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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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예술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예술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
당대 문학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친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 단편선!
이 책의 총서 (5)
작가정보

1906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1923년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전공했다. 1928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강사로 부임하여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제임스 조이스를 만났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에 대한 비평문을 공식적인 첫 글로 발표하고 1930년 첫 시집 『호로스코프』를, 1931년 비평집 『프루스트』를 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일랜드인이지만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베케트는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어와 영어 2개 국어로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주요 작품으로 『몰로이』(1951), 『말론 죽다』(1951), 『이름 붙일 수 없는 자』(1953) 등의 소설과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1952) 외에도 단막극 및 비평서 등 다수의 라디오 드라마와 몇 편의 시집이 있다. 베케트는 정형화된 예술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예술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 당시 문단에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말년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다가 1989년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번역 전승화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파리 7대학(소르본 파리 시테 대학)에서 에블린 그로스만 교수의 지도를 받아 불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옮긴 책으로 사뮈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와 질 들뢰즈의 대담집 『디알로그』가 있다.
목차
- 첫사랑
추방자
진정제
끝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
책 속으로
그 당시에, 나는 여자들을 잘 몰랐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른다. 남자들도 그렇고,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내 고통들뿐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모든 고통을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렇다고 그 고통들이 전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나는 이것들도, 그러니까 내 고통들도 잘 모른다. 그건 필시 내가 고통 그 자체만은 아니라는 데서 기인한 일일 것이다. 야아 이렇게 교활할 수가 있나. 그래서 난 거기에서 떠나, 다른 행성의, 놀라움이 있는 곳까지, 찬미가 있는 곳까지 간다. 드문 일이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바보가 아냐, 인생은. (「첫사랑」, 21~22쪽)
사랑이 당신들을 망친다는 것,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사랑을 말하는 걸까? 열정적인 사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육감적인 사랑 하면 열정적인 사랑이지. 안 그래? 아니면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랑과 혼동하고 있나? 사랑에는 정말 여러 종류가 있잖아, 그치? 상대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사랑들도 있고 말이야, 안 그래? 예컨대 플라토닉 러브, 이게 방금 생각난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사심 없는 사랑이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이야말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긴 어렵다. 순수하고 사심 없이 그녀를 사랑했다면 암소가 싸지른 오래된 똥 덩어리들에다가 그녀의 이름을 썼겠는가? 더군다나 다 쓴 다음에 입에 넣고 쪽쪽 빨았던, 내 손가락으로? (「첫사랑」, 26쪽)
새벽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되도록 빨리 밝은 곳으로 가려고, 어림잡아, 해 뜨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바다의 수평선이나, 사막의 지평선을 원했어야 했다. 내가 밖에 있을 때면, 아침에는, 태양을 맞이하러 가고, 저녁에는, 내가 밖에 있을 때면, 태양을 따라, 망자들의 집에까지 간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다음번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그 이야기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보게 될 거다. (「추방자」, 74쪽)
그러다가 마침내, 황소처럼, 무릎을 먼저 털썩 꿇은 다음, 앞으로 엎어지면서, 쓰러지기 직전에, 나는 군중들 가운데 있었다. 나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는데, 내가, 내가 의식을 잃게 된다면 그건 의식을 도로 되찾기 위해서는 아닐 거다. 사람들의 배려는 분명 감동적이었다, 나를 밟고 지나가는 일은 가능한 한 피하면서도, 나한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는데, 바로 그 맛에 내가 나왔던 거다. 인간들의 발아래서, 밤과 고요함에 잔뜩 젖어도, 만일 날이 밝는다면 빛의 심연의 밑바닥에서도, 나는 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피곤해서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 지체 없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군중들이 물러가면서, 빛이 돌아온 덕에, 조금 전에 경탄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빈터로 내가 돌아와 있는지 알려고 아스팔트에서 굳이 고개를 들 필요가 없었다. 친근해진 아니면 적어도 아무 감정 없는 그 포석에 누운 채, 여기 그냥 있어, 나는 말했다, 눈을 뜨지 마, 사마리아인이 오기를, 아니면 날이 밝기를 그래서 경찰관들이 아니면 또 알아 어느 구세군이 오기를 기다려. 그런데 참 나는 또다시 일어나더니, 계속해서 오르막길인 대로를 따라, 내 길도 아닌 길을 또 가기 시작했다. (「진정제」, 105쪽)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언컨대, 나는 내 상자 안에서 잘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내가 잘 지내는지 필요한 게 없는지 물어보러 오지 않았고, 올 수도 없었다는 사실에, 나는 그렇게 속상하지는 않았다. 나는 잘 지냈다, 그렇고말고, 완전히 잘 지냈지, 그리고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필수품에 관해서는, 말하자면 내 수준에 맞게 줄였는데, 당시 관점에서 봤을 때는, 그 어떤 구호품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매우 우수했다. 부지불식간에, 아무리 어설프고 허망하게 존재했더라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일은, 옛날 같았으면 나를 감동시키는 선물이었다. 누구나 미개한 존재로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제정신인지 가끔씩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끝」, 142~43쪽)
출판사 서평
『첫사랑』은 아일랜드인인 베케트가 모국어인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46년의 단편들(「첫사랑」 「추방자」 「진정제」 「끝」)을 묶은 책이다. 베케트가 지향하는 글쓰기는 무지와 무능, 결핍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그에 적합한 언어가 바로 프랑스어였다. 이후부터 베케트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글을 쓰면서 본격적인 이중 언어 작가의 길을 걷게 되고, 영어로 쓴 작품은 프랑스어로, 프랑스어로 쓴 작품은 영어로 직접 번역하여 방대한 서가를 이루기도 했다. 베케트의 초기 단편들을 묶은 이 책은 이후에 쓰인 다른 작품들보다 내용적ㆍ형식적인 난해함이 덜하나, ‘반-주인공’이라고 불리는 방랑하는 주인공, 주인공이자 화자, 문장부호의 활용, 영어식 표현, 낯선 글쓰기, 패러디, 구어체 등 그의 전 작품에서 반복되는 독특한 특성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먼저, 표제작인 단편 「첫사랑」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서 그 제목을 차용한 것으로 패러디의 암시를 주는 작품이다. 첫사랑, 이 단어가 갖는 울림과 환상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지! 베케트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클리셰를 패러디하여 익숙한 표현과 의미를 낯설게 만들고 관습화된 가치를 추락시키면서 편견을 깨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향수와 이상화된 가치는 가차 없이 파괴되고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사랑을 추방으로 정의하고(“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향에서 때때로 보내오는 그림엽서나 받아보는, 그런 추방이다”), 똥 덩어리 위에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적음으로써 성스럽고 순결한 사랑을 모독하는 행위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모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가장 현실에 가까운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첫사랑」은 이렇듯 우리가 사랑에 대해 갖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리며,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왜곡되고 은폐되어 있던 우리의 견고한 위선에 균열을 일으키는 작품이다.
「추방자」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가 어느 건물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며 추방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버지가 사준 모자, 관처럼 생긴 마차, 램프의 불, 말의 시선, 주인공의 머리에 난 종기, 마부가 준 성냥 그리고 마부와 마부의 부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나’가 어떤 식으로 어떤 범주에서 추방당하는지 알려주는 단서들이다. 예컨대 아버지가 사준 모자는 평범한 또래 집단의 범주에 ‘나’가 속할 수 없게 만들고, 착취당하는 말과 그 말의 시선은 ‘나’를 인간의 범주와 가축의 범주에서 방황하게 만든다. 램프의 불과 성냥은 문명의 삶으로부터 추방당하는 ‘나’를 보여준다. 이렇듯 각각의 소재는 다양한 범주에서 추방당하고 추락하는 주인공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추방과 추락은 베케트 작품의 특성 중 하나인 부조리한 삶의 한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진정제」는 “이제는 내가 언제 죽었는지 모르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진 지점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 역시 사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무너진 지점에 있다. 중심이 되는 사건 없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의 여정으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부랑자라는 주인공의 처지와 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면서 집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들과 주인공의 대비를 부각시킨다. 또한 데칼코마니 같은 구조를 통해 상대성 원리를 떠올리게 하는 속도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며, 베케트 작품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소설 작법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마지막 작품인 「끝」은 1946년에 집필된 단편들 중 가장 먼저 쓰인 작품으로 원래 제목은 「연속」이었다. 다른 단편들처럼 이 작품도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가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치 지금까지 읽은 단편들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듯한 이 작품은 사실 이상의 모든 단편들의 시작이다. 베케트가 「연속」에서 「끝」이라는 상반된 의미로 제목을 수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문학 세계에서 끝과 시작은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대기적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진정제」에서 삶과 죽음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 것처럼, 무한 반복을 전제하고 있는 베케트의 문학 세계에서는 어느 시점을 시작으로 하고 어느 시점을 끝으로 정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베케트가 지향하는 글쓰기는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글쓰기, 즉 무지를 드러낼 수 있는 글쓰기다. 문법에 어긋난 문장들, 뚜렷한 사건이 없는 이야기, 일관성 없는 화자의 서술, 자아의 분열 등 전통적인 소설 작법에서 벗어난 그의 글쓰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독서라는 행위를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베케트의 소설을 접하는 순간 독자와 작가, 작중인물은 서로 뒤엉키며, 독자들은 읽히지 않는 텍스트를 읽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함으로써 독서라기보다는 기실 창작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베케트의 텍스트를 경험하는 것은 예술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고, 인생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기본정보
ISBN | 9788932036250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5월 08일 (1쇄 2002년 12월 30일) | ||
쪽수 | 170쪽 | ||
크기 |
121 * 188
* 16
mm
/ 181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스펙트럼 시리즈
|
||
원서(번역서)명/저자명 | Nouvelles et textes pour rien/Beckett, Samu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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