀 더 힘을 쓰는 과정이 하권에서는 상권에 이어서 이어지고 사임당의 이겸에 대한 사랑의 느낌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 점이 다르게 다가온다.
남편도 좋았지만 의롭고 정의로운 인물로 표현이 되는 이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그래서 더욱 미련이 남게 되고, 이는 곧 현실의 지윤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것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중의 모습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이겸을 사랑하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선택한 사임당, 현재의 지윤 또한 민 교수의 방해를 물리치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를 그린 이 소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여전히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내치면서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모습들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해서 씁쓸함마저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또 다른 여인, 휘음당의 등장은 사임당과는 또 다른 이겸에 대한 사랑과 질투, 그로 인한 악녀로서 행할 수밖에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를 드러냈기에 삼각관계에 얽힌 모든 감정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재미도 준다.
시대를 넘어선 두 여인의 활약과 등장인물로 내세운 것은 기존의 실존 여성을 내세운 타 작품들보다 확실히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점, 드라마를 통해서 보인 영상미를 생각하며 그에 맞는 장면들을 회상해 읽어가는 재미도 주는 책이다.
저자의 상상력을 토대로 그려진 이 소설 안에서의 두 여인들의 만남이 비록 시대는 달리했지만 저마다 자신들이 갖고 있었던 재능을 통해 현실에서 안주하지 않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 그래서일까? 새삼 오만 원 지폐에서 우러나오는 신사임당의 아우라가 새롭게 보인다.
새롭게 태어난 신사임당에 대한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는 시간이 된 책이기에 드라마와 비교해 읽어도 좋은 듯 하단 생각이 든다.
두 달 만에 출간이 되어 기대를 가지고 서둘러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이 작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이겸과 사임당의 절절한 이야기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안타까웠고,
오랜만에 이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읽어 신선하기도 했다.
하권에서는 사임당이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지윤 또한 자신의 어려운 상황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또 상권과 마찬가지로 하권에서도 휘음당이 꽤 중요한 인물로 나오는 것이 좋았다.
드라마에서는 오윤아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인데, 꽤 매력적인 악역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읽은 사극 소설, 로맨스 소설이었는데 만족스러움을 안겨주었다.
드라마가 왜 아쉬운 성적을 남겼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소설도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드라마도 볼 예정이다.
부와 명예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도교수 옆에서 옳은 방식이 아님을 알고 진실을 밝히려는 주인공 지윤과 그녀를 사랑하지만 더 안락하고 좋은 삶을 위해 앞만 보면서 달린 지윤의 남편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의 추락은 아내 지윤이 하는 일과도 연관이 깊은 이야기가 상권에서 펼쳐졌다면 하권에서는 이겸과 사임당의 가슴 절절 애절한 사랑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임당과 그녀의 가족들은 생계를 걱정하는 고단한 삶에서 종이공방을 통해 숨통이 틔여간다. 이런 와중에 이겸은 이십년 전에 사임당과 자신의 이별이 왜 일어났는지... 그 가슴 아픈 사연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을 삭이던 모습을 넘어 진심을 전한다. 허나 사랑보다는 가족이 우선인 사임당은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아무리 뛰어난 여성도 현실을 넘어서기 힘들다. 남자들의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예술적 역량을 온전히 보여주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사랑마저도 권력과 암투로 인해 허락하지 않는다.
의롭고 정의로운 남자 이겸은 옳은 일을 하려던 행동이 위험에 처하고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한 사임당과 지윤은 현실을 넘어서는 만남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현실의 벽을 넘어 사랑하나만 가슴에 묻고 산 이겸과 이겸을 사랑하지만 가족과 자식을 위한 삶을 포기하지 않은 사임당의 모습이 매력적이다.
과거의 인물을 애절한 사랑으로 재탄생한 작품으로 만난 '사임당 빛의 일기'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이며 스스로의 삶을 진취적으로 살아가려는 여성으로 지금 현실에서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넘치는 여성이다.
드라마보다 책으로 만난 사임당과 이겸은 더 좋았다. 사랑했던 여전히 사랑하는 여인 사임당 그녀 모르게 도움을 주려는 이겸의 모습은 시대를 넘어 내 여자에게 지고지순한 순정을 보여주는 멋진 캐릭터란 생각이 새삼 든다. 내가 알고 있던 사임당보다 더 멋진 여성으로 산수화에도 능하다는 것도 책을 통해 새삼 알게 된 이야기로 오만원 지폐를 볼 때마다 사임당 빛의 일기 책 속에 사임당을 떠올릴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